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노동보다 | 2020.01.31

임금체계 개편, 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주도해야

사회진보연대
정부는 올해 노동 개혁 핵심과제로 호봉제를 직무급제로 바꾸는 임금체계 개편을 제시했다. 임금체계 문제는 노동운동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박근혜 정부 말기에도 공공부문 총파업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노정 갈등의 화약고였다. 정부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어 반복적으로 노사합의를 우선하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경제가 더 침체하고, 자본 측 단체들의 친기업 정책 요구가 거세지면, 정부는 언제든 노동 측 양보의 ‘쇼케이스’로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고, 그 대상은 박근혜 때도 그러했듯 임금체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설마’ 했더니 ‘역시’로 뒤통수를 맞았던 것이 노정 관계의 역사다. 노동운동은 임금체계 개편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필요가 있다.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안

 
정부가 주장하는 호봉제의 문제점은 두 가지다. 첫째, 고령화와 호봉제가 결합해 청년고용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우리나라 호봉 체계에서는 고령자 비중이 증가하면 임금총액이 많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임금총액 증가는 신규채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둘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호봉제는 기본적으로 장기근속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전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자리는 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만 가질 수 있다.
 
정부가 호봉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직무‧직능급이다. 직무의 난이도 차이에 따라, 개개인의 숙련 차이에 따라 임금을 차등화하자는 것이다. 근속이나 고용 형태가 아니라 직무‧직능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동일노동-동일임금 기준에 더 적합하다는 점도 정부가 강조하는 바다.
 
 
 
 

핵심을 벗어난 대책

 
하지만, 정부 대책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청년 고용 위기와 임금 격차 문제의 핵심을 비켜 나갔기 때문이다.
 
한국의 청년고용률(15~29세)은 40% 초반이다. OECD 35개 국가 중 30위에 해당한다.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최하위다. 이유가 무엇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청년들이 대기업․공공부문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오랜 기간 취업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일자리는 긴 근속과 높은 임금을 보장한다. 그리고 이 둘의 매개가 되는 것이 바로 호봉제다. 평균 근속은 대기업․공공부문이 10년이 넘고,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은 4년이 되지 않는다. 임금 격차는 호봉제와 근속이 결합해 고령자에서 두드러지는데, 20대의 임금은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1.6배 컸지만, 50대에서는 2.6배로 벌어진다. 호봉이 더 가파르게 상승하는 공공기관과 중소기업을 비교해보면 연령대별 임금 격차는 더 커진다.
 
그런데 문제는 호봉제를 없앤다고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처우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의 일자리는 근속이 짧아 호봉제와 무관하다. 호봉제 탓에 근속이 짧은 것도 아니다. 중소기업의 20대와 50대 임금 격차는 1.4배밖에 되지 않는다. 임금체계가 문제가 아니라, 재벌과 수출제조업 주도의 한국경제 구조에서 중소기업 사업주의 지불능력이 충분하게 확보되기 어렵다는 점이 핵심문제란 것이다.
 
그렇다면 호봉제를 바꾸면 공공부문과 대기업의 고용이 더 늘어날 수 있을까? 이것도 그다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정부 임금체계 개편안이 기업별 수준의 직무 직능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 내의 임금체계 개편은 개별 사업주의 이윤 추구 동기를 제어하지 못한다. 예로 고령자의 호봉을 직무급으로 바꿔 삭감했을 때, 과연 그 삭감분만큼을 사업주가 신규채용에 사용하려 들까? 아닐 것이다. 공공부문도 다르지 않다. 경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거나 기관장이 자신의 경영능력을 대외에 인정받으려고 임금삭감분을 부채상환이나 성과 보상에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요컨대 정부 임금체계 개편안은 노동시장의 임금표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업 내 보상체계의 합리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기업 내에서 작동하는 경영 관행을 제어할 수 없다.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안은 청년 고용 위기와 임금 격차라는 거시경제적, 산업적 문제를 전혀 다루지 못한다.
 

그럼에도 호봉제 사수가 대안일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호봉제 사수가 대안인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호봉제가 상위 임금소득자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제도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허문다고 임금 격차가 감소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현 상태로 지키자는 것은 고용 위기나 임금 격차 문제를 방관하자는 말에 불과하다.
 
혹자는 아예 대기업․공공부문 호봉제를 모든 노동자가 누릴 수 있도록 하자고도 제안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현 임금 격차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알리바이로만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호봉제가 정상적 임금체계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70~80년대다. 연 경제성장률이 10% 내외였고, 취업자 중 50세 이상 비중도 20% 정도에 불과했다. 현재는 연 경제성장률이 2% 내외이고, 취업자 중 50세 이상 비중도 40%가 넘는다. 미래의 성장을 전제로 젊은 취업자가 고령자에게 임금을 이전하는 호봉제가 유지되기 어렵고,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될 수도 없다.
 
일부는 재벌의 곳간을 풀면 모든 노동자에게 고임금의 호봉제를 적용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그 재벌 곳간 덕에 재벌 대기업 노동자들이 고임금 호봉제를 쟁취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재벌의 이윤 상당 부분이 투자에 사용하고 있는 터라 전체 노동자의 8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기업 노동자와 같은 임금을 지불할 만한 여지도 적다. 최근에는 장기 저성장 속에 극소수 재벌을 제외하면 이윤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공공부문도 마찬가지다. 공공부문은 기본적으로 공공서비스 요금과 함께 시민 세금으로 운영된다. 고임금체계를 유지하면서 공공부문 고용을 확대하면, 서비스 요금과 세금 지원이 커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구나 한국의 공공부문은 OECD에서 임금은 최고 수준, 고용 비중은 최하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가파른 커브의 호봉제가 이런 한국의 공공부문 특성을 설명해주는 핵심 요소임은 분명하다.
 

격차축소를 방향으로 삼아 임금체계 개편에 주동적으로 대응하자.

 
임금체계 개편으로 임금의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임금체계든 기본적으로 노동자 간 경쟁을 강화해서, 또는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을 강화해서 이윤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다. 마르크스는 임금형태 자체가 착취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라고도 말했다. 임금 노동제가 악이지, 임금 지급 방식에 선과 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의 노동운동은 임금 노동제를 지양하면서도, 현실의 노동시장에서 임금 격차를 좁히며 노동자 단결을 넓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이 임금체계 개편에 대응하는 기본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임금 격차의 축소와 경쟁의 지양이다. 현재의 임금체계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격차를 키우고 경쟁을 심화시키기 때문일 뿐이다. 현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만의 임금상승 제도인 호봉제 역시 이런 점에서 개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노동운동 주도의 임금체계 개혁은 기업별 보상체계 합리화가 아니라, 경제구조, 산업구조를 변화시키는 초기업적이며 집단적인 노동표준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동표준은 시장이 아니라 총연맹이나 산별노조가 정한 동일노동 기준과 임금수준에 따라 격차를 최소화하는 전국적, 산업적 임금체계이다. 이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노총과 산별노조가 20세기 내내 실제로 실현했었다. 서유럽에서 대기업, 중소기업 간 격차가 작은 이유도 노동조합 이런 역할과 관계가 있다. 노동자 간 임금 격차를 최소화하니 이런 임금협약을 준수할 수 있는 기업만 시장에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고용 비중이 한국보다 월등히 높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임금 격차가 작고, 모든 노동자에게 같은 임금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사용자가 외주화나 하청을 기를 쓰고 늘릴 이유가 없다.
 
노동운동은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을 노동자계급의 논리로 뒤집어야 한다. 비판의 핵심은 정부 직무 직능급 안이 결국에는 기업 내부 경영 관행을 유지하는 기업별 보상 논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호봉제 사수는 이런 점에서 정부 안에 대한 적절한 비판도 되지 못한다. 노동운동의 비판과 대안은 기업의 이윤 추구와 무관하게 전국적, 산업적 수준의 동일노동-동일임금을 노조 자신의 임금협약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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