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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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6.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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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사회운동의 분기점으로서의 3.1운동

1919년 3.1운동과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

이원재 | 근현대사 세미나팀

"임시정부는 폐쇄되었다. 국가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기관(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트 및 수비대의 선두에 선 혁명군사위원회)의 손으로 넘어왔다. 인민이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해 온 대의, 즉 즉각적인 민주적 강화의 대의, 지주적 토지소유의 폐지, 노동자 생산관리, 그리고 소비에트권력의 수립, 바로 이와 같은 대의가 보장된 것이다. 노동자 병사, 농민의 혁명 만세"(<러시아 국민에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혁명 군사위원회, 1917.10.25)

"이슬람 교도들의 세계정복 첫 세기 이래 10월 혁명의 세계적 확산에 필적할만한 것은 없었다."

"우리 동포형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삼천리 강토를 탈환하라. 죽음은 한 번 뿐이고 두 번도 아니다. 동포여 이때가 어느 때냐, 한번 분발하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피와 피, 대한독립만세"(경북 청도군 운문면의 격문, 1919.3.25)


0. 들어가며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이른바 '3.1운동'은 사상 유례 없는 전국적 규모의 항쟁이었다. 운동에 참가한 연인원만도 200만 명이고 일제가 학살한 시위대는 7,500여 명에 달한다(이는 '통계'에 잡힌 숫자이기 때문에 실상은 이보다 몇 배 많을 것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인구가 2000만 명이었으니 10명 중 한 명은 3.1운동에 가담한 셈이다.
우리는 3.1 운동을 아주 강한 의미에서 '사건'이라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전까지의 정세와 급진적으로 단절하고 그 후의 정세를 근저에서 규정한다는 점에서. 반면 지금껏 국가가 3.1 운동을 '기념'하는 방식이란, 그 사건적 성격을 '상해임시정부' 건설 등의 한 계기 정도로 국한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홍보전략의 일환이라는 것, 이러면서 당시 사건의 다면적 측면들이 사후적으로 제한될 수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심지어 박정희 정권 때는 '새마을 정신'이 3.1운동의 정신이라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기념사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국가가 역사를 대하는 방식이야 매양 그랬다 치더라도, 문제는 우리들 역시 이런 사고로부터 별반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국가주의적 역사를 비판하는 대항적 사고가, 80년대 후반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중적으로 크게 세력화하지 못한 탓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와 관련한 약간의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즉 3.1 운동이라는 사건 자체를 좀더 충실히 조사하고, 이에 입각해 그후 정세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필 것을 제안한다. 이렇듯 사건 자체의 성격 규명에 초점을 맞출 경우,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겨온 역사의 전개, 곧 근대 민족국가(보다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의 수립이라는 목적론과는 사뭇 다른 역사가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논의가 다소 거칠 수는 있지만, 이는 대화를 통해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1. 1919년을 전후한 국제정세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위기'와 러시아혁명

질문. 3.1 운동은 왜, 1912년이나 1915년이 아닌, 1919년에 일어났는가? 그러니까 1919년이라는 시기는 어떤 정세적 종별성을 갖고 있는가? 여기에는 '국권상실'로 인한 '민족적 분노'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작용하고 있다.
관련해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또는 차라리 이 세미나를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실을 우선적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즉 3.1 운동은 순수한 '일국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정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점, 그리고 이 세계정세의 격변의 중심에는 '러시아 혁명'이 있다는 점.
3.1 운동이 발생한 1919년은 주지하다시피 전대미문의 참사였던 1차세계대전이 막 종결되었던 때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에서 "세계를 뒤흔든"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한 직후다. 우선 러시아 혁명에 관해 말하자면, 이는 '한일합방' 이후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자결을 선포하였다. … 울려퍼지는 봄의 소리에 의해 천지의 대변화가 일어난 이상 우리도 역시 활약하고 맹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박은식,《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라든가,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러시아는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 선진국의 모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작성한 <2.8 독립선언서>)하자는 논의는 상징적이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지금, 더구나 러시아 혁명과 3.1 운동을 거의 연관시켜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이같은 즉각적 반향이 잘 납득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 혁명이, 공고한 철벽처럼 굳건하게만 보였고 '역사의 진화법칙'의 필연적 귀결인 것처럼 여겨졌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 질서 안에, 더 이상 꿰맬 수 없는 모순과 '약한 고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세계적 사건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제국주의 지배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요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경까지 세계자본주의 체계를 주도했던 영국 헤게모니 하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1873년에서 1896년에 이르는 시기 영국의 대불황과, 1873년, 1882년, 1890년에 유럽 각국에서 연이어 발생한 금융위기와 농업불황으로 크게 위협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독일은 영국을 맹렬히 추격하면서 세계체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영국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1890년대 말 런던의 시티(City)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금융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벨 에포크(belle poque)라 불리는 안정과 평화의 '황금기'는, 그러나 끔찍한 야만과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남김없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한 '新제국주의'의 발호). 그 야만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게 해 주는 대표적 사례는 남아공 정복을 위해 영국이 일으킨 보어전쟁(1899~1902)이다. 이때 영국은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한다. 인구 50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의 군인을 동원하면서, 보어인의 전답·가옥을 불사르고, 무려 21만의 민간인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독일은 영국의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지위를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다. 영국을 대체하는 헤게모니의 이행을 둘러싼 미국과 독일의 경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이는 이른바 '총력전'의 성격을 띠면서 민중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파괴적 전쟁은 비단 국가의 경제력과 인명을 손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차별한 살상과 폭력, 그리고 무의미한 전쟁 기간 동안의 '희생'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억압민족으로부터는 물론, 지배계급의 제국주의 기획에 동원되었던 대중들로부터도, 이같은 파국적 상황에 관한 지배계급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불만과 저항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유럽 각국을 비롯한 국제정세는 심상치 않게 고양되기 시작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혁명은 이같은 사태의 정점에 있다. 러시아 혁명이란 결국, 제국주의적 지배계급을 심판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탄생시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각국 민중들의 저항을 크게 고양시켰고, 자본주의 체제를 한층 위협했다.
이때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것은 러시아 혁명이 표방한 '민족자결'이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과 지배를 전면 부정했다. 이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모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는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민족정책('짜리즘 체제로부터 제민족의 解放')에서 절정에 이르렀는 바,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피압박 민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적 강화를 위한 주요한 조건은 합병(약탈)의 포기이다. 그것은 모든 열강들이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잘못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른 의미, 즉 유럽과 식민지에서 공히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민족(nationality)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려 하든 어떤 다른 국가에 소속되려 하든간에, 자신의 자유와 자결의 가능성을 획득할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 우리는 즉각적으로 우크라이나인과 핀족의 요구를 총족시키고, 이들과 그밖의 다른 非러시아 민족들에게 분리의 자유를 포함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이를 전체 아르메니아에 똑같이 적용시키고, 이 고장과 그밖의 우리가 점령한 터키 영토 등에서의 철수에 착수해야 한다."

이렇듯 러시아 혁명은 그동안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라는) '역사의 진화법칙'을 체현하고 있다고 여겨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일괴암적 연쇄고리를 부숨으로써 제국주의의(그리고 또한 부르주아의) 착취와 지배가 결코 '숙명'이 아님을 입증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후 건설할 세계질서('민족자결')와 국가형태('노동자 농민 등 근로인민대중에 근거한 민주주의 국가')를, 한 마디로 새로운 '문명의 형태'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혁명적 보편주의야말로 당시 모든 피압박민족들이 보았던 것이고, 러시아 혁명이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원천이었던 것이다.

2. 1910년대 일제 식민통치
-'무단통치'의 전개와 점증하는 민중의 분노

한편 3.1운동의 전국적인 전개는 1910년 이후 강압적이고 무단적인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의 결과 정치적 경제적으로 누적된 대중적 불만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일제의 '무단통치'가 문제이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대놓고 "조선인은 우리 법규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발언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전국에 행정과 사법적인 업무 뿐 아니라, 언론지도, 사회풍속 개선, 신용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의 업무를 담당하는 헌병경찰이 대폭 증원되었다. 경찰서, 주재소, 파출소, 헌병분소 등 헌병·경찰 관련 기관은 각각 1910년 653개(2,019명), 481(5,881명)개에서 1918년 1,048개(8,054명), 748(6,587명)개로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은 일본의 언어(이른바 '국어')역사와 문화를 강제로 배워야 했으며, 민족적 영웅을 기리는 소설이나 교양도서(장지연의 《대한신지지》, 현채의 《유년필독》, 이채우의 《애국정신》,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등)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1912년 '토지조사령'의 공포 이후 실시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기존의 왕실소유지(궁장토), 관유지(역둔토) 등을 총독부 소유의 이른바 '국유지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통해 조선으로 이주해오는 일본인에게 값싸게 불하해주는 과정에서 경작권을 비롯한 농민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지주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강화되었다. (총독부와 일본인은 경지면적 가운데 10%를 차지하였다.) 1918년 사업이 마무리된 뒤 조선의 토지소유구조는 상위 3%가 50%의 농지를 차지하고, 77%의 농가는 소작 없이 생활을 꾸려갈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등 '식민지 지주형'으로 변모한다. 지주들은 소작료를 인상했을 뿐 아니라 지세나 비료비 등을 소직인들에게 떠넘겨 그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고리대금을 빌려쓰고 나중에 상환의 막중한 부담을 지게 하였다. 주로 일본인 자본가의 진출로 인해 증가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단순노동이나 자유직에 종사하여 하루 12-16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이들이 받는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절반, 혹은 1/3에 불과한 것이었다.
저변에서 민중들이 '체감'하고 있었던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 없이 3.1운동의 광범위한 파급력과 폭발적인 대중참여 양상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농민들은 이미 토지조사사업을 방해하는 '실력행사'를 불사하는 경우도 있었고(1912년 경남 진해에서의 주재소 습격, 1913년 4월 강원 삼척에서 화전민들에 의한 임야작업 측량기사 타살), 세금납부를 거부하는 폭동도 일어났다(1910. 평안북도 22o 군에서의 시장세 반대폭동, 같은 해 3월 경남 고성의 지세징수반대 폭동). 무론 이러한 '소요'는 일제의 강력한 헌병경찰기관에 의해 곧바로 탄압을 면하지 못했다. 노동자들 역시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일본인들과의 임금 및 노동조건에서의 차별에 항의하여 파업을 벌였다.(파업건수는 1917년까지 한 자리수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1918년과 1919년에는 각각 50건과 84건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산발적인 투쟁과 불만, 항의는 노동자가 밀집한 부두, 광산, 철도 등지에서 부두노동자, 화물운반부, 지게꾼과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노동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아직 그리 강고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러한 '조직력'은 3.1운동 당시 노동자들이 호응하여 파업을 벌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3. 3.1운동과 사회주의

3.1. 3.1운동의 전개양상

러시아 혁명이 돌이킬 수 없이 새겨 넣은 '민족자결'의 요구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기화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판단 하에, 각각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한다. 국내에서는 국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독립요구의 분위기에 보조를 같이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 교단들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민족자결' 요구가 관철되려면 조선인들의 의지를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위행진을 기획하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은 마지막 모임에서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식' 장소를 고급중국음식점 '태화관'으로 변경하고 탑골공원으로 나가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경무총감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투항하였다.
이처럼 어이없는 초반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은 진행되고 이후 만세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그야말로 운동으로 전개된다. 3.1 운동은 3월말 4월 초로 가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고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점차 급진화된다. 학생들은 등교거부와 동맹휴업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노동자들 역시 시위와 파업투쟁 등으로 운동에 결합하였다. 이른바 '만세꾼'이 생겨나 3.1운동을 곳곳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농촌에서는 군중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선동하거나 횃불·봉화·산호(山呼: 산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것) 등의 연락방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농민들은 헌병과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을 경험하면서 낫, 괭이, 몽둥이로 무장하고 면사무소, 군청, 주재소나 경찰서 등을 습격하여 세금징수 장부를 불태우거나 순사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심지어 만세시위 중에 일제로부터 탈취한 총검을 이용하여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초기 팁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단지 미국 등의 연합국에 대한 독립청원을 마련하기 위한 전시용 정도로 생각하였던 당시 민족운동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중의 저항행동이었다. 이처럼 정세가 점차 고조되는 과정에서 대중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주체화되면서 나타나는 이러한 시위의 격렬한 전개는 헌병대의 보고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중 심한 것은 낫, 괭이, 몽둥이 등 흉기를 가지고 전투적인 준비를 갖추었으며 군중의 진퇴는 오로지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마치 훈련받은 정규병과 같은 모습을 띤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집합하자마자 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기세를 올리고, 나아가 면사무소, 군청 등 비교적 저항력이 빈약한 데를 습격함으로써 군중의 사기를 고무하고 마침내는 마지막에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왕왕 파괴적 책동에 빠지려 하였다."

약 2개월에 걸친 3.1운동은 8,511명의 입감자, 전국 232개 부·군에서 229개의 부·군에서 1,491건의 만세시위와 160개의 관공서 파괴 등을 기록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3.2. 3.1운동에 대한 평가와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3.1 운동은 일단 그 규모 면에서도 놀라움을 자아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조선에서의 정세가 그로부터 연유한다는 점에서 일제 시기 조선인들의 저항과 투쟁을 이해하는 데 지대한 의의를 갖는다. 3.1 운동이 촉발한 정치적 경험과 각성은 이후 제국주의에 맞선 각급 계급대중운동들의 성장과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3.1 운동과 그 이후 사회주의 이념의 급속한 확산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1910년 이후 신민회 등의 몇몇 반일 비밀결사운동이 대거 일제에 검거된 이후 사실상 국내에서 독립을 꾀하는 운동의 흐름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국내적으로는 지지부진하였고 대부분은 국외로 옮겨갔다.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국내진공작전'을 대비한 군사교육에 노력하였으며(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박은식 등의 '신한혁명당' 건설, 유인석·홍범도 등의 '국내진공작전', 이상설·이동휘의 '대한광복군 정부'의 조직), 미국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는 독립전쟁론, 실력양성론, 외교청원론 등의 상이한 전망 등이 서로 반목하여 이렇다할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합법·비합법 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출판물의 발간, 강연회 등의 사업을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후에 <2.8 독립선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각각의 '반일운동'은 고립되어 있었으며 특히 국내에 어떤 조직적 기반도 갖지 못했다. 이념적으로 이들은 구한말 '의병전쟁'의 무력항쟁 노선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실력양성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후자는 제국주의 지배체제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문명' 및 그 운영원리를 제시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사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각에 따를 때 3.1 운동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제국주의-식민지 질서를 '역사의 진화법칙'의 결과로 표상하는 한에서, 이 질서의 '약자'로 남아 있는 한 독립이란 사실상 무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그 실력의 성격이라는 것은 지극히 모호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였던 3월 1일 당일 행동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3.1 운동 이후 일부 민족운동 진영은 당장의 조선독립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으로 귀결된다. "준비도 실력도 없이 무모했다"는 평가 속에서 당장 '독립'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일부 인사는 오히려 독립의 방도로 당장은 '실력양성'이 중요하다며 교육과 문화활동에 역량을 국한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입장은 일제와의 정치적 타협 이상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민족대표'와 '민족주의자'들이 이른바 '친일파'가 되었다(3.1운동 이후 '민족개조론'을 주창한 일제와 타협적인 방향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180도 선회한 이광수는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활동가들은 대중들을 조직하고 저항주체로 묶어세우기 위한 정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수많은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의 역사철학과는 정반대로 역사의 변화는 계급투쟁, 즉 억압받고 천대받는 계급들의 투쟁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고를 접하면서 '실력양성론' 등과는 전혀 다른 반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3.1 운동에서 (러시아 혁명 등이 앞서 보여준) 조선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녀들이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결코 보지 못한 것, 곧 장차 일제의 정치적 지배 뿐 아니라 조선 안에서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과 결부되어 있는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을 발견함으로써 독립과 혁명을 통일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사상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해방을 일제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당면 과제와 결부시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이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이러한 '매력'은 비단 사회주의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바, 일제와의 정치적 협력에 비타협적인 전망을 지니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대부분 (당시 대표적 사회주의 강령으로 여겨진) 토지분배와 국유화 등의 강령을 공유했던 데에서도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에는 15개 지회에 2만여 명을 포괄하는 조선노동공제회(1920년)가 설립되고 1925년에는 5만여 명과 200여 개의 하부조직을 가진 전국적인 규모의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발전하였다. 1920년 동경에서 "계급투쟁의 직접적 기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전개하겠다"([동우회선언(同友會宣言)](1922.1))고 선언한 '조선고학생동우회'를 비롯하여, 전조선청년당이나, 북풍회 등 주요 사회주의 사상단체들이 결성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동, 농민, 청년, 사상운동의 활발한 전개는 1925년 조선공산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4. 3.1운동: '실패'가 아닌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1919년이 되었죠. 나는 전인민의 거대한 항쟁에 참여하였습니다. … 1919년의 사건은 나를 공산주의자 진영으로 이끌어들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이념이 독립과 정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해야겠지요."(박헌영, 해방 직후 소련영사관 직원이었던 샤부시나 여사의 대담 中)

이상의 근거에 따라 3.1 운동의 성격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단적으로 3.1 운동은 식민지 사회운동의 진정한 분기점이다. 기존 반일운동의 이론적·정치적 한계를 넘어선 이들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을 수용한 식민지 조선의 젊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오직 이들만이 3.1운동을 '패배'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후 계급대중운동을 통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중굴레로부터 조선민중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계기로서 이해하였다.
이는 이후의 조선의 사회운동이 어째서 사회주의자들, 혹은 그 조직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하게 해 준다. 이는 당시 조선의 정세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헌영의 표현대로 그것은 독립과 정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염원하는 이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그렇지 않은(혹은 사회진화론과 '대중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이러한 사고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존재했던 구도가 아니었을까?
3.1 운동이라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격동적인 정치적 경험 속에서, 당시 그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이들은 박헌영과 같이 열렬한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3.1 운동을 통해 드러난 대중의 발언들과 요구들, 그리고 행동들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기존의 틀로서는 너무 한계적이었다.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과정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무척 순진한 것이었음이 밝혀졌고 원조를 기대했던 미국 등의 연합국도 결국 일본과 대동소이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또다른 제국주의 세력에 불과했음이 밝혀짐에 따라 기존의 '한계'를 밝혀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론과 이념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객관적 조건이었다.
바로 이들의 활동으로부터 3.1 운동 이후 조선의 사회운동은 새롭게 전개된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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