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봄. 174호
첨부파일
09_기획연재_조유리.pdf

서울의 봄, 거리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보았나〔2〕

김인숙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조유리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4. 안개정국


1980년 상반기의 총학생회 부활과 학원민주화 운동을 살펴보기에 앞서, 정치권의 동향을 살펴보자. 1979년 겨울에서 1980년 봄 사이는 개헌문제를 포함해 민주화를 위한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권력의 소재가 불분명해 정국을 예측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안개정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시기 최규하 정부와 신민당의 무능으로 인해 학생운동은 급진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국을 주도할 권력집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한국사회의 정치구도는 복잡해지고 있었다. 권력 장악을 위해 각계에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지만, 최규하 정부도, 국회와 신민당도, 또 재야도 신군부의 시도를 분명하게 제어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했다. 가장 가시적으로는 차기 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두고 최규하 정권과 국회가 갈등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규하 정권 내부에서는 군의 정치적 개입을 제어하고 민간정부로의 이양을 준비하고자 하는 최규하 대통령-신현확 내각과, 군의 재집권을 기도하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 국회 내부에서는 공화당의 김종필, 신민당의 김영삼, 김대중이 대권을 놓고 갈등하면서 혼란을 가중할 뿐이었다.
 

1) 개헌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의 대립 

10·26 사태 이후 안정을 찾은 국회는 본격적으로 개헌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최규하 정부가 정부 주도로 개헌을 하겠다고 밝히면서 개헌의 주도권을 두고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정부는 이미 1월 10일경부터 이원집정부제 개헌안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국민직선의 대통령이 외교, 국방 분야를 맡고, 국회에서 선출된 국무총리는 경제, 치안 등 내정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최규하 정부는 그간 한국 정치의 문제점이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이라고 보고, 그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가 국회를 불신하고, 국회 주도의 개헌 논의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만으로 권력분산이 가능할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곧이어 최규하 정부는 헌법연구반을 구성하여 유럽으로 파견을 보낸다.

이에 뒤질세라 국회는 개헌특위를 구성하고, 1월 16일 서울 지역 공청회를 시작으로 대전, 광주,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여론을 수렴해 나갔다. 학자와 전문가를 포함하여 대다수 국민이 압도적으로 대통령 중심제, 직선제 개헌을 옹호했다. 국회가 주도하는 개헌론은 여론을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으로 보였지만, 유신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한국 정치의 발전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생략되어 있었다. 국회의 여론수렴 결과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은 1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투표를 통한 개헌절차가 국민 대다수의 의견이라면 개헌 발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며 정부 주도 개헌론을 다시 한 번 내세웠다.

2월 7일에는 신민당이 개헌안을 확정했고, 11일에는 공화당이 개헌안을 발표했다. 신민당과 공화당의 개헌안은 대통령 중심제와 직선제, 임기 4년에 1회 중임 가능,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폐지와 긴급명령권 인정, 국회의 국정감사 부활 등 대부분 서로 일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부에 개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협력에 따른 것이었다. (국회의 개헌안은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한을 일부 제한하고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을 삭제하면서 국회의 권한을 보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신민당은 여전히 정권 내부에 남아 있는 군부의 영향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면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계속해서 정부 주도의 개헌을 추진했고, 3월 14일에는 신현확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개헌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정부와 국회가 개헌 주도권을 둘러싼 논쟁을 지속하자 향후 정치 일정을 알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안개정국 속에서 신군부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차근차근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
 

2) 신군부의 숨겨진 의도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이원집정부제 개헌안을 지지함으로써 국회가 민주화 일정을 추진하지 못하게 힘을 보탰다. 동시에 신군부는 군부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군부의 재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해나갔다. 10·26 이후 비상계엄은 유지되었고,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권한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선 민주화세력의 저항을 예상한 신군부는 충정훈련을 강화했다. 충정훈련은 공수부대라는 특전부대와 서울과 주요 대도시 인근의 일반부대에서 실시하는 민주화운동 진압훈련으로, 광주항쟁 당시 시민을 살상하는 데 많이 사용되기도 한 진압봉 훈련이 포함되었다. 2월 18일 육군본부는 수도권 주위에 배치된 충정부대와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예정보다 앞당겨, 강력히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3월 초에는 충정회의가 열렸다. 수도권 소요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태세를 점검했고, 회의 결과에 따라 충정훈련을 강화하고 부대의 즉각적인 출동태세를 유지했다. 

군부의 재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론을 조작하는 ‘K-공작계획’을 활용했다. 신군부는 이미 2월 1일부터 보안사령부에 정보처를 신설하여 언론을 검열하고 공작계획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보다 구체화된 게 K-공작계획이었다.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하여 안정세로 전환’한다는 방침하에 보안사의 언론공작반은 언론계 중진들과 접촉하고 회유공작을 펼쳤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와 검열 속에서 야당, 재야, 학생운동의 민주화 요구는 ‘폭력파괴행위’로, 양 김씨를 포함한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은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최규하 정부는 무기력한 허수아비 정부로, 전두환 및 신군부의 정치개입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묘사되었다.
 

3) 대권을 둘러싼 3김의 경쟁

작품 중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 ‘삼김’이라 불리던 정치인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김삼수 씨는 경찰관 아들을 둔 가게 주인으로, 민주화가 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계엄이 유지되고 군인들이 시내를 활보하고 있어 불안함을 느낀다. 박가는 유신 시기 공화당을 찍기 않았다는 소문이 퍼져 곤란을 겪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정치상황에 대해 아는 체를 하며 김대중 씨를 지지할 것을 호소한다.

민주주의가 어떻고 하는 그 말은, 바로 그제 복권이 된 김대중이란 자의 말이었는데, 김삼수 씨도 이미 조간신문에서 그 회견기사를 본 바 있었다. 그 사람 이제 팔자 폈네 그려…… 김삼수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대중이란 사람이 요란스레 유명한 사람이란 건 김삼수 씨도 알고 있는 바였지만 실상 신문을 보고 있으면 그런 사람들 복 터진 앞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박가놈의 아는 체 많은 아니꼬운 꼬락서니가 밉살스러워 곰곰이 신문글자를 뜯어보아도 그닥 신통할 건 없었는데 어쨌든 이런 사람들이야 신세가 탁 터진 난사람들이거니 하는 생각만 드는 것이었다. 

시국이 하수상하다더니, 참 요상, 별꼴스러운 것도 많은 시절이었다. 이즈음 김삼수 씨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만 눈에 띄는데, 끈덕지게 이어지는 계엄이란 것도 그렇고 그런 계엄통치 중에도 68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형무소에서 몰려나오는 게 그랬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름이 오싹 끼치게 무서운 세상인 것도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뭔가 모르게 좋은 세상이 되가는 것도 같고……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2권 26~27쪽.)

김대중 씨는 가택연금이 해제되었지만 아직까지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김대중 씨는 1976년 명동사건 판결에 따라 1981년 3월 10일까지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을 만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앞서 10·26 사건 직후에도 김영삼 씨는 가택연금되어 있는 김대중 씨를 고려하여 빠른 개헌을 주장하지 않은 바 있다. 김영삼 씨는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 이후 공평한 당 내 경쟁을 통해 대선 후보를 결정하려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정부 각료들은 김대중이 사회혼란을 야기할 것이라 보고 김대중의 사면·복권에 반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전두환 합수부장이 김대중의 복권을 강하게 주장했다. 김대중이 야권을 분열하고 재야를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신군부의 집권에 유리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요구에 따라, 최규하 정부는 김대중을 포함한 687명을 3월 1일자로 사면복권했다. 언론에서 ‘유력 재야인사’라는 명칭으로 보도되던 김대중 씨는 이제야 실명을 찾을 수 있었다. 김대중 씨와 함께 윤보선 전 대통령, 정일형 전 국회의원 등 총 217명이 사면복권되었다.

김대중 씨를 지지하는 박가와 달리, 김삼수 씨를 비롯한 시장 상인들에게는 여전히 정치인들이 믿을만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삼김씨 모두 대권을 향해 달려들지만, 뚜렷한 리더십은 없었다. 여전히 민주화 일정은 오리무중이었고, 대통령만 바뀐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지 명확하지 않았다.

김삼수 씨의 말 이면에는 박가에 대한 타박도 있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박가가 그렇게 영웅 섬기듯 입에 붙어 주워섬기고 다니는 정치꾼 작자에 대한 타박질이 컸다. 도무지 이건 무슨 놈의 세상이 아침에 해나 떠야 오늘도 성하게 살아 있구나 싶지, 갈아치우겠다는 놈이나 안 갈겠다고 생떼를 쓰는 놈이나 간에 벌집 쑤셔놓은 듯 웽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을라 치면 이게 분명 어디가 고장나도 크게 고장난 세상이었다. 이러다간 큰 일이 나도 보통 큰 일이 나는 게 아니지…….
물론 큰 일이 나야 이 놈의 세상 팍 뒤집어지지 싶은 마음, 김삼수씨에게도 마찬가지 심정인 것이었지만 정치하는 놈들 떠들어대는 것이 정말 세상 잘 되게 하자고 그러는 것인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정치하는 놈들이 서로 저만이 대통령을 하고 말겠다고 저렇게 떠들어대다가는 판을 깨기가 십상이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박가의 얼굴이 담박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삼수 씨의 타박을 십분 알아들은 눈치였다. 
“너, 크게 잘못 생각헌다!”
“뭘 잘못 생각해?”
“사공이 많다고 혔냐? 니가 지금? 그것이 뭔 말이다냐? 세간에서 삼김씨, 삼김씨 아무리 떠들어싸도 그게 다 똑같은 김씨가 아닌 것이여! 피라미들이 어디 고래한테 어깨를 겨눌 것이냐 말여! 암만. 너 걱정할 필요 하나 없다. 무소속으로 나설 것인께. 암만! 삼천만 국민이 다 원하는디!”
그는 김대중이란 자가 신민당에 입당을 거부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안절부절을 못 했었드랬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그래도 그분 생각이 오죽 어련하셨으랴, 하면서 무소속 출마를 주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2권 85~86쪽.)

김대중 씨의 복권 이후 상황은 전두환 합수부장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대권을 두고 정치인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개헌 주도권을 두고 정부와 경쟁할 때에는 협력하기도 했던 공화당과 신민당이었지만,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평상시라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치권에서의 갈등은 신군부의 언론공작에 이용되었고, 결국 신군부의 집권을 재촉할 뿐이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유신체제의 2인자로 서울의 봄 시기 반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이제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하여 유신체제를 부분적으로 비판하면서 민중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공화당 내부 소장파 의원들이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김종필의 주도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러한 공화당 내의 갈등은 이후 신군부가 정치권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했다.

한편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사면·복권된 김대중 씨는 누가 민주화세력의 적자인가를 두고 대결했고, 때로 이 갈등은 암투로까지 이어졌다. 3월 한 달간 양 김씨는 김대중 씨의 신민당 입당과 대통령 후보 조정을 두고 갈등했다. 김영삼 씨는 김대중 씨의 빠른 입당과 당내 경선을 통한 후보 조정을 주장했다. 반면 김대중 씨는 재야 인사와의 의논이 필요하다며 입당을 미뤘다. 
양 김씨는 3월 6일 범야의 대동단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신민당 지구당대회에서는 양 계파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3월 3일 신민당 경북지부 결성대회에서 양 계파의 지지자들이 몸싸움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3월 내내 지역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양 계파가 연쇄적으로 충돌했다. 양 계파의 싸움은 각목까지 등장하는 난투극으로 이어졌고, 다수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4월 7일 김대중 씨는 결국 신민당 입당을 포기한다. 재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신민당에 입당하더라도 김영삼 씨를 이기고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씨의 행동은 재야를 분열시킨다. 국민연합의 대부분은 김대중 씨의 신민당 입당 포기를 환영했지만,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을 맡았던 윤보선 씨는 김대중 씨의 탈당이 성급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신군부에 장악된 언론은 양 김씨의 갈등을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보도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민주화 세력 내부의 갈등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보고, 양 계파의 싸움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5. 학원민주화에서 사회민주화로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4월까지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단계적 투쟁론이 우세한 가운데,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 이어진다. 각 학교는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나 ‘학생회부활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중적 논의를 확산하고 이후 학원민주화와 학생활동의 자율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4월이 되자, 12·12 쿠데타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신군부가 노골적으로 집권을 위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최규하 정부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승인한 것으로 보였고, 국회 역시 신군부를 제어할 힘을 모아내지 못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전면적 투쟁론이 강해지며, 학생운동이 나서서 비상계엄을 철폐하고 민주화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1)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

김대중 씨와 함께 복권된 사람들 중에는 대학생 373명이 있었다. 감옥살이 후 청년단체 언저리를 기웃거리던 학준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학준은 ‘철저한 탄압의 시기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소수정예주의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하며, ‘평범한 학생들 그들 자신이 이제 스스로의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싸워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자신이 학원에서 해내야 할’ 역할이며, 따라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선배로서의 복학이란 귀환이 아니라 출정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작가 김인숙 본인을 연상시키는 혜신은 복학한 학준이 만나기 시작한 새로운 후배들 중 하나다. 혜신은 ‘노동자의 쥐꼬리 월급’에 분노하지만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어 먹는 자기 식성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소위 운동을 한다는 아이들의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문화적 식민주의’에 분노하는 의미에서 ‘타임지를 찢어버리기 위해 차비를 털어 타임지를 사기도 하는’ 모순적인 학생이었다. 혜신은 학준과 교류하면서 ‘모순덩어리 이 더러운 세상을 이겨내는 아주 강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시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학준의 제안에 따라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2·29 복권조치로 학생운동에 재편입된 복학생 일부 그룹, 10·26 이후 운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개인주의적’ 학생들(이전에 정치서클 활동은 하지 않았던 학생들. 이후 총학생회장이 되는 대현도 그 중 하나다), 10·26 이전에는 현장준비론의 경향을 보였던 학생 일부가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에 결합한다.

학준은 학원민주화 활동에 소원한 정치서클 활동가들도 만난다. 학준은 윤익과 서클 후배들에게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의 의미를 설명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한다. 그는 정세가 변화한 만큼, 학생운동의 형태도 달라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윤익의 친구들은 여전히 학원민주화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학준) 우리 운동은 하루 이틀로 끝날 문제는 아니야. 학생운동은 자기의 튼튼한 기반이 필요해. 소수정예가 아니란 말이다. 튼튼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만 자기의 목표를 이루어 낸다는 거야. 대중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소수정예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어. 우리는 흔히 계란으로 묘사가 되곤 했지. 하지만 이젠 달라. 계란과 바위의 싸움이 아니라 바위와 바위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정예활동가가 만들어지느냐가 아니라 그 정예활동가들에게 얼마만큼의 대중들이 결집되느냐야. 학원이 탄탄해져야지. 그러면 그 탄탄한 힘으로 이제는 바위와 바위의 싸움이 아니라 바위와 계란의 싸움, 즉 저들이 계란이 되는거야.
(기태) 계란과 바위의 예를 드셨지만, 우리가 바위가 된다는 것은 학원이 바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힘이 그만큼 단단해져야한다는 걸로 생각합니다. 물론 학생운동이 학원활동을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가장 결정적인 투쟁에서 투쟁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힘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건 소시민적인 학생대중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1권 286~287쪽.)

윤익과 그의 동료들은 거리를 두었지만,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의 활동은 무르익어간다. 혜신은 정치학과 김대현을 총학생회장 후보로 미는 참모가 되었다. 각 과의 학생들을 너르게 만나고 모인 참모들은, 일반 학생들이 선거라고 하면 ‘뇌물공세’를 떠올린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사회의 더러운 선거풍토가 학원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총학생회의 의미와 총학생회장의 역할을 대중적으로 인식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총학생회를 만들지 논의하며 혜신은 자신이 ‘현실의 인간으로 이제 태어난다’고 느낀다. 

3월 28일, 김대현은 총투표율 64.2%로 총학생회장에 선출된다. 윤익도 학원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총학생회가 부활했다는 소식에 알 수 없는 감동에 휩싸인다. 광장에서는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가 울려퍼진다. 학생들은 환호하며 “총학생회는 우리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외친다.
3월 내내 총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운동에 집중해온 학생운동은 4월 들어 본격적으로 학원민주화운동을 시작한다. 세종대, 경희대, 조선대에서는 이미 3월 중순부터 학원민주화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학원민주화투쟁의 주요이슈는 학도호국단 폐지와 직선제 총학생회의 부활, 학칙의 비민주적 조항개정, 학생활동과 학내언론의 자율화 보장, 정보원의 학원사찰과 학내출입 금지, 학원의 족벌운영 반대 및 재단부조리 척결, 어용교수 퇴진 및 지도교수제 폐지, 학교시설 개선, 병영집체훈련 등 군사교육 철폐가 있었다. 
 

2) 1980년 초 노동운동의 고양

한편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동현장에서도 유화적 상황이 전개된다. 1970년대 내내 노동기본권이 억압되어 있었으며,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성장률 둔화와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노동자들의 삶은 궁핍해져 있었다. 10·26 직후 잠시 눈치를 살피던 노동자들은 1980년대 초가 되자 집단적인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25%에서 50%까지 높은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이 전개됐다. 미조직 노동자들은 각자의 사업장에서 더 과격한 집단행동으로 나아갔다. 1980년대 초에는 파업, 농성, 점거와 같은 노동쟁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요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4월 21일부터 나흘간에 걸친 사북항쟁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광업 자체가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던 데다가, 경기침체로 사북광산의 노동자들이 생활고를 겪었다. 노동자들은 40% 임금 인상을 내걸었는데, 어용노동조합 지부장 이재기가 광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회사와 20% 임금인상을 합의하고 만다. 격분한 조합원들이 지부장 사퇴와 40%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노조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다. 여기에 경찰이 개입하여 농성 중인 광부들을 연행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경찰이 이재기 지부장을 외부로 피신시키자, 분노한 광부들은 사북지서를 점거하고 사북리를 완전히 장악했다. 광부들과 부인들까지 합세하여 3,000명에 이르는 수가 농성에 참여했다. 지부장의 부인이 인질로 잡혀 구타를 당했고, 경찰병력으로도 광부들의 농성을 해산할 수 없었다. 결국 광산노조 위원장의 중재로 광부들과 회사, 당국은 약간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달성하는 방식으로 합의했다. 

사북항쟁은 뒤늦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소설 속에서도 3~4월을 전후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조직된다. 사북항쟁 이후에는 종훈이 가르치던 야학노동자의 80% 이상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움을 시작했다. 그런데 종훈은 오히려 회의감에 젖어든다. 종훈이 보기에 ‘이 국면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과거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종훈은 그저 싸우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노동자들은 종훈의 경고를 무시했다.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동료 교사는 이런 상황이 야학 교사들의 ‘본질적인 한계’라고 자조했다. 현장 밖에 있는 야학 교사들이 현장 속의 노동자들을 지도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종훈은 지식인의 역할이 꼭 ‘지도’는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학습지도, 사상교육, 경험의 객관화를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하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자기 역할을 변화시켜나가면서 건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이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는 무력했다. ‘야학교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선배들이 일선에서 손을 떼면 갑작스레 무력한 지식인으로 돌아갔던 것’을 떠올린다. 그가 보기에 열 명 중에 여덟은 야학교사 이후에 활동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종훈이 낙담하던 시점에 형사들이 야학교실을 조사하러 나온다. 형사는 ‘우리도 사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지만’, ‘상부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협조를 구한다. 종훈은 ‘우리 교실을 걸고 넘어갈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순순히 교실을 내어준다. 그 모습을 목격한 노동자 학생들은 종훈에게 실망한다. 학생들은 ‘형사들하고 타협’이나 하는 종훈에게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야학 노동자들과 종훈 사이의 갈등이 커진다.
 

3) 신군부의 실권 장악과 YS-DJ의 갈등

드디어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학원사태와 ‘북괴의 위협’을 언급하며 전두환 합수부장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케 한다고 발표한다. 중앙정보부장은 타직을 겸직할 수 없는 직책이었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을 중앙정보부 서리에 임명함으로써 신군부의 실권장악을 기정사실화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정부의 정책방향을 통제할 합법적 권한을 얻었다.

민주화세력의 발빠른 대응이 필요했다. 먼저 신민당은 최규하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비판하며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의 분열을 관조하던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국회 소집을 기피하며 대응을 미뤘다. 

그런데 이때에도 양 김씨의 행동이 갈라졌다. 김영삼 씨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한다 해도 국내외 상황을 고려할 때 민주화에 역행하는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 봤다. 그는 재야와 학생들의 시위가 커지면 오히려 신군부의 영향력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반면 김대중 씨를 비롯한 재야는 유신세력이 여전히 반역사적, 반민주적 흉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파수병이 되어 이들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4월 말 김대중 씨는 ‘민주화추진 전국민운동’을 제안하며, 민주화운동 세력을 다시 한 번 결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윤보선, 함석헌 씨는 김대중 씨의 제안을 선거유세로밖에 볼 수 없다며 국민연합의 참여에 반대했다. 

결국, 양 김씨의 분열이 점차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신민당 내부에서 김대중계 인사들을 징계하면서 출당이 이뤄졌다), 이러한 분열은 재야 민주화세력의 분열도 재촉했다. 이러한 상황은 1987년 6·29 선언 이후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의 후보단일화 실패, 민중운동의 분열로 재연되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중운동은 김대중 비판적 지지, 후보단일화, 당선 가능한 야당 지지, 민중후보를 통한 후보단일화, 민중후보 완주로 입장이 완전히 갈린다.)
 

4) 서울의 봄, 학생운동 논쟁1: 김영삼과 김대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래간만에 민혁과 학준이 만났다. 민혁은 급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아쉬워하며, 민중운동의 역량 강화를 위해 전체 운동을 지도할 통일된 지도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신민당의 양 김씨가 세력다툼을 하며 군부가 자체정비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김대중을 중심으로 신당을 결성하려는 국민운동파 역시, 민중운동이 강화되지 않고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북항쟁이 민중의 자생적인 투쟁성을 보여준 것처럼, 소시민 위주의 국민대중운동으로만 매몰되지 않고 민중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혁) 제도권 정치인들이야 특별히 고려할 만한 가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판단을 간과해버리는 건 중대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운동의 주체세력일 수 없는 건 분명하더라도 주요 변수로 작용을 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신민당의 경우, 형도 알겠지만 완전히 투쟁지양론으로 빠져버렸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미국이 더 이상 정통성 없는 군부통치를 지지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을 일차로 염두에 두게 되면서 군부와의 심각한 갈등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거죠. 말하자면 환심 사기에 급급한 겁니다. 학생운동의 과열을 우려한다느니, 이러다간 군부 개입의 명분을 주게 된다느니 하는 등의 발언들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입장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들의 판단이 순진무구하다는 데에는 새삼 놀라울 지경이지요.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한국 정권은 미국의 이익을 손상 없이 관철시켜낼 수 있는 강력한 정부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신민당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면 미국도 말썽 많은 군부보다는 신민당을 선택하겠지요. 그러나 미국의 최후의 카드는 언제든지 군부입니다. 군부통치의 재등장 가능성은 항상 강력하게 존재한다는 거죠. 
이런 시점에서 신민당은 군부의 공작에 놀아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세 김씨 선풍이 일고 있지만 제이피는 차치하고라도 와이에스와 디제이의 세력다툼은 군부가 자체정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군부는 십이십이 쿠데타 이후 극우파가 전면 부상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최규하를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실질적인 세력정비를 전면 마감하고 있는 중이라는 건 거의 확실한 판단 같아요. 그런데 신민당이 미국이나 군부의 지지를 기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유아적 사고에 지나지 않죠. 
국민운동파도 마찬가집니다. 디제이가 신민당 입당을 거부하고 나서 국민운동파 일각은 디제이를 중심으로 신당을 창설해보려고 하는 모양인데요. 민중적 운동의 승리가 전제되지 않는 한 국민운동파 일각이 주장하는 대로 제도권 정치의 장악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죠. 결국 제도권의 혼란을 가중시키면서 오히려 군부 신세력에게 유리한 고지를 제공할 뿐이죠. 
(학준) 국민운동파를 한덩어리로 묶어 말해선 곤란하지. 행동주의 노선(국민연합 내부에서 적극적인 가두시위를 통해 유신군부독재 세력의 재집권을 저지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일컬음)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아. 
(민혁) 물론입니다. 그들은 제도권 정치를 지향하는 사람들보다야 훨씬 선명하죠. 그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부독재의 재구축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는 선명한 슬로건을 내세우죠.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중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여 국민대중에게 이러한 음모를 폭로시키고 대중들을 분기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나 같은 경우는 이 입장에 상당히 동조를 하고 있습니다만 일각에서는 이들의 대중에 대한 판단이 계급성을 결여한 판단이라는 점에 대해서 비판을 하더군요. 민중역량이 뒷받침되어지지 않는 소시민 위주의 국민대중이란 그 뚜렷한 존재적 한계 때문에 일정 정도의 역할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 경우에 있어서는 그보다 더 뚜렷한 문제점은 이들의 조직기반이 극히 취약한 데 있다고 봅니다. 거의 아무런 조직력도 갖지 못한 채 이런 입장만을 강조한다는 건 현실성이 없지 않겠습니까? (2권 171~172쪽.)

소설은 김영삼, 신민당의 입장을 일종의 투쟁회피론이라고 보고 김대중, 국민운동파 중 행동주의적 노선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국민운동파가 재야 소시민(즉 소부르주아)이 중심을 이루고 민중운동(즉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 계급운동)과 결합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김대중 씨가 이끄는 국민운동이 결국 신당 창당, 야권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간과하는 셈이다. 김영삼 씨는 1971년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 씨에게 패배한 후 결과에 승복했지만, 김대중 씨는 1980년과 1987년 대선, 두 차례 모두 단일 야당 내에서의 경쟁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이 글이 발표된 게 1987년 2월이므로,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씨가 1980년과 동일한 행태를 반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5) 서울의 봄, 학생운동 논쟁2: 병영집체훈련 거부인가, 전면적 투쟁인가? 

한편 4월 중순에는 특히 병영집체훈련 문제가 주요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맨 처음 병영집체훈련이 예정되어 있던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서강대, 서울대에서 대학생들이 병영집체훈련에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병영집체훈련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 학교의 총학생회가 서로 교류하며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구성된다.

그러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의 결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강력하게 진행되자 신군부는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신군부의 공작에 넘어간 언론은 학생들이 ‘안보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교내 시위와 농성은 ‘사제간의 도리를 짓밟는 패륜적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사회적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혜신이 있는 총학생회장실에는 학생들을 비난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친다.

학교에서는 이를 중재하기 위해 타협안을 제시해왔다. 총학생회의 일부 간부들은 그럴 때일수록 더욱더 강경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또 다른 간부 일부는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병영집체훈련 폐지와 전체 사회 민주화의 관계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이 작은 문제로 군사당국에 간섭의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혁과 학준은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학준은 학생운동이 병영집체훈련 등 일상투쟁에 매몰되어 있다는 민혁의 비판에 수긍하지만, 일반 학생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훈련 거부운동을 빠르게 정리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준) 몇몇 사람들은 팔십년에 들어오면서 학생운동이 학원민주화에 안주하는 건 패배주의적 모습이라고까지 극단적 비판을 했었지. 하지만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니야. 네가 기대가 크다고 말한 것처럼 학생운동은 지금 어느 운동권보다도 막강한 조직력과 선도적 투쟁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학생운동이 현 국면의 모순을 파헤쳐가면서 전면적 투쟁을 선언하기까지는 학원 내부의 결집력이 우선되어야 돼. 학원민주화는 학생대중을 운동의 전선에 결집시켜 내면서 내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제 몫을 다 해냈다고 봐.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야. 네가 말한 국면의 평가, 특히 군부 동향에 대해선 전적으로 동의해. 군부 움직임에 대해서 가능한 한 세심한 관찰을 하고 있다만 십이십이 이후 새로운 인물이 부상되고 있는 건 분명히 위험한 조짐을 담고 있어. 저들이 겉으로는 민주화 열기를 조장하면서 실질적으로 계엄령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도 모종의 음모가 차근차근히 진행되고 있다는 걸로 보여지고. 대중들은 민주화바람에 넋을 놓고 있지만 그 실상을 폭로해 나가야지. 이제까지 결집된 대중역량을 가지고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해. 
(민혁) 형 말대로라면 가급적 빨리 방향전환이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학준) 그래야겠지. 하지만 고려할 문제가 있어. 방향전환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군부 물리력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측들의 주장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이야. 그건 싸우기도 전에 주저앉기부터 하겠다는 식의 패배주의적 발상만은 아니라고 생각되거든. 
(민혁) 글쎄요.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닐까요? (…) 군부 물리력을 능가할 때만이 싸울 수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건 결국 싸우면 질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적 발상에 다름아닌 거예요. 
(민혁) 병영집체훈련 거부가 학원의 주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학준)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 안 해. 아이들은 일상투쟁에 매몰되어 있어. 지금이 병영집체훈련 문제를 가지고 시간을 낭비할 때는 아니야. 하지만 이 문제는 또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일반학생들의 광범위한 지지폭, 그 열기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데에 딜레마가 있지. 방법은 가급적 빨리 정리해내는 게 옳다고 봐. (2권 174~176쪽.)

신군부의 권력 장악이 본격화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익과 서클 동료들 역시 병영집체훈련문제에 대한 논쟁이 과열되면서, ‘계엄령 철폐’ 한 번 제대로 외쳐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안타까워한다. 윤익은 사회민주화 없이는 병영집체훈련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윤익의 동료들도 학원민주화와 사회민주화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이 병영집체훈련만을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화를 위해 가두시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총학생회는 군부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것을 우려하며 가두시위는 자제했다. 총학생회는 물리력으로 대립하면 군부에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탄압의 명분만 줄 뿐이라고 보았다. 

총학생회와 서클의 입장은 팽팽하게 맞섰다. 일반 학생들의 분위기는 병영집체훈련 거부보다는 이미 비상계엄 해제 요구로, 이제는 사회민주화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서울시내 13개 총학생회 회장단이 모여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을 철회하고, ‘민주화투쟁기간’을 설정하기로 결정한다. 당장 가두시위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학내에서 유신잔재세력 퇴진, 계엄 해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농성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5월 2일부터 13일까지 각자의 학교에서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를 비판하는 대대적인 교내시위와 철야농성이 전개된다. 한 대학에서는 횃불 철야시위의 첫 횃불을 대학 총장이 나서 점화하기도 했다. 다른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다. 학생들은 “계엄령을 철폐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고 외친다.
 

6. 서울역 학생시위에서 광주항쟁까지

 

1)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싸우자”

5월 첫째 주 민주화기간에도 비슷한 논쟁이 반복되었다. 학내농성이 진행되는 내내 서클은 더 급진적인 가두시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계엄령을 철폐하라!”, “짱돌을 들자!”, “유신잔당 물러가라!”라고 외치면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0일, 서울과 지방의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다시 한번 모여서 “5월 14일까지 계엄령을 해제해야 한다. 우리들은 당분간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교내시위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정치서클 활동가들은 ‘교내시위’만을 강조하는 총학생회장단의 발표에 분노하며, 총학생회장단의 발표가 학생들의 고조된 열기를 냉각시킨다고 비판했다. 총학생회는 성급한 가두진출이 군사당국에 탄압의 명분을 줄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을 학생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킬 것이라고 반박했다. 

소설 속에서 대현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임무’를 무겁게 느낀다. 연일 이어지는 농성장에서 학생들은 ‘우리는 이제 투쟁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니 총대를 잡아 달라’는 눈빛으로 총학생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학생회의 부활을 준비하던 시점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 앞에서 담담하려고 노력해온 대현이었기에, 뒷걸음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모험적인 투쟁에 맹목적으로 편승할 수는 없었다. 

5월 12일, 다시 한번 26개 대학 총학생회 회장단의 결의가 발표되었다.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교내집회를 원칙으로 하여 가두시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때마침 각 학교의 총학생회에는 긴급한 소식이 전달된다. 오늘(12일) 저녁, 군부가 학내 농성을 정리하기 위해 학원에 진입한다는 소식이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군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총학생회는 군의 학내 진입에 대응하여 비상연락망을 만들고, 민주화기간의 학내 농성을 긴급해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12일 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농성을 철회한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비판이 쇄도한다. 학생들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의를 더 기다릴 수 없었다. 

5월 13일 밤 9시,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앞에 한 학생이 달려 나와 민중가요 ‘흔들리지 않게’를 선창한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계엄령을 철폐하라!”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 사거리로 진격한다. 총학생회를 지도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복학생들과 정치서클 활동가들이 가두시위를 밀고 나온 것이었다. 학생 대열이 종로2가로 진출하자 경찰이 출동하기 시작했다. 데모 대열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종로1가, 서린호텔, 동아일보사 앞을 거쳐 무교동, 광교로 진출한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기 시작한다. 학생뿐만 아니라 취재를 하던 기자들까지 경찰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한다.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학생들이 계속해서 몰려나왔다. 

13일 밤, 총학생회장단은 대중적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총학생회장단은 “우리의 평화적 교내시위는 끝났다.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싸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밤샘 토론 끝에 대현은 새벽 첫차를 타고 광화문으로 향한다. 대현은 그동안 가두투쟁을 요구하던 학생대중의 성숙한 의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대현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학생회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14일, 거리로 달려 나온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쟁취하자!”고 외쳤다. 윤익은 감격에 차올랐다. 거리로 가득 메운 학생 수가 십만은 족히 되어 보였다. 우리는 이만큼이나 커져 있었다고, 오늘의 가두 진출은 그저 총학생회가 갑자기 입장을 바꿨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윤익은 생각했다. 가두진출을 결정하기까지의 숱한 논쟁 속에서 십만의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한 것이다. 

그런데 길가에 서서 시위대열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이 “겁먹고 두려움에 찬 시선들이었다. 어쩌다가 시위대열과 눈이 마주치기라고 하면 슬몃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고 윤익의 기세가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윤익은 “자부심에 차 구호를 외쳤고 오늘은 냉담한 시민들의 반응도 내일은 달라져 가리라 믿었다.” 그는 더 크게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계엄령을 철폐하라고 외쳤다.
 

2) 5월 14일 학생 가두시위와 한국노총 농성 해산  

이때 학생대열은 농성장으로 변한 한국노총 대회장을 지났다. 한국노총은 노동3권이 부당하게 규제되어 왔으며, 국회의 헌법개정심의위원회마저도 새 헌법에서 노동기본권을 유보하려 한다며 이를 규탄하는 전국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 때 민주노조 지도부와 조합원들은 한국노총 어용노조 간부들의 즉각 사퇴와 각 정당대표의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전국궐기대회의 단상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향해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소리가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선진노동자’이고, ‘노동운동가’였던 민주노조 지도부와 조합원들은 학생들의 요구에 농성을 해산시켜버렸다. 시민들의 싸늘한 반응에는 개의치 않았던 윤익도 선진노동자들의 외면에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1980년대 내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민주노조 조합원과 지도부조차 학생들의 동참 요구를 거절하고 해산해버린 것이, 1970년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기 때문이다. 

소설 속 영이는 노동자로서 야학에서 공부하며 노조활동을 펼쳤고 이 농성에 참여했는데, 지도부의 해산 결정에 발을 동동 구른다. 영이는 학생대오를 떠나보내며 노동자들이 정치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이는 창가에 달라붙어 그 수천의 가두대열이 빗속을 뚫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우렁찬 소리로 ‘계, 엄, 령, 을, 철, 폐, 하, 라!’ 구호소리가 파고들어왔다. 미칠 것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영이는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쳤다. 그들은 노총회관 바로 앞에 몰려들어 한동안 연좌를 하기도 했다.
노, 동, 3, 권, 보, 장, 하, 라!
노동 3권 보장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야학 선생님들이 대학생이어선지는 모르지만 영이는 대학생들이 자신들 노동자들의 따뜻한 친구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아아, 정말 뭐가 될 것 같아…… 영이는 터질 듯한 설레임을 담고 선희 언니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선희 언니는 보이지 않았고 창가마다 달라붙은 농성노동자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갑시다! 우리도 나가서 같이 싸웁시다!”
어떤 남자의 우렁찬 소리였다. 그는 벌써 뛰어나갈 태세였고 몇몇이 우루루 그를 따르려고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나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자, 흥분하지 맙시다!”
그들을 가로막는 사람은 어제부터 줄곧 농성을 주도해 오던 사람이었다. 
“이 안에만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같이 싸웁시다. 대학생들도 그걸 원하고 있쟎습니까?”
“성급히 행동하지 말고 차근차근 판단을 해 봅시다!”
“왜 그러십니까?”
그 사이에도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노동3권 보장하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그 소리는 함성이었다. 영이는 조바심이 일어 자꾸만 선희 언니를 찾았다. 나가야 돼. 여기만 있는다고 뭐가 돼? 학생들은 우리들 친군데…… 같이 어깨를 걸고 싸워야 한단 말이야. 
그러나 농성 지도자의 의견은 영 딴판이었다. 
“우리는 기본권 확보를 위해 어제부터 지금까지 불굴의 투지로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냉철히 판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기본권 확보라는 문제는 노사간의 문제가 아니쟎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파업까지 감행해 가면서 농성을 계속해 간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결코 유리한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학생데모와 합세를 한다는 것은 현재의 사회여론을 고려해 볼 때 우리들에게 결코 유리한 결과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긍정적으로 모아지고 있는 여론을 혼탁하게 만들 뿐이라는 겁니다!”  (2권 321~323쪽.)

소설 속 윤익도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곤혹스러워 한다. 

노, 동, 3, 권, 보, 장, 하, 라. 그 구호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우렁찬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이어진 현실 속에서 당혹감으로, 어이없음으로, 허탈함으로 바뀌어야만 했었다. 물론 간혹가다 몇몇은 스크럼 대열 속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기도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따듯한 시선을 보내 주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은 개별적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윤익은 곧 느껴야 했다. 숱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 밖에 있었다.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 사람도, 박수를 쳐 주었던 사람도 쭈삣거리고 있을 뿐, 곧이어 먼저 떠난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쉬움의 시선만 남긴 채. 그러나 그런 와중에는 간혹 불만이 잔뜩 서린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건 분명히 거부의 시선이었다.
넋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러한 외면이라니……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었다. 물론 학교에서 세미나를 진행할 때 노동문제 토론이 되면, 간혹가다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가령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했을 때 학생 출신이 겪게 되는 부적응문제와 더불어 노동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갖는 불신감 같은 것들을 말이다. 대개 그러한 경우 노동자들에게 비치는 학생운동 출신자들은 먹고 살 게 남아서 여유 삼아 하는 운동이라든가 하는 식의 아주 극악한 불신감에서부터 구체적 고민의 근거가 다른 까닭으로 맺어지지 못하는 공감대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도 했다. 그런 것들은 학생운동 출신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데에 자주 인용되는 경험담들이었다. (2권 328쪽.)

그러나 윤익은 민중에 대한 믿음을 철회할 수 없었다. 민주노조 운동을 주도했던 선진노동자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군부 독재세력과 맞서 싸울 사상적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윤익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노총회관을 떠났다.


3) 5월 15일 서울역 회군

15일이 되자 학생들은 다시 한번 스크럼을 짜고 교문에서부터 걸어 나왔다. 전국 곳곳에서 대학생 수십만 명이 모여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윤익이 한강을 건너 서울역 광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아직까지 경찰과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여전히 시민들은 도로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의 관심’을 보냈다. ‘약간씩 놀라움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은근한 기대가 퍼져 오르는’ 표정이었다. 서울역 광장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학생들의 대열이 펼쳐졌다. 시끄러운 환호가 이는 곳에서는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대열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하는 학생들. 비상계엄 해제하라, 민주화대투쟁이라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십만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시국토론회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당연히 민주주의를 맞이”해야 할 시점에 유신 잔당들이 “고스란히 정권의 고위층에 남아 다시 한번 유신체제로 복귀하려는 음흉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더는 계엄령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시민들을 향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워”줄 것을 호소했다. 

시국토론이 두 시간 가량 이어졌다. 윤익은 더는 그저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십만의 힘을 모아 시청, 중앙청, 청와대를 향해 진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학생회장단은 비폭력적 방법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우리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여의도 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시국토론을 이어나가자고 제안했다. 야유가 쏟아졌다. “지도부는 물러가라, 총학생회 물러가라”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시청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학생의 진격과 동시에 전경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대현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서울역 가두시위를 결정한 시점부터 그는 ‘이렇게 거대한 대중의 폭발적 투쟁이 벌어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십만의 학생들이 모인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은 그의 능력을 벗어나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출국해 있었다. 전국의 학생들의 움직임에 신현확 총리는 오전부터 학생시위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신민당은 황급히 「비상계엄 해제 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물리적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며 강경탄압에 반대했다. 신현확 총리는 이미 군의 투입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학생들을 회유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에는 양대선거를 치러 정권을 이양하겠다며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또 모든 정치일정은 국회와 긴밀하게 협의하겠다고 덧붙였다. 

오후 7시, 총학생회장단은 투쟁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일단 시위와 농성을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회군파와 학생대중의 농성을 해산해서는 안 되며 군부대가 있는 용산 방면으로 진격해 군부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는 반회군파가 대립했다. 대현은 유혈사태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총학생회장단은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다. 정부로부터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를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우리들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이상 우리들은 이제 학교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우리의 대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부무장관은 우리의 안전귀가를 확약하였고 우리들이 평화적 시위를 하면서 학교까지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들의 해산은 패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주장을 충분히 전달했으며 그만큼의 성공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제 학교로 되돌아가 오늘의 투쟁을 평가하고 내일의 투쟁을 계획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될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오늘의 우리 투쟁은 성공적이었던 것입니다!”
뭐야? 도대체 뭐라 그러는 소리야? 대표의 말이 끝났어도 그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까 울렸던 환호소리처럼 수런거림과 의아한 물음의 소리들만이 서울역 광장을 어지럽혔다. 순간 어느 학교 대열에선가, 일제히 우-하는 야유가 퍼져나왔다. 싸우자, 싸우자, 그런 구호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
“안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성공이라구요? 우리는 이제 시작을 했을 뿐입니다. 겨우 한 걸음을 나섰을 뿐인데 무슨 성공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학교로 되돌아가버린다면 그건 패배에 다름아닙니다. 이제껏 싸워온 것까지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결집된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건 문교부장관과의 약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회, 장, 단, 은, 물, 러, 가, 라! 또 한 쪽에서 그런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싸우자, 싸, 우, 자! 그들은 연좌를 한 채 마치 대표단을 향해 시위를 벌이는 꼴이 되어 싸, 우, 자,를 그렇게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3권 33~34쪽.)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불만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해산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날의 ‘서울역 회군’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뼈아픈 반성과 전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회군파’는 5·17 쿠데타로 민주화투쟁이 좌절된 후 서울역 회군이 오류였음을 자인했다. “계속 투쟁해야 할 상황에서 후퇴를 결정한 것은 전술상의 과오였다”, 즉 비록 패배가 예견되는 싸움이더라도 운동의 장기적 전망에 비추어 중요성을 가지는 투쟁일 때 궁극적인 승리의 토대를 마련하고 장래의 투쟁에 확실한 전망을 부여할 수 있도록 과감히 투쟁에 나서야 했다고 반성했다. 반면 ‘반회군파’는 회군을 막지 못했던 자신들의 한계를 지적했다. 긴급조치 시대의 비합법적 투쟁에 익숙해 있어 대중투쟁을 주도적으로 이끌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단계적 투쟁론에 공개지도력을 위임함으로써 대중을 지도해 나가지 못했으며, 나아가 5월 13일 이후 전면적 투쟁이 벌어진 후에도 투쟁을 이끌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는 게 반성의 핵심이었다. 어느 측이든 간에 5·15 시위 이후 벌어진 5·17 쿠데타와 광주항쟁은 서울역 회군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을 강제했다.  
 

4) 1980년 5월 17일 

다음날인 16일 학교에서는 어제의 싸움을 평가하는 학생총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달려 나갔을 때 노동자 민중이 함께 호응하지 않았음을 돌아보았다. 민주화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했다. 이제 학생들은 가두투쟁보다는 홍보전, 선전전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제가 가두진출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법이 가장 옳은 방법은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시민들은 아직 우리들의 적극적 동조자가 아닙니다. 그건 왜인가, 저는 어제 계속 그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마도 그 까닭은 시민들이 저 유신잔당들의 세뇌공작에 너무나 깊이 빠져들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시민들에게 우리의 의사가 무엇이고 지금 이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가, 그것을 정확히 선전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전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지금에 있어 가두시위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당분간 가두시위라는 형태를 떠나 홍보전을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요. 유인물을 돌린다든가 성명서를 계속적으로 발표한다든가 하는 등등 말입니다. 우리가 어제의 싸움을 마치고 더 이상 가두진출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면서 끊임없이 대시민선전을 해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많은 학우들의 의견을 이제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학우들이 한결같이 민주쟁취의 의지에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가 달성되는 그날까지 쉼없이 싸워나갈 것이라는 걸 확인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저는 총학생회장으로서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주주의 쟁취의 그날까지 결코 투쟁을 중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3권 78~81쪽.)

저녁에는 이화여대에서 6차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렸다. 광주, 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총학생회장이 참여한 회의였다. 일부 강경파는 여전히 가두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다음날, 5월 17일에도 학교에는 지난 투쟁을 평가하는 모임이 한창이었다. 정치서클은 서클 나름대로 평가엠티를 기획하고 있고, 학생회도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간 대현을 기다리며 엠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교정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군부대를 마주하게 된다.

응? 은미는 멈칫하고 몸을 세웠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교정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는 한떼거리의 무리, 은미는 다시 기절을 할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학생회관 쪽으로 달려가는 저들의 무리, 그 무리의 안에는 분명히 군복들이 있었다. 은미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커진 눈을 닫을 수는 없었다. 그 처진 눈으로 은미는 황급히 학생회관 쪽을 바라보았다. 학생회관 앞에는 이미 몇 대의 자동차들이 마치 바리케이트를 친 듯이 포진해 있었고 그 자동차의 주변에는 군복과 사복들이 어둠 속의 야수들처럼 서 있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계엄군이다! (3권 100쪽.)

그동안 신군부는 충정훈련을 하며 호시탐탐 쿠데타의 기회를 노려왔다. 학생운동이 강경해지던 5월 초부터는 특전부대를 수도권 지역에 배치하고 투입 시기를 살피던 차였다. 마침내 5월 17일, 신군부는 재집권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 해외에 나가 있던 최규하 대통령이 입국하자마자 열린 심야대책회의에서 전두환 합수부장은 비상계엄 확대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동시에 보안사는 전두환의 권력장악 시나리오를 철저하게 준비한다. 1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대한 집단적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전문대학 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회 간부들을 모두 예비검속한다, 2 정치권의 세 김씨를 각각 상이한 명분으로 제거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연행할 병력을 준비한다, 3 국회가 열려 계엄 해제를 결의하지 못하도록 군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한다, 4 사실상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혁명위원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준비하고 알맞은 인물을 선정해둔다, 5 검열거부를 추진한 언론인들을 모두 제거하고 계엄확대조치를 옹호할 수 있도록 중진 언론인들을 확실하게 포섭한다는 것이 그 계획 중 일부였다. 

최규하 정부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비상계엄 확대 선포와 동시에 신군부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군부는 내각과 정치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재야의 주요 인사들까지 체포했다. 이제 권력의 중심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서게 됐다.

날이 밝자 학생회장단들이 모두 검거되었다는 소실이 들려왔다. 윤익의 서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 명은 연락이 안 되고, 다른 한 명은 길에서 연행되었다. 경찰에 많이 노출되었던 윤익도 검거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한편, 15일 ‘서울역 회군’의 결정은 광주에도 전해졌다. 다만 광주지역 학생운동연합회는 5·16 19주기에 유신부활 음모에 맞서 투쟁하는 청년학생의 구국정신을 재확인하기 위해 하루 더 투쟁을 강행했다. 동시에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의 결과를 존중하기 위해 5·16 화형식을 거행한 후 시위를 중단하고 해산했다. 

17일은 평온한 주말이었다. 광주지역 학생들은 19일에 다시 한 번 시국성토대회를 준비했다. 그 때 전남대 총학생회로 다급한 전화가 울려왔다. 이화여대에서 회의하던 학생대표들이 계엄사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광주 학생들은 19일에 원래의 계획대로 모일 수도 있었고, 계획을 포기하고 모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모이기로 결정했다. 이후 광주의 상황은 시시각각 서울로 알려졌다. 

스크럼을 푼 학생들은 광주의 학생과 시민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꼭 광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함께 싸우던 친구, 선배, 후배들이 구속되었고 가혹한 고문에 시달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또 어떤 친구들은 구속을 피해 지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민주화를 위해 자신들의 역할이 아직 많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5) 1980년 봄, 투쟁의 대열에 나섰던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7일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군사당국은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총학생회장 대현은 이화여대에서 회의 중이던 다른 총학생회 회장들과 함께 계엄군에 끌려간다.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연행되자 윤익은 일단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광산에서 경비 일을 시작한다. 그가 목격한 노동자들은 있는 그대로 변혁적이지도 않았고, 때로는 기회주의적이기도 했다. 그는 뒤늦게야 경비로서 자신의 역할이 노동자들의 소요를 사전에 파악하고 진압하는 일임을 알고 자괴감을 느낀다. 그는 도피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군사당국에 검거된다. 

한편 종훈은 민중운동의 주체로서 노동자운동의 역량이 미약하다고 보고 서울의 봄, 학생들의 투쟁을 관조했다. 그러나 5.17 이후 대대적인 탄압 속에서 그가 이어왔던 야학은 문을 닫고, 그 역시 계엄군에게 잡혀 들어간다. 결국 그는 운동의 대열에서 떠난다. 

이런 비극적 결말 속에서도 작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종훈이 떠났지만, 종훈이 가르쳤던 야학 노동자들은 다시 모임을 조직한다. 이미 그들이 만들었던 노동조합은 깡그리 깨진 후다. 영이는 ‘노동자는 위대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음을 후회하며, 더 이상 정치 문제를 대학생들에게만 맡겨두지 않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영이와 동료들은 ‘전진회’를 만들고 민중세상을 위해 투쟁해나갈 것을 결의한다.

윤익은 결국 검거되지만, 윤익의 여자친구였던 은미는 아직 남아있다. 그저 학보사 기자였던 은미는 서울역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윤익이 현장으로 숨어든 후, 은미는 4·19 항쟁의 시작이자 부마항쟁의 태동지인, 윤익의 고향이기도 한 마산으로 내려간다. 이후의 선택은 오롯이 은미의 몫으로 남는다.

학생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학준도 검거되어 다시 옥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혜신이 학준의 옥바라지를 한다. “면회실 밖으로 나와 혜신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초여름의 푸른 하늘이 한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혜신은 크게 심호흡 했다. 그래. 여긴 내 나라 내 땅이야. 우리 나라, 우리 땅이야. 저들의 땅이 아니야, 저들의 나라가 아니야.” 혜신은 학준이 나올 때 쯤이면 우리 모두가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거라 믿는다. 

광주의 소식을 듣고, 광주로 내려간 민혁의 이후는 소설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소설 속에서 매번 그랬듯, 1980년대 운동의 획기적인 전환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월에 우리가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 채 물러섰다고 하여 우리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시청 앞에서 패배를 하던 그 순간에도 우리의 민중들은 이 땅의 구석구석을 갈아엎고 있다. 의심하지 말자! 오늘 우리의 민중들이 마치 허깨비처럼 주눅든 모습으로 보이더라도 우리들은 그들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는 투쟁의 불씨를 보자.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눅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소리 없이 타오르는 불, 그러나 어느 날 그 어느 순간엔 모아두었던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터뜨려 이 모순의 시대를 남김없이 파괴할 것이다.
그러한 민중들이 있는 한 나는 외롭지 않다. 슬프지 않다. 쓰러지지 않는다. // 외롭지 않은 가슴으로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진정 찬란한 목소리로 외치리라. // 민주주의여, 민주주의여, 민중해방이여! 만세!! (3권 334쪽.)
 

7. 1980년대 학생운동의 전환

 
2010년대에 학생운동을 경험한 나에게 『`79~`80』에서 나타난 학생운동의 변화 모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다. 부족한 밑천을 모두 내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솔직한 감상평을 정리해보겠다.

우선,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내내 노동운동이 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노조파괴에 맞서 연대하고 노동자운동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의 다른 문제들에는 조금 덜 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정치 이슈에 대하여 더 그렇게 생각했었다.) 소설 속에서라면, 나는 학생운동의 역할이 민주노조를 도와 한국노총의 어용 지도부를 쫓아내거나 민주노조의 새로운 상급조직을 결성할 수 있게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노동운동 활동가가 되어서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또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1970년대의 학생운동은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학생운동을 할 당시에도 1970년대에는 반유신운동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변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1980년 봄에 학생운동은, 민주화라는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수자인 노동계급과 더 긴밀하게 결합해야 함을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학생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적 자원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끌어왔다. 지금 느낀 바를 가지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것만큼이나 지식인을 지향하는 학생으로서 나의 과제는 무엇인가, 학생운동의 과제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투자했을 것 같다.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운동에 있어서 ‘대중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70년대에 유신독재체제가 경제적 모순을 극대화하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학생들은 소수였다.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 그랬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소수인 것 같다.) 그랬던 학생운동이 ‘학생운동의 대중화’라는 논의를 시작하게 된 것은 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내내 ‘대중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같이 운동하는 동지들이 줄어들수록 더 그랬다. 학생회 선거 시기가 되면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아닌가는 우리가 주장하는 바가 얼마나 적절하고 옳은지에 더하여,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깊이 느꼈다. 1970년대 반유신투쟁을 선도했던 학생운동이 외로웠던 것처럼, 우리도 얼마간 외로운 시간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학생운동 경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꼭 기억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 전두환이 집권하게 된 배경에는 민주화세력의 무능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많은 학생운동가들은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을 더욱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국민’에게 호소하는 김대중보다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민혁, 윤익과 같은 학생들도 있었다. 정말로 우리가 김영삼보다 김대중이 낫다고 볼 수 있는지, 또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국민’에게 호소하는 김대중과 국민운동파의 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강화하는 운동이 어떻게 다른지를 다음 기회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1979년 겨울에서 1980년 사이 학생운동이 만들어 낸 대 전환으로 돌아가 보자. 1980년 당시 현장에서 활동하던 김문수씨는 1987년에 상반기에 발표한 「어느 실천적 지식인의 자기 반성」이라는 수기에서 광주항쟁 직후의 심경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그러나 5·17이 일어나자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사태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온갖 잔인한 광경과 광주시민의 절규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노동운동은 위축되고 정화다 순화 교육이다 얘기가 떠돌면서 회사 측의 태도도 하루 아침에 갑자기 돌변해 노조고 뭐고 이제 끝장이라는 투로 나왔습니다.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이 돼 있어서인지 조직적인 대책이 전혀 서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지부장 사표를 내고 10월 3일자로 해고되었습니다. 그 뒤 잠시 도피했다가 봉천동에다 서점을 차리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나는 다시 노동운동을 철저히 새롭게 정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5·17 그것은 정말 나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고 새로운 전환을 강요한 획기적인 계기였습니다.

김문수 씨처럼, 광주항쟁 직후 강경한 탄압이 이루어지는 동안 학생운동가와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은 이전의 활동방식을 재평가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초반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새롭게 개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광주항쟁의 충격은 학생들에게 한국사회를 보다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19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혁명적 사상이 본격적으로 현실운동에 도입되면서 독특한 학습문화가 자리 잡는다. 대학가의 크고 작은 복사 가게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이 유통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80년대 초반의 비공개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한다.
또 학생들은 서울역 시위에서 동참 요구를 거절했던 한국노총 농성장의 노동자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1970년대의 노동자운동은 이념적으로든 조직적으로든 종교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노동자운동을 자신의 고유한 이념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집단적으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수천 명에서 만 명까지,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이 노동 현장으로 들어간다. 노동 현장으로의 이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학교 내 소그룹 형식의 ‘이전모임’ 또는 ‘현장준비팀’이 구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적인 현장투신은 개별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던 1970년대의 현장투신 경향과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승리, 민중해방을 위해서는 다양한 부문운동을 체계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했다. 학생운동은 노동현장의 선진 활동가들과 함께 지도조직, 즉 지하 전위당 건설을 모색했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 레닌 저작의 보급이 의미한 바였다.) 특히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전위당 건설의 방식을 둘러싸고 다양한 정파로 재편되었다. 

1979~1980년은 데워진 땅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모든 것이 격정적으로 전개되던 시간이었다. 경제위기, 군부의 반동적 성격, 신민당과 재야의 분열과 무능으로 학생운동은 보다 급진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노동자에게 주목하던 학생들은 노동자의 정치의식화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서울의 봄, 거리로 달려 나왔던 학생들은 그들의 시선을 회피한 민주노조 활동가들을 보았다. 스크럼을 풀었을 때 그들은 광주에서 시작된 절규를 들었다. 민주주의와 민중해방이라는 목표는 학생들에게 더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치열한 투쟁과 논쟁 끝에 서울의 봄은 198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 나아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