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겨울.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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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어디서 길을 잃었나

『교차성×페미니즘』, 『페미니즘을 퀴어링!』, 『젠더는 해롭다』 서평

김유미 | 페미니즘팀장, 조직국장

1.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논란과 페미니즘의 현주소

 

트랜스젠더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올해 초, 숙명여대에 합격한 신입생 중에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법적 여성으로 성별정정을 했기 때문에 여대 입학에 절차상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숙명여대 재학생 일부가 트랜스젠더를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러한 목소리는 입학처 항의 전화, 학내 게시판 글쓰기, 카카오톡 단체방 개설 등으로 신속하게 조직되었다. 숙명여대뿐 아니라 이화여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에서도 ‘래디컬 페미니즘’ 모임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이 신입생은 두려움을 느껴 입학을 포기했다.
 
올해 2월, 숙명여대 캠퍼스에 트랜스젠더 신입생의 입학을 지지하는 대자보와 반대하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이 사건이 특히 충격을 주었던 것은, ‘여성들만의 안전한 공간’인 여대에 트랜스젠더의 입학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표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란 민주, 진보, 인권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운동의 일부로 받아들여져 왔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라면 여성 외에도 다른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에 반대하고 나선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제도적으로 보장된 해당 신입생의 권리를 부정했으며, 트랜스젠더의 존재나 성별정정 행위에 대한 조롱과 비하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논란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열풍이 촉발된 온라인 공간인 ‘메갈리아’에서는 여성의 권리와 게이·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었다. 논쟁의 결과로 ‘우리는 여성인권 운동을 하려는 것일 뿐 게이·트랜스젠더 같은 다른 성소수자의 인권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워마드’라는 독자적인 온라인 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디지털 성폭력, 낙태죄 등의 이슈에 대응하는 행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즉,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로 가시화한 입장은 이미 수년 전부터 10~20대 한국 여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온 경향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의 두 경향

대다수 기성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트랜스젠더 혐오 세력(트랜스포비아)’으로, ‘삶의 불안정성이 높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성장해, 타자에 대한 관용 없이 자신의 생존만을 우선시하는 청년들’로 이해하는 듯하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논쟁을 오늘날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이 맞닥뜨린 주요한 한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의 평가가 필요하다. 

첫째, 현재 여성학계의 주류적 입장인 포스트페미니즘의 한계다. 최근 몇 년 동안 페미니즘 운동에 유입된 많은 젊은 여성이 자기 운동의 근거를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찾게 된 핵심 이유는, 3세대 페미니즘으로서 포스트페미니즘이 여성 문제의 해결에 무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포스트페미니즘은 다양한 억압이 교차하는 구체적 현실에 맞선 구체적 저항을 강조하지만, 여성억압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이는 일련의 이론적 정의를 거부하는 포스트주의적 입장과도 관련이 있다. 여성이라는 실존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이론적 작업 역시 상대화하는 것이다. 

둘째, 2세대 페미니즘의 주류인 급진주의(래디컬) 페미니즘의 한계다.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부각되었지만, 영미권에서 트랜스 여성의 여성 전용 공간 참여 보장을 둘러싼 갈등은 1970년대까지 역사가 소급되고, 그 양상도 매우 격렬했다. 트랜스젠더 문제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억압의 원인을 남성의 생물학적·심리학적 본질에서 찾고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분리주의 입장을 강화하면서 대두된다. 남성성이 곧 폭력성이라는 등식을 받아들인다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정정을 한 트랜스여성 역시 본질적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끝나지 않은 섹스-젠더 논쟁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면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으로 양분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반대를 표명한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여대는 여성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여성들만의 공간이다. 그런데 작년까지만 해도 남성이었던 사람이 지금은 여성이라면서 여대에 들어오는 것은, 여대의 존재 의미와 여학생들의 권리, 특히 안전을 위협한다. 타고난 성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젠더 또는 트랜스젠더 개념은 문제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여성인 사람만이 여성이다.’

반면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지지하는 이들의 핵심 주장은 ‘성별 이분법’이 가부장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불일치하는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보여주듯이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남성성·여성성 규범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비정상이라 여겨지는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여성에게 여성성을 강요하는 여성 억압과 통한다. 따라서 여성 권리 운동은 성소수자 권리 운동과 함께 가야 한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전용 공간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우려다.’

이러한 논점은 ‘섹스냐 젠더냐’는 오래된 질문의 곤란을 반복하는 듯하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의 기반이 타고난 성별(‘섹스’)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성별이라는 젠더를 부정한다. 반대로 포스트페미니즘은 유동적인 정체성으로서 ‘젠더’를 강조하며 타고난 성별에 따른 본질 따위는 없다고 섹스 개념을 부정한다.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여성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여성억압의 원인과 여성해방 운동의 전략은 무엇인가’라는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번 서평에서는 포스트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이러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가졌는지 알기 위해 양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을 살펴본다. 『교차성×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퀴어링!』은 포스트페미니즘을, 『젠더는 해롭다』는 트랜스젠더 정치학에 비판적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대중서다. 세 권 모두 2018~2019년 사이 국내에 출간되어 이 쟁점에 관심 있는 독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많이 읽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책들을 통해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는 페미니즘의 내용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2. 포스트페미니즘이 여성 문제 해결에 무력한 이유

 

 『교차성×페미니즘』, 중층적 억압의 가시화

1980~90년대 들어 페미니즘은 여성 집단의 동질성보다 여성 내부의 차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를 1960~70년대의 2세대 페미니즘과 구분하여 3세대 페미니즘이라고 부른다. 2세대 페미니즘의 주류적 경향이 급진주의였다면, 3세대 페미니즘은 고정된 본질의 존재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포스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로즈마리 통은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에서 클레어 스나이더를 인용하여 3세대 페미니즘의 두 가지 특징을 이렇게 규정한다. 첫째, 여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개념이 무너지고 “교차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의 페미니즘 설명을 제시한 개인적인 서사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둘째, “종합보다는 복합적인 목소리를, 그리고 이론적 정당화보다는 행동을 수용했다.”
 
교차성x페미니즘
지은이: 한우리 , 김보명 , 나영 , 황주영
출판사: 여이연
발행일: 2018년 08월 20일

그러나 여성이라는 집단의 동질성, 또는 여성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권리에 관한 이론이자 운동인 페미니즘은 어떻게 성립 가능한가?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되기 때문에 3세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즘’이라고도 불린다. 3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교차성 이론, 퀴어 이론이 존재한다. 

『교차성×페미니즘』은 2018년 겨울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진행한 강좌의 내용을 다듬어 출간한 책이다. 한우리, 김보명, 나영, 황주영이라는 네 명의 저자가 교차성 이론의 문제의식을 한국의 독자들에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교차성 이론은 킴벌리 크렌쇼가 1989년, 1991년에 발표한 두 논문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흑인 여성 법학자인 킴벌리 크렌쇼는 인종이나 젠더 하나만 고려하는 ‘단일축 분석틀’로는 놓치게 되는 흑인 여성의 경험을 ‘교차로’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미국의 법학자인 킴벌리 크렌쇼는 1989년, 1991년 발표한 두 논문에서 인종이나 젠더 하나만 고려하는 ‘단일축 분석틀’로는 놓치게 되는 흑인여성의 경험을 ‘교차로’라는 위치를 통해 설명했다. 사진은 2016년 테드 강연자로 교차성 개념을 설명하는 킴벌리 크렌쇼의 모습.

한우리에 따르면, 젠더와 인종, 계급 등의 정체성이 교차한다는 문제의식은 교차성 개념이 등장하기 전인 1960~70년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 과정에도 이미 존재했다.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 계급 여성’의 입장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임신중지의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했지만, 인종차별의 역사 속에서 강제적 불임 수술을 당했던 흑인 여성들의 개입으로 ‘아이를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재생산 권리로 논의가 확대된다. 또한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다면,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유모, 가정부, 세탁부, 비숙련 노동자로 일해야 했던 흑인 여성들에게 자신의 집에서 가족을 위해 요리하고 세탁하는 일은 오히려 ‘기쁨의 노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처럼 교차성 이론은 주변부 여성들이 경험하는 중층적인 억압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김보명은 교차성 이론의 목적이 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어 누가 더 억압받는지를 경쟁하거나, 다양성을 강조하여 차이의 정치학을 중립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보다는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민족, 이주상태, 장애 여부, 시민적 권리와 같은 다양한 억압이 맞물려 작동하는 현실에 맞서, 보다 역동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차성×페미니즘』의 저자들은 교차성의 정치학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넘는 “대안적인 지식체계이자 인식론”이라 말하고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을 하나의 억압된 계급으로 보고 초역사적인 여성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달리, 교차성 페미니즘은 “지금 이곳에서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억압과 차별을 그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관계망 속에서 분석하고 그려내고 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교차성 이론은 “페미니스트 분석의 범주로서의 ‘젠더’와 페미니스트 실천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지속해서 문제화하고 역사화”한다는 면에서 포스트페미니즘의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퀴어링!』, 이분법적 패러다임의 거부

‘퀴어(Queer)’란 이상한, 괴상한, 특이하고 예상 밖인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다. 본래 이성애 규범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한 비방의 목적으로 사용되던 말이지만, 최근에는 규범에서 벗어난 다양한 정체성을 긍정하는 전복적인 의미가 되었다. 『페미니즘을 퀴어링!』은 1990년대 초에 등장한 퀴어 이론의 기본적인 개념·관점과 함께 퀴어 페미니즘의 의미를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인 미미 마리누치는 ‘퀴어링(Queering)’이 “무언가를 복잡하게 만드는 과정”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기존의 철학적 추론이 갖는 안정적인 의미를 붕괴시키는 것이 퀴어 이론의 목적이자 실천이라는 뜻이다. 퀴어 이론 세미나의 기본적인 커리큘럼으로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1권,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이브 세지윅의 『벽장의 인식론』을 들고 있다. 
 
페미니즘을 퀴어링!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 행동
지은이: 미미 마리누치 | 옮긴이: 권유경 , 김은주
출판사: 봄알람 | 발행일: 2018년 06월 18일

책은 본문의 여러 장에 걸쳐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에 관한 범주들이 불완전하며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과학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의 섹스 범주를 전제하지만, 인터섹스의 존재는 성별 범주의 경계가 생각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성별 검사는 계속해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게다가 생물학적으로 지정된 성별에 일치하지 않는 자아 감각을 가진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범주 사이에 존재하는 더 큰 격차를 드러낸다. 

다른 하나의 예는 성적 지향의 구분이다.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를 구분하는 일반적 통념과 달리, 킨제이 보고서는 0부터 6까지의 ‘이성애적-동성애적 평가 척도’를 제시하여 이러한 현상이 상호 배타적이기보다 연속적이고 변동 가능한 것이라 분석했다. 20세기 말~21세기 초를 거치며 섹슈얼리티에 관한 패러다임은 이성애 규범에 따르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일련의 수정을 거쳐 왔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정체성을 표현하는 LGB에 트랜스젠더의 T, 특정한 정체성으로의 규정을 거부하는 퀘스처닝의 Q, 인터섹스의 I, 무성애자의 A, 범성애자의 P 등이 추가된 것이다(LGBTQIAP). 퀴어 이론에 따르면 이와 같은 추가와 수정이 계속 필요하다는 사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더는 구해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패러다임은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렸다. 이원성은 다중성으로 대체되고, 대안의 범위는 무수히 넓어진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제3물결 페미니즘, 퀴어 이론 등 당대의 페미니즘에 관한 다양한 정의를 소개하며, 이러한 경향을 연결하는 하나의 공통점은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통제권을 행사하는 시도라는 우려”라고 설명한다. 즉, 퀴어 이론은 여성성 같은 젠더 범주뿐 아니라 여성 같은 섹스 범주를 포함하여 모든 범주의 실재를 부정한다. 게다가 그런 범주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통제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퀴어 이론이 어떻게 페미니즘과 만날 수 있는가? 

미미 마리누치는 ‘페미니즘’과 ‘퀴어’를 한 쌍으로 묶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자신이 ‘퀴어 페미니즘’이라는 문제적 이름표를 택하는 것은 가야트리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를 따르는 것이라고 밝힌다. 여성이라는 불확실한 범주는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위한 하나의 위치’로서 유효하기 때문에, 언젠가 개념적 변형을 통해 무의미해질 때까지 페미니즘이 지속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페미니즘은 대안인가

『교차성×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퀴어링!』에 서술되듯이, 포스트페미니즘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비판을 통해 탄생했다.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여성을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한 여성운동은 실제로는 일부 집단의 입장을 대변할 가능성이 있다. 그 때문에 여성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 인종, 민족·국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장애 여부 등의 억압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한 초역사적 가부장제라는 분석을 넘어, 여성억압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함께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이 놓인 구체적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역사적 맥락, 다른 억압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동시에 사회변혁운동과의 만남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지만 포스트페미니즘이 문제 설정에 걸맞은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한 차이와 억압은 서로 다른 맥락을 지닌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억압을 두고도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 해법이 달라질 수 있다. 인종에 따른 차이는 차별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성별에 따른 차이는 성적 관계와 재생산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실존하기 때문에 동등한 대우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문제가 남는다. ‘계급’이라고 불리는 범주의 경우, 이를 단순히 빈부격차의 문제로 볼 것인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 관계에 편입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문제로 볼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정치적 기획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운동론의 형성에는 각각의 차이와 억압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를 분석하는 과정이 핵심이며,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해법을 두고 자유주의·급진주의·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등 다양한 입장으로 분화했다. 따라서 ‘다양한 차이와 억압이 교차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특정한 운동적 관점에 미달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페미니즘 운동이 맞설 사회 구조가 무엇인지에 관한 분석이 취약하다. 『교차성×페미니즘』의 저자들은 초역사적 가부장제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구체성(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관계망 속) 속에서 억압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경제적·문화적·역사적 사회 구조란 무엇일까? 포스트페미니즘 입장을 취하는 여러 논자의 글을 참조하면 대부분 가부장제, 자본주의,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개념을 필요에 따라 활용하고 혼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첫 번째 쟁점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체제를 어떻게 규정하고 변혁할 것인가를 두고도 수많은 입장이 경합한다. 맞서야 할 체제가 무엇인지를 규명·합의하지 않는다면, 페미니즘은 구체적인 권력의 작동을 묘사하는 것, 개개인이 주장하는 자기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을 기르는 것,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고발하고 처벌하는 것 등의 문화주의적 실천에 그칠 것이다. 

셋째,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여성의 실존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포스트페미니즘이 취하는 전략의 핵심은 성별 이분법을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보고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의 대상으로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와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로서 여성은 기각된다. 물론 포스트페미니즘 안에도 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배제하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보는 입장과 ‘전략적 본질주의’의 관점에서 여성 또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잠정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뉜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여성 문제를 다양한 억압 중의 하나로 사고할 뿐, 여성억압에 맞서는 독자적인 방식을 개발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결국 포스트페미니즘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넘어서지 못했다. 포스트페미니즘이 여성 문제를 다룰 때 많은 부분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개념이나 운동 방식을 차용한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게다가 여성의 실존을 부정함으로써 성적 차이에 대한 분석, 여성억압에 대한 비판은 더 큰 공백으로 남았다. 이는 “무언가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시도”라는 포스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차성 이론과 퀴어 이론은 이론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지만, ‘이론을 거부하는 이론’에서 스스로 존재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해체할 뿐 해결하지 못한다. 
 

3.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젠더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젠더는 해롭다』, 페미니즘은 젠더에 맞서 싸워 왔다

열다북스는 2017년 말에 만들어져 국내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입장을 대변하는 출판사다. 2014년 출간된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비판한다. 2019년 열다북스가 번역하여 출간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영미권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갖가지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사례를 나열하는 데에 할애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 권리를 둘러싼 하나하나의 쟁점에 집중하기보다는 제프리스가 섹스와 젠더를 다루는 방식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보겠다. 
 
젠더는 해롭다
페미니즘의 눈으로 본 트랜스젠더 정치학
지은이: 쉴라 제프리스 지음 | 옮긴이: 유혜담
출판사: 열다북스 | 발행일: 2019년 09월 20일

『젠더는 해롭다』는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정치 체계를 ‘성 카스트’라고 규정한다. 많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사용했던 ‘성 계급’ 대신 ‘성 카스트’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계급이라는 표현은 “노동 계급에 속한 사람이 부르주아로 계급적 지위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여자도 성 계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배층으로서 남성, 피지배층으로서 여성이라는 분석은 동일하지만 타고난 신분을 자의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면을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성 카스트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트랜스젠더 운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젠더 정체성’ 개념을 부정한다. 이는 한편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과정이 기존 사회가 ‘여성적’이라고 말하는 말투, 몸짓, 외모, 문화를 강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관련이 있다. 제프리스에 따르면 젠더의 본래 개념은 존중해야 할 ‘정체성’이 아니라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잘못된 신념 체계다. 페미니즘은 젠더를 없애기 위해 싸워 왔다. (한 예로, 1970년대 초 영국 교원노조는 학교 교과서에서 성 역할 고정관념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운동이 젠더라는 개념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젠더를 개인이 선택하고 변형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차별이라는 문제를 지운다고 말한다. 이는 포스트페미니즘에 관한 평가와 연결된다. 제프리스는 1990년대에 퀴어 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위세를 떨치며,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문제시했던 남성 지배의 문제를 흐릿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이 시점은 “페미니즘이 여러 방향에서 ‘백래시(반발)’에 맞닥뜨렸던 시점”이다. 책에 따르면, “퀴어 이론은 젠더를 일종의 개성 표현이나 퍼포먼스의 형태로 축소”했으며, “거칠게 말해 학계 페미니즘은 길을 잃었고, 여자의 뒷배가 되어주고 페미니즘적 연구를 장려하는 데 실패”했다. 

책의 서두에, ‘나는 왜 터프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옮긴이의 말은 왜 지금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쉴라 제프리스의 저서를 비롯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열광하는지를 엿볼 수 있도록 한다. 옮긴이 유혜담은 자신이 “나치와 다를 바 없이 여겨지는” 터프가 된 이유는 퀴어 이론의 내용과 운동 방식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학에 입학한 후 접한 3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이 아닌 “다른 소수자를 돌보는 운동”에 가까웠으며, “퀴어 이론서는 한 장 넘기기가 어려울 만큼 까다로웠고 기어이 이해하고 나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3세대 페미니즘이 잠식한 학계는 ‘젠더 이분법’이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자신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조건이 여성을 옭아매는 방식이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다는 것이다. 
 

남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을 지배층으로, 여성을 피지배층으로 규정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 계급’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의 지배계급·피지배계급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쉴라 제프리스는 타고난 계급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 카스트’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지배-피지배 계급에 관한 기본 규정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 계급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하는 사회는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통제하여,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 계급이 소멸하는 사회다. 반면 성 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상정되는 남성은 소멸 또는 해체할 수 있는 인구 집단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카스트라는 비유도 대안적인 것은 아니다.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는 궁극적으로 소멸·해체해야 하며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없애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면, 대체 이 ‘계급투쟁’은 어떤 목표와 전략을 가져야 할까?

1968년부터 1973년 사이의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즘에는 여성억압의 원인을 생물학적 재생산이나 이성애 가족 제도의 역사적 형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들은 기존 사회에 여성이 편입되는 것만으로는 여성해방이 불가능하며, 이성애 관계, 가족 제도, 재생산 과정을 포함하여 사회 전체에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성 계급을 폐지하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에 변혁운동으로서의 성격이 필연적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이 되자 남성의 본질에 내재한 폭력성이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지목되기 시작하고, 남성을 배제한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분리주의·문화주의 경향이 중심이 된다. 이 시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성애 관계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성폭력에 주목했다. 또한 성매매, 포르노그라피, 나아가 남성과의 섹스·연애·결혼이 모두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강조하며, 다수 여성을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질과 같은 존재로 묘사했다. 열다북스를 포함하여 최근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1970년대 중반 이후 분리주의·문화주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남성을 변화 불가능한 폭력적 집단으로 보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이성애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남성 배제 전략은 이와 같은 현실을 무시한다. 또한 현존하는 여성과 남성 관계의 대안이 단절뿐이라면, 여성과 남성의 관계맺음 양태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사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성애 관계 속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들에는 ‘폭력의 사후적 고발과 처벌’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개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대안적인 관계, 대안적인 사회의 상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곤란은 ‘성 계급’이라는 불완전한 비유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남성이 폭력의 가해자이자 타도해야 할 지배계급이라면, 페미니스트 여성 주체는 ‘이성애 관계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남성과의 관계를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완전한 배제는 소규모 집단의 문화주의적인 실천이 될 수는 있어도 사회의 보편적 원리로 확장되기 힘들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영향력은 대안의 적합성보다는 분노를 일으키는 능력 덕분이었다. 
 

젠더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날 쉴라 제프리스 부류의 주장이 힘을 얻는 데에는 한편으로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의 난해함과 여성 범주의 해체에 대한 반감, 다른 한편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몰인식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중 후자는 비판할 필요가 있지만, 전자의 문제의식에는 정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사용되던 ‘젠더’ 개념이 페미니즘 이론에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생물학적인 성별을 의미하는 ‘섹스’와 구분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역할 규범을 일컫는 젠더 개념은 “여성은 (육체적 특성 때문에) 공적인 활동에 부적합하다”는 생물학적 결정론·환원론에 대항하기 위해 발전했다. 여성에게서 관찰되는 수동성·의존성 등의 특징은 생물학적으로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라는 것이다. 사실 여성의 동등권을 주장하기 위한 이러한 접근법은 젠더 개념이 사용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9년 출간한 『제2의 성』의 유명한 문장,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처럼 말이다. 

하지만 섹스와 젠더의 구분이 여성의 특성에 관한 논쟁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생물학적 성인 섹스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역할 규범인 젠더의 구분선이 과연 어디인지, 그 둘이 분리 가능한 것인지가 여전히 모호했기 때문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이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젠더 접근법은 과학(자연적인 성적 차이의 존재)을 상대화하고 무시하며, 여성과 남성의 차이란 사회적으로 습득된 임의적인 행동 형태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젠더와 구별되는 섹스란 존재하지 않으며, 섹스 역시 이미 젠더”(주디스 버틀러)라고 섹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최근 들어 ‘젠더 폭력’, ‘젠더 평등’과 같이 젠더 개념을 성별을 대체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이와 같은 포스트페미니즘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페미니즘이 ‘젠더’ 개념을 확장해서 생물학적 성별을 지우는 것에 대한 쉴라 제프리스의 비판은 두 가지 이유로 길을 잃고 만다. 

첫째, 이러한 비판은 결국 페미니즘 운동의 참여 자격을 제한하기 위함이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젠더 중에서도 여성으로 성별을 정정한 이들이 ‘생물학적 여성’에게 끼치는 위험성을 강조한다.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집단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상되지만, 사실 이것은 ‘남성이라는 집단을 어떻게 보느냐’에서 파생되는 문제다. 남성을 여성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폭력적인 지배계급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던 사람’ 역시 배척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특수한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폐쇄적인 정체성 정치로 전락한다.

둘째, 성차별의 생물학적 기반을 인정하고 있지만, 결국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성의 무효화(중립화)’ 전략을 취한다. 『젠더는 해롭다』는 섹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퀴어 이론을 비판하며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억압과 착취를 겪는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여성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부정적인 경험을 묘사하고 그 해법으로 ‘젠더’를 싸워 없애는 것, 즉 여성에게 강요되는 특성과 역할을 거부할 것을 제안한다. 

성별의 차이가 의미 없어지는 사회는 많은 페미니스트의 저작 속에 묘사된다. 대표적으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1970년 『성의 변증법』을 통해 여성억압이 재생산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임신·출산·수유 등)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이러한 생물학적 조건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스톤이 꿈꾸는 이상적 사회는 인공 자궁 등을 활용한 재생산 기술이 자연적인 임신과 출산을 대체하고,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마찬가지로, 분리주의 전략은 성과 재생산에서 여성의 불리한 위치를 극복하는 방법을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서 찾는다.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만든 신조어로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를 뜻하는 ‘4B’ 운동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성적 차이가 실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개인적인 위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은 (파이어스톤의 미래사회 구상과 비교해 봐도) 지나치게 순진하다. 게다가 모든 이성애적 관계를 단절하는 운동 방식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으나, 사회적으로 성과 재생산 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구체화 하는 데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4. 성적 차이, 우리 시대의 주제

 

정체성 정치와 반본질주의·반보편주의

『젠더는 해롭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여성 전용 공간 참여에 반대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의 입장과 이를 둘러싼 갈등이 오늘날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용은 미국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의 역사를 다룬 『트랜스젠더의 역사』에도, 『페미니즘을 퀴어링!』에도 서술되고 있다. 갈등은 2세대 페미니즘 내에 분리주의·문화주의가 대두되던 1970년대에 시작되어, 학계에 퀴어 이론이 등장한 1990년대를 거쳐 성소수자 권리의 법제화가 본격화된 2000년대에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다. 이 축제는 문화주의 페미니스트 실천의 일환으로 1976년에 시작되었다. 행사는 매년 약 일주일 동안 개최되며, 남성의 통제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들만의 해방구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런데 1991년 트랜스여성 낸시 버크홀더가 입장을 거부당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주최 측은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으로 한정하며, 여성들에게는 이 축제 기간만이라도 생물학적 남성들과 분리된 안전한 공간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호소했다. 반면 트랜스젠더 여성의 참여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성별 이분법이 동성 간 성폭력에 개입하는 데 실패하며, 트랜스여성도 여성으로서 축제에 함께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매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의 입장이 충돌하며 갈등이 심화하자 결국 축제는 2015년도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문화주의 페미니스트 실천의 일환으로 1976년에 시작된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는 1991년 트랜스
젠더 여성 낸시 버크홀더의 참가를 거부했다. 주최측은 이 행사에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만 들어
올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은 1970년대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의 모습

이런 갈등 속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은 서로를 비판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유사한 논리와 대응 방식을 보인다. 상대방의 입장이 (여성 또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이자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의 발언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이 본질주의(섹스 본질주의 또는 젠더 본질주의)며, 자신의 입장이 사회 구성주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은 ‘정체성 정치’의 양 편향을 대변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으로 고정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정체성을 수없이 많은 다양성으로 해체한다. 매우 달라 보이는 이 두 경향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반본질주의·반보편주의다. 보편적 과학의 토대, 보편적 개인의 권리라는 문제설정을 상대화하고 소수자 집단의 불안, 위협, 피해를 고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의 집단과 다른 집단의 권리가 충돌하고, 누가 더 약자인지를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논쟁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 속을 돌고 있는 것과 같다. 
 

뤼스 이리가레라는 참조점

서평을 마무리하며, 페미니스트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를 소개하려 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즘의 이론적 궁지를 해결하는 데에 이리가레의 입장이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를 주제로 하는 이리가레의 연구를 참조점으로 삼아, 다시 각각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성적 차이의 생물학적 토대를 부정하고, 차이를 무수히 많은 정체성으로 쪼갠다. 성적 차이라는 문제는 해체되지만 해결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리가레에 따르면, 생물학적 설명을 일절 거부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착취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 생물학에 기초하여 여성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리가레는 ‘서로 다른 두 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유성생식을 하는 인간 종의 지속과 재생산을 위한 현존하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성이 없는 사회란 SF소설에서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현실의 인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계급이나 종교, 민족과 같은 차이와 비교했을 때, 성적 차이는 중립화되거나 담론으로 취급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간학적 차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학계의 주류적 입장인 포스트페미니즘은 성적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간주함으로써 심각한 이론적·실천적 결함을 내포한다. 

포스트페미니즘과 달리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적 차이가 여성 억압의 핵심 요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해법으로 남성을 공동체에서 배척하거나 강하게 규제하고,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관습을 거부하고(‘탈코르셋’) 성과 재생산에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여(‘4B’) 성적 차이를 소멸시키는 방식을 지향한다. 여성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성적 차이의 ‘무효화’를 지향하는 셈이다.

서양 철학을 비롯한 다수 문명에서 남성이 보편적 인간, 정치적 주체의 자리를 독점하고, 여성은 여성의 육체적 특성과 함께 동물적 타자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여성이 보편적 인간, 정치적 주체의 자리에 편입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리가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미 확립된 남성적 주체성 모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와 동등해지는 것은 여성의 곤란을 해결하지 못한다. 여성의 고유성, 예를 들면 임신과 출산을 인간성의 실현에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존의 통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도 여전히 ‘2등 시민’의 지위를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이리가레는 인간성의 모델에 성적 차이, 즉 여성과 남성이라는 표상을 기입할 것을 주장한다. 나아가 중성적 개인의 권리로 포괄되지 않는 여성의 고유한 권리로서 ‘성욕’과 ‘모성’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이는 성폭력, 낙태죄 등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육체를 통제하는 관행’을 비판하고, 여성이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온전히 소유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안하는 것이다. 

사실 문화주의·분리주의적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전략은 남성 중심 사회로의 편입이라기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역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기존 사회 질서가 남성만을 유의미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다면, 이들은 ‘오직 여성만이’ 유의미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성적 차이는 남성의 입장을 철저히 묵살함으로써 ‘무효화’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메갈리아의 시작이 남성들의 여성혐오적 언행을 그대로 돌려주는 ‘미러링’ 실천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남성의 소멸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이러한 전략은 보편적인 사회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성이 그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문명화된 관계 양식의 발명, 이리가레의 표현에 따르면 ‘성적 차이의 윤리’일 것이다. 
 

성적 차이를 사유하자

사실 성적 차이에 관한 이리가레의 철학적인 작업은 이렇게 짧은 해설을 통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리가레에 관해 다룰 때 자주 제기되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이리가레가 모성과 같은 ‘여성성’을 긍정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는 공감, 책임, 친밀성, 이타성 등의 윤리적 태도를 (임신·출산·양육 등의 모성 경험과 연결되는) ‘여성의 고유한 특성’으로 보고 긍정하려 했던 이들이 존재한다. 이리가레는 종종 이들과 함께 ‘차이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데 이것은 이리가레에 대한 대표적인 오독이다.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의 고유성은 기존 사회에서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가치들을 긍정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녀의 관심은 중성적 개인의 권리로 설명되지 않는 여성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정식화하는 것, 그리고 여성의 육체에 대한 (남성중심적·여성혐오적이지 않은) 고유한 상징을 만드는 것에 있다. 예를 들면 이리가레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기도 하는 ‘두 입술’이라는 비유를 통해 여성의 욕망과 발화(말하기)를 동시에 표현한다. 

두 번째 질문은 성적 차이의 자연적 기초를 강조하는 입장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페미니즘이 주류인 여성학계의 분위기에서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에 관한 이론화는 철 지난 ‘본질주의’로 매도되고 무시되기 쉽다. 특히 성소수자의 권리를 긍정하기 위해서 ‘성별 이분법’이나 ‘성적 차이에 생물학적 기반이 있다’는 명제는 반드시 비판되어야 할 무언가로 설정된다. 

그러나 성적 차이의 생물학적 토대를 인정하는 것은 일부 종교인들처럼 ‘신이 여자와 남자를 창조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동성애는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죄악’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여성에게 임신·출산의 역량이 있다는 것이 (신이 여자에게 임신·출산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의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또는 (섹스 행위는 종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피임이나 임신중지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부정한 행위’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는 ‘종’이 유성생식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개별적 인간 주체의 동성애적 욕망·실천, 트랜스젠더의 의료적·제도적 성별 정정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쉴라 제프리스를 포함하여 아직 많은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비판이 필요하다.)

이리가레는 철학적으로 탐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차이로서 ‘성적 차이’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다른 차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리가레는 성적 차이가 어느 하나로 일반화할 수 없는 고유성, 독자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여러 차이 관계들의 기본 모형일 수 있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관계를 발명하는 ‘성적 차이의 윤리’가 여타의 차이 관계들을 풀어갈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성적 차이의 윤리』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각 시대는 사유해야 할 하나의 주제를 갖고 있다. 성적 차이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주제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사유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을 주제.” 포스트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이의 논쟁은 우리 시대가 여전히 성적 차이를 ‘철저히 사유’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적 차이에 관한 이리가레의 철학적 사유는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던졌던 ‘여성은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인간은 남성인가?’라는 질문으로 뒤집는다. 인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에겐 다시 수많은 질문이 남는다. 성적 차이의 생물학적 토대를 인정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맞서 싸웠던 생물학적 결정론·환원론과 같은가? 다르게 말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우리는 성적 차이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가? 또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 남성의 권리를 부정해야 하는가? 성적 차이와 다른 많은 차이는 어떤 측면에서 연결되고 어떤 측면에서 다른가?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 시대의 주제’로 진지하게 마주할 때, 페미니즘은 비로소 잃어버렸던 길을 찾고 여성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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