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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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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 비판 ③] 독일 사례를 통해 본 사회적 합의주의

이규철 |
독일 사례를 통해 본 사회적 합의주의

이규철(노동차장)

1. 他山之石
독일은 노사간의 공동의사결정체계가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는 나라다. 이는 한국처럼 몇 년간의 투쟁과 협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독일 노동운동의 긴 역사만큼의 오랜 시간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과거를 되돌아 보라 했다. 사회적 합의주의가 노동운동을 휩쓸고 있는 지금, 독일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

2.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
독일에서 형성된 노사 공동의사결정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를 먼저 간단히 살펴봐야 한다. 독일의 노사관계라는 것이 독특하고 오랜 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를 몇 시기로 나누어 특징적인 부분들을 검토해보자.

1시기: 독일 노동운동의 태동(1840-1918)
이 시기는 독일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등장하면서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1844년 슐레지엔 방적공들의 파업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1860년대부터 위로부터의 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독일에서는 본격적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하고 이념적으로도 자유주의, 라살레주의 등으로 분화된다. 그러나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합하고 군국주의적 정책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자 탄압법'으로 인해 독일 노동운동은 큰 시련을 맞게 된다{{) 비스마르크 정권이 도입한 사회주의자 처벌법은 모든 노동자조직과 노동자언론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비스마르크 정권은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을 국가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
}}.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독일 노동운동은 의회에 13명을 진출시키는 등 영향력을 점점 강화한다. 결국 1890년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되고 난 후 30만 명 이상의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독일 노동조합 중앙위원회'가 설립되어 이른바 '자유노조'(Freie Gewerkschaften)가 탄생했다. 자유노조는 아직 산별이라기보다는 직업별 조직의 성격이 강했으며 조합원 권익신장,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등을 놓고 단체협약을 체결해나갔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독일 사민당 다수파가 전쟁참여를 지지하면서 자유노조도 민족적 이해가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체제 자체의 변화보다는 체제 내 개선을 지향했던 자유노조의 성향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독일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본격적 시작과 아울러 투쟁 속에 형성되었으나 내부 분열과 이념적 한계-체제 변혁에 대한 명확한 상의 부재-에 의해 경향적으로 체제에 통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시기: 11월 혁명부터 바이마르 공화국까지(1918-1933)
1918년 독일 노동운동은 11월 혁명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11월 혁명과정에서 북부독일의 키일해병들의 반란과 뮌헨 혁명, 베를린의 투쟁 등을 통해 노동자, 농민 병사를 아우르는 평의회가 독일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이런 투쟁을 통해 독일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이행한다. 이를 통해 탄생한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평의회 운동을 주도했던 급진적 세력에 의해 건설된 것이 아니라 개량주의 세력의 타협과 협상의 산물이었다. 이는 1918년 11월 협정{{) 11월 협정은 독일 노사관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turning point)을 이룬다. 그것은 이 협정이 기존의 전제적인 노사관계를 유지시켜 왔던 구조를 해체시키고 집단적 노동관계에 입각한 새로운 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11월 협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노동조합'의 공식적 인정과 남여노동자의 '단결권'을 합법적으로 보장. ② 회사조합(어용노조)에 대한 원조를 중지할 것. ③ 구체적 노동조건을 '단체협약'으로 결정할 것. ④ '노사동수'로 된 분쟁조정위원회의 설치를 협약에 포함할 것. ⑤ 근로자 50명 이상의 기업에 '노동자위원회'를 설치할 것. ⑥ 직장알선을 노사공동으로 관리할 것. ⑦ 1일 '8시간 노동제'를 실시. ⑧ 이상의 협정실시 및 사후문제의 협의기관으로 '노사동수'의 중앙위원회를 설치함. 사실 11월 협정은 내용적으로만 보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나 문제는 이런 협정이 임시방편적인 것이었으며 불안정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난다. 전쟁과 자본주의 자체에 저항하는 혁명적 대중들에 대해 부르주아는 개량적인 사민당 다수파와 노조지도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건설하게 한 것이다. 이런 태생적 한계속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여전히 혁명적이었던 평의회운동{{) 1919년 2월과 4월 루르지역 탄광노동자들에 의한 총파업, 3월 베를린 노동자들의 총파업, 4월 뮌헨의 '레테공화국' 선포와 내전의 발생(노동자 약 1천 명 정도 살해됨) 등
}}을 체제내화한다. 1920년 제정된 '노동자평의회법'이 그것인데 노사 공동의사결정 등을 명문화하기는 했으나 평의회의 파업권을 부정하고 노사의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할 의무를 부과하는 등 그 한계는 명확한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혁명적 대중운동을 체제내화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지지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찌당을 음양으로 지원해 혁명적 대중과의 세력균형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결국 나찌당을 키워주는 결과를 나았으며 결국 나찌당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 붕괴된다.
이 시기 독일에서는 분업화, 단순작업의 확대 등 테일러리즘이 본격화되는 생산의 합리화가 시작된다. 이에 대해 사민당 다수파와 노조지도자들은 이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생산합리화가 사회 진보로 이루어질 거라는 생산력 주의-하고, 이 과정에서 평의회운동은 패퇴하고 만다. 이를 통해 독일 자본주의는 1929년 공황까지 상대적 안정기를 유지하고, 노동운동은 체제 자체에 대한 정치투쟁에서 분배를 위한 경제투쟁으로 경도된다.

3시기: 나찌 시대(1933-1945)
나찌가 권력을 잡았던 이 시기는 독일 노동운동의 암흑기다. 집권 후 4개월이 안되어 대부분의 노조와 운동조직이 파괴되고 그동안의 제도적 성과물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모든 저항운동은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에서는 포디즘적 발전체계의 기초가 형성되어 1950년대 비약적 발전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4시기: 본격적 산별체계의 시작(1945-1968)
2차대전 후 독일 노동운동은 본격적 산별노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광범위한 연대를 위해, 또 한편으로는 나찌즘의 재발호를 막기위한 연합국의 이해관계속에 16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 1949년 결성된다{{) 독일 산별노조의 3대 기본원칙; 1산업 1노조의 원칙, 1기업 1노조의 원칙, 그리고 정치적 독립의 원칙(조직적 자주성을 의미)
}}.
한편 이 시기 독일의 부르주아들은 포디즘적 축적체계를 본격화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체제내화하기 위해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을 실시하고 대량소비의 확대를 꾀한다. 이는 국가에 의한 노사공동의사결정의 보장과 노동자 경영참가를 통해 노사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독일의 산별노조 역시 이 과정에 함께 하면서 경제주의적 이익 추구를 본 목적으로 삼게 된다. 이런 과정은 노동조합 상층부와 기층 노동자, 노조와 노동자평의회 사이의 분리를 낳게 되고 근본적으로 노동자, 혹은 노동자조직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5시기: 산별체계의 안정화에서 신자유주의로(1968-현재까지)
1966/67년 공황을 거치며 독일 부르주아들은 산업합리화를 적극 추진한다.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강화라는 상황에 대해 노동자들은 69년 가을 전국적 파업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노조 지도부는 산업합리화과정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노조의 영향력을 합리화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참여와 형성정책을 내세운다. 부르주아들도 이에 동조하며 '노동생활의 인간화'라는 일종의 유화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1970년대에서 1980년대를 거치며 독일 부르주아들은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기조를 받아들이며 적극적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이런 부르주아들의 공격에 대해 독일 노조는 이에 대해 적극적 저항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통해 문제해결을 꾀하기 시작한다.

덧붙여: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노동조합
이런 과정에서 독일 통일은 노동운동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독일의 통일과정(여기서는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통일협정이 조인된 이후의 과정을 말한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3차원의 정화사업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헤어진 이산가족이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시간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차원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나 산업구조 전체를 서독 자본의 필요에 맞게 바꿔내고('시장경제'라는 경제적 차원), 둘째로, 이것과 맞물리면서 노동자의 내부구성, 세력관계, 사회적 의사결정의 구조를 완전히 새로 짜 맞추며('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차원), 셋째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위방식을, 즉 일상적 삶의 방식을 서독의 기준에 맞추어 내는(사회적 차원) 것이다.
이런 통일과정에서 서독 노조는 통일 이후의 사회재편에 대해서는 부르주아들에게 맡겨버린 채 조합원을 늘리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통일 이후 서독의 부르주아들이 추진한 동독의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대해 노동운동은 거의 방관으로 일관해버렸다. 물론 독일의 노동운동은 동독과 서독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투쟁을 전개했으나, 이 역시도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동독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자본주의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현재 독일의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를 거스르는 흐름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3. 독일의 노사 협상과정
독일에서 노사 협상의 주체는 대부분 산별노조와 사용자단체다. 이들간의 대표협상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독일의 일반적인 노사협상이다. 산별수준에서 맺어진 단체협약은 기업수준에서는 임금 및 근로조건의 '최저수준'으로 인정되며 각 기업별로 이 협약에 기반해 세부 협상을 한다. 이때 세부협상의 노동자측 주체는 공장/노동자평의회다. 이 평의회는 한국의 노사협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지니며 경영참가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영참가의 수준은 임금 및 노동조건에 관한 공동의사결정 및 각종 이의제기와 협의를 할 수 있는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파업은 산별수준에서만 가능하며-단사에는 노조가 없고 평의회만 있기 때문에-평의회의 파업은 불법이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독일에서 노조가 파업을 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단체협약 체결시 합의가 안돼 쟁의행위에 돌입하면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75%(!)이상의 찬성이 나오고 4주간의 '평화기간'(냉각기간)을 거친후 파업에 돌입해야 합법파업이 된다. 처음 단체협상부터 파업 돌입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석달 정도다. 덧붙여 파업기간에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어 노조에서 파업참가조합원들의 임금을 지급한다. 한마디로 파업에 돌입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며 노조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이유로 독일의 산별노조들은 가능한 파업을 피하려 하며 파업 돌입전에 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붓는다{{) 지난 1995년 2월 말에 이뤄진 금속노조 바이에른 지구의 파업은 이를 잘 증명한다. 즉 금속노조는 바이에른주에서 '파업을 해도 망하지 않을 기업' 120개를 고른 뒤, 그 중 '소비자와 중소납품업체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는' 22개 공장에서만 파업을 개시했다. "노동조합은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독일 금속산업의 국제경쟁력을 해치거나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
독일의 노사협상과정을 통해 우리는 독일의 노사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산별노조와 평의회의 경영참가 및 공동 의사결정은 존중하고 이를 근거로 파업투쟁에 강력한 제한을 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독일의 노사관계가 갈등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협조적이며 덧붙여 경영참가와 공동의사결정을 통해 노조가 기업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가 실제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4. 폭스바겐 사의 노동시간 단축 협상 사례
독일 폭스바겐 사의 노동시간 단축 협상은 93년 11월 사측의 30%인원감축계획 발표에서 시작되었다. 폭스바겐 사는 애초에는 노동과정 혁신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꾀했으나 이것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잉여인력의 과감한 정리를 통해 기업의 노동유연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인원감축 계획은 구체적으로 당시 10만 3천 2백 명인 국내 노동자를 95년까지 7만 1천 9백 명으로 30%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무려 3만 명의 노동자를 '정리'하겠다는 이 계획에 대해 폭스바겐사의 노동자평의회와 독일 금속노조는 사측에 협상을 요구한다{{) 폭스바겐 사는 독일의 사용자단체에 가입해있지 않기 때문에 금속노조와 폭스바겐사가 직접 협상을 하는 대각선 교섭구조를 가진다.
}}. 이에 사측에서도 적극 협상에 나섰고 결국 세가지 주요원칙에 기반한 단체협약을 맺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 4일제'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 유연화: 교대제를 통해 주 4일 28.8시간 노동{{) 당시 노동시간은 주당 36시간제였는데 이를 20% 감축하면 28.8시간으로 된다.
}}에 주 5일 공장 가동한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20% 줄어든 대신 세후 소득의 12-13%를 삭감하지만, 생계비 보전을 위해 보너스나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정상 월급여로 계상한다. 그리고 주당 35시간이 넘는 노동시간분에 대해서는 금전적 보상과 함께 시간외 노동에 대한 보상 휴가를 부여하는 방식(노동시간 계좌제도, Arbeitszeitkonto)을 도입했다.
둘째, '미혼자 탄력근로제': 30세 이하의 미혼자 4만 명은 1년 중 8∼9개월 근무만 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 3∼4개월은 취미생활이나 신설 공공직업훈련원에서(공공실업기금 보전) 계속교육, 직능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이를 Block-Modell, 블록시간 모델이라고 함).
셋째, '직업훈련생과 고령자 파트타임제': 수천 명의 직업훈련생이나 고령자는 주당 28.8시간 미만으로 일하게 하면서도{{) 직훈생(Azubi)의 경우 첫해는 주 18시간, 둘째 해는 주 20시간, 셋째 해는 주 24시간, 넷째 해는 주 28시간 노동.
}} 타기업에 대체노동력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거나 서서히 노동시간을 줄여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정년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한다.{{) 50세 이상의 고령자는 정년의 3년 전에는 주 24시간, 2년 전엔 주 20시간, 1년 전에는 주 18시간만 일하게 함. 그리하여 매끄럽게(glatt) 정년 생활로 적응이 되게 만들고자 함.
}}
결국 폭스바겐사의 고용조정은 한마디로, 임금축소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의 완벽한 유연화로 정리된다{{) 고용조정의 결과 대부분의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월 급여는 전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각종 상여금과 수당을 월급여에 포함시킨 결과로 연봉으로 계산했을 때는 전보다 약 11%정도 감소하게 되었다.
}}. 이는 사측 입장에서 보면 임금 총액의 축소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생산성 향상, 노동시간 유연화로 인한 공장 가동시간 연장 등 여러모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또 폭스바겐사의 '주 4일 근무제' 협약은 그 자체로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도 중요한 초석이었다. 즉 작업교대제와 노동시간이 그로 인하여 유래 없이 유연화될 수 있었고, 그 사이에 독일 내 10개 폭스바겐 공장들에서만 약 150 가지의 노동시간 모델이 실시될 정도로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위의 협약이 노사가 모두 좋은 윈윈전략은 분명히 아니었다. 협약의 4조 1항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용안정을 이루기 위해서 경영상의 이유로 배치전환과 전근 등이 불가피하므로, 모든 소속노동자는 회사측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업을 두말없이 수행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주 4일 근무제' 협약은 1995년 말, 1997년 말에 가서 효력이 끝나고 비슷한 내용의 새로운 협약이 맺어졌지만, 이 노동력의 유연한 사용에 관한 특별조항은 그에 관계없이 효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 개인의 '시간'에 대한 권리를 완전하게 사측에 '양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시간의 끊임없는 변동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박탈한다. 개인적으로는 규칙적 생활의 불가능으로 인해 건강 및 사회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며, 작업장내에서도 집단적 유대형성이 힘들어져 단결의 저해요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 자동차 공장내에서 탄압의 방법으로 노동자를 주간조에서 야간조로 옮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를린 금속노조 지부의 W. Hajek에 따르면 주 28.8시간 근무는 주당 4일 근무가 아니라 1년단위의 변형근로시간제이며 그나마 각 공장별로 4주에서 4개월 정도밖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반면 인건비 30% 절감, 생산의 유연화, 노조의 협조주의적 통합 강화 등 사측의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간 것이 이 모델의 특징이다. 또 한국에서도 쟁점이 되었던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삭감이 노조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각종 휴가와 수당의 폐지, 초과근로수당 지급조건의 강화(주35시간 이상)등도 큰 문제점이다. 무엇보다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하를 바꾸자는 경영측의 제안에 대해 조합원들의 의사를 제대로 묻지도 않은 채 별 다른 독자적 대안의 모색이 없이 너무도 쉽게 수용적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이는 노사간의 협조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철저한 부르주아적 명분아래 노조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이후 독일노총과 금속노조는 이와 비슷한 성격의 협약을 계속적으로 사용자와 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의 적극적 동반자로 전락하고 만다{{) 독일 사민당 집권이후 98년에 창설된 '일자리를 위한 동맹'은 독일을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구상이었으며 독일노총은 이에 적극 동참한다. 또 2004년 금속노조는 폭스바겐사와 새로운 단체협약을 맺는데 협약의 주요 내용은 향후 7년간의 고용보장을 조건으로 임금동결 및 노동자간 임금차별, 노동시간 유연성의 강화, 초과근로수당 지급조건의 강화 등이다.
}}. 독일 노동운동의 슬픈 역사다.

5. 총평가
많은 이들에게 독일 노동운동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왔다. 확고하게 자리잡힌 산별노조체계와 노사공동의사결정 등이 그 주된 부러움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변혁을 소망하는 이들에게 독일 노동운동은 마냥 부러운 대상일 수만은 없다.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럽다기보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독일의 평의회는 처음 봉기했을 때의 혁명적 지향을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강제로 거세당한 채, '협의회'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대중의 투쟁의 성과를 나찌에게 넘겨버렸다. 나찌 몰락이후 독일 노동운동은 산별노조를 통한 사용자와의 협상과 합의를 주목적으로 한 철저히 실리주의적 지향으로 경도되고 만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6-70년대를 거치면서 강력하게 시행된 사회보장제도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및 노동조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앞에 지금 독일의 노동운동은 무능하기만 하다. 사용자측과 다양한 협상을 체결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지켜내는 듯 하나 그 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대한 완전한 동의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다. 개량의 유혹에 홀려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린 것이 현재 독일 노동운동의 현 주소다. 독일 노동운동을 우리의 현 상황에 대한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독일 노동운동은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대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6. 나가며
알튀세르는 노동조합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전 사회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잘 들어맞는 말이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의 동의는 조합원의 동의로 등치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노동조합이 부르주아들과 어떤 합의를 이룰 경우 그 합의는 노동자대중과의 합의로 인식되고 신자유주의는 전체 대중의 합의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관철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반대하는 노동자대중의 역동성은 질식되어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해만이 대변된 앙상한 '합의'뿐이며 노동조합은 '부적절한'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노동자대중의 피 어린 투쟁으로 만들어진 민주노조와 방대한 체계, 그 체계가 지금은 대중의 역동성을 질식시키고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의 지지대가 되고 있다면,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투쟁의 성과들이 밑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면 작은 기득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봐야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의로 강한 걸음을 준비해야 할 때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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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법 이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