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20.04.11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년, 응답하라0411

사회진보연대
 
오늘 4월 11일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66년간 대한민국은 임신중지(‘낙태’)를 한 여성에게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벌을 내려왔다. 임신중지를 도운 의료인 역시 처벌받았다. 그런데 작년 헌법재판소는 이 ‘낙태죄’가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다.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고 외치며 수년에 걸쳐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선 여성들의 행동은 대한민국 형법에서 ‘낙태죄’가 존치되어온 지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그리고 오히려 필요한 것은 여성에 대한 처벌과 낙인이 아닌, 성과 재생산의 권리보장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헌재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안적인 법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부터 1년이 다 되도록 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논의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이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는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2020년을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의 첫 번째 해로 만들 것을 선언한 것에 이어, 4월 10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년 맞이 기자회견 #응답하라0411 #안전하고_합법적인_임신중지 #재생산_권리보장>을 개최하고,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와 재생산 권리보장을 위한 21대 국회의 역할을 촉구했다.
 
 
“폐암을 1기, 2기, 3기, 기수에 따라 어떻게 치료할지 법에서 결정하지 않아도 개별사정을 가진 환자와 표준치료법 알고 있는 의사가 상의해서 맞춤형 치료를 하는 것처럼, 여성의 자기요청에 따른 임신중지 역시 의사의 조력 하에 합리적이고 안전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시급합니다. 21대 국회에 요구합니다. 여성의 임신중지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가 아니라 여성의 건강과 기본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입법 방향을 세워 주십시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보라 공동대표는 여성의 건강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의료행위로 ‘낙태’ 즉 임신중지의 개념을 재확인하며, 여성의 의료접근권을 제한하고 건강권을 침해하는 ‘낙태죄’ 전면 비범죄화 및 유산유도제 도입, 의료인 교육, 공공 의료(서비스상담, 수술, 시술, 약처방)제공과 임신중지와 피임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을 요구했다.
 
합법적이고 무상의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체계를 갖추는 문제와 더불어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 제공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모낙폐’가 기자회견에 앞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점으로 한 달 동안 진행한 <퀴즈를 통한 임신중지 상식 설문조사 “나의 임신중지 상식은 몇 점?”> 결과에 따르면,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는 법·제도 및 절차가 없어져야 한다는 인식은 높은 반면, 임신중지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위험도, 피임에 대한 상식 등에 관해서는 여전히 잘못 알고 있는 응답자 비율이 확인되었다.
 
[표] 퀴즈를 통한 임신중지 상식 설문조사 “나의 임신중지 상식은 몇 점?” [출처: 모낙폐]
 
이처럼 법 개정 및 제도개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간 정부와 국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낙태죄’의 문제는 헌법재판소, 즉 사법부로 가기 이전에 마땅히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다뤄야 했다.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유산유도제) 도입과 관련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을 때 당시 조국 민정수석이 나서서 실태조사 후 정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그 순간만 모면했을 뿐 실제 진행된 것은 없었다. 정부와 국회 모두 헌법재판소 결정만을 기다렸고, 정작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에도 여전히 눈치만 볼 뿐 사회적 논의를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최근 ‘낙태죄’ 형법 조항을 개정하고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뉴질랜드의 사례는 정확히 우리나라의 모습과 대조된다. 뉴질랜드 정부는 2019년 임신중지 처벌 조항을 삭제하고 여성 건강권의 관점에서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법을 발의했다. 그리고 반년에 걸쳐 공개적인 의견 수렴을 진행하고 의회에서의 치열한 토론 끝에 과반의 찬성(68:51)으로 2020년 3월 18일 법안이 통과되었다. 법 개정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수용되지 않았고,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에 대한 표결은 당론을 정하지 않고 의원들이 자기 의사에 따라 투표하는 ‘양심 투표’로 이뤄졌다. 국가와 가족의 허락과 처벌이 아닌, 종교나 의료계의 권위도 아닌, 여성의 판단을 존중하는 결정을 국회에서 책임있게 내렸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무적이다.
 
21대 국회가 구성된 이후의 우리는 어떤 변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책임회피가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 사회운동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모인 사회운동단체 회원들, 의료인들, 여성노동자들의 대표들, 이주여성의 벗, 장애여성, 청년학생, 청소년, 그리고 라이브 생방송으로 함께한 전국의 모든 용기있는 여성들은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상징하는 건강보험증, 유산유도제, 핫팩, 상담 핫라인,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돌봄 휴가계, 단체협약서 등을 투표함에 넣고 21대 국회의 역할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민주노총 봉혜영 여성위원장은 ‘안전한 임신과 출산, 안전한 임신중지를 넘어서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 결정하고 교섭할 수 있는 힘’을 여성노동자가 쟁취하여야 한다는 점을 소리높여 알렸다.
 

‘모낙폐’에 참여하는 단위들은 4월 총선으로 구성될 대한민국 21대 국회가 지체없이 '낙태죄' 폐지 이후의 법안 마련에 힘쓰도록 요구해 나갈 계획이다.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법 개정 방향성을 분명히 하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고,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 및 성과 재생산의 권리가 보장되는 2020년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의료인들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되찾아 행사하는 데에 든든한 조력자로 함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동자·사회운동은 여성들의 저항에 연대하고 '낙태죄' 전면 비범죄화 및 재생산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여성이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어머니라는 가족을 매개로 한 정체성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사회적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여성이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시민적 권리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시민으로서 여성이 스스로 자기 노동을 통제하면서, 낳을 권리 혹은 낳지 않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노동자 사회운동이 함께만들자. 경제위기와 인구감소라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복합적 문제가 야기하는 이중 삼중의 곤란함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는 저항하는 여성들과 사회운동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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