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20.01.08

위기의식도, 비전도 없었던 대통령 신년사

사회진보연대
180년 전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근대의 시작이었다. 1840년 영국은 무역적자를 해결해보겠다고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고, 중국이 이를 규제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2년 전쟁 끝에 2만의 영국군이 25만의 청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동아시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 체결됐다. 그런데 이 천지개벽할 사건을 마주한 한·중·일의 태도는 사뭇 달랐고, 그 태도가 운명을 갈랐다.
 
전쟁 당사자였던 청나라는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기보다 사태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아편전쟁은 무역 확대를 원하는 양이를 황제가 위로해준 것으로 각색됐다. 1860년 베이징이 함락되기 전까지 이런 태도가 유지됐고, 이 잃어버린 20년이 중국 근대의 반식민지 비극을 만든 결정타였다. 아편전쟁에 청보다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오히려 일본이었다. 일본은 무역상들이 가져온 정보로 전쟁의 양상과 패전 원인을 소상히 파악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서유럽 정세도 분석했다. 이런 정세 분석이 일본을 반식민지 위기에서 구했다. 조선은 청을 뒤따라갔다. 그것도 뒤늦게. 조선은 조공사절을 통해 아편전쟁 소식을 접했다. 당연히 청 황실의 각색된 정보만 들어왔다.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다 보니 청보다 더 오랫동안 쇄국을 지속했고, 내부 개혁에도 실패해 세도정치와 외척정치라는 군주정의 가장 타락한 형태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
 
요컨대 아편전쟁을 얼마나 냉정하게, 그리고 절박하게 인식하고 분석했는지가 세 나라의 미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아편전쟁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현재의 한국 정부 상태가 180년 전 조선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다. 한국이 처한 객관적 정세와 정부의 정책 방향을 담는 대통령의 신년사에는 미국과 이란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있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경제는 저성장 인구감소라는 우리가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가운데, 여론은 조국 사태 이후 내전이라 불릴 만큼 적대적인 대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 정세가 단 하나도 없었다. 신년사에는 어떤 위기의식도 없이 온갖 미사여구와 자화자찬만 가득했다. 아편전쟁 직후 조선 왕정에서 “청나라는 안녕합니다.”라고 말했던 그 상황이 현재 청와대가 아닌지 우려된다.
 
▲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청와대 본관에서 올해 국정운영 방향을 구체적으로 담은 신년사를 발표했다.
 
위기를 분석하지 못하는 안일한 정세 인식은 신년사의 자화자찬 내용 하나하나에 녹아있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대통령은 2032년 올림픽 남북공동개최, 남북 철도연결,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 김정은 위원장 답방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공언이 과연 한반도 주변 정세를 정확하게 보면서 나온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막연한 낙관과 의지만 가진 것처럼 보인다.
 
미국과 북한의 교착상태는 3년 전 “분노와 화염”까지 갔던 군사적 대립으로 치닫기 일보 직전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은 무역만이 아니라 군사 부분에서도 매우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 미국은 중거리 핵전력 조약을 탈퇴했고, 이후 중거리 미사일 실험을 확대하고 있다. 잠재적 타격 대상은 중국과 러시아다. 이런 와중에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로 치고받는 중이고, 일본은 미국의 지원 아래에서 인도·태평양 군사전략의 핵심 역할을 맡아 군비 확장에 나서고 있다.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핵미사일을 그대로 두고 경제 문화 교류를 확대하겠다고 말하는 셈인데, 안보리 결의 위반임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 상대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도 쉽지 않았던 일이었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첨예한 갈등의 고리 중 하나인 북핵 문제를 정부의 낙관과 의지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는 ‘희망 고문’이거나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도박이라 하겠다. 민족사를 좌우할 수도 있는 지정학적 위기가 자칫 집권 세력의 정치 공학 속에서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해리스 대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 직후 미국과 발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KBS 인터뷰 화면 갈무리]
 
다음으로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완수하고, 공정을 뿌리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권력기관 개혁의 본령이었던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국 임명을 강행해 청년들에게 불공정의 좌절감을 주고, 한국 사회를 몇 달 동안 극한 대치 상태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대통령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잘 생각해보자. 권력기관 개혁의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이었다. 3년 전 권력 농단은 박근혜가 검찰을 부린 것이지, 검찰이 박근혜를 조종한 것이 아니었다. 검찰개혁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대통령 권력의 조정을 전제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공수처가 설치되면, 당연히 대통령이 공수처를 통제할 여지가 많아진다. 공수처장 후보에 대해 야당이 비토권을 가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공수처란 제도 자체가 검찰보다도 대통령과 가깝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여당은 대통령제 개혁에 대해서는 안 되면 그만이란 식으로 접근하는 반면, 검찰개혁은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결국 집권 세력은 제왕적 대통령과 판검사를 수사 및 기소할 수 있는 공수처를 얻었다.
 
문 정부 3년간 한국 사회 민주주의는 결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야당 정치인들을 공격했던 탓에 의회 정치는 중단되었다. 검찰이 정적을 잡아넣고, 판사가 정치적 갈등까지 판결하는 정치의 사법화는 더욱 심화했다. 조국 사태로 내전에 가까운 정치적 대결 국면까지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신년사에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에 관해 그 어떤 반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장구한 발전보다 집권을 지속하기 위한 당리당략만 판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은 일자리가 뚜렷하게 회복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최근 증가한 취업자 숫자의 상당 부분은 영세자영업(종사자 없는 자영업자)과 단시간 취업(36시간 미만 취업자)이었다. 좋지 않은 일자리가 증가하다 보니 1~2분위 가계소득에서 임금소득은 정체, 하락하고 정부 지원에 의한 소득(공적 이전소득)만 증가하고 있다.
 
물론 고용과 임금 문제가 정부 탓만은 아니다. 저성장으로 청년들이 만족할만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고령화로 노인들이 저임금 일자리로 몰려들면서 노동시장 상황이 악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이런 구조적 변화를 엄중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 정부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구조적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들을 전혀 정리하지 못했다. 출범부터 지금까지 과학적 객관적 조사와 정책이 아니라 인기가 있을 것 같은 정책들만 여론을 봐가며 좌충우돌 내놓았을 뿐이다. 저성장 인구감소라는 장기의 변화는 이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점점 더 위험한 상태로 발전 중이다.
 
▲ 2014년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이 "대통령과 대통령 주변의 권력이 시스템을 벗이나서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보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폐단을 새삼 느끼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2020년 대통령 신년사를 보며 다시금 현 정부와 집권 세력에게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한국사회의 미래를 크게 걱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지정학적 위기와 경제 위기가 동시에 심화하는 가운데, 이 문제들을 헤쳐나가야 할 정치까지 위기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조선 말, 정세를 읽지 못해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민중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때이다. 더불어 노동자 운동은 이제 집권 세력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세계의 흐름을 읽고, 국내의 모순을 분석하며, 한국 사회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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