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1-2.42호

2003년 반전평화운동 평가와 재출발

박준도 | 사무처장
새로운 운동,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

2003년 주목해야 할 운동이 무엇이냐 물으면 누구라도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을 손꼽을 것이다. 2003년 한 해 가장 떠들썩했던 뉴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고 이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이 손꼽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멀리 베트남 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1990년 이라크 전쟁에서 다국적군은 물론, 동티모르 사태의 UN평화유지군까지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이렇게 오랜 시간 전개된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운동이 대중들에게 그리 익숙한 쟁점이 아닌데도, 이 새로운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었던 데는 다음과 같이 적어도 두 가지 이유만큼은 들 수 있을 것이다. 9․11 테러 보복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가 드러나면서 대중들이 강하게 반발했다는 사실을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효순이․미선이 살인사건 이후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하자는 대중적 요구가 강하게 일던 중에 미국의 부당한 파병요구가 제기되자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운동을 각각 이끌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과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두 공동 투쟁체가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2003년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7․27 정전 50년, 한반도 평화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으로’와 ‘반전평화 8․15 통일대행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고발하는 운동과 미국의 북한 고립 책동을 반대하며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운동들 역시 앞서의 여중생 범대위 사례처럼 반전평화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는 미국의 냉전 전략의 상흔이 깊숙이 남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역으로 전통적인 반미운동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데 한반도에서만 평화로우면 되는가라는 (조금은 조잡한) 일차원적인 질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만이 반전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이 운동은 충분히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파병반대운동을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보아도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성격은 사뭇 다른 양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기도 하다.
그렇다고 파병반대 반전운동이 내적으로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자주’ 혹은 ‘반전평화’라는 묘한 대립과 함께 ‘한반도 위기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할 것인가’ 아니면 ‘이라크 점령 중단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격한 논란 또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4월 2일 국회의 이라크 파병 결정, 4월 9일 미국의 이라크 종전 선언이후 파병반대운동이 새로운 전망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서 제기된 이 논란은 ‘한반도 위기를 문제삼지 못하는 파병반대운동의 공허함’과 ‘이라크 전쟁 반대에 대한 민족주의 운동의 소극성’을 비난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새 운동세력의 출현을 못마땅해 하는 감정들의 충돌에 가까웠던 이 논란은 결국 각자 제기했던 ‘자주평화연대’와 ‘반전평화공동실천’ 구상이 좌초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다소 허탈한 것이었으나 역으로 이는 반전운동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향후 반전운동 전망을 둘러싼 논란이 각자가 제기하는 연대조직의 구상차이로 드러났다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주체형성과정을 위한 실천으로서 유력한 매개고리가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물론 뒤에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주의

반전평화운동의 기반이 약한 남한에서 파병문제가 왜 첨예한 쟁점이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북핵을 매개로 전개되는) 한반도 위기를 인식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국익/실리를 이야기하면서 파병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연계시켜야한다고 주장(한반도 전쟁 발발 시 이를 국제적으로 호소할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파병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 포함)한다. 그리고 냉전적 사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역할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파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공산 괴뢰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데 대한 보은의 논리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날조된 거짓말이거나 대중운동과 무관한 쟁점이다.
잘 아는 것처럼 미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한국에게 번번이 전후복구지원과 파병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강력한 한․미(․일) 군사동맹을 믿고서다. 하지만,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이 되는 정전협정, 상호방위조약 그리고 합의의사록에서조차 군사동맹의 범위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위험이 초래될 때로 한정되어 있다. 역의 경우까지 그러니까 한반도․동북아시아를 넘어서는 미국의 군사적 대치상태까지를 포괄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한국전 혈맹을 근거로 한미동맹을 확대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지배세력이 국내정치의 역관계를 유지 관리하려는 차원이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행동에서 한․미 동맹이 언급되는 것은 한․미(․일) 동맹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이 역사적 특수성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냉전구도 아래 진행된 일본․한국의 전후복구 및 고도성장과 정치․외교적 관계에 바탕을 둔다. 미국의 냉전 구상은 일제의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나라들(특히 한국, 대만)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완충시켜 왔고, 그 아래 일본을 정점으로 동아시아 각 국이 묶이는 수직적 경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 우산아래에서 남한이 성장한 것이다. 이때 남한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전망의 쇼케이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더불어 동북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미국에 순종하는 절대적인 협력국가(식민지 종속국가)로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이해를 보존하는 의미를 갖는다.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한․미․일 3국 동맹은 굳건했고 오히려 공동의 전망을 더 가속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특수성에 기반해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을 구상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을 기화 삼아 동아시아에서 더더욱 (미국식) 번영을 구가하여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강화하는 한편, 강력한 한․미․일 군사(정치)동맹을 전제로 동아시아에서 정치․군사적 안정을 꾀하여 자신의 이해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냉전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있어서 기본 개요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전쟁 억지력 구상은 더욱 호전적이 되었다. 불특정대상에게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대칭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가능하다고 보았다. 첫째, 군사기술의 혁신(첨단기술, 정보전)은 이것의 기술적 토대가 되는데 미국은 여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 목표에 대해 미-유럽은 물론 미-동아시아 역시 공동의 이해(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협력과 공조태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군사 전략의 재편방향의 기본 얼개는 다음처럼 그려진다. 정치․군사적 불안정성이 금융세계화 중심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미국 군사안보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목표 아래 첫째, 효율적인 군사적 응징이 가능하도록 작전부대를 경량화하고 기동력을 강화하는 한편, 둘째, 기존의 군사동맹(한․미․일)을 지역동맹으로 확장하고 정치․군사적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군사동맹국(한․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셋째, 군사적 위험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동맹국의 역할(전비 지원, 파병)을 확대하는 것. 한반도의 주한미군재배치, 한미동맹의 현대화와 한국군 역할의 강화, 일본의 재무장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려는 미군의 신축성 확보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 재차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사실, 이 같은 구상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할 수 없다. 소말리아의 실패,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장기화, 북한의 강한 반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군사 기술적인 우위 같은 것으로 미국이 원하는 목표를 간단히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UN․유럽 동맹국들의 지원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경계 밖에서 ‘폭력의 지속’, ‘항구적인 내전’, ‘폭력의 순환’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고, 이를 관리하는 것이 초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지역동맹을 확장하고, 한국․일본 등 동맹국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무기 이용의 주체를 늘림과 동시에 군비지출을 (경쟁적으로) 비가역적으로 늘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당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게 된다는 사실이 문제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스라엘은 빈발하는 총성 한 가운데 있으며, 중동지역의 정치․군사적 통치를 위해 키워온 이라크가 느닷없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여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가르쳐온 테러리스트들이 9․11 테러에서처럼 되려 미국 본토를 향해 총을 겨누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위험이 동반하는 것은 이스라엘, 이라크, 일본 등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 국가들을 동원하는 과정이 지배세력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동반하기 일쑤고,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자국의 무장을 합리화하고 주변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어, 군사적인 경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남한의 자주국방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중국과 군사적 경쟁을 가속하고 위기상황에 빠뜨릴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무기 이용 주체를 늘리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무기의 사유화(사유화된 무장)는 폭력 자체를 아예 제어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지게 한다(테러와 폭력의 악순환).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데, 미국이 이 때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거 호황기 때처럼 막대한 생산성이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요, 옛날 영국 제국주의처럼 식민지에게서 공물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리품을 정부재정으로 직접 귀속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정부재정에서 전비지출 비율을 대폭 늘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는 사회복지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귀결된다. 사실 이 같은 분배 정의의 왜곡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역의 정치․군사적 안정을 떠맡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도 적용된다. 자주국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군비지출을 대폭 늘리고, 사회복지 지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하려는 남한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예비하겠다는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안보 논리가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냉전시대 안보란 소련이라는 ‘실제’하는 적을 경계하는 것이지만, 냉전 이후 안보란 언제 어디서 누가 강력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가상’의 적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과 같은 방식 즉, 냉전구도를 전제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자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이에 기반해서 통치를 하는 방식의 부르주아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가상’의 적이란 적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아닌 남은 모두 적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언제 어떻게 폭력이 출현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다. 적합한 인식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지배세력은 반복되는 폭력의 원인을 호도하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이 반복되는 폭력을 ‘테러리즘’으로 뭉뚱그려서 정의한 것이다. 지배세력의 호언과 달리 이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적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란 시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렇게 해서 지배세력 스스로 자신이 약속한 민주주의마저 배신하는 일이 현실로 드러난다. 이 현상은 미국은 물론 동맹국 - 미국의 식민지 종속국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화헌법 아래 유사법제를 만드는 일본,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고 헌법마저 무시하면서까지 파병을 강행하는 한국, 테러방지법의 제정, 집시법의 개악들로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가상의 적이라는 말과 달리 ‘공포’는 실재한다는 점이다. 폭력의 무한한 반복과 실재하는 공포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대중들을 매우 수동적인 상태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계속되는 테러리즘과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의 기반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고만 있거나 정치를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물론 역의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에서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대중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 파괴과정에 침묵하는 대중, 정치에 무심한 대중의 문제를 분명히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한다.
이 때 가장 관건인 문제는 이 모든 모순과 위기감을 인민들이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이다. 미국의 군사적 패권, 군사적 긴장 고조, 재정분배의 불균형과 이에 따른 사회적 위기의 심화,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협 들 앞에서 말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2003년 반전평화운동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한다.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적 패권전략 -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이라는 시각에서 말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Ⅰ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자, 이제 반전평화운동의 현실을 되돌아보자. 남한의 반전운동은 대단히 더디게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2003년 2․15 국제반전행동에서 전 세계적으로 1000만에 가까운 대중들이 이라크 침략위협에 맞서는 행동을 벌이는 사이 한국에서는 2000여명의 대중들이 집회를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개시되고 한국군 파병이 불거지면서 반전평화운동의 쟁점은 좀 더 구체적이 되었고, 이것은 3월 한달 내내 대중들 사이 주요 쟁점이었다. 3월 22일 서울에서만 7~8,000여 규모의 대중적인 집회가 진행되는 등 전쟁반대, 파병반대 운동의 물결은 상승세를 타는 듯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제기되고 노무현 정권이 ‘국익’ 이라는 쟁점을 제기하면서 이 운동은 급격히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반대하지만 한국군 파병에는 국익이 중요할 수 있다는 모호한 선택이 지속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결정 이후 국회 앞에서 벌어진 투쟁은 이런 소강상태를 결정짓는 국면이었고, 파병결정이 최종으로 확정되면서 파병반대 운동은 한숨을 고르게 된다.
반전평화운동이 더디게 진행되었던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세 좋게 성장하던 반전평화운동이 왜 주춤거리게 되었을까? 일단, 전 세계적인 2․15 반전운평화운동은 우리와 달리 사회운동의 네트워크에서 상당히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온 운동이라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것의 교훈으로 목적 의식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시 남한의 반전운동은 (유럽처럼) 전체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중운동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반전평화라는 쟁점은 한국의 민중운동에게 낯선 쟁점이었다. ‘전쟁반대’는 신사회운동의 쟁점에 불과했거나 중심운동(노동운동, 통일운동)에 비해 부차적인 쟁점이었고, 기층 대중운동에게 이것은 사안별 연대의 대상으로서 부문운동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의해야 할 문제는 더디게라도 시작했던 반전평화운동이 파고를 그리다 ‘한미동맹이 위험수준’이라는 지배세력의 협박 앞에서 주춤거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평화운동의 첫 번째 난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이 한미동맹을 넘어서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위협하는 수구반동세력의 공세도 문제지만, 한․미 공조를 통해서만 경제가 성장할 수 있고 정치․군사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신화가 지난 50여 년 동안 형성되어 왔고 이는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다. 1960~70년대 고도 성장이 노동자 민중의 처참한 희생으로 가능했음은 이제 누구에게나 알려졌지만, 이곳에 한․미 공조아래 발전이 가능하다 신화도 함께 자리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IMF 경제위기는 대중의 이율배반적인 면을 더욱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게되자 이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침체의 종식과 신화의 재현을 더더욱 갈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요가 부당한 파병압력에 대한 대중의 불쾌감과 동아시아 경제적 번영과 정치․군사적 안정이라는 미국의 구상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온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을 가로막은 벽은 외재한다기보다는 대중 안에 내재했던 것이다.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이 미국의 군사패권전략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초점을 두었다는 것은 결국 한미동맹의 암초 앞에서 반전평화 운동의 동력이 급격히 위축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경제적 번영, 정치 군사적 안정)에 대한 대중의 허구적지지 - 즉,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미국의 야만성/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데만 초점을 둔 운동으로 깨트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Ⅱ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생존권 사수운동)과 연대의 곤란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막대한 전비, 그리고 이라크 개전 이후보다 종전 선언 이후 더 많이 발생한 미국 사망자, 이라크 저항세력의 지속적인 저항들로 미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 점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을 강조했고, UN의 이라크 재건 결의를 배경으로 동맹국들에게 전비지원과 추가파병을 요청하였다. 한국 역시 이를 따랐고, 추가파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하반기 파병반대 운동의 조건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파병을 반대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많은 활동가들이 적지 않게 노력했음에도 정작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은 좀처럼 다시 불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범국민대회라고 명명하고도 2,000 ~ 3,000 규모의 시위대를 조직하는 것 이상의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하반기 노무현 재신임을 전후하여 대중운동들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음에도 말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반전평화운동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미국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생존권 사수운동이 분리된 계기를 통해서 드러나다 매번 서로 미끄러지면서 종결되더라는 사실이다. 2003년 한해 각자의 계기를 통해서 전개되는 대중운동들은 무엇 하나 예외 없이 거기에서만 멈추었다. 극한적인 삶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목을 메고 분신하며 노동자 운동의 촉발을 호소했지만, 노동자 운동은 자신의 분노를 한번 드러내는 것으로 이후를 기약했다. WTO 시장 개방에 맞선 농민운동 역시 멀리 칸쿤에서 산화한 열사를 상여에 메고 투쟁에 나섰지만 농업시장 개방을 항의하는 투쟁을 대규모로 조직해보는 것으로 2003년 한해 투쟁을 마감하였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의 투쟁은 대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시도들만 보아도 주목되어야 하는 투쟁이었지만, 2003년 내내 부안지역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이들 운동들은 반전평화운동과 별개의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또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민중운동의 상설적 공동투쟁체로서 전국민중연대의 위상이 모호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공동투쟁을 위한 네트워크의 부재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런 네트워크가 형식적으로 존재했다 할지라도 사안별 연대투쟁에만 무게중심이 쏠려있던 이들 운동이 공동투쟁으로 나가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연대 틀의 부재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2003년 하반기 파병반대운동은 상반기와 달리 미국의 침략전쟁을 규탄하는 것보다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상반기 투쟁에서는 적어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규탄하면서 한국군 파병을 저지하는 투쟁을 벌였던 것에 비해, 하반기 투쟁은 오히려 쟁점의 폭이 좁았다는 뜻이다.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점령에 무심하다 한국군 파병이 제기되자 그제야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출발했다는 상황 자체가 이를 조건 지운 것이다. 물론 이렇게 출발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운동이 지속적으로 파병을 막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고, 대단히 기술적인 방식을 중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세력 내 분파 갈등의 활용, 재 신임 국면의 활용, 국민투표 방식의 활용, 그리고 끝내는 낙선운동마저 활용하자는 일련의 전술들은 파병을 막아내는 것만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운동은 단기적인 목적달성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의식화․조직화보다는 시민운동가들 - 이른바 국회 국방위 전문가들, 정당정치 전문가들, 법률 전문가들 등 테크노크라트들의 능력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이슈를 부각시키는 데 유력한 수단인 미디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결국 이익집단들의 운동방식 혹은 자기 중심적 실리주의 운동으로서 코포라티즘적 운동과 유사한 모양새를 띄면서 파병반대운동은 연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것이다. 2003년 11월 격렬했던 노동자운동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거리를 유지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일부 시민단체들이 노동자운동의 폭력성, 반전평화운동의 참가자와 노동자운동의 참가자가 다르다는 식으로 반발하며 이들 운동의 연대를 가로막았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호한 입장으로 반전평화운동을 급진적이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오류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파병반대운동이 연대 지향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원인을 단지 시민운동진영 탓이라고 돌릴 수만은 없는 문제가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이렇게 사안별 이슈에만 집중하여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계기에서만 찾는 방식의 운동 즉, 연대를 스스로 제한하는 운동은 파병반대운동 뿐만 아니라 손배가압류 철회를 위한 노동자운동, 그리고 FTA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농민 운동도 비슷한 경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 운동이 노동자운동, 농민운동과 거리를 둔 만큼 이들 노동자운동, 농민운동도 파병반대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의 출발점

2003년 한해동안 반전평화운동의 흐름은 파병반대운동에서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국방비 증액 반대운동, 한미미래동맹/SCM 규탄 등,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의 군사적 현대화를 비판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출현하였다. 또 두 여중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주한미군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비판하는 운동이 2003년에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이 운동이 반전평화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민족자주 통일운동이 한반도 위기에 맞서 평화를 염원하는 운동으로 전화를 모색하고, 반전평화운동과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들도 있었다. 이 운동들이 광범위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패권전략에 맞서는 반전평화운동이 파병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계기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이 2003년에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다.
가장 핵심적인 초점은 어떻게 해야 한미동맹에 균열을 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미동맹은 정치․외교․군사적 동맹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을, 즉 군사동맹으로서 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가 한반도 민중에게 무엇을 뜻하는 지를 정확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고 투자여건을 확보한다는 미명아래 남한 정부는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그 결과의 참혹 상을 분명히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수 조원의 돈이 초국적 자본의 이동과 함께 해외로 빠져나갔고, 그 사이 남한 민중은 삶의 위기에 내몰려 자신의 목숨을 내놔야 했다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한미관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과 더불어 우리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성의 구축 곧,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 반전평화운동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 전략은 또한 경제위기와 통치성의 위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전평화운동이 다양한 계기로 촉발되듯이 대중운동의 새로운 개시를 위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함을 뜻한다. 문제는 대중들이 반공발전주의라는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겠는가이다. 또 이슈 파이팅으로서 운동의 지위를 넘어서 자신의 정치적 연대의 지점을 확보하고 반전평화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이다.
운동의 성장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의식화)과 운동주체의 형성(조직화)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고전적인 정식이 매우 적합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대중들이 과학적 인식에 기반해서 실천을 벌일 때에야 자신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정념에 빠지지 않고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반전평화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003년 반전평화운동은 정치를 다시 가동하려는 인민들의 노력이라는 측면만 보아도 그 역사적 의미가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많은 난관(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노동자/농민/빈민운동과 연대의 곤란)에 부딪히면서 급격하게 소강했지만,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을 매개로 정치가 다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유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상이 바로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운동으로서 가능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반전평화운동은 이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이것이 보편적인 이념적 지향 아래 대중운동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는가이다.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은 곧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운동 자체의 복원으로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를 진실로 깨닫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PSSP
주제어
평화 국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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