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19.12.20

민정수석실 사태와 문재인 정부의 퇴행

사회진보연대
 
3년 만에 다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갈등의 중심에 섰다. 조국 씨가 법무장관 임명 35일 만에 사퇴한 후 그가 책임자였던 민정수석실에서 여러 불법적 권한남용이 있었다는 의혹이 연이어 폭로되는 중이다. 2016년 10월 말 박근혜 게이트 책임자로 지탄을 받았던 우병우 민정수석이 사퇴한지 3년 만에 민정수석실이 이렇게 정치논란의 중심에 다시 복귀했다. 심지어 거론되는 불법의 내용도 당시와 비슷하다. 우병우 씨는 현재 논란이 되는 하명수사와 감찰무마에 해당하는 직권남용과 직무유기로 구속됐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격변까지 겪고도 왜 청와대 조직은 이전의 구태를 반복하는 것일까?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전면에 내걸고 출범한 정부마저 권력남용으로 몰락할 경우,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나가게 되는 것일까?
 
 

왜 민정수석실이 반복적으로 논란이 되는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반복적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민정의 업무 자체가 권력 위의 권력으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민정수석실은 권력기관 간 정책 조정, 민심흐름 파악, 인사 검증 및 직무 감찰 등의 업무를 관장한다. 민정수석의 역할은 권력기관과 인사권이라는 대통령 권력의 핵심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대통령의 권력이 강하고 권위적일수록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넓어진다. 민정수석실이 현재와 같이 논란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대통령과 청와대의 권력이 크다는 방증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정치학자들은 문 대통령의 청와대가 역대 어느 정권보다 강하다고 평가한다. 청와대와 행정부가 어떻게 운영됐는지 보자. 경제개혁의 책임자는 내각의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청와대 정책실장이었고,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의 주인공도 법무부 장관이 아니라 민정수석이었다. 입법부가 주도해야 할 대통령제 개헌안마저 청와대가 제출했고, 청와대 비서를 비판했다고 여당 국회의원이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온라인에서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청와대 권력이 강화된 것은 문 대통령 임기 시작부터였다. 1호 공약 적폐청산이 그 매개가 됐다. 시실 이전 정부의 부패비리를 일소한다는 적폐청산은 권위주의 정부들에서도 사용됐던 것이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악일소’가 대표적이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회의를 만든 후 이전 정부의 부패비리를 척결한다며 구악으로 찍힌 사람들을 혁명재판소 판결로 처벌했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적폐청산은 어떠했는가? 두 대통령을 포함해 이전 정부 핵심들을 적폐로 규정해 구속했고, 정부 지지자들은 이들을 SNS에서 조리돌렸고, 심지어 이들을 구속시키지 않는 재판부까지 신상을 털어 공격했다. 정부 지지자들은 제1야당도 구질서의 잔재로 몰아 공격했다. 혁명재판소의 군 장교들은 적폐수사의 검찰 지검장들로, 국가재건회의는 청와대 민정으로, 군부의 총부리는 여론의 압력으로, 거리의 조리돌림은 인터넷의 조리돌림으로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인적청산 중심의 개혁은 감정적으로 속이 시원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지속성 있는 변화는 사회적 합의를 거친 제도개혁을 필요로 한다. 인적청산 과정에서 시민의 열정이 과거 인사에 대한 화풀이로 소진되고, 상대를 절멸시키는 처벌과정에서 제도개혁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합의는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처벌의 주체로서 집권세력은 자신이 권력에서 내려온 후 같은 과정으로 처벌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권력을 지키려 한다.
 
청와대의 권력행사 방법이 과거와 닮아있다는 점은 ‘쇼통’이라 불린 미디어-이벤트 정치에서도 드러난다. 박정희의 대한뉴스나, 전두환의 ‘땡전뉴스’가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문 정부에서 진화했다. 텀블러를 들고 산책하는 수석비서관들, 곶감을 말리는 영부인, 토크쇼 형식의 취임 100일 국민보고대회 등 청와대는 출범 직후부터 대통령 이미지를 만드는 미디어 작업에 열중했다. 자신들이 박근혜의 권위주의와 다르다는 점을 개혁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충분히 시민에게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탈권위적 이미지를 미디어에 내보내는 식으로 강조한 것이었다.
 
한편, 최근 문 정부가 힘을 쏟는 정책은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는 검찰개혁이다. 그런데 이런 검찰개혁의 모순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다. 역사적으로 권력기관의 일탈을 조장한 대통령 권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없어서다. 대통령이 임명한 처장이 수사기관을 조직하는 공수처는 여러 견제장치가 있는 검찰청보다도 대통령과 직접적 관계를 맺는다. 행정자치부 소속의 경찰청은 독립적 사법기관으로 규정되는 검찰청과 달리 더욱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종속된다. 요컨대 검찰개혁의 최종 수혜자는 결국 또 대통령이란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초지일관 대통령 권력 강화를 위해 달려왔다. 적폐청산, 미디어-이벤트 정치, 검찰개혁 등등 모두가 그렇다. 현재의 민정수석실 권한남용 사태도 같은 맥락에 있다.
 
 

민주정의 타락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체 자체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해외로 망명한 이승만, 부하의 총에 살해된 박정희, 부패와 학살로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 자식들이 구속된 김영삼과 김대중, 자살을 선택한 노무현, 부패비리로 구속된 이명박, 국정농단으로 탄핵된 박근혜. 단, 한명의 대통령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한 것이 한국정치 70년의 역사다. 과연 이런 상태를 제대로 된 정치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대통령까지 전임들의 역사를 따라간다면 변화에 대한 기대 자체도 사라질 수 있다.
 
시민들은 타락한 민주정을 군주정 같은 반민주적 정치체로 되돌리기도 한다. 역사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다. 프랑스의 1848년 제2공화정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투표로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뽑아 결국에는 제정으로 나아갔다. 1차 세계대전 후 군주정을 타파하고 공화국을 세운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히틀러가 민주적 투표로 공화국을 몰락시켰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한동안 장준하 같은 재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공화국의 혼란보다 사회 안정을 바랬던 것이 당대 시민들의 생각이었다. 무능한 민주주의자보다 유능한 독재자를 선출하겠다는 시민들의 선택은 21세기에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나, 유럽의 나치 친화적 정당들의 의석 확대가 바로 그런 사례들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상황은 민주정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민중은 박근혜 게이트의 후과로 386운동권, 참여연대, 민변 등 지금까지 권력 중심부에서 배제됐던 세력들을 지도자로 발견했다. 그런데 이들의 연합정부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민주공화국을 더욱 민주적으로 발전시키기보다 미디어 이벤트 정치로 민중을 타락시키며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히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한 예로 문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자들이 정적들에게 가하는 각종 온라인 린치를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조국 사태 이후 서초동에서는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국 수호 집회가 열리기도 했고, 광화문은 박근혜 지지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촛불정부의 몰락, 이제 단호한 결별이 필요하다.

 
 
집권세력의 퇴행적 정치개혁 와중에 한국사회는 위험천만한 국제정세와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지나는 중이다. 2007-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부쩍 성장한 중국과 세계유일의 군사적 경제적 패권 국가인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충돌 중이다. 한반도는 그 충돌의 한복판이다. 핵무기와 경제제재 해제를 동시에 손에 쥐겠다는 북한 정권은 다시 전쟁 위기 상황도 감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중심인 일본은 재무장 속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사회 변화 역시 그 속도가 무섭다. 2019년 2% 성장률이 무너질 수도 있는 가운데, 잠재성장률 역시 급전직하하고 있다. 반백년의 산업화 추격성장이 문턱에 부딪힌 것이다. 2020~21년 중에는 사망이 출산보다 많아지는 인구론적 변곡점에 도달한다. 세계 최하위의 출산율에 고령화나 인구감소의 속도는 세계 역사상 존재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 사회 제도는 대부분 고성장과 인구증가 시대를 배경으로 형성되어 있다. 유래없는 저성장과 저출산, 인구감소라는 변화에 우리 사회가 적응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체제가 이런 민족사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권력은 대통령의 능력에 국운을 맡긴다. 하지만 현 정세가 대통령 혼자 감당할 상황이 아닌데다, 대통령의 잘못된 정치이념이나 무능한 정책결정 능력이 민족의 운명을 벼랑 끝으로 내몰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의 오늘날 상태는 이런 위기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실제 상황일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민정수석실 비리 사태는 문 정부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부질없는 것임을 확인시켜줬다. 이제 노동자운동은 현 집권세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단호하게 이들과 결별할 때다. 무너지는 민주공화국을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차분하게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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