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봄.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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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 역사로 살펴본
민주당 정치의 위험성

정치위기는 어떻게 경제위기를 증폭하는가?

한지원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며

 
이 글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경제위기를 살펴보며, 더불어민주당의 계보가 각각의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분석한다. 계보는 장면 총리로 대표되던 민주당(1955년) 신파에서 시작해 1970~90년대 야권 김대중계, 2000년대 열린우리당(노무현), 2010년대 야당의 친노·친문으로 이어진다.
1958~61년은 해방 이후 첫 번째 경제위기였다. 미국의 무상원조 감소로 나라 경제가 주저앉았다. 부패한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 기대는 없었다. 4·19혁명을 거쳐 장면 총리 민주당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집권과 동시에 신파(장면 총리)와 구파(윤보선 대통령) 간 내분에 휩싸였고, 8개월 만에 5·16 쿠데타로 무너졌다. 이 대목에서 질문. 과연 민주당은 쿠데타가 없었다면 민주주의를 유지하며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왜 민주당은 그 짧은 시간에 민심을 몽땅 잃어버렸던 것일까?
1979~80년에 두 번째 경제위기가 닥쳤다. 울산의 거대 중공업 설비와 함께 대한민국이 침몰할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유신으로 연명하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하지만 독재가 갔다고 민주가 온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군인이던 전두환 씨가 쿠데타로 군부 정권을 재건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질문! 과연 야권은 당시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왜 경제위기와 군부 쿠데타 위험 앞에서도 야권은 분열로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일까?
1997년, 세 번째 경제위기가 닥쳤다. 이번에는 국가가 아예 부도났다. 재벌의 수익성 악화와 막무가내 해외차입이 문제를 일으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국경제 최악의 위기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딱 10년 만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 10년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고, 선거정치가 재벌에게서 나온 선거자금에 좌지우지되던 시기였다. 민주화와 재벌의 방종(放縱) 사이에는 분명 어떤 관계가 있는 듯 보인다. 자, 여기서 질문. 민주화 이후의 정치는 왜 재벌을 규제하지 못했던 것일까? 민주화 세력은 재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2020년, 조용한 경제위기가 진행 중이다. 대외 충격도 없는데 1% 성장률로 미끄러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기조는 적폐청산이었다. 소득주도성장 역시 이윤주도 성장이란 적폐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수립됐다. 하지만 집권 3년 차를 지나가는 현시점에서 성장과 분배 실적은 낙제점이다. 정부마저 소득주도성장론을 더는 꺼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정치는 작동불능 상태다. 제1야당을 적폐로 찍었으니 국회가 제대로 작동될 리 없다.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인에게 문자폭탄을 날리는 것을 두고 민주주의라고 칭찬한다.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과연 집권세력은 오늘날의 경제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은 민주당의 근본적 한계를 분석하면 찾을 수 있다. 장면 내각의 무능, 1980년의 분열, 민주화 이후 금권정치,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정치는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개혁적 수사로 대중을 동원한다는 점이다. 이 글은 현 집권세력의 계보가 자유주의에 미달한 상태에서 점차 포퓰리즘으로 타락해나갔다고 분석한다. 포퓰리즘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도 볼 수 있듯, 대중의 정념을 극대화해 정치적 갈등을 키우고, 인기영합 정책으로 경제위기를 키운다. 포퓰리즘은 정치위기와 경제위기를 악순환하게 만든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듯, 경제위기에서 정치세력의 민낯이 드러난다. 1961년, 1980년, 1997년, 그리고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통해 현 집권세력의 본질이 나타난다. 긴 글을 읽을 시간이 없는 독자를 위해 미리 결론부터 말해두겠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는 경제위기에 대처할 역량이 없다. 경제는 고사하고 민주주의마저도 퇴보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번 총선에서 “그래도 보수보다는 민주당이 낫다”라는 식의 차선론, 차악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민주당 선택은 최악의 선택일 뿐이다.
 

2. 1959~61년 경제위기와 장면 총리 내각의 무능

 
1960년 7월 장면 정부가 출범했을 당시 한국경제는 이미 침몰하고 있었다. 부패와 경제실패에 실망한 미국이 1958년부터 무상원조를 줄인 탓이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미국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1959년 미국 무상원조는 2년 전보다 40% 감소했다. 설상가상으로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를 관통해 4천여 명의 사상자와 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재집권에만 눈이 멀어 대규모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나라 꼴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아닐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국회는 1960년 6월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7월 29일 총선에서 75%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의 캐치프레이즈는 ‘경제 제일주의‘였다. 시민의 민생 요구가 컸던 데다, 적폐 청산에 부담도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은 경제 문제로 정국을 돌파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출범 반년도 지나지 않아 무능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정치도, 경제도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민주당은 집권과 함께 분열했다. 구파와 신파로 불리는 두 세력이 총리 선출과 각료 자리를 두고 충돌했다. 권력 투쟁에서는 신파가 승리했다. 신파 리더였던 장면 씨가 총리를 차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명한 공무원에 대한 물갈이도 있었는데, 적폐청산인지 낙하산 임명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불만이 폭발한 구파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신민당을 창당했다. 장면 총리은 8개월 동안 내각을 네 번이나 개편할 정도로 불안정하게 국정을 이끌었다.
다음으로, 경제정책에서도 실패가 이어졌다. 민주당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관료지배가 경제를 망친다고 비판해왔다. 관치경제를 철폐하고 자유 시장을 만드는 것이 민주당 경제정책의 골자였다. 장면 총리 내각의 2인자로 불린 김영선 재무부 장관은 이런 기조하에서 두 가지 정책을 수립했다. 하나는 금융시장 자유화였고, 다른 하나는 국토개발이었다. 국토개발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면서 동시에 경제개발의 기초를 다진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두 정책 모두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했다.
 

야심 차게 준비된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은 국회 예산 심의 단계를 넘지 못했다. 구파와 신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예산안 자체가 미국의 원조 증가를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61년 미국 원조는 전해보다 도리어 20%가 줄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만큼 민주당의 무능에도 비판적이었다. 환율은 미국이 원했던 것이니만큼 단기간에 두 배로 상승했다. 하지만, 금리 자유화의 경우 시행되지 못했다. 김영선 장관은 시장 법칙으로 금리를 올리면 국민 저축이 증가해 투자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소득 수준이 높고 경제성장이 오랫동안 이뤄진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서민은 저축할 소득이 없었고, 수익성 낮았던 기업들은 이자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장면 내각의 경제정책은 민심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시민들에게 수년에 걸쳐 진행될 국토개발이나 저축할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나 좋아할 고금리 정책은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부정축재자의 상징이라 할 재벌을 우대한 것도 장면 내각이 대중의 원성을 산 이유였다. 장면 총리는 1961년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를 조직했다. 이 협의회의 목표 중 하나는 정치자금 양성화였다. 서민 체감 경제를 악화시키는 공공요금 인상도 병행했다. 시민들의 원성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1961년 상반기, 한국 경제는 되는 것은 없었지만, 안 되는 것은 더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정부가 방치해뒀던 정치군인들이 5월 중순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당 정부는 끝까지 엉망이었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 직후 수녀원으로 숨었다. 장면 총리가 임명한 수많은 고위 관료 중 적극적으로 나선 인사도 없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를 지켰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전이 최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무기력했을 수도 있다. 민주당의 무능함에 진절머리가 난 국민들은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지식인의 대표 격이라 할 장준하는 오히려 박정희 군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요컨대 1958~61년 경제위기에 민주당은 대안이 되지 못했고, 그 결과 박정희 군부가 대안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리고 1960년대 경제성장 결과만 놓고 보면, 적어도 3선 개헌과 유신으로 나아가기 전까지 박정희 정권은 저개발 국가의 성공 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나았다.


3. 1979~80년 경제위기와 양김의 정세오판

 
1979년 10월 말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됐을 당시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태였다. 이윤율이 1960년대 수준으로 폭락했고, 경상수지 적자는 40억 달러로 전년보다 네 배가 증가했다. 미국의 냉전 우산이 없었다면 당장 국가부도가 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경제위기의 원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무리하게 추진한 중화학공업화였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이 동아시아 미군을 감축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군수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한 것이 중화학공업화 정책이었다. 중화학공업화의 핵심 목표는 수출 이전에 군수물자 수입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동률과 자본집약이 중요하고, 기계공학 같은 오랜 노하우가 필요한 중화학공업은 개발도상국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자본부족과 노동과잉의 한국 경제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2차 오일쇼크와 미국 발 긴축이 시작되자 3고(고금리, 고유가, 고달러)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가 곧바로 고꾸라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야당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960~61년의 분열과 무능을 이때도 반복하고 있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항하는 통합 야당으로 신민당이 창당됐다. 신민당에는 구파의 후예 김영삼 씨와 신파의 후예 김대중 씨가 치열하게 당권을 두고 경쟁하는 가운데, 유진산, 이철승같이 온건 야당을 표방하며 박정희 대통령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세력도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신민당은 세 세력이 연합과 배신을 반복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도 제대로 된 통합력을 만들지 못했다. 심지어 하나회 세력이 군 지도부를 체포한 12·12 사태 이후에도 야당의 분열은 계속됐다. 
야당과 재야 원로들이 야권 단결로 군부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며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의 연합을 주선했다. 하지만, 둘은 정세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될 계획에 집중했다. 김영삼 씨는 김대중 씨의 신민당 입당을 막았고, 전두환 씨의 집권이 눈앞에 있었던 1980년 4월에는 김대중 씨가 김영삼 씨의 입당 요청을 거부했다. 1980년 봄, 양김은 “눈먼 길잡이”가 되어 시민을 천 길 낭떠러지 앞으로 이끌고 있었던 셈이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양김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지지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김영삼, 김대중 씨가 정세를 오판한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 야당의 경제적 문맹이었다. 한국의 경제 상태는 아주 심각했다. 그럼에도 야당은 한가하다고 볼만큼 경제 문제에 안일했다.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에너지 절약, 유류가격 인하, 생필품 가격 통제, 소득세 인하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민생 요구를 나열했을 뿐 경제위기 대책에는 한참 미흡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화학공업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인 상태였다. 미국에서는 볼커 혁명이라 불리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 선포됐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미국의 뒷마당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외채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이런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둘째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었다.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야당 탄압에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야당 인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고위층이 양김을 신뢰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970년대 말 미국의 한국 관련 정보 보고서들은 하나같이 야당 집권 시 반공과 경제성장 양자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욱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냉전이 강화됐다.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레이건의 당선이 유력해짐에 따라 미국 대외정책 역시 냉전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미국에게는 분열되고 실력이 검증되지 못한 야당보다 군부가 더 믿음직한 냉전 파트너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열한 야당과 미국의 간접적 지지를 배경으로 5월 17일 전두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국회를 폐쇄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군대를 동원해 유혈진압했다. 김대중 씨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영삼 씨는 다시 자택에 연금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을 따라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시행했고,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구조불황산업 합리화 및 부실기업 정리 정책을 추진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안정화시책을 이어받아, 나름 일관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시작하게 된다.
 

4. 1997년 외환위기와 87년 민주화 이후 금권정치

 
김대중 대통령은 IMF관리체제로 임기를 시작했다. 핵심 경제정책을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의 통제 속에서 추진했다는 점에서 김대중-IMF 공동정부라 부를 수도 있다. 이 기간에 금융시장 규제가 무장해제 됐고, 은행은 해외에 팔려나갔다. 유동성 위기를 겪던 제조업 기업들도 헐값에 해외에 매각됐다. 외국인들은 평가절하된 최상위 수출기업의 주식을 매입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경제가 시작됐다. 한국은 정치적 주권은 있지만 경제적 주권은 없는 나라가 됐다.
국가부도의 원인은 무엇보다 재벌개혁의 실패였다.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재벌들이 사업 확장을 위해 해외에서 조달한 단기 외채였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 재벌 구조조정을 시행했지만, 집권 중반에 이르러 3저 호황과 서울 올림픽 특수에 취해 개혁을 중단했다. 골치 아픈 개혁 없이도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89년 3저 호황이 끝나고, 1990년부터 세계적 경기하강과 금융시장 개방이 시작되면서 개혁되지 못한 재벌은 나라경제를 끝장낼 폭탄으로 돌변했다.
재벌들이 단기 외채까지 써가며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던 것은 수익성에 둔감한 재벌의 속성 탓이었다. 재벌 총수는 투자 수익률에는 둔감하고 기업집단 규모에는 민감하다. 소수 지분만 소유한 채로 순환출자구조와 계열사 경영권으로 거대 기업집단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재벌 가문에게는 수익성에 따라 늘어나는 주식 배당이 아니라, 지배하는 계열사의 총자산이 더 중요하다. 적자가 나도 차입으로 기업집단 규모를 늘리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결과 1990년대 중반 30대 재벌의 핵심 계열사 부채비율은 500~700%에 달했다. 망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던 상황이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임계에 이르러 대마필사(大馬必死)로 뒤집어졌다.
그렇다면 왜 정치권은 3저 호황이 끝난 시점에서도 재벌을 이렇게 방치했을까? 단적으로 말해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함이 그 이유였다. 민주화 운동은 군부를 정치에서 어느 정도 떼어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금권(金權)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군부는 폭력으로 재벌을 통제했다. 반면, 재벌을 통제할 민주적 수단은 1987년 이후에 만들어지지 못했다.
1987년 6월, 노태우 씨는 직선제를 수용해도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앞서 두 번의 역사적 분기점에서 패착을 둔 야권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정세오판 속에 분열했다. 1986년 11월, 1987년 7월 초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김대중 씨는 돌연 입장을 바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김대중 씨는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김영삼 씨의 요구를 거부했고, 10월 중순 통합민주당을 탈당해 11월 초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후 대선에 독자 출마했다. 당연히 김영삼, 김종필 씨도 독자 출마했다. 그리고 노태우 씨가 넉넉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선거정치가 확대됐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 경쟁에는 큰돈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정치구도는 정당의 사상이나 역사적 계보가 아니라 잠재적 대통령 후보들의 경쟁이 중심이었다. 사상과 계보의 빈자리를 선거자금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백억 원, 수천억 원의 선거자금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재벌 총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대선 당시 2천억 원의 선거자금을 썼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오늘날 통화가치와 경제규모로 환산해보면 2조 원이 넘는 액수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도 이보다는 적었지만, 꽤 큰 선거자금을 썼다. 당시 후보들은 수십만 명 규모의 장외 집회를 수시로 열었다. 야당 후보들이 노태우 대통령의 10%만 썼다고 해도 현재 가치로 수천억 원을 선거에 쓴 것이다.
1988년부터 노태우 정권은 규제개혁에 나섰다. 아예 전경련 회장을 위원장으로 한 ‘행정규제완화 민간위원회’도 만들었다. 정권과 재벌은 규제와 정치자금을 대놓고 거래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완화한 대표적 규제는 재벌의 금융진출 관련 규제였다. 금융시장 진입 문턱을 낮춰 하위 재벌들이 금융계열사를 쉽게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단 2년 사이에 빅4(현대, 삼성, 럭키금성, 대우)를 제외한 30대 재벌이 만든 금융계열사는 증권, 투자, 보험 등에 걸쳐 50여 개에 달했다. 재벌들은 이 계열사들을 이용해 투자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1996년 해외 단기 차입금 급증의 원인이었다.
금권 정치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는 1992년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 씨의 통일국민당 창당이었다. 정주영 씨는 정치자금을 퍼주느니 자신이 직접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군부정권 하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민주화 이후 가능해진 것이었다. 통일민주당은 1992년 총선에서 단숨에 제3당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대선에서 정주영 씨는 3당 합당을 통해 여당 후보가 된 김영삼 대통령과 정계은퇴라는 배수의 진을 친 김대중 씨에게 밀려 3등에 그쳤다. 
물론 정주영 씨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재벌의 금권정치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증언에 따르면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이 받은 대선자금은 3천억 원에 달했다. 현재 한국경제 수준으로 보면 현재 가치 1조 원이 넘는 액수다. 현대가 아니어도 정치자금을 댈 재벌들은 줄을 서 있었다. 1997년 대선에서의 금권 개입도 유명했다.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은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자금 제공과 여론 조작을 시도했었다.
금권정치의 한복판에서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재벌개혁보단 오히려 재벌 살리기에 주력했다. 반짝 반도체 호황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1990년대에는 재벌의 수익성이 하락했고, 무역수지도 계속 적자였다. 정부는 경기 활성화를 도모한다며 재벌의 투자를 독려하고 관련 규제들을 완화했다. 외환위기의 도화선 중 하나였던 1994년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 허가가 대표적 사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정부는 재벌의 문어발 확장 수단이었던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을 규제하겠다고 밝혔지만, 이후 재벌의 상호지급보증을 통한 외부 차입은 오히려 더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 이건희는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며 말해, 재벌의 힘이 정치권 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야당 역시 재벌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야당 정치인들도 1990년대 내내 정치자금을 받아왔다. 국정감사에서 비리 의혹 관련 질문을 하지 말라는 청탁이나, 지역의 규제 관련 청탁을 받았다. 한보그룹과 김대중계 정치인들 간의 비리 의혹은 꽤 잘 알려진 스캔들이었다. 한편, 야당이 재벌을 견제하지 못한 것은 야당의 경제 노선과도 관련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노선은 1961년 장면 총리 내각 수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1996년 김대중 대통령이 정계복귀를 선언한 후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장면 총리 내각의 ‘경제제일주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5년 미국에서 출판한 “대중참여경제론”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하지만 핵심내용은 관치경제 철폐와 자유시장 강화였다. 1961년 김영선 장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책에서 관치금융으로 재벌에게 자금이 집중되었고, 더불어 저금리로 인플레이션과 부동산투기가 증가했으니, 금융 자유화로 자금 배분과 금리를 시장에 맡겨야 독점과 투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에서도 확인했듯, 재벌개혁이 전제되지 않는 금융 자유화는 국가부도로 가는 급행열차였다. 야당의 경제노선은 재벌 경제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어설픈 신자유주의 흉내에 불과했다.
이렇게 정부와 정치권이 재벌개혁의 대안이 되지 못하자 IMF가 개혁의 주체로 나섰다. 1997년 12월 국가부도와 함께 경제주권을 IMF가 가져갔다. 1997년 12월부터 3년 8개월 동안 IMF에 의한 개혁이 이뤄졌다. 1961년과 1980년 군부의 역할을 1997년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와 IMF가 맡았다.
 

5. 저성장 시대의 포퓰리즘 정치와 그 계보

 
2017년 문재인 정부는 2% 성장률이 일반화된 시기에 출범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자본투자가 지속해서 감소했고, 심지어 출산율까지 빠르게 하락했다. 자본과 인구가 동시에 감소하면 국민경제가 당연히 마이너스 성장을 피할 수 없다. 이전처럼 요란한 경제위기는 아니지만, 더 치명적인 경제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경제의 저성장은 두 가지 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첫째,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 위기가 배경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바로미터라 할 미국 경제의 이윤율은 2000년대 중반부터 하락하고 있다. 2007년부터는 금융위기, 국가부채 위기, 그리고 최근에는 기업부채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수출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경제는 세계경제 침체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둘째, 중진국 함정이 또 다른 배경이다. 2천 년대 한국경제는 40년 가까이 이어진 선진국 기술모방을 대부분 끝냈다. 하지만 반도체와 같은 극소수 산업을 제외하고는 기술 프런티어로 나서고 있지 못하다. 최근 20년간 한국경제 성장의 핵심동력이었던 중국은 이제 한국을 추격하는 경쟁자가 됐다. 이른바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세계경제의 위기야 어쩔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중진국 함정에 빠진 경제는 한국이 스스로 만든 결과다.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일까? 외환위기 이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외환위기 이후 경제정책은 민주당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를 연장선에서 보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중간에 끼어 있는 형국이고, 민주당 정부가 경제정책의 설계와 시행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앞서 봤듯 IMF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예외로 치면, 쟁점이 되는 것은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금융세계화 주도 성장론이었다. ‘동북아 금융허브론’부터 ‘한미FTA’까지 그는 일관되게 금융세계화를 추진했다. 2천 년대 초반부터 국내 제조업 기업의 해외진출이 많이 증가했고, 기업 해외매각과 외국인의 국내 금융투자도 증가했다. 그리고 이런 결과 국민경제 내부의 자본축적은 제한됐다. 한국의 저성장 이유 중 하나는 이때의 너무 빠른 세계화였다. 참고로 오늘날의 비정규직 규모와 천정부지로 상승한 서울 아파트 가격 역시 이때 형성된 것이었다. 금융세계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자산 시장의 확대를 가져온다. 민주당 정부 10년간의 총론적 변화와 비교해보면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기 변화는 오히려 각론적 변화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는 왜 금융세계화에 그렇게 몰두했을까? 그의 기득권 반대 원칙과 관계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당 경선 과정부터 기득권 세력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기득권 세력은 재벌, 주류 정치인이 장악한 의회, 검찰과 법원 같은 사법기관, 서울대와 강남의 엘리트 등등 다양했다. 대중은 그의 이런 반기득권 원칙에 환호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이런 반기득권 원칙은 동맹을 필요로 했다. 그가 찾은 동맹은 정치에서는 386세대, 경제에서는 초국적 금융이었다. 386세대는 정치적, 경제적 자산이 상당했지만 주류에 진입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기존 기득권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초국적 금융은 지대추구에 혈안이 된 재벌의 대항마였다. 
금융세계화는 경제영역에서의 반기득권 연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 친화적이라 평가받던 관치금융을 철폐하겠다며 당시까지 해외에 넘어가지 않았던 4개 시중은행을 매각했다. 그는 집권과 동시에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충청은행을 신한은행에, 한미은행을 시티은행에, 제일은행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매각했다. 한미FTA 역시 미국 시장에 의한 개혁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었다. 민주당 신파에서부터 이어져 온 관치경제 철폐가 이렇게 김대중 대통령의 IMF관리체제와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FTA체제로 실현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소득주도성장론을 수용한 것도 노무현 대통령의 동기와 비슷하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경제성장을 이윤 주도 체제와 임금(자영업 소득도 포함한다) 주도 체제로 나눈다. 전자가 기득권이 주도하는 성장이라면, 후자는 반기득권이 주도하는 성장이다. 소득주도성장위원회 홍장표 위원장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구조는 원래 임금 주도 성장체제인데, 기득권이 이윤 주도 성장을 추구하다 어려움에 처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적폐청산을 내걸고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러한 반기득권 성장론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반기득권 연합을 해외자본에서 찾았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그것을 노동자 자영업자에게서 찾았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은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에서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다른 글에서 밝힌 바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거나 문재인 정부는 최근에는 소득주도성장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앞서 봤듯 한국의 저성장은 전형적으로 공급 측 생산성 하락에서 발생한 것인데, 이를 소득을 높여 해결하겠다고 나섰으니 무엇하나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반기득권 원칙으로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이다. 평등·자유 같은 보편적 가치나 과학적 이론에 입각한 정책이 아니라, 소외감을 느끼는 대중에게 기득권 또는 가상의 적을 제시한 후 그것을 타도해서 만족을 주는 것이 포퓰리즘 정치의 요체다. 트럼프가 이주노동자와 중국 같은 외부의 적과 월스트리트 기득권을 때리면서 세계화의 피해자인 중하위층 백인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노무현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반기득권, 또는 적폐청산 정치 역시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제도적 개혁보다 대중의 정념을 이용한 반대세력 타도에 몰두하다보니 경제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정치 자체를 무력화한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 정치가 바로 그런 예였다.
 

6. 결론: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경제위기 분기점마다 민주주의 대신 군부나 미국이 사태를 정리했던 것은 한국의 야당 정치세력, 특히 더불어민주당 계보의 무능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반복해서 무능했을까?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민주당의 사상적 한계가 그 원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특히 재산 소유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재산 소유의 자유는 한편에서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규칙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재산 증식을 위한 활동으로 나타난다. 전자가 법치, 후자가 시장이다. 법치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평등한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규칙은 시민이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된 입법부가 정하는 법률이 기준이다. 입법부를 통한 법률 제정과 적용은 일반적으로 의원내각제로 발전했다. 시장의 경우 정치와 달리 규범적 원칙 이전에 생산과 분배에 관한 과학, 즉 경제학을 통해 발전했다. 경제학은 희소한 자원을 어떠한 방법으로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다룬다. 19세기에는 스미스, 리카도의 고전학파, 20세기 전반에는 케인스주의가 나타났다. 20세기 후반에는 양자를 결합한 신고전파종합(새케인스주의)이 주류경제학을 형성한다.
요컨대, 법치를 위한 정치제도와 국민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한 경제학이 자유주의의 요체다. 자유주의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현대로 통칭되는 오늘날 세계를 만들었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집권세력의 계보는 스스로 자유주의 세력이라 칭했음에도 실제로는 그것에 한참 미달했다. 이 점이 그들의 심각한 문제였다.
먼저 법치와 관련해서 현 집권세력은 입법부를 상대화하고,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과 사법기관에 의한 통치를 선호한다. 출범 직후부터 입법이 아니라 검찰에 의한 적폐청산을 추진했고, 심지어 국회의 갈등조차 고소고발로 해결했으니 말이다. 검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청와대의 사법기관 통제를 도모하는 공수처나, 대통령 권력을 손대지 않는 개헌안도 그러한 사례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태도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역사적 계보가 있다는 점에서 뿌리가 깊다.
4·19혁명 이후 집권한 민주당 신파는 흥사단이 주축이었다. 흥사단은 서북출신, 기독교계, 미국 유학파, 미군정 참여 등의 경험을 공유했는데, 사상적으로 보면 철두철미한 친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은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보다도 더 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조차 두 손 들었을 정도로 제멋대로 정책을 추진한 반면, 민주당 신파는 집권 후 곧바로 미국 측 요구를 수용해 환율을 조정하고, 공공요금을 인상했다. 이들은 반공주의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에 뒤지지 않았다. 민주당 신파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 반대 세력을 규합할 때 구파 측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완강하게 거부해 야권 분열을 야기했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맞대결이 이뤄진 조봉암을 비토해 이승만 대통령 재집권을 결과적으로 방치하기도 했다. 법치의 수립보다 반공이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신파의 계승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식 대통령제가 신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80년대 야당의 의원내각제 대안을 무시했고, 1997년 DJP연대의 조건이었던 의원내각제 개헌도 집권 후에 폐기했다. 그런데 군부독재의 유산과 의회정치 과소라는 한국적 조건에서 대통령제 고수는 입법부 중심의 정치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의회 경시가 더욱 심했다. 그는 당정 분리라는 명분으로 정부의 입법부로부터의 자율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행정부 성격을 민의의 정치가 아니라 테크노크라트의 경영관리(management)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의회 경시를 더욱 업그레이드해 아예 팬덤 정치로 국회의원을 조리돌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유주의의 또 다른 핵심인 경제학에서도 민주당 계보는 지속해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경제정책의 특징이 도덕적 수사로 핵심 갈등과 곤란을 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제2공화국의 경제정책은 박정희 정권이 따른 로스토우의 경제개발 이론보다도 뒤떨어진 것이었다. 로스토우는 성장의 최초 축적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는 저개발 국가의 낙후한 정치체제가 이런 희생을 관리할 수 없으므로 선의의 독재자로서 군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성장 초기의 폭력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도 지적했던 바다. 경제성장에서 잉여노동을 축적하기 위한 최초의 도약은 어떤 체계에서든지 구성원 모두의 상당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같은 계급경제에서는 이 희생을 피지배계급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기 위해 극단적 폭력이 동원된다. 제2공화국 민주당 정부는 자본주의적 성장정책을 신봉하면서도, 관치금융 철폐로 축적을 시작할 수 있다는 낭만적 주장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피해갔다. 그리고 결국 진실의 순간이 오자 권력을 군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구조개혁의 곤란함을 아예 미국이나 초국적 금융자본에 위탁한 사례였다. 김대중 정권은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개혁 이론을 수용해 이를 민주화 담론으로 포장했다. 관치금융은 독재, 자유금융은 민주라는 식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금융세계화를 포퓰리즘적 담론으로 포장해 기득권과 반기득권의 대결로 프레이밍했다. 문재인 정권은 기득권과 반기득권의 대결을 재벌개혁과 소득주도성장으로 덮어씌웠다. 하지만 금융세계화도 소득주도성장도 노동자 서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는 무능했을 뿐이다.
이렇게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현 집권세력은 결국에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으로 타락했다. 포퓰리즘은 경제나 정치의 진실과 곤란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회피하고, 자신들이 만든 선과 악의 대결로 정치구도를 단순화한다. 여당과 이들을 지지하는 개혁진영 사회단체들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선거 구도를 ‘적폐회귀 대 적폐청산’으로 만들려고 작전을 짜고 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보았듯이, 그들의 적폐청산은 실은 제왕적 대통령 강화에 불과했고, 그들의 서민 정책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현재의 정부나 정치권은 경제위기에 대처할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1961년, 1980년 같이 군부가 사태를 정리할 수는 없다.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정치군인이 사라진 현재 가능하지도 않다. 1997년처럼 미국이 사태를 정리할 수도 없다. 미국은 자기 코가 석 자다. 또한 월스트리트가 주도하는 금융세계화는 금융위기 이후 몰락 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재의 이 난국을 정리할 수 있을까? 
극심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계속될 경우 새로운 한 가지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경험하진 않았지만 포퓰리즘 정치가 일반화된 나라들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사법부에 의한 정리이다. 사법부에 의한 정리는 검찰, 법원, 헌법재판소 등이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들을 수사해 구속하거나 탄핵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법정치의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는 마이너스 경제성장이 이어지면서 경제위기가 심각했다. 그러나 사회당과 기독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기성 정당들은 부패와 무능, 극단적 갈등으로 위기를 관리하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깨끗한 손”으로 불린 검찰의 대규모 정치비리 수사였다. 2년간 약 1천 명을 구속한 검찰수사로 사회당과 기독민주당이 몰락했다. 그런데 검찰과 법원이 청소한 정치를 대안세력이 아니라 금권과 스포츠로 무장한 베를루스코니의 ‘전진 이탈리아’가 장악했다.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 베를루스코니는 구조개혁을 미루며 인기영합 정책을 2천 년대 내내 이어갔다. 그리고 2010년대 이탈리아 경제는 세계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2010년대 브라질 역시 사법정치의 사례다. 자원 가격 상승 덕에 2천 년대 내내 경제 사정이 좋았던 브라질은 세계금융위기 이후 직격탄을 맞았다. 룰라에 이어 호세프가 대통령에 두 차례 당선됐지만, 경제침체로 민심 이반이 늘었다. 2016년 룰라가 재집권을 위해 정치활동을 재개하자 검찰은 정치인 부패수사를 시작해 그를 여러 비리혐의로 기소했다. 호세프 대통령은 룰라 비리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고, 회계법원에서 재정회계법 위반을 판결 받았으며, 결국 연방대법원을 거쳐 상원에서 탄핵됐다.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탄핵의 배후 테메르 부통령은 검찰의 수사를 받다 퇴임 후 구속됐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2019년 극우 성향의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검찰은 또다시 보우소나루의 아들을 횡령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검찰과 법원이 룰라를 구속하기 위해 공모한 혐의가 폭로되기도 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 위에서 검찰과 법원이 정치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혼란 속에서 브라질 경제는 2019년에도 침체를 이어가고 있다.
위의 사례들이 보여주는 바는 검찰과 법원이 정치를 통제한다고 경제가 살아나거나, 더 나은 민주주의가 오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위 사례들은 오히려 사법이 정치를 마비시켜, 더욱 포퓰리즘 친화적 경제정책이 쏟아지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사법 정치체제는 민주정보다는 군주정에 더 친화적인 것이다. 민주정의 핵심은 시민의 대표자들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기준으로 스스로 통치해 나가는 것이다. 독립적 사법이란 법 집행의 공정성(justice)을 담보할 뿐 정치를 대체하지 못한다. 반면 군주정에서는 입법과 사법이 군주 개인으로 통합된다. 그래서 왕의 뜻이 곧 법이니, 사법이 곧 왕의 정치가 된다. 입법과 정치가 아니라 사법과 행정이 중심인 나라는 아무래도 민주정보다 군주정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다. 사법정치는 민주주의의 몰락이다. 경제위기를 더욱 심화하는 정치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추구하는 바가 사법정치인 것처럼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2년 가까이 검찰을 이용해 사법적 힘으로 적폐청산에 매진했다. 심지어 외교사안인 징용노동자 보상 건도 대법원 판결로 처리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측근들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만약 이전 정부 고위관료들을 구속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청와대 권력남용 수사로 현 집권세력을 끌어내린다면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여당과 야당은 수많은 정치 갈등을 검찰 고발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자칫 브라질처럼 정치인 모두가 검찰과 법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차선이나 차악이 아니라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현 정세에 더불어민주당 지지는 민주주의의 ‘집단자살’로 귀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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