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11.50호
첨부파일
_합의회의.hwp

한국에서 열린 세 번째 합의회의

전문가 중심주의에 대한 우려

심용석 |
2004년 10월 8일. "유전자조작식품(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GMO)의 안전과 생명윤리"와 "생명복제기술"에 관한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가 1998년과 1999년에 이어 세 번째 합의회의가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합의회의는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을 주제로 10월 8일부터 11일까지의 일정으로 국민대에서 진행되었다. 행사 전에 원자력 계나 환경단체와 무관한 시민 패널들{{) 176명이 지원하여 최종적으로 이중 17명의 시민패널이 선정되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한 분이 행사 전날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상사로 인해 16명의 패널만이 합의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경미한 교통사고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이 글을 통해서나마 쾌유를 빈다.
}}을 선정, 원자력 발전소 및 전력 정책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그에 관해 논의하는 '예비모임'을 시행하였다. 합의회의는 사회적·정치적으로 논란이 되는 과학기술적 사안{{) 가령, 과학기술과 관련된 안전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어떤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미미한 상황인데 그 사고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신체의 일부분만 손상을 입지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때 그것은 안전한 것일까? 결국, 이에 대한 판단은 다양한 가치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프레온 가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에게 이들의 안전성 즉, 지구온난화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요구된다면 그들은 회사의 입장과 무관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필자가 전공하는 과학사회학은 결코, '반(anti) 과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적 내용에는 이미 그러한 입장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이 부분까지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에 대해 보통시민들(lay people)이 참석하여 토론을 통해 직접 판단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합의회의에서는 장기이식 의학(스위스 2000년 합의회의 주제), 식품과 환경에서의 화학물질의 위험성에 대한 평가(덴마크 1995년 합의회의 주제) 혹은 생명공학을 이용한 해충 통제(뉴질랜드 1999년 합의회의 주제) 등과 같이 전문가들의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는 주제를 다루곤 한다. 다만, 과학기술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나 정책적 판단에 있어 요구되는 이 외의 고려 사항들에 관한 내용들은 일반 시민들이 알기 힘들기 때문에 사전 예비모임이나 본회의 과정에서 전문가 패널들을 초청하여 이들에 관한 세세한 설명이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이 합의회의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있어 뿌리 깊은 믿음 즉, 과학기술에 관해서 만큼은 오직 전문가들만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그 관행에 원칙적으로 거세게 도전한다. 합의회의는 과학기술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적절한 정보와 지식만 주어진다면 보통시민들도 얼마든지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전제한다. 합의회의가 "농업과 산업에서의 유전공학의 적용"이라는 주제로 처음 시작된 덴마크에서 2002년까지 지속되었고{{) 합의회의를 주관하는 덴마크 기술부(The Danish Board of Technology)의 홈페이지에는 2002년 10월 9일까지 업데이트되어 있어 이 이상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1987년부터 2002년까지 매해 1~2차례의 합의회의가 개최되었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에 관해서는 덴마크 기술부 홈페이지 http://www.tekno.dk/subpage.php3?article=468&language=uk&category=12&toppic=kategori12를 참조하시라.
}} 유럽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 이번 합의회의 홈페이지인 http://www.npdebate.org/contents/about_othercc.html를 참조하였다.
}}은 이러한 판단을 확신시켜 준다. 이 외에도 전문적 내용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루어지는 전문가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의 순조로운 진행과 이후의 시민 패널들 사이의 전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토론 과정도 그렇다.
이번 합의회의에서-필자는 행사 실무팀의 일원으로 전 과정에 참석하였는데- 필자의 시야에 확연히 들어온 것은 시민 패널들이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벌이는 논쟁 및 이후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 그리고 합의회의 마지막 날에 제시된 시민 패널들의 합의문 등과 같은 것{{) 그렇다고 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것이 있었을 뿐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모두, 인터넷 한겨레신문(http://www.hani.co.kr)과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보다는 다름 아닌 '전문가 패널' 그 자체였다. 원자력에 관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전문가들이 참석하여 시민 패널들에게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하였는데 사실, 이들이 지닌 전문적 지식들은 합의회의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그 무엇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지닌 지식이 무엇이기에 그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은 어떠했을까"라는 질문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는가?
지하철을 이용하면서-버스도 그렇고, 길을 걸으면서도 그러하며, 학부제가 실시된 이래로 한 수업에 60~70명이 참석하는 대부분의 대학 수업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병원은 어떠한가? 동사무소, 시청 등에서는?- 사람들 간에 어떤 대화도 없으며 옆 좌석에 앉은 사람과 인사 한마디도 나누기도 어려운 따라서,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오늘날 필요한 '지식' 내지는 '정보'는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일지도 모른다. 즉, 태어나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동사무소에 신고하고 8살이 되면 학교에 보내며 적당한 나이가 되면 주민등록번호와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사회는 이미 그 사회 자체가 그들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지식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통제 내지는 관리 대상으로 여겨지곤 하며-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이는 다름 아닌 '교육부'가 굳이 '교육인적자원(Human Resource!!)부'로 명칭을 바꾸고 NEIS(네이스)-필자에게 이는 결코 '나이스'로 들리지 않는다-를 도입하여 학생들의 각종 정보들을 관리하고자 했던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상황의 출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결코 무관하지도 않았다. 철도나 자동차 등과 같은 각종 운송기술의 발명과 이에 따른 도로 및 철로의 정비, 컨베이어 벨트의 출현, 도시 건설 계획의 출현, 먼 거리를 순식간에 연결해 주는 각종 커뮤니케이션 기계들의 등장에서 드러나듯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 반경이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수단들이 고안된다.{{) 가령, 확장된 운송 수단, 개선된 모터, 자동화된 그물, 정교한 해도, 통신 수단의 발달, 대규모 냉동 시설, 해저에 있는 어류 및 다른 어선을 탐지할 수 있는 전파 탐지기 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장했을 대형 선박과 소형 어선 사이의 차이점을 고려해 보라. 소형 어선에서는 누군가가 굳이 다른 사람들을 관리할 필요성이 없으며 사람들은 서로를 몇 번의 항해를 통해서 알게 되지만, 대형 선박은 레이더 측정사, 끌어올려진 그물에서 물고기를 떼어내는 사람들, 이 물고기들을 나르는 사람들, 운항과 관련된 선장과 다수의 선원들 등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된다. 이 경우 이 많은 사람들을 관리할 도구는 어떻든 간에 필수적이지 않겠는가?
}} 즉, 앞서 간단히 언급했던 주민등록증이나 은행에서 숫자로 관리되는 사람들의 정보, 이와 연동해서 기록되는 전화(및 핸드폰) 번호, 각종 통계기술, 경영학 등의 도입은 이러한 상황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특정 지역에서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지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어떤 때에든 적용될 수 없다면-무엇인가가 상기되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은 당연히 지식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타당하거나 그럴 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지식의 경우에는 당연히 그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식들은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가령, 직접 농사를 지으며 알게 된 그곳의 기후와 풍토에 적합한 농경지식들은 적어도 생명공학분야에서는 어떤 의미도 없는 것처럼, 시공간적 제약에서의 벗어남은 어쩔 수 없이 특정 요소들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곤 한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벗어남은 그 분야를 직접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의 접근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결과도 가져오기 마련이다. 즉,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각의 분야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가정들을 세우기 마련이고 이를 통해 어떤 것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밝혀내고자 하기 때문에{{) 가령, 화학에서 '물'은 오직 H2O만을 의미한다. 실제의 물은 이 외에도 다양한 미네랄과 같은 것들이 함유되어 있지만, 실험실에서 이들은 물에 포함된 불순물일 뿐이고 따라서, 이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순수한' 물에 관한 각종 지식을 획득하겠지만, 현실에서의 '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이용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기 힘들다.
}} 이들에 관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과학이나 공학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가면서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흐름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우선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특정 사안을 전문적으로 다루다보니 그 사안과 연결되는 다른 측면들-특히, 그 소수의 사람들이 보기 힘든 점-은 무시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가령, 원자력과 관련된 사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원자력과 관련된 다양한 가치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기술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만 주목하여 연구함으로써 환경이나 위험 문제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게 되는 지역에서 발생하곤 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보기 힘들다. 즉, 기계적 효율성만이 추구해야할 최상의 가치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것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하는데 점점 더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면서 이들 전문가들은 결국, 다른 이들의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가령, 합의회의 막바지에 이루어진 기자 회견장에서 시민패널들은 원자력계 전문가 패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밝혔다: "나이가 어리다고, 또 원자력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환경단체에서 나온 전문가를 무시하는 듯 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시자 역할을 자처한 환경단체 사람도 무시하는데 우리 같은 일반 시민들은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동안 전력정책에 대해서 한 번도 국민의 의견을 묻지 않은 사정도 이해가 됐고요." 이러한 비판에 정도는 덜하지만 환경단체 전문가 패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정부나 원자력계의 전문가들보다는 덜 하지만, 환경단체 역시 시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데 많은 미숙함을 보였다 .... 전문가들을 상대하면서 반대 운동을 벌이다보니, 어느새 그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을 해봐야"{{) 프레시안 <'원전건설 중단' 합의까지 '시민 16인'의 3박4일> 중에서.
}}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권력은 결코 억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식을 추구하고 생산해내면서 스스로 권력의 그물망에 빠져들며 주어진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서의 권력은 차라리 스스로 생산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푸코의 원형감옥이 그렇듯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의 수많은 원형감옥들이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만 고안되고 운영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차라리, 죄수들이 간수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하는 것들 또한-물론, 다양한 어긋남 내지 벗어남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내면화되어 생산되고 향유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지식이 어떤 사회에서 중요한 아니 차라리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가 사물을, 대상을, 그리고 심지어는 사람을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바로 그 시선'이 이미 널리 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눈이 있는 북극지방에서는 곰은 모두 흰 빛깔을 하고 있습니다. 노바야젬블라는 북극 지방에 있으며 거기에는 언제라도 눈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 있는 곰은 어떠한 빛깔을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흰 빛깔'이다. 하지만, 어떤 학자가 인터뷰한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구술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물었을 때, 전형적인(!!) 대답은 우리의 예상을 확실히 뛰어 넘는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까만 곰이라면 본 일이 있습니다만 다른 빛깔을 한 것은 본 일이 없거든요…… 어디든 그 땅에만 있는 생물이 있는 법이거든요." 사실, 곰의 색깔은 추론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보면 그냥 알게 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 문자를 배움으로써 (어디에서든, 언제든 적용 가능한) 추론과정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저 대답은 틀린 답일 뿐이다.{{) 『구술문자와 문자문화』 발터 옹 지음, 이기우·임명진 옮김, 문예출판사(1995)를 참조하였다.
}}
위의 사례에서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대답이 정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각각의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이루어진 대답이기에 둘 다 모두 정답일 수도, 오답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이 사례를 인용한 이유가 상대주의에서처럼 모든 판단을 중지하자고 주장함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식의 판단이든 그것 자체는 이미 때가 묻어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익숙해진 우리의 관점이 중립적이며 객관적이고 따라서, 그 어떠한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고집하는 모습은 이미 다른 논리나 다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오만함을 스스로 선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합의회의 마지막 날 이루어진 기자회견에서 한 전문가패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필자에게는 너무나 반가웠다: "원자력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시민들과 대화하는 법이 미숙한 것은 사실이나 원자력과 관련된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우리 안에서도 이에 대한 성찰이 있다."{{) 프레시안 <'원전건설 중단' 합의까지 '시민 16인'의 3박4일> 중에서, 약간 변경함.
}}
주제어
생태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