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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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7-8.27호

자본주의의 시기구분-2

기술, 제도, 그리고 생산관계

G.Dumenil, D.Levy |
4. 생산관계, 계급, 지배

기술과 분배의 변화 과정과 상이한 제도적 틀의 연속적 변화는 자본주의의 시대구분에 사실상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것은 다른 접근방법들에 대해 이러한 분석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제공해 주는 3장뿐만 아니라, 1장이나 2장의 분석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분석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번 장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서두에서는 생산관계, 생산양식,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과 『공산당선언』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 원리들을 상기시킨다(4장 1절).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러한 분석 틀을 20세기에 적용한다. 우리는 19세기 후반 이후의 자본주의의 진화가 이전에 경영 자본주의의 출현이라고 이론화되어온 생산관계와 계급 유형의 점진적인 진화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4장 2절).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화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여전히 적합하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내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포스트-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새로운 계급유형, 새로운 계급모순이 존재한다. 우리는 지배계급(들)의 특정 분파가 지배하고, 특정한 타협이 구축되는 거대한 역사적 국면들의 교체를 고려함으로써 이러한 분석을 보충한다.

4.1 역사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틀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분석에 상당한 부분을 바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봉건주의 내에서 출현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의 거의 말해지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들은 봉건적 사회관계들을 점차적으로 뒤엎고 마침내 이전 지배계급의 정치적 장치들을 전복하는 혁명적 계급으로 묘사되었다(지배계급 자체와 국가의 변형이라는 오랜 과정 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묘사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의 발생에 대한 묘사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본주의는 사회유형을 단순화시킨다고 말해진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는 단지 두 개의 적대적 계급만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의 사회화를 불러일으키지만, 부르주아지들은 그들이 일깨운 사회적 힘을 통제할 수 없다. 이러한 무능력은 점점 더 커지는 위기로 나타나고,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혁명에 이르게 된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혁명은 한 지배계급에서 다른 지배계급으로 권력이 대체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지도력 아래 계급 없는 사회가 출현함으로써 끝나게 되어 있었다.
역사는 이러한 전망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자본주의가 성숙한 인류사회의 궁극적 단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단순히 연기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계급의 제거를 위한 투쟁은 우리의 의사일정에 남아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역사는 실제로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비슷한 새로운 이행이 진행중이다. 이는 새로운 경영적 지배계급과 함께 자본주의 이후의 질서를 낳을 것이다. 이 테제는 마르크스주의를 반박하려는 다양한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정식화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의 분석의 두 번째 측면, 즉 계급(들), 계급투쟁, 국가에 관한 분석 역시 자본주의의 현재적 변형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각각의 국면에 종별적인 권력 관계의 특수한 표현으로 서로 구별되는 “체제”(regime)들이 형성되어 왔다.
지배계급 내 특정 분파가 헤게모니를 획득할 가능성은 마르크스의 정치적 저작에서 매우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출현한 다양한 체제들의 연속적 변화―왕정복고, 7월 왕정, 공화제―를 귀족(이미 부르주아지가 되었다.), 금융가와 거대 산업가 등과 같은 지배계급의 다양한 분파의 지배나 하나의 전체로서 부르주아 일반의 지배와 연결시켜 분석했다. 프랑스에서 왕정복고나 제국의 형성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진보를 멈출 수 없었다. 중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분석되어야 하는 것은 여전히 이러한 분석 틀 안에서이다.

4.2 경영 자본주의: 새로운 생산관계와 계급유형

19세기 후반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의 몇 가지 양상들은 생산관계의 실질적 변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절은 우선 생산과 자본축적에 영향을 미치며 생산관계와 계급유형의 연속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해석된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유형의 변화가 간략하게 설명된다. (1)화폐와 금융 메커니즘 따라서 거시경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경제적 국가개입. 여기서는 금융과 지배계급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2)교육이나 연구계발과 같은 다른 사회적 과제들. 여기에는 공적 부문의 과학적이고 경영적, 사무적 활동들이 포함된다.
우리는 생산과 축적에서 시작한다. 이것들은 분명히 생산관계와 계급유형을 명확하게 하는 데 결정적이다.
1. 소유와 경영의 분리. 세기의 전환과 함께 출현한 거대 법인기업과 이에 조응하는 금융과 경영층의 분리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권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생산관계의 결정적인 측면에 변형(metamorphosis)이 일어난 것이다. 사적 소유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지만, 기업의 소유와 경영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만들어졌다. “활동적인 자본가”의 기능은 봉급생활 노동자에게 위임되었다.
2. 소유의 사회적 유형.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은 거대 자본가들의 보호 아래 점점 더 금융 기관 내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기관들은 수많은 익명의 유가증권 보유자들의 기금을 관리했다. 위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봉급 생활자들에게 경영이 위임되는 현상이 이러한 금융 기관들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기관들이 결합한 광범위한 일련의 제도들, 거대 자본가와 소규모 증권 보유자들에 대한 그것들의 특정한 관계, 그들의 상층 관리자가 금융이라 이름 붙여진 사회적 실체의 대략적 형세를 규정한다.
3. 임금 생활자들 사이의 위계. 이에 상응하여 임금 생활자들 내부에 몇 개의 분할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 한편으로는 생산직 노동자와, 다른 한편으로는 경영 및 사무직원들 사이의 분할. 생산직 노동자들은 경영 및 사무직원들에 의해 규정되고 통제되는 규칙에 따라 생산하도록 강제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 창조된, 노동자들과 생산수단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넓어졌다.
⒝ 경영층 내부에서도 주도권은 상층 부문의 손에 집중되고, 하층부문은 집행을 맡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자본의 가치증식을 통제하는 소유주의 특권의 한 측면에 영향을 끼치는 생산관계의 추가적인 변화다.
덧붙여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분명하게 이러한 사건들을 예상하였다. 그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 그리고 새로운 소유 형태 속에서 생산수단의 집합적 소유를 향한 예비적인 진일보[부정적 사회화]를 보았다.
우리는 생산관계의 이러한 진화에 새로운 계급유형의 출현을 연결시킬 수 있다. 낡은 자본주의적 틀과 새로운 경영적인 특징에 각각 상응하는 두 개의 계급 모순이 문제이다.
1.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대립:
⒜ 이러한 관점에서는 경영 및 사무 층은(위계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그/녀의 기업의 경영자로서 개인적인 활동적 자본가의 전통적 기능을 맡고 있다.
⒝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는 소규모 유가증권 보유주들은 비록 종속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거대 자본가들의 조건의 몇 가지 측면을 공유한다.
2. 경영층과 “관리되는”(managed) 층(사무직원들과 생산직 노동자들을 가리킨다)이라고 하는 새로운 피지배 계급의 사이의 새로운 대립.
오늘날의 계급 유형의 복잡성은 위의 두 가지 모순의 변증법적인 공존의 표현이다. 어떤 개인은 각각의 모순에서 상위 부문과 하위부문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는 생산현장에서는 집합적 노동자의 부분이면서 경영층에 속한다. 일반 하급 회계원은 자본가의 업무를 수행하지만, 명백하게 “관리되는” 층의 일부분이다. 블루 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사이의 분리는 새로운 피지배계급 가운데에서 사무직원과 생산직 노동자 사이의 구분을 반영하지만, 점차적으로 자신의 적합성을 상실하고 있다. 유가증권의 보유 역시 이러한 경계를 흐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내부에는 새로운 지배계급과 오래된 지배계급들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있다. 양자의 “접점”은 소유와 경영 사이에 존재한다. 이것은 최고 경영자와 이사회의 세계이며, 여기에서 특정한 형태로 경영에 여전히 관여하고 있는 소유주들이 그들에게 종속적인 경영자들과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대면접촉은 소유와 경영이 기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체계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이다.
경영적 전환은 처음에는 기업과 사회적 생산이 수행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화폐와 금융 메커니즘, 따라서 거시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리는 비슷한 진화의 또 다른 표현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러한 거시경제에 대한 관리의 담당자는 내각과 행정 기관 내부에서 활동하는 관료들이다. 이러한 관리는 완전고용이나 물가안정과 같은 실질적 목표와 독립적으로, 두 번째 “경영 혁명”이라 해석될 수 있다.
화폐와 금융 메커니즘에 대한 관리가 어떠한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관리가 왜 자본주의의 진화에서 결정적인―정치적인― 쟁점을 표현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용과 이에 상응하는 화폐의 발행은 자본의 축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윤의 예비적인 저축은 자본축적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기업 내 투자된 자본의 총량―이는 동시에 세 가지 대안적 형태(생산자본, 상품자본, 화폐자본)를 취할 수 있다―은 신용에 의하여 증가될 수 있다. 요컨대, 신용이 자본을 창조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과 신용은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채무 스톡의 가치, 즉 채권자(lenders)의 자본을 감소시킨다.
금융은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관리를 자신의 기본적인 특권의 하나로 간주했다. 국가가 화폐와 금융 메커니즘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금융에게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결정적 측면을 잠식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심지어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한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산업과 기업들 사이에서의 신용 배분이 아니라 단지 신용의 총량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의 정식에 따르자면, 이러한 거시경제에 대한 관리는 길들이기 불가능한 힘을 일깨운 현대 자본주의의 매우 중요한 획득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이와 비슷하게 결정적인 다른 측면들에 대해 더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이나 특히 일본에서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에 대한 자본가들의 태도는 항상 모호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한 나라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있던 최초의 시기동안에는 국가개입이 환영을 받거나, 단순히 참고 견디어졌다.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의 진화의 마지막 특징은 교육, 보건, 치안, 그리고 사회적 관리의 다른 형태들과 관련된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제 메커니즘의 한계를 넘어서 “사회화” 과정이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들은 인류 사회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어오던 것이다. 특정한 제도적 틀은 각각의 생산양식 내에서 규정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것들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였다. 그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현재의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는 단지 여기서 그것들의 자본주의적이면서 경영적인 이중성을 강조할 것이다. ⑴ 이러한 “사회적” 기능이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실행되는 방식은 체계를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을 표현한다. ⑵ 이러한 기능들은 자본주의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사회화의 광범위한 과정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그리고 다소 “민주주의적”이든 “엘리트주의적”이든 그 특징들과 무관하게, 그것들은 우리 사회의 경영적인 변화와 경영 및 사무 층의 과업을 반향 한다. 계급 유형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기능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종별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사업상의 참모(business staffs) 기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경영 자본주의라는 표현의 용법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혹은 보통의 용법) 보다 더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의 이중적 결정[기업과 국가]과 함께 앞에서 살펴본 모든 양상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경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특징들과 새로운 경영적 논리가 특정하게 결합된, 새로운 생산양식을 예견하는 혼성 적인 사회 형태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두 개의 구별되는 사회적 “논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⑴ 이윤율을 최대화하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하는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게임의 법칙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집합적이기는 하지만) 소유 ⑵ 체계의 상당한 적대적인 특징을 넘어 점점 더 많은 협력과 조정을 확보해가면서 사적 소유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아가는, 기업들, 금융 기관들 내부의, 그리고 그 외부에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화.

4.3 지배 계급과 계급 타협

생산관계에 준거를 두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해석에서 분석의 첫 번째 근본적 수준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계급 유형의 변화 사이에는 직접적 대응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좀더 정치적이고 국가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분석의 두 번째 수준이 있는데, 계급유형의 진화는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고찰되어야한다. 그것은 특정한 계급이나 계급 분파의 지도 혹은 지배를 가리키거나 지배 계급(들)의 다양한 구성요소들 내부에서 주어진 타협의 존재를 의미하는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계급 타협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다른 중간 계급들이나 노동자 자체를 포함하는 데까지 더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계급타협은 폭력과 회유를 결합시키면서 계급 권력이 일반적으로 행사되는 형세를 설명해준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들” 내에서, 지도력이나 타협의 교체(succession)와 함께 체제(regimes)도 반드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역사적 분석에서 묘사한 것과 유사한 메커니즘은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체제”라는 개념 자체는 너무 협소하다. 그러므로 거대한 권력 형세(power configuration)나 국면과 같은 더 넓은 개념에 의지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에 미국에서, 그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그러한 세 개의 국면을 확인할 수 있다.
1. 거대 금융가들(모건, 록펠러 등)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세기의 시작과 함께 일어난 소유와 경영 분리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금융과 경영자들의 공존과 전통적 자본가들과의 타협.
2. 대공황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금융의 후퇴(그들의 활동범위가 제한되었다)와 경영층(사적 부문과 공적 부문 모두에서)의 증대된 자율성과 그리고 노동자들과의 타협.
3. 신자유주의 내에서 금융 권력의 재주장, 노동자들과의 타협의 소멸, 기업과 국가 내부에서 경영층의 자율성 감소.
따라서 1장과 2장에서 묘사된 변화가 계급투쟁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결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대립과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 이 양자 모두가 문제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립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 양상에 있어서, 20세기의 자본주의의 경영적인 특징들의 출현과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특정한 내용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는 방식은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20세기 자본주의의 경영적 변화는 사회적 타협을 이끌었던 동일한 사회적 긴장들에 의해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1. 지배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은 노동자들의 운동을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이용했다. 우선 1차 세계전쟁 이전 “진보주의의 시대”에 전통적인 기업의 소유주들은 트러스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보수적 입법(반독점 입법)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더 나은 노동조건과 노동조합의 결성, 생활수준의 개선을 향한 노동자들의 압력에 저항했다. 그 다음에는 거대 법인기업의 소유주들과 경영자들의 중요 부분이 이러한 측면에서 (특히 1차 세계대전 중에, 노동운동의 좀더 급진적인 부분에 대한 진압과 결합되어) 노동자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협은 거대 법인 기업의 지배력이 상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많은 특징들은 이러한 초기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영적 법인 기업의 성장은 동시에 노동운동을 이용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복지국가의 성립에 기여했다.
2. 금융 메커니즘과 거시경제에 대한 집중적인 경영적 통제가 지배계급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부분에 의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인즈주의적 제도들이 본래 완전 고용을 목표로 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제도들은 소유권과 축적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의 본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력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간주된다.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요에 따라 구매되며, 그것이 사용되는 바에 따라 지불된다. 자본가들의 수요와는 관계없이, 노동할 권리 또는 일정한 소득을 향유할 권리를 승인하는 것으로의 진전은 임금노동자들의 “조건”을 변경시킨다. 이러한 조건들은 생산관계의 또 다른 측면을 규정한다. 이와 같은 임금노동의 아주 특수한 진화는 경영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니었지만, 새로운 경영적 사회가 주장되었던 정치적 조건들로부터 나왔으며, 이는 이러한 사회적 획득물의 불안정성을 설명해준다.
3. 세기 전반기의 다른 특징들과 관련지을 때, 경제의 경영적인 변화와 사회적 타협 사이의 수렴이라는 현상은 명백한 것이었다.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들의 발전은 성숙한 경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의 한 가지 표현이다(경영 자본주의 내에서는 교육받은 사람들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결정적이다). 일정한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그것들은 사회적 타협의 일부분으로 노동자들의 조건의 실질적 개선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실상으로서, 이러한 제도들의 발전이 성취된 정치적 환경의 결과다.
우리는 여기서 자본주의 내부에서 경영적인 생산관계가 출현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의 더욱 세부적인 사항들과 계급과 권력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를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전체적인 해석은 다음의 세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1. 현대 자본주의의 진화에 대한 해석에서 핵심 요소는, 생산력의 발전에 더욱 부합하지만 그 안에서 자본가들의 소유권이 대체될 지도 모르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에 대한 자본가들의 반작용이 수행한 중심적인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에 대한 자본가들의 저항은 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⑴ 새로운 거대 법인 기업의 성장에 대항하는 전통적 자본가들의 싸움 속에서. ⑵ 대공황 이후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의 증가하는 개입에 대한 모든 그룹의 자본가들의 광범위한 저항 속에서. ⑶ 신자유주의의 성장 속에서.
2. 그러나 지배계급의 분파들은 또한 정기적으로 거대한 변화의 촉진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인혁명과 경영혁명은 생산력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양립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몇 십 년 동안의 케인즈주의적 타협 속에서 이러한 이행 밑에 놓여 있는 생산관계의 변화가 “편향되기는” 했었지만, 거시경제에 대한 관리와 국가 개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편향은 나중에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수정되었지만, 동일한 긴장과 이해관계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3.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적 타협 내에서 이루어진 경영자들과 봉급생활 계급 사이의 제휴를 침식시키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과 경영자(특히 경영의 상층분파) 사이의 새로운 제휴를 구축하려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의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은 제휴의 전통적인 형태 아래에서는 간단하게 자신들의 지배를 영속화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특권을 가능한 한 보존하고, 마침내 그들을 별다른 고통 없이 새로운 지배계급[경영의 상층분파]과 “통합하도록” 해 줄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싸웠다.
이번 절의 서두에서 상기시켰던 세 가지 “형세들”을 하나씩 고려해 보자. 19세기 후반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의 사회화의 새로운 형태를 필요로 할 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경영은 봉급생활 노동자들에게 위임되었다. 진보주의의 시대 동안에 타협의 초기 형태가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은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공황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역사적으로 특수한 성격을 띤 케인즈주의적 타협과 함께 경영의 특권을 더욱 확대하고, 생산관계의 중요한 새로운 전환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했다. (넓은 의미에서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모든 요소가 문제가 되었다. 거시경제, 합병, 자본의 이동, 경영의 자율성, 복지국가…). 이 시기에 국가의 역할이 상당히 강화되었다.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는 노동자들에 대한 새로운 반격을 위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며, 금융의 권력을 다시 주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우리가 다음 장에서 주장할 것처럼, 금융은 자본주의의 경영적 진화에 큰 굴절을 야기하였으며, 더 나아가 실제로 그것을 멈추게 하였다.

5. 신자유주의가 역사를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장에서는 지난 세기의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와 관련시켜 신자유주의의 함의들을 논의할 것이다. 이 해석은 현대 자본주의의 경영적 특징과 그것의 점진적인 출현을 강조하는데, 이는 최근의 발전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경영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들의 운명은 자본주의의 변화과정, 즉 20세기 초의 법인 및 경영 혁명과 그에 뒤따른 케인즈주의적 타협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성장은 경영 자본주의 이론에 대해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5장 1절). 그러나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이윤율 극대화의 재천명과 함께 자본의 배분에 영향을 끼치는 세 번째 경영 혁명을 위한 조건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5장 2절). 마지막 절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영향, 즉 그것의 “비용과 이득”(costs and benefits)에 대한 논의의 개요를 제시할 것이다(5장 3절).

5.1 신자유주의 대 경영자본주의

경영 자본주의 이론의 부침은 자본주의 자체의 변화를 반영한다. 가장 이른 단계부터 자본주의의 발전은 생산과 조직에 대한 과학의 응용을 촉진했다. 따라서 18세기 이래로 초보적인 경영 자본주의적 해석과 경영 자본주의적 해석이 발전해왔다. 이러한 해석들은 때로는 상당히 유토피아적인 내용과 함께 사회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분명하게 이러한 움직임은 20세기 초반의 경영 혁명에 의해 상당히 강화되었으며, 나중에는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 케인즈주의적 타협에 의하여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것은 케네스 갤브레이스(Kenneth Galbraith)의 매우 유명한 저작과 함께 1960년대와 7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훨씬 이후에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초기의 경영이론에서 경영자들은 계급을 초월한 새로운 형태의 “합리성”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경영 혁명의 초기에 미국에서 특히 그러하였는데, 그 당시 아돌프 벌(Adolf Berle)과 가디너 민쯔(Gardiner Means)는 경영자를 “중립적 기술관료”로 묘사하였다.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시기 동안에 발전된 이론들은 이러한 점에서 (더 모호하기는 하지만)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경영 자본주의는 경기순환을 대체하였으며, 노동자들에게 더 큰 구매력과 사회적 보호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사회주의 국가, 그 중에서도 소련에서 발전된 관점은 실제로 이러한 평가와 일치한다. 그러나 경영자들은 또한 새로운 지배계급이거나 자본가들의 훈련된 대리인일 뿐이라고 묘사되었다. [이들과 달리] 우리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⑴ 경영자들은 계급을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⑵ 그들은 잠재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⑶ 그들은 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된다. ⑷ 그들의 실질적 권력은 그들의 계급 권력이 표현되는 사회적 형세들의 연속적 교체(succession)에 달려 있다.
신자유주의의 상승이 경영자주의에 관한 이론을 소멸시켰는가? 자본주의의 현재적 진행 뱡항의 많은 측면들이 이 이론을 진부한 것으로 만드는 데 분명하게 기여했다. 너무나 많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들이 다시 출현하였다: 금융의 이해를 위한 이윤율 극대화, 이자율 상승, 임금 상승에 대한 통제, 노동자의 종속, 탈규제 등.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 본성은 너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그것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출현을 보여주는 사실들을 은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영 및 사무직원들의 역할이 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도 명백하다. 신자유주의 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관계나 계급 유형의 진화가 경영 자본주의 이전 단계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권력과 관련된 것이다. 즉, 오늘날의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 중 금융의 새로운 헤게모니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에 마주치게 된다. 우리의 사회는 새롭고 강력해진 자본의 지도력 아래 경영적 길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지도력이 중립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앞에서 제안한 것처럼 그것은 그 이전 시기의 국가 개입의 점진적 확대와 노동자들의 성취물과는 거리를 두면서 현재의 진화를 몇 개의 가능한 길 가운데 하나를 따라 거대 법인 기업, 더 일반적으로 “사적” 이해의 보호 아래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화”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5.2 세 번째 경영 혁명? : 경영과 거시경제 이후의 자본 배분

자본주의의 경영적 변화는 몇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첫 번째 혁명은 20세기 초반의 기간 동안 생산조직과 기업 일반에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혁명은 대공황 뒤, 2차 대전 이후에 거시경제의 관리에 도달하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발전을 뒤로 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기업의 경영자들은 사회적 비용과는 상관없이 이윤율 극대화를 그들의 유일한 행동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정책들은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윤율 극대화에는 두 가지 기본적 측면들이 있다. 기업의 조직과 기술이 첫 번째 요소를 규정하고, 산업과 기업들 사이에서의 자본의 배분이 두 번째 요소를 규정한다. 두 번째 측면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자금을 모으는 능력(주식발행과 대출) 뿐만 아니라 미래의 전망에 대한 평가와 현재의 상대적 수익성에 대한 결정이다. 거시경제처럼 이러한 일은 개별적인 비금융 법인기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20세기 초반의 경영 혁명 동안에 금융의 중심적 역할은 보존되었다.
명백하게 신자유주의 내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으며 경영 혁명은 오래 전에 금융에 영향을 미쳤다. 금융가들은 세기의 전환기에 근대 금융이 출현했던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사업 참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내에서 새로운 단계가 성취되었다.
이러한 진화가 나아갈 수 있는 아주 다양한 길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1. 국가 개입은 장기적 지향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산업정책, 학술연구, 특정산업에 대한 금융,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 규제들…)
2. 금융은 상당한 비율로 성장해 왔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위기 이전에는 게이레츠(Keiretsus, 재벌)가 조직과 집중의 선진적이고 효율적인 형태로 간주되었다.
3. 연속적으로 심지어 비금융 법인기업들도 그들의 활동 분야를 다각화하고 확장했고, 그리하여 경영적 관리 아래에서 산업들 사이의 자본 이동에 참여했으며, 그들의 금융적 활동을 그 자체로 발전시켰다. 전략적 결정들이 이제는 거대 법인기업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4. 뮤추얼 펀드나 연금 기금과 같은 새로운 기관들이 이제 금융 투자의 광범위한 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산업들과 기업들 내에 자본을 배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들은 이윤율을 비교하고, 경영진의 성과를 판단한다. 특정 기업에 대한 부정적 판단은 그 기업의 주식으로부터 떠나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에 따라 그 기업이 새로운 자금을 획득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많은 비용을 수반하게 된다.
뮤추얼 펀드와 연금 기금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기관들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생산관계의 관점에서 그것들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들은 주주들을 대신하여 기업에 수익성의 표준들을 부과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인 기본적 특징을 재천명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특징들을 강화한다.
2. 위와는 반대로, 비록 이러한 진술이 때때로 엄청나게 과장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은 거대 자본가, 즉 개별적인 대주주들이 없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어떤 분석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소유권의 비인격적 특성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기업지배를 위한 기금의 성장을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변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기관투자자들”이 경영자들에게 자신의 솜씨를 표현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본가와 임금생활자 사이의 장벽이 점차적으로 잠식되어 간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볼 때,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경영적 측면은 경영자들이 이제는 전통적 금융기업과 비금융 기업의 상층에 위치한, 거대한 집합적 기관 내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단계를 세 번째 경영혁명, 즉 소유권에 새로운 사회적 내용을 부여하는 자본의 집중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으로부터 출현하는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네트워크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은 아직 너무 이르다.
이러한 “사회화”의 한계는―거시경제의 관리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이 이제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새로운 맥락에서 이윤율 극대화라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기준에 종속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새로운 계급의 경영적 능력이 표현되어야하는 경로를 결정하는 현재의 금융의 헤게모니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은 이러한 진화의 내용, 즉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경영자들이 유례없이 집중된 수준에서 기업경영의 수행과 자본 배분을 관리하는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자본에 의하여 그들에게 부과된 엄격한 제한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취의 중요한 의미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⑴ 다양한 경영 참모들의 업무수행을 비교하면서, 매우 많은 자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그 이용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⑵ 이윤율 기준에 대한 엄격한 종속.
이윤율 극대화는 자원의 효율적 사용에 관한 확실한 보증을 제공하지만, 그것의 한계도 자주 강조되어 왔다 : ⑴ 이러한 기준은 그것이 사회적, 인간적, 생태학적인 다른 현상들에 대하여 맹목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아왔다. ⑵ 좀더 정교한 분석의 수준에서는, 이것이 우리 사회를 그 자신이 초래한, 되돌리기 어려운 특정한 역사적 궤도(특정한 소비, 생활방식, 문화)를 따라 몰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역사를 멈추지 않았지만, 현재를 결정하고, 그 미래를 한쪽으로 편향되게 하였다.

5.3 신자유주의의 비용과 이득

1장 3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이윤율의 상승 추세와 함께 새로운 단계가 현재 진행중인 것 같다. 이 새로운 단계와 신자유주의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문제이며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1980년대 동안 실질 이자율의 급격한 상승이 기업들에게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이윤율, 즉 이자(그리고 모든 세금) 지급 이후의 이윤율의 회복을 지연시켰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반드시 그 이전 시기와의 비교를 통해 평가되어야한다. 이는 비금융 법인기업 부문의 이윤율을 보여주는 그림 6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윤율은 자본량(법인기업의 순가치)에 대한 이윤량(인플레이션에 의한 채무액의 가치절하에 맞게 수정된 이자와 세금을 지불한 이후의)의 비율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1. 그림 3과 6에서 사용된 이윤율의 정의상의 차이의 결과는 분명하다. 이윤율에 대한 정의상의 차이로 인해 그 수준이 더 낮다. (차이의 일부는 주택(부문)을 제외한 사적 부문과 한정된 법인 부문들과 같이 서로 다른 부문들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2. 1970년대 동안 실질 이자율이 마이너스 수준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에 비해 매우 낮았다. 이 때문에 채권자에서 채무자로 상당한 부의 이전이 생겨났다. 이 효과는 상당히 커서 실제로 이윤율의 감소를 보상하였다. 감소가 나타나는 대신 겉으로 보기에 1960년대만큼 두드러지게 컸던 1970년대의 팽창은 바로 이러한 이전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림 6)
3. 1980년대에 이자율의 상승과 인플레이션의 소멸은 이러한 유예를 끝냈으며, 1980년대 초반에 이윤율은 급격하게 하락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1980년대의 상태는 1970년대에 나타났던 것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부의 흐름이 거꾸로 바뀌었다.
4. 최근의 회복의 효과는 이제 명백하다. 이는 기술변화의 새로운 경로와 노동 비용의 정체, 보다 낮은 실질 이자율, 그리고 채무의 감소가 결합된 결과이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수익성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높은 실질 이자율의 부정적인 영향은 자주 보고되어 왔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1979년의 정책 쇼크로 인해 채권자들은 실제로 이익을 본 반면 80년대의 위기가 추가된 셈이다. 비금융 기업들은 이자의 부담(순 이자, 왜냐하면 기업은 대출과 대부를 동시에 하기 때문에)을 경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주식 시장의 극적인 성장을 자극함으로써 마침내 이것을 성취해냈다. 신자유주의의 비용은 매우 컸다. 그리고 위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수익성 수준을 잠식하는 투자와 고용에 대한 영향은 단지 이 비용의 한가지 측면을 규정할 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비용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이점이라고 알려진 것들이다. 우선 노동비용에 대한 통제와 탈규제에 관하여 명백한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금융에 이익이 된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분석의 수준에서 신자유주의의 잠재적인 “진보성”(progressivity)에 대한 질문을 제출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새로운 기술의 경향들을 신자유주의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가능할 것인가? 그 문제는 실제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수도 있다 : 만약 정책이 달랐더라면(구조적 위기에 대해 케인즈주의보다 더 적당한 “좌파적”대안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자본 생산성이 향상되는 전환이 나타났을까? 언제? 더 빨리 아니면 더 늦게? 그 진폭과 효과는 어떠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충분하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20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비슷한 상승의 독특한 실례와 간단히 비교해보는 것이 이 복잡한 현상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두 역사적 환경의 유사성은 상당히 크다.
우선 기업, 기술, 그리고 경영의 변화에 있어서 금융의 역할을 고려해 보라. 법인 혁명과 경영 혁명은 ⑴ 경영 및 사무 층과 ⑵ 금융의 결합된 활동을 요구했다. 전자는 법인기업 내부에서 새로운 효율성을 획득 가능하게 했으며, 후자는 거대한 법인 기업의 설립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을 제공해 주었다. 유사한 이중의 과정이 1980년대 이후에 진행되고 있다. 금융은 최근의 합병 물결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른바 정보혁명에 의해 뒷받침된다고들 하는 새로운 경영의 성취가 경영 및 사무 층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이제 수입과 안정성에 대해 고려해 보라. 20세기 초반의 또 다른 독특한 특징은 거시경제의 관리와 화폐와 금융 안정성의 보존과 관련된 금융의 헤게모니였다. 이 임무에 부합하지 못한 금융의 실패는 대공황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대공황 이후에는 케인즈주의 안에서 경영주의의 공적 요소의 성장을 허락해야 했다. 이 지점에서 금융의 해로운 측면은 쟁점이 되고 있는 바, 소득과 불안정성이라는 측면 모두에서 그러하다. (케인즈가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제안했던 것을 상기해 보라.) 최근의 자본주의에서 금융은 다시 국제 경제에서 화폐와 금융 안정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제도적 틀의 확립을 지연하고 있으며, 혹은 이러한 목적으로 현존하는 국제적 제도들을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고 심지어 위험한 진행을 조장하고 있다 (192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최근의 금융 위기는 확실히 이러한 위협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몇 가지 통제를 부과하려는 새로운 자극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공황의 역사적 경험은 잊혀지지 않았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확립된 새로운 제도들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파괴되었을 뿐이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일부분만이 소멸되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경영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경영적 요소는 시스템의 안정성을 지속하는데 요구된다면―아마도 지금 그러한 것처럼―갑자기 아니면 점진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자본가계급이 거대한 경제적 붕괴를 야기할 과도한 경직성으로 인해 무대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차라리 새로운 지배계급에 “통합될” 것 같다. 이것이 이행의 동시대적 형태들, 특히 다소 명료한 사적이거나 공적인 특징들이 이 계급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형태와 그 이행의 정확한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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