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노동보다 | 2021.01.29

호봉제 개혁에 앞서 해결할 문제들

시사인 “노조여 세상을 바꾸려면 호봉제부터 바꿔라” 기사에 대한 논평

사회진보연대
얼마 전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특집 기사 하나가 노조 활동가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바로 “노조여 세상을 바꾸려면 호봉제부터 바꿔라”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호봉제(연공급) 탓에 임금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고, 호봉제는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에도 맞지 않는 불공정한 임금체계이며, 노조는 호봉제를 ‘사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인용된 전문가들의 대안은 직무‧직능급이었다.
 
하지만 기사의 내용에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호봉제가 임금격차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해 호봉제는 격차의 결과이다. 기업별, 고용형태별 격차가 괜찮은 호봉제 유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호봉제를 직무‧직능급 같은 다른 임금체계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바꾼다고 해도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임금격차의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임금격차의 원인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기업 간 지불능력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부터 재벌대기업은 노조를 회피할 목적으로 노동집약적 공정을 대규모로 외주화했다. 중소기업은 이후 저임금 저생산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하청기업으로 고착화했다. 서비스업에서는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이 자영업에 갇히면서 저임금 저생산성 일자리가 일반화됐다. 공공부문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대기업 임금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최소 고용, 최대 임금이라는 기형적 구조가 정착됐다. 군부독재 종식 이후에는 정권이 공공부문에서도 당선을 위한 지지를 얻어야만 했는데, 이때 정권은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다수의 노동자를 외주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말하자면, 예산 배분의 격차가 고착화한 것이었다.
 
둘째, 노조의 초기업 교섭을 정부와 자본이 오랫동안 억압해 왔기 때문이다. 임금격차가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의 공통점은 임금협약의 포괄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연하다. 기업은 노동자를 경쟁시켜 임금을 낮추려고 하고, 노조는 임금과 고용을 연대하며 이런 경쟁을 완화한다. 후자가 무너지면 전자의 독주가 일반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1980~90년대 그 유명한 ‘제3자개입금지법’부터 시작해, 21세기에도 여전히 쟁의 대상이나 교섭 절차를 기업별로 한정하는 제도가 많다. 임금을 연대할 수 없도록 막아놓고서는 임금격차가 노조 탓이라고 비난만 하는 것은 정부와 자본의 파렴치한 태도이다.
 
사실 호봉제는 이러한 임금격차의 상위 일자리 임금체계를 대표한다. 호봉제에는 엄청난 논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안정적 고용 속에서 지속해서 임금 인상이 보장되는 체계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임금격차 문제는 자본과 노동의 역사적 제도들을 개혁하는 것에서 해결을 모색해 봐야 한다. 기업별 지불능력 격차를 완화할 방안, 그리고 초기업 교섭을 통해 보편적 임금협약과 단체협약을 노동자 다수에게 적용할 방안을 찾은 후, 그 결과로써 임금체계도 공정한 방식으로 개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기업별 지불능력 격차를 완화하는 방법은 고생산성 부분에서 고용을 충분하게 늘리면서, 저임금 저생산성 부분에서 고용을 줄이는 것이다. 고생산성(고예산배당) 부분인 대기업, 공공부문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이 고용을 충분하게 늘릴 수 있도록 조정되어야 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에서는 적절한 임금을 보장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사라져야 한다. 요컨대 전국적, 산업적으로 적용되는 초기업적 임금협약이 확대되면서 동시에 산업적 재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 재편을 추동하는 정부 정책이 필요하고, 초기업적 노사관계에 유인을 주는 법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이런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 나갈 노조 운동의 개혁이 필요하다. 임금체계 개혁은 이런 변화의 중간 어딘가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물론 임금체계 개혁이 필요 없다거나, 호봉제를 ‘사수’하는 것이 노조운동의 정당한 목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임금체계 개편 반대를 외치면서 암묵적으로 호봉제를 현행 상태로 지키려는 노조 운동 일부의 태도는 상당히 퇴행적이다. 다만, 우리는 본 글에서 임금체계 개혁에 앞서 해결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올해 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또다시 임금격차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귀족노조’론을 동반하며 이야기될 것인데, 민주노총, 공공운수, 금속노조 등이 방어적 대응에 그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기회에 초기업교섭구조, 산업재편, 임금체계 개혁 등을 종합해서 사회적 토론으로 붙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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