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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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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FTA 6차 협상 저지 동경 원정투쟁 3일간의 이야기

류미경 |
한일 FTA 협상 저지 투쟁으로 하나 된 한일 노동자-민중

지난 11월 초 일본 동경에서 한일 FTA 6차 협상이 열렸고, [자유무역 WTO 반대 국민행동],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으로 꾸려진 [반세계화 공동투쟁 기획단]은 약 90여 명의 '한일 FTA 6차 협상 저지 일본원정투쟁단'을 조직했다. ['이의있음! 한일 FTA' 캠페인], [아탁 재팬],[젠토이츠노조], [평화포럼]등 일본의 사회운동은 한국 원정투쟁과 함께 공동 활동을 펼치기 위해 '11월 한일 FTA 저지 공동행동 실행위원회'를 구성했다. 2002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1차 협상 당시에는 '한일 민중 공동성명서'를 긴급하게 조직하여 양국 정부에 초국적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며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짓밟는 한일FTA 협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정부간 협상은 2개월에 한번씩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진행되었는데, 이때마다 양국 사회운동들은 협상장 앞 시위를 조직했고, 참여 인원은 회를 거듭할수록 늘어, 지난 8월 경주에서 열린 5차 협상에는 약 500여명이 모이게 되었다. '한일 FTA 산관학 합동 연구회' 등 한일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한일 FTA 체결로 관세가 철폐되면 현재 관세가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이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 규모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에, 전경련 등은 정부에 공산품에 대한 관세 철폐를 유보하거나 시기를 늦춰줄 것과 중소기업체들의 피해산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등 국내자본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찾고 있다. 그러나 양국 민중에게 놓인 한일 FTA의 문제가 이들처럼 양국 사이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었다면 양국 민중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국 민중은 한일 FTA가 국경과는 상관없이 투자의 범위와 영역을 확대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초국적 자본에 최적의 환경을 선사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일 FTA 협상에서 교육,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자유화가 WTO 도하개발의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 등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무역장벽으로 취급하고 있는 점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동권, 환경권,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등 민중들의 제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한일 FTA를 저지하는 투쟁에 양국의 민중들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연대의 시작, 서로에 대한 이해로

한일 민중들의 만남. 이토록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행동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이긴 했지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행동을 펼치는 것을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동 활동 기간은 고작 3일이었기 때문에, 원정투쟁단의 활동 목표는 한일 FTA 체결에 대한 양국 민중의 반대의 목소리를 양국 협상단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돌아온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설정되었다. 그러나 원정투쟁단과 일본실행위의 조건은 너무도 달랐고,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한국의 원정투쟁단에게 동경은 언어도 다르고 지리도 낯설고 스스로의 행동이 어떤 효과를 낳을지 예측하기 힘든 매우 생경한 곳이었다. 일본의 실행위 역시 이런 대규모의 원정투쟁과 공동 활동을 펼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정투쟁단은 한정된 시간동안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행동을 하고자 했으나,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동경에서 벌어지는 어떤 상황에 대해 즉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실행위는 원정투쟁단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모조리 발휘하고, 그럼으로써 침체된 일본의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하고 있었으나, 스스로의 역량이 마음만큼 이를 지원하기에 충분하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공동 활동이 최대한의 성과를 남기도록 하기 위해, 원정투쟁단과 일본 실행위는 서로가 처한 조건,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3일간 진행된 투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이를 훌륭하게 해냈고, 서로서로를 진정한 동지로 가슴에 담았다.

외무성 앞 연좌농성, 경단련 항의방문, 시부야 거리집회…

원정투쟁단의 기본적인 활동계획은 협상이 진행되는 일본외무성 앞에서 연좌농성을 진행하며 협상중단을 요구하는 것과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한일FTA가 정하는 '비관세 무역장벽'에 포함시켜 없앨 것을 주장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 앞에서 항의시위를 전개하는 것, 양국 정부가 협정문안을 합의하고 나면 비준절차가 이루어질 국회 앞,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한일 FTA의 반민중성을 알려내는 것들로 구성되었다. 동경 시내 중심지인 시부야 공원 근처에서 거리시위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투쟁형태인 외무성앞 연좌농성도 일본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한번도 이런 형태의 투쟁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원정투쟁단이 일본에 도착하기 직전, 코우다라는 일본청년이 이라크에서 납치되어 참수 당한 사건이 있었고, 일본 정부는 바로 그 즈음을 대테러 대책기간으로 정하고 있어서 정부 건물 주변 경비가 강화된 상태였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날 밤, 연좌농성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일본실행위가 마련한 방안들을 공유하고, 한일FTA 체결에 대한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출하겠다는 의지들을 확인하며 다음날을 예비했다. 20년 만에 처음인 정부청사 앞 연좌농성이 어떤 양상을 그릴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협상이 개시된 11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외무성 근처의 히비야 공원에는 원정투쟁단을 포함하여 250명 가량이 모여들었고, 간단한 결의대회를 진행한 후 외무성 앞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경시청소속 기동대(그러나 차림새는 한국의 전경과는 매우 다르다. 헬멧, 방패, 곤봉 아무것도 없었다)는 외무성 앞길을 막아섰다. '니칸 FTA 쿄쇼 야메로!(한일 FTA 협상 중단하라!)', '한일FTA 중단하라!' 한국어와 일본어 섞어가며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중, 한국 정부 협상단을 실은 버스가 외무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위 참석자들이 외무성 앞으로 다가가 항의하며 이를 가로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원정투쟁단은 대열을 가다듬고 길 건너편 신호등의 파란 불이 들어오는 것을 신호로 하여 스크럼을 짠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경찰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스크럼을 짜고 있는 원정투쟁단원들의 목을 조르며 인도로 밀어 넣으려 했다. 순식간에 일본의 참가자들이 원정투쟁단 사이를 헤치고 경찰 앞으로 다가섰다. 원정투쟁단원들은 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일본 참가자들의 행동이 경찰과의 충돌을 막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원정투쟁단을 경찰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일민중 공동기자회견부터 유라쿠쵸 마리온 이라는 번화가 선전전까지, 이날의 활동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하루 일정이 끝난 후, 다음날의 투쟁 수위를 둘러싼 일본 실행위와 원정투쟁단 상황실간의 격렬한 논쟁이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일본 실행위는 이날 아침 외무성 앞에서 벌어진 격렬한 몸싸움으로, 경찰의 대응은 더욱 강화될 것이고, 일본의 법에 의하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이 따를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따라서 다음날까지 연좌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며, 계획을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원정투쟁단 상황실은 한계적인 조건임을 감안하더라도 연좌시위를 지속하는 것이 투쟁단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는 입장을 폈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서로의 조건과 의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다음날 현장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상황을 공유한 원정투쟁단은 다음날의 투쟁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조별로 모여 밤늦은 시간까지 토론했고, 이를 지켜보는 일본 실행위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토론에 합류하여 마음은 원정투쟁단의 의지만큼 함께 투쟁하겠지만 몸은 경찰 앞에서 원정투쟁단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달하는 일본 활동가도 있었다.

날이 밝자 히비야 공원은 또다시 외무성앞 시위를 전개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외무성으로 향하기 직전 일본실행위는 원정투쟁단 상황실에 긴급한 메시지를 전했다. '구속을 감수하고서라도 원정투쟁단이 정하는 수위의 투쟁을 함께 하겠다. 그러나 원정투쟁단이 경찰에 의해 다치는 일이 없도록 일본인들이 앞장서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외무성으로 향하는 원정투쟁단의 발걸음은 힘이 넘쳤다. 전날과 달리 방패며 곤봉으로 무장한 채 외무성을 감싸고 있는 경찰을 바라보는 일본 참가자들의 눈빛에도 힘이 넘쳤다. 서로의 손을 굳게 잡은 채 더욱 목소리를 높여 항의의 뜻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이날 시위에서 경찰의 진압으로 두 명의 원정투쟁단원이 부상을 입고, 전일본운수노조연대 소속 노동자 한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국회 앞 시위, 경단련 항의시위, 마루노우치 경찰서 앞 항의시위, 일본외무성 항의면담까지 힘찬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시부야 거리시위에는 전노협, 이주노동자들이 주된 조합원인 카나가와시티 유니온을 비롯 500여명이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든든한 동지를 얻었다는 기쁨에 지칠 줄을 몰랐다.

'원정투쟁단이 침체된 일본 운동에 활력이 되어주길…'

일본의 3개 노총 중 가장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렌고(聯合)는 한일 FTA의 필요성을 긍정하지만, '일본'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공산당 계열의 젠노렌(全勞聯)은 한일 FTA가 반민중적이라는 입장은 공감을 하지만, 실행위에 결합하고 있는 여타 일본 단체들과의 관계상 원정투쟁단과 직접 공동투쟁을 벌이기는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원정투쟁단과 행동을 함께한 일본실행위를 구성하고 있는 단체들은 가장 작은 규모의 노총인 젠로쿄(全勞協),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고 있는 젠토이츠(全通一)노조 등과 반전-반세계화 투쟁을 강화하여 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풀뿌리 사회운동들이었다. 시위 참가자들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동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침체된 일본운동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국철이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해고된 조합원들이, 민영화를 수용하며 사측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새롭게 구성된 노동조합의 외면 속에서 18년간 원직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며 조합원들의 자주적인 활동을 제어하는 어용노조에 맞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14명의 인원으로 새로운 노조를 설립하는 모습…. '복지는 국가가 책임 질 테니 노조는 투쟁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노동운동이 받아들인 후의 모습이라고 했다. 일본의 운동은 원정투쟁단에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지만, 원정투쟁단은 침체된 일본 사회운동에 활력이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마무리하며

6차 협상이 끝난 직후, 한국 정부는 한일 FTA 협상을 내년 중으로 타결한다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으나, 서두르지 않을 것이며, 한중 FTA, 한미 FTA 체결을 함께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국내자본이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한 협상안을 일본 측이 쉽게 수용하지 않은 탓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정부 협상단은 원정투쟁단의 항의면담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국내자본의 요구대로 관세철폐 등 무역자유화의 일정을 조정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지언정, 초국적 자본의 이해보다 민중의 권리가 우선해야 한다는 양국민중의 요구는 청취조차도 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 원정투쟁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진행했던 '한일FTA 저지 전략 워크샵'에서는 한일 양국 민중의 연대투쟁을 이번 원정투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가자는 의견이 오고갔다.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릴 WTO 6차 각료회담 저지투쟁에도 한국과 일본의 사회운동이 아시아지역 사회운동의 합력을 모아내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3일 동안 다져진 서로에 대한 신뢰와 동지애가 그 바탕이 될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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