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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6.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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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풍문을 넘어

최예륜 |
조금 상관없는 얘기.

주말 늦은 밤, 버스는 만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왠지 엉덩이 쪽이 따뜻하다. 고개를 획 돌리니 옆에 서있는 남자의 손이 재빨리 사라진다. 기분은 더럽지만 그냥 가기로 한다. 그 남자도 취한건지 꾸벅꾸벅 존다. 어랍쇼 졸고 있는 건지 조는 척 하는 건지, 이 남자 하반신이 좌석에 앉은 젊은 여자 무릎 쪽으로 향한다(버스는 바퀴 부분의 좌석이 높다). 한참을 노려보다 “야, 좋냐?”라고 큰소리로 말해버릴까 하다가 가만보니, 앉아있는 여자는 창가쪽 남자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바람에 좌석의 1/3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한 채 왼쪽 다리가 통로 쪽으로 한참 삐져나와있다.
서있던 남자가 내리고, 잠시후 앉아있던 여자도 내리고 나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가 다리풀린 취객이었고 여자의 다리가 삐져나와있었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되기도 한다. 남자가 정말 졸고 있었는지, 의도적으로 제 몸뚱이를 여자에게 밀착시켰는지는 이제 확인할 바가 없다. 모든 것이 풍문처럼 떠돌 뿐이다. 창가에 앉은 남자와 서있던 남자 사이에 끼어있던 그 여자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확인할 바 없는 풍문이 지난 후, 심야버스를 타지 말자고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자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남성 일반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이 앙금처럼 깔려있을지 모른다.
떠도는 소문이 사건이 되고, 사건을 겪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이해와 공감을 유발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는 과정이란, 객관적 사실관계의 조사에 선행하는 주체의 발견이다.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지게 마련이니까. 앞서의 남자가 화자인 상황을 가정했을 때, 좌석에 앉아있던 여성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라거나,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라는 서술까지 가능해진다. (그게 대부분의 강간포르노 신화의 줄기) 객관적 사실의 규명이란,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과 별개일 수도 있으며, 역시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진실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풍문.

지난 5월 11일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월례포럼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여성노동자에 대한 풍문들에 의거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간병인 노동자가 토론 자리를 함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돌고돌고 허공을 맴돌았다.
전 세계 소득의 10%, 전체 부동산의 1%만을 소유하고 있고, 전 세계 빈곤층 13억 인구 가운데 70%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하청, 파견, 성과급, 시간제 노동 등이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해나가고 있는 노동유연화 과정의 최대 희생자인 여성, 여성노동자의 94%가 비정규직, 비조직 부문에서 일하며 극도의 불안정성과 착취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등등의 일련의 서술은, 물론 현실을 반영하는 객관적인 지표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객관적 사실을 인식함과 더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억압의 현실을 서술하는 화자, 즉 주체의 문제이다.
객관적 사실의 나열은 한편, 떠도는 소문들에 불과하다. 그 자체로 개조되어야 할 원인들이 규명되지 않는다. 예컨대, 전체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착취가 왜 여성 노동자들에게 극대화되어 나타나는가? 왜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비정규, 비공식부문 노동으로 대체되고 있는가? 왜 여성노동의 대부분이 평가절하되고 있는가?(이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 내부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을 때)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온갖 떠도는 풍문이 진실이 되고, 변화되어야 할 현실의 조건으로 규명되기 위해서는 관점의 이동, 즉 숱한 ‘주체화’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리라. 주체화 과정을 통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과제에 대한 일인칭 서술 시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이전에 관찰자 시점의 객관적 관점으로는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간병인 노/동/자/

그러나 이 텀의 서술을 시작하는 순간 괴로움에 빠진다. 이 글이 3인칭 시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때문이다. 하지만 간병 일을 하는 아줌마에서 간병인 노동자로 자기정체성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 그녀들을 아줌마(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냅다 가방을 던지고 달려가는 것으로 묘사되는 무성적 존재)에서 여성노동자로 인식하게 되기까지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있다.
내가 겪은 혹은 보았던 간병의 경험은 환자인 가족 구성원 누군가에 대한 다른 가족 구성원의 보살핌, 그 자체였다. 그것의 여의치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돈을 들여 고용하는 사람이 바로 간병인이었고, 이 관계에서, 간병인은 노동자로서 고용된 사람도 간호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도 아닌, 어쩔 수 없이 돈주고 부르는 아줌마들에 불과했다. 이 간병인 아줌마 들이란 화장실 등에 붙어있는 스티커의 전화번호로 연락하면(유료소개소) 아무 때나 불러올 수 있는 존재들이며, 가족들의 몫을 대체하는 보살핌과 감정노동의 전담자여야 했다. 모든 노동이 귀중하다는 전제는 보살핌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비공식부문의 여성노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은 사회적 가치를 지닌 노동이 아니라, 잡스러운 일들이지만 어쩔 수없이 돈주고 사야하는 부차적인 노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간병인 아줌마들이 데모를 했다. 요구조건은 병원 내 유료소개소를 폐지하고 무료소개소 운영을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24시간 근무 후 받는 5만원에서 5천원을 유료소개소에 빼앗기는 것을 막는 것이 근본적인 투쟁의 목표는 결코 아니었다. 피고용관계에 있으면서도 노동자로서의 지위와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던 것이고, 간병인도 노동자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비공식 부문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이 평가절하되는 근거는, 그것이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고 있으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차적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환자를 24시간 간호하는 간병인의 노동이 부차적인 것일까? 학습지, 보험설계사 등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은 사회적 가치가 없는 노동이기 때문에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노동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면(간병인 노동자 전체 수는 약 20만으로 추산된다) 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그 노동의 결과물을 향유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상식이 어째서 통하지 않는 것일까?
간병인 노동자들은 오랜 근무시간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오로지 일이 끊기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라 위안하며 간병 업무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쉬고 싶어도 쉴 땅 한 평을 제공받지 못했으며, 간병 업무 중 사고(환자로부터의 감염, 부상 등)의 책임은 오로지 스스로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병원 측으로부터 고용된 노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원 서비스를 제공받는 환자 가족도 아닌, 유령같은 자신의 존재가치였을 것이다.

서울대병원 간병인 지부의 투쟁의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간병인은 없어지고, 간호보조인력이 충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간호보조인력을 국가에 요구해야 하지 당장 있는 간병인들의 지위를 조금 개선한다고 달라질 게 무어냐는 논리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껏 간병인 업무를 수행해왔던 간병인 노동자들이 국가에 의해, 혹은 병원에 의해 재고용되면 안되는가? 바로 그 간병인 노동자들이 간병에 관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간병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것은 안되는가?
현존하는 비공식부문 노동의 폐해는 현재 힘겹게 노동하고 있는 해당 노동자들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출발은, 현재의 비공식 부분 노동자들의 제도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자기요구의 수립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여성이 임금인상과 처지개선을 요구하는 것보다 가족임금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와 단절할 수 있는 출발일 것이다.
수많은 아줌마들(수입은 보잘 것 없으면서 괜히 삶만 팍팍한 여성 노동자)이 당당한 여성노동자로 인식되어가는 과정, 당당한 여성노동자로서 투쟁의 역사를 서술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간병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료소개소 인정에서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을 국가 혹은 기업이 책임져야 할 사회적 노동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자로서의 자기정체성 형성이라는 투쟁이 촉발되어야 한다.
기존의 조직화 관점에서의 접근은 조직화 대상인가 아닌가, 혹은 조직화가 쉬운가 어려운가의 판단만을 허락할 뿐이다. 노동하고 있는 여성들의 주체화가 문제라고 했을 때, 조직화 관점의 채택은 기존 노동자 운동의 틀 안에 변화된 노동의 양태와 노동자들의 처지를 가두고 재단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노동자의 주체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의 역사는 해결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물론 부르주아 계급의 위기,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의 위기를 조건으로 할 수 있고, 조건으로 해왔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억압과 착취의 당사자인 노동자계급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그/녀들의 자각의 과정과 동지들과의 연대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오늘 노동하는 여성들 자신이 처한 조건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노동자운동의 관념과 운동의 방식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숱하게 떠도는 여성동자에 대한 풍문이 개조되어야 할 현실이 되고, 오늘날 여성노동자가 처한 모순적 현실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성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투쟁이 확장되어야 한다. 여성노동의 역사를 써나가는 서술의 주체로서 오늘의 여성노동자들이 서야 한다. 따라서 여성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방식은, 여성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과제로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형성의 과정은 여성노동자를 불안정한 일자리로 유인해내는 그리고 평등 개념을 핑계삼아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삭제하고, 복지를 축소하는 차이의 삭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판명되었으며, 떠도는 풍문 같은 객관적 사실의 나열만으로 진전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훗날 누군가에 의해, 21세기의 여성들은 가정에서의 가사의 부담 때문에 적은 액수의 단기적인 일자리를 선호했다라는 식의 역사의 왜곡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남성노동자 나아가 전체노동자 임금과 근로조건의 저하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며, 비공식부문의 노동의 제도화 요구가 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를 위협할 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두려움이 전혀 근거없는 기우에 불과했음을 현실에서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여성 노동자들의 주체적 관점에 입각한, 역사의 서술, 즉 투쟁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 그 숱한 여성노동자들의 주체화 과정에서 올바른 역사관과 서술의 양식을 함께 모색하기 위하여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모두들 파이팅!! PSSP
주제어
노동 여성
태그
KT 민주노조 해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