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1-2.42호

연재를 마치며

김예니 | 편집부장
고등학교 때 우리가 배웠던 ‘문학’을 생각해보자. ‘무정’을 읽으며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배우고, 심훈의 ‘상록수’를 통해 브나르드운동을 배웠다. 이 때 우리는 계몽주의를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계몽주의는 무조건 좋은 것이었고 이를 작품 속에 구현하는 작가들은 선각자였다. 김동인을 배울 때조차 ‘붉은 산’의 주제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 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즘 ‘김동인이 지향했던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면서 개화기 계몽주의를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면밀히 살펴보면 계몽주의는 일제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맞닿아있다. 결국 이런 논의는 친일파가 개인적인 변절의 문제가 아니며 당대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일제에 저항하는데 허약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광수나 김동인을 평가할 때는 다양한 논쟁이 뒤따른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해야지 작가 자신의 과오로 작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작품과 작가의 일생이 불가분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친일파 문학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하거나, 리얼리즘 문학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될 때마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물론 소위 ‘순수문학’이 지금까지 우리 문단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현실반영과 사회참여를 자신의 예술적 실천으로 여겼던 사람들은 배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순수문학을 중심으로 문학사가 재구성되었고 우리 문학의 많은 부분이 삭제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여기서 순수문학이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반정립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문학을 지칭한다. 1930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목적성만 내걸고, 문학을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며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순수문학은 ‘순수한 예술성만 추구한다.’는 기치아래 지금까지 활동했다. 순수문학의 이론을 확립한 이론가는 김환태다. 그 사람은 세 가지 이론으로 순수문학을 정리하는데 문학은 목적성, 사상성, 사회성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특히, 그는 사회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남녀의 사랑도 사회인데, 왜 리얼리즘 문학은 사회계층문제나 빈부문제만 다루느냐고 반박한다.
‘사람, 글로배움’에 임화, 이기영, 강경애를 소개한 것도 순수문학 위주의 문학사에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카프를 평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술성 없는 작위적 글쓰기로 프롤레타리아 문학가들을 비판하는데 나는 이런 평가가 무척 편파적이고 정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존의 평가를 쇄신하고 새로운 평가의 잣대를 제시하면서 1930년대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고유한 미적 특성을 설명하고 싶었다. 당대 대중에게 발표된 작품의 양만 확인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압도적이었다. 이후 순수문학을 중심으로 문학사를 정리할 때, 한국문단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분파로 ‘시문학파’가 등장하고 이를 이어 서정주, 김동리가 언급되지만, 사실 1930년대 그들은 신진작가일 뿐이었다. 이러한 순수문학 중심의 문학사는 전쟁 이후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왜곡이다. 해방 후 반공 투쟁과정에서 사회주의 문학파들은 모두 월북하거나 전향해버리고,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씨가 김환태의 순수문학 이론을 계승했다. 특히 김동리가 이론적 활동을 많이 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에서 목적성, 사회성, 사상성을 제거해서 현실을 외면해야만 순수한 예술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1960년대에 다시 불거지는데, 1960년대 초반에 안남일이 제기하는 순수․참여논쟁, 그리고 1960년대 말 이어령, 김수영의 논쟁이 그것이다. 또 이 논쟁은 1970년대로 이어져 1970년대 초의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 논쟁이 이루어진다.
어쨌든 이런 흐름 속에서 그 동안 왜곡, 삭제되었던 리얼리즘 문학파와 그들의 작품은 해금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 카프와 관련한 논의 또한 이 시기에 와서야 가능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1930년대 문학사 속에 등장하는 작가와 유명한 작품을 함께 공부하려 했다. 왜곡되고 삭제되었던 역사를 정정하고, 과도한 평가를 수정하며 작품 자체를 평가할 때에도, 그 작품이 노리는 미적 효과가 적절히 드러나고 있는지, 그를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결국 사회와 예술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밝혀나가려고 했다. 물론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사실을 언급하는 수준 이상이 되진 못했지만 이와 관련한 연구와 고민은 꾸준히 진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한 작품을 꼭 읽어보자는 당부를 붙인다. 작품을 읽지 않고서는 역시 이 글도 쓸모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문학작품, 음악, 미술을 잘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 예술작품이 조금만 어려워도 대중에게 친절하지 않다면서 화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도 공부는 필요하다.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문학 작품 안에는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존재하며 지난 사건에 대한 증언이 담겨있다. 많은 관심과 독서가 필요하다.PSSP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