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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끝에 내린 비, 소중한 결실로 이어져야

김은주 | 민주노총 부위원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가 하늘을 울린다. 여성노동자들의 울분과 한숨이 11호 태풍 나리보다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자본에 대한 떨리는 분노로 하루하루 투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대응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운동을 전망하며 우리는 얘기한다. 비정규직 투쟁만이 노동운동의 희망이요, 비정규직만이 새로운 투쟁의 원동력이며, 자본의 심장을 치명적으로 강타할 역동적인 노동자 계급의 선봉대라고.

그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고 있다. 매 맞고, 피 터지고, 질질 끌려서 닭장차에 던져지는 탄압양상은 80년대를 방불케 한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백만 배는 훨씬 더 무참하고 서러운 탄압이다. 적어도 그때는 같은 조합원들에게 멸시당하거나 두드려 맞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와중에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실로 몸과 마음을 다해 비정규 투쟁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이 정도, 이 상황 됐으면 눈에 독기를 품고 정권과 자본에 달려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랜드.뉴코아 투쟁이 한창이던 때, 사회운동 포럼이 개최되었다. 그 중간에 개최된 여성대회는 지난 10여 년 동안 비정규직 투쟁과 여성노동운동에 남다른 결의와 각오로 임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리고 여연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여성운동의 주류적 흐름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너무나 절실하고 반가운 대회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페미니즘이라는 의제를 그다지 매력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운동의 풍토상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운동포럼의 전체 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배치하고, 그 대회에서 ‘여성주의’라는 관점을 가지고 활동가들이 토론할 수 있었다는 점, 향후 전망에 대해 고민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만 해도 대단한 진전이자 성과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다양한 사회운동 부문에서 페미니즘을 부르짖고 있는 개별 활동가들이 조직되고, 그동안 주변적. 비주류적 의제와 주체들에게 힘을 받게 해서 앞날을 도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 있었을 뿐.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뿌듯하였다. 최근 개최되는 각종 토론회에 기껏해야 20~30명의 참석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100여명 가까운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짧게나마 한국 사회의 여성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도 다뤄졌다. 비록 토론자들의 개인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의 이념, 조직, 실천이 부족했다는 내부적 반성도 갖게 하였으며, 무엇보다 여성대회가 일회적 행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네트워크를 구성하거나 내년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사업에 대한 공동 대응 등의 실천적 결의를 모은 점은 여성대회에 모인 성원들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고민을 하였나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방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계급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재 조망과 그로 인한 인식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내용을 좀 더 담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또한 여성대회 주관 주체의 준비 부족으로 선언문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대단히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대회가 기존 운동을 혁신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대안전략을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긴급한 과제인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꾀한다는 당초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자 하였다면, 그 결의와 실천적 내용을 담은 선언문의 채택은 필수 요소였기 때문이다.

작은 일일지는 모르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인데, 적절한 크기와 위치의 장소 선정, 열악한 놀이방 환경 등은 다음 대회에서 좀 더 세심함을 기울여 개선되었으면 한다. 여성들이 모이는 행사에 놀이방을 마련하는 것까지의 당연히 배려는 정착되고 있지만 지하 어두컴컴한 곳에서 몇 시간씩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건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운동은 변화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자본의 무한착취 대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기존의 남성 중심적,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획기적으로 달라져야만 한다. 자본의 계급 분할 전략은 투쟁으로 돌파되어야 하며, 여성노동자들의 한숨과 비애가 더 이상은 계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과 접근이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실천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 앞으로 여성대회가 가야 할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시작은 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미 페미니즘과 사회운동 결합을 반쯤은 성공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천에 매진하자. 이랜드.뉴코아 투쟁 승리하자.


새로운 여성운동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_길고도 짧았던 나흘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문설희 | 회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galia227@jinbo.net


지난 8월30일부터 9월2일에 걸쳐 나흘 동안 이어진 <소통/연대/변혁 사회운동포럼>에서는 ‘위기에 빠졌다’라는 말조차 식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꽤 오랫동안 위기에 봉착해 있는 사회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때로는 다급한 현안과 실무에 치여서, 또는 무기력감과 막막함에 빠져, 차마 꺼내어 보지 못하고 지냈던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는 다시금 꺼내어 보았다. 그 질문들 중에는 “왜 페미니즘인가?”라는 것이 있었다.


왜 페미니즘인가?_ 새로운 길찾기를 위한 나침반

<사회운동포럼>의 시작을 알리는 ‘대토론회’ 1부와 2부를 통틀어 페미니즘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낯설어하고, 아니 불편해했던 사회운동 내에서 언제부턴가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강조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은, “왜 페미니즘인가?”라는 것이었다. <사회운동포럼>이 기치로 내건 ‘소통/연대/변혁’에 있어서 페미니즘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왜 관건적인지? 사회운동의 위기에 대한 토론의 과정에서 한 토론자는 ‘운동의 특권화’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다른 토론자는 ‘특권화’라기보다 ‘보편성의 상실’이 위기로 진단되는 것이 적확하겠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적확한 평가는 87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노동자 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이 ‘애초에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닐지? 페미니즘의 눈으로 한국사회 사회운동을 본다면, 대공장-남성-가장-정규직 중심의 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취약한 보편성이 해체되는 과정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인 것이다. 운동의 위기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을 제공함과 동시에,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이념이 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즉 페미니즘은 ‘새로운 보편성의 구축’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운동 간의 소통과 연대, 그를 통한 변혁을 꿈꾸는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관건적인 이유이겠다. 우리에게 왜 페미니즘이냐고? 페미니즘의 렌즈를 통해 살펴보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친 아이의 진실처럼 사회운동의 위기가 투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상상력을 페미니즘이 제공해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페미니즘이 마치 위기에 빠진 기존운동의 혁신을 저절로 가능하게 해 줄 ‘구원자’로 여겨져서도 곤란하다. 페미니즘 운동 역시 전체 사회운동의 위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순간, 페미니즘은 ‘운동’이라기보다 ‘도구’로 전락할 뿐이요, 껍데기만 남아 일종의 ‘트랜드’, ‘유행’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의 사회운동이 자신의 운동의 목표로 삼지 못했던 ‘여성해방’이 ‘페미니즘’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운동의 새로운 보편성이 구축될 수 있고 나아가 위기에 빠진 사회운동의 혁신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길 찾기에 나선 우리들에게 길을 잃지 않게끔 해 줄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다.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_대안세계를 향한 상상력을 펼쳐라

페미니즘과 여타의 다른 운동들과의 결합이 사회운동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준다는 사실은 ‘대토론회’ 이후의 여타의 마당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밝혀질 수 있었다. 일례로 사회운동의 열쇠말 중의 하나였던 사회공공성 마당에서는, 사회공공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운동과 여성해방을 향한 운동이 결합되었을 때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사적 영역, 즉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행해지던 간병과 보육 등의 재생산 노동이 철저히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을 반대하고 사회공공성 강화를 위한 요구를 제기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러한 노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공간에서 누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인지? 페미니즘은 돌봄과 관련된 재생산의 책임이 다시금 가족의 역할로 돌려지는 것도 대안이 아니요, 그것이 여성, 즉 어머니나 아내가 책임져야하는 몫으로 귀결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일러준다. 결국 사회공공성 쟁취 투쟁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노동자민중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사회적 권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쟁취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더욱 급진적인 대안을 요구하게끔 한다. 이처럼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보여주는 이미 실패한 미래를 단호히 거부하고 대안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새로운 여성운동을 위한 우리의 선언_나/너/우리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

이러한 여성운동을 선언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회운동포럼> 세 번째 날 한자리에 모였다. ‘여성대회’에 모인 백여 명이 넘는 참가자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아래에서 더욱 고통받고 억압당하고 있는 오늘날 여성의 현실을 확인하였고 이에 맞서는 운동이 시급함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여성운동의 형성을 가로막았던 기존 사회운동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하며, 더불어 한국사회 여성운동 또한 자기혁신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점 역시 이야기되었다. <사회운동포럼>이 열리기 직전 개최되었던 여성노동자공동투쟁대회에서 기륭전자여성노동자, KTX-새마을호여성노동자, 이랜드-뉴코아여성노동자들은 입을 모아 질문했다. 왜 비정규직의 70%는 여성노동자인가? 왜 여성에게는 저임금불안정노동이 당연시되는가? 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여성노동자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말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재의 운동을 혁신하고 또한 여성운동의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구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새로운 여성운동의 형성 및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변혁이 절실한 것이다. 여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던 기존 사회운동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바탕으로, 이날 ‘여성대회’에서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위한 공동의 전략과제가 제출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여성에 대한 빈곤과 차별,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자기 위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의 전략을 재구성할 것, 여성의 경제적 자율성을 파괴하고 여성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공사분할-성별분업-성차별이데올로기를 폐절하고 여성의 노동권과 성욕․신체에 대한 권리가 완전히 실현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할 것, 성적차이에 기반한 여성의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권을 확립해나가고 여성노동자의 저임금불안정노동을 철폐하는 투쟁을 전면화할 것, 여성이 스스로를 대표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자기조직화/자기교육을 활발하게 진행할 것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전략과제와 더불어 두 가지 공동행동이 제안되었다. 한 가지는 개별화되어있는 여성운동의 주체들 간의 소통과 연대를 지원하기 위한 ‘여성운동네트워크’를 구성하자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2008년 3․8 여성의 날을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망을 논의하는 장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여성운동.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막막한 느낌에 가슴이 짓눌리기도 했다. 절실하기는 하지만 과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누구와 함께 시작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여성대회’에 모인 이들과 함께라면, 그리고 이날 우리가 약속한 공동의 전략과제와 공동행동에서부터 시작을 한다면, 비록 힘겹기는 하겠지만 새로운 여성운동은 분명히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슴을 짓눌러왔던 막연함이 가시고,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슴이 뻐근해져왔다. ‘여성대회’에서의 논의내용은 더욱 깊이 있는 검토와 의견의 교환 과정을 거쳐 이후 선언문으로 채택될 계획이다. 그리고 새로운 여성운동을 약속한 선언자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구성될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소통과 연대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될 것이며, 이 공간에서의 대중운동적 실험은 내년의 100주년 3․8 여성의 날에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나/너/우리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은 길고도 짧았던 나흘간의 <사회운동포럼>이 마감된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발 한발 진행되고 있다. 나/너/우리의 마음속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모든 사회운동의 공간에서!

추석, 여자 그리고 가족


이꽃맘 | 회원, 참세상 기자


하나. 나 그리고 엄마 이야기

나는 이제 막 서른 줄에 들어선 미혼 여성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아는 얘기긴 하지만, 나의 엄마는 내가 스물다섯이 되었을 즈음부터 내가 이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자와 결혼식을 하는 꿈을 꾸었다. 학생운동 당시 회의에 갈 때면 “화장이라도 하고, 이쁘게 하고 가라는 것”이 항상 입에 달린 당부였다. 뭐 다른 엄마와는 다르게 운동권이라도 괜찮다는 조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했을 당부지만 참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나. 엄마는 내 침대 앞에 있는 옷장 위에 살림살이들을 쌓아 놓곤 했다. 이뿐 그릇 세트며, 이불이며, 냄비들이며... 침대에 누울 때 마다 옷장 위에 놓여 있는 상자들을 보며 헛웃음을 날리곤 한다.

이런 공세는 추석이 되면, 명절이 돌아오면 모든 친척들의 공통분모가 된다. “이제 니 차례다”, “살 빼야 결혼하지”, “남자친구는 있냐” 나를 결혼시키기 위해 일치단결한 모습이다.

여기서 나도 “전 가족이라는 현실의 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을 만든다는 것이 여성에게 얼마나 많은 모순을 만드는 데요”, “꼭 결혼을 통한 가족이 필요할까요. 그냥 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랑 같이 살면 안 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자기 주변부터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무슨 운동권(!)이냐.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이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냥 “네”하고 답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나의 방식은 그간 무수한 부딪힘 속에서 터득한 방법이기도 하고, 포기이기도 하다. 이게 그냥 엄마를 설득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엄마만 설득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 말이다. 이건 오히려 남성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엄마를 설득하는 일은 사회를 페미니즘으로 바꾸는 나의 계획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일 될 것이다.

힘들다. 추석이 힘들다.

장면 2. 추석, 이랜드 불매운동 그리고 여성

지난 17일, 전국여성연대는 ‘홈에버 뉴코아에서 추석 선물, 장안보기 1만인 주부선언대회’를 했다. 누구든 나서서 이랜드 불매운동을 선언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손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

워낙 ‘나쁜 기업 이랜드, 소비자의 힘으로 심판하자’는 논리도 썩 맘에 안 들어 하던 참에 여성단체가 주부선언이라는 것을 한다니 선뜻 기자회견에 가기도, 기사를 쓰기도 싫었다. 차라리 왜 여성들이 모여 있는 단체가 그것도 추석 직전에 ‘주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불매운동을 선언하는지 비판하는 기사를 쓸까 하다가 좋은 일에 왜 또 딴지냐는 말을 듣는 게 귀찮아서(?) 그만 뒀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추석이 되면 얘기에 중심에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동안 아무리 중심에 세우려고 해도 남성들의 이야기만 가득하던 세상이 명절만 돌아오면 여성들에 집중한다. 미혼 여성들이 추석에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 결혼 얘기. 기혼 여성들이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 “좀 더 있다가라”. 명절 스트레스에 우울증, 증후군까지. 온통 여자들 얘기다.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명절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여성이고, 아니 여성에게 전가되고, 명절 프로그램을 전가 받기 전(!)인 미혼여성들에게는 명절 프로그램을 이행할 준비를 하라는 압박이 집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심이 되는 얘기는 여성이 중심에 서면 당연히 쫓아오는 ‘가족’얘기다. 모든 미디어에서는 가족과 함께 먹으면 좋을 음식, 가족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가족과 함께 가면 좋은 여행지, 가족과 함께 하면 좋은 게임, 가족과 함께, 가족과 함께... 이도 논리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해야만 때이고 이 프로그램은 여성들이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과 가족, 명절이 떨어질 수 없는 세트처럼 움직인다. 뭐 이건 명절 때만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자연스럽게 운동을 제안하는 여성단체들 입에서도 나온다. 전국여성연대는 명절=여성=주부=가족이라는 논리를 깨기 위한 노력(?)으로 보도자료에 주부선언대회 앞에 ‘여남’이라는 전제를 괄호를 쳐서 넣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아닌, 한국진보연대가 아닌 전국여성연대가 왜 주부선언대회를 개최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피할 순 없어 보인다. 그리고 왜 여성이 아닌 ‘주부’였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소비자의 힘’으로, ‘(소비자인) 주부의 힘’으로가 아닌 생산의 주인공인 여성의 힘으로,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힘으로라는 말이 절실하다. 정말 절실하다.

추석. 명절=여성=주부=가족이라는 논리로 힘들다. 여자들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