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가을.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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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이유미 |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1. 문제제기

 
지난 5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윤미향 의원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을 둘러싼 비리 의혹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사안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은 윤미향 의원을 두둔하며, 비판하는 세력을 친일 토착왜구로 비난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문재인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모호한 태도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 대선공약으로 2015년 한일합의의 재협상을 내걸었으나, 막상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는 합의를 파기하지는 않으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실상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이에 이용수 할머니로서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초조한데, 한일합의 인정도 파기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를 지속하는 문재인정부에 불신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가 여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자 배신으로 여겼을 수 있다. 즉, 문재인정부와 윤미향의 결탁에 불만을 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정부 지지자들은 이용수 할머니가 정신이 온전치 않다거나,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5월 25일 두번째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윤미향 전대표가 사리사욕을 채우려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고 비판했다. [출처: 뉴시스.2020.5.25]

둘째로, 위안부 문제를 교착상태로 만든 문재인정부와 정의연의 책임이 크다. 2015년 한일합의는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사죄, 일본 정부 예산을 통한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과거보다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정의연은 한일합의를 박근혜정부의 적폐로 몰아 파기할 것을 주장했다. 핵심 근거는 합의가 피해자중심주의에 어긋나고, 일본 정부가 법적인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합의 당시 생존자 47명 중 34명이 보상금을 수령했다. 이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피해자중심주의가 아닌가. 또한 문재인정부는 박근혜정부와 다르게 일본으로부터 법적인 책임 인정을 받아낼 현실적인 방안이 있는가. 

문재인정권과 민주당은 보수정권을 친일파로 몰아세우고 정통성 있는 세력으로 자임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활용하고서, 해결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일본 탓만 하며 손 놓고 있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인다. 정의연이 민주당의 반일민족주의를 정당화해주는 대가로, 집권 이후 정부의 지원과 윤미향 전 대표의 국회의원 공천을 약속받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정의연은 2015년 합의 파기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나, 문재인정부는 공약을 이행하지도 않고 일본에서 받은 10억 엔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반정부 투쟁은커녕 윤미향 전 대표가 여당 비례의원으로 공천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처럼 민주당과 정의연이 반일민족주의 전선에 함께 서게 된 것은 과거사 청산에 몰두하는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사를 친일파와 독립투사, 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이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로 바라보며, 과거사 청산을 모든 개혁의 근본이자 도덕의 근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일제 식민통치가 남북한의 분단과 한국전쟁을 초래했고, 그래서 독재정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단선적인 역사인식을 전제한다. 이에 따라 만악의 근원으로서 일본에 맞서는 것을 정부의 정통성,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연결하여 역사를 정치화한다. 

셋째로, 위안부 문제가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로 빠지게 된 이유는 문재인정부의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의연이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 여성들이 식민지 시기 위안소에서 폭력적 상황에 부닥친 것과, 귀향하고 나서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바로잡는 노력과 오늘날의 우리를 성찰하고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일본이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것과, 피해자들을 침묵시킨 한국 사회의 여성 억압적 구조를 성찰하고 바꿔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진상규명을 토대로 역사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가해자 일본에 책임을 묻는 운동으로 표상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의연과 지지 세력은 일본에 책임을 물으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 성찰도 하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단적으로 ‘평화의 소녀상’에서 확인되듯이,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 가해자의 잔혹성을 부각하고 한국을 피해자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여기서 한국 사회가 피해자들을 낙인과 배제 속에서 고난을 겪게 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잊히고, 시민사회의 역할도 일본을 압박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한국사회의 성찰은 등한시되는 것이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있어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것보다 ‘민족의 피해를 보상하는’ 맥락을 우선시하면서, ‘법적 책임’이라는 사죄·보상 형식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본에 법적 책임을 강제할 경로가 부재하다. 정의연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하 국민기금)보다 진전된 측면이 있는 2015년 한일합의를 법적 책임 인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효를 주장한다.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법적’ 형식만이 피해자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죄·보상 형식에 대한 피해자들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의 성격과 해결을 위한 접근방식을 제시하고, 정의연의 활동 쟁점을 평가하며, 국민기금과 2015년 한일합의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위안부 문제의 성격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의 비극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사고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즉, 당시 위안부제도가 가능했던 구조는 무엇이며, 앞으로의 역사에서 반복되지 않기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위안부 제도가 가능했던 역사적 조건을 확인하고, 피해자들이 50년 가까이 개인의 수치로 여겨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위안소 제도의 토대가 된 공창 제도1

위안부 제도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공창 제도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일본의 공창제도는 풍기 단속과 성병 예방을 명목으로 실시되었으며, 유곽을 설치하고 영업허가를 가진 여성에게 성매매와 장소를 제공하는 업자를 인정하는 형태로 존재했다. 창기가 되겠다고 계약할 때 부모를 연대 보증인으로 삼았다. 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성매매 업자에게 전차금이라고 불리는 돈을 빌려, 갚을 때까지 일을 그만둘 자유가 없었다. 수입은 적고 빚은 크게 불어나 돈을 갚기도 어려웠다. 공창 여성들은 법률로 정한 폐업의 자유가 있으나 전차금에 매여 사실상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손님을 선택할 자유, 외출의 자유(1933년부터 법률상 허용), 거주의 자유가 없는 상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공창 제도는 개항시기 일본인 거류지역 성매매 단속을 위한 것으로 출발하여, 병합 이후 제도를 확대 실시했다. 식민지 수탈로 농민들의 경제적 곤궁이 심화되고 도시빈민층이 늘어나는 가운데, 여성들이 전차금에 팔려가 공창제로 유입되었다. 부모가 딸을 팔거나, 양부모가 양녀를 키워서 파는 경우도 있어 업자들이 농가의 소녀를 대거 양녀로 사들이는 편법이 자행되었다. 공창 제도 자체가 부모와 본인의 ‘승낙’을 받은 사실상의 인신매매인데, 이러한 제도가 더욱 ‘위법적’인 인신매매를 성행하게 했다. 남편이 부인을 팔거나, 여성을 납치 강간 후에 팔아넘기는 경우, 취직 등을 약속하며 감언이설로 꾀는 경우도 상당했다. 

일본이 공창제를 정당화했던 논리는 양가의 부녀를 보호하기 위해 창기가 필요하다는 것과 병사들의 성병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을 정숙한 현모양처와 창기로 나누는 구도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팽창하면서, 군국의 어머니와 위안부라는 구도로 확장되었다. 천황제 국가의 기본단위인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창기 이외의 일본인 여성을 위안부로 징집하지 못하도록 하여, 위안부 대부분은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으로 채우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러일전쟁을 거치며 아시아 침략을 확대했다. 공창제와 성매매업의 해외송출도 이와 궤를 함께하였다. 조선에 도입된 일본의 성매매업이 해외송출로 확장되면서 조선의 여성들은 중국이나 시베리아, 동남아시아로 팔려나갔다. 전쟁이 확대되고 일본군 부대가 각지로 진출하면서 위안소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조선이나 중국 여성들은 일본 공창제도의 최하층에 편입되어 태평양전쟁기 위안소의 최대 공급원이 되었다.    

위안소로 모집된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농촌의 빈곤계층이었다. 창기를 모집하던 업자들이 위안부 모집에 활용되었으며, 일부 관헌에 의해 모집되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모집 방식 역시 공창제와 유사하게 아버지나 남편에 의해 팔려가거나, 사기 감언(“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일이 있다, 병원에서 붕대 감고 세탁하는 일이다, 애를 보거나 밥하는 일이다” 등)에 속아서 가게 되는 경우가 상당했다. 납치·유괴되는 사례도 있었다. 여성들이 약속과 다르다고 저항하더라도 이미 해외로 멀리 이동해왔고, 위안소에 도착하기까지 쓰인 비용의 몇 배를 여성들에게 빚으로 씌웠기 때문에 달아날 수 없었다. 

조선의 위안부를 대규모로 동원하는데 토대를 제공한 것은 공창제도였으며 동시에 식민지 수탈로 인한 빈곤과 차별,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가부장적 질서가 작용하였다.  
 

2) 일본군 위안소의 특성

일본군 위안소는 공창제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졌으나 차이점이 있다. 공창제와 다르게 책임 주체가 군이었다. 군에서 위안부 모집 명령을 하달하여 여성들을 모집했고 위안소까지 군용선으로 이송했다. 업자에게 운영을 위탁하더라도 위안소에 대한 감독과 통제도 군이 맡았으며, 성병 검사 역시 군의관의 책임이었다. 위안소는 군법이 적용되었고 여성들은 군인의 성적 상대가 될 것을 강요받았다. 위안소 여성들에게는 공창제가 명목상으로나마 보장하는 폐업의 자유나 외출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투지에서 군의 강간 사건이 다수 발생하자 이를 명예를 실추하는 문제로 간주하고, 강간 방지를 위해 군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다. 그러나 강간 방지에 성공하지 못했다. 둘째, 성병 예방의 목적이다. 그러나 여성들을 아무리 단속하더라도 병사들이 이미 성병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셋째, 성적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군 내부의 위계질서 아래서 생겨난 병사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전장에서 생긴 극도의 긴장을 폭력적으로 해소하는 장소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넷째, 병사들이 점령 민간 매춘업소를 드나들면서 비밀을 발설하는 것을 우려하여 설치하였다.2

이러한 위안소 설치 이유에서 제도의 정당화 논리를 살펴볼 수 있다. 병사의 성욕은 억제할 수 없다는 인식은 전투지에서 병사의 강간은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즉 일반 부녀를 지키기 위해 위안소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는 남성의 성욕은 배출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강간이 발생한다는 통념의 전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남성의 욕구 충족을 위해 여성을 배출구로 비인격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발상이 성폭력을 양산하는 핵심구조다. 결국 앞서 지적한 것처럼 위안소 설립으로 강간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3
 

3) 강요된 침묵

전쟁이 끝난 뒤 위안부 여성들은 전장에 방치되어 상당수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한 여성들은 귀국할 방법이 없거나 돌아가길 거부하여 해외에 잔류하기도 하였으며, 가까스로 귀국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귀환자들은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꺼렸고, 돌아간다더라도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가 그녀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몸을 더럽힌 여자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버지나 남편에게 쫓겨나거나, 후유증으로 불임이 되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기존 가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가족에 편입되기도 어려웠던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성 산업, 식당종업원, 술집, 식모 등의 일을 하면서 간신히 먹고 살았다. 여성의 사회경제활동이 크게 제약되었던 당시, 선택의 폭은 좁았고 빈곤을 면하기 어려웠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폭로하기 전까지, 전 위안부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한 것은 정조를 상실한 여성이라는 사회적 낙인이었다. 정조를 기준으로 여성을 분류하는 사고방식은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성의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인정하기보다, 정조 기준 미달자로 낙인찍어 하자가 있는 물건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여성의 몸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라는 것을 전제한다. 여성은 남성의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정조를 기준으로 현모양처와 공창을 나눴으며, 이러한 구도는 전쟁 시기 군국의 어머니와 위안부로 재현되었다. 정조를 지킬 필요가 없는 여성은 성욕의 배출구로 비인격화했다면, 정조를 지켜야 하는 여성은 남성의 소유로 대를 잇는 수단으로 여겼다. 이처럼 정조 관념이 유지되는 조건에서 여성은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 여성의 성과 몸이 남성의 소유물이 되고, 피해 사실조차 남성의 소유에 흠집이 난 것으로 여겨진다. 남성이 소유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여성은 철저하게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3.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방법과 정대협 활동의 쟁점

 

1)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방법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시기 조선에 도입된 공창 제도의 연장선에 있으며, 일본군의 주관 하에 실시되었다. 위안부의 귀국 이후에는 성폭력을 여성의 수치로 여겨온 한국 사회가 침묵을 강요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며, 피해자에게 보상해야 한다. 또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의 다짐이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를 과거의 비극으로만 여기지 않고, 현재적 과제로 받아들여 사회 변화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해자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

구체적인 현재적 과제는 첫째,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구조를 성찰하며 바꿔나가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여성들에게 병사들의 성욕 배출구 역할을 강요했으며, 식민지 지배 아래에 놓인 조선의 빈곤계층 여성들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한 제도를 가능하게 한 토대는 남성 성욕을 자연화하고 여성을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비인격화하는 구조다. 당시에는 공창제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러한 통념은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현실에서 지속하고 있다. 또한 귀국한 위안부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순결에 대한 통념도, 여전히 오늘날 여성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문화를 성찰하고 바꾸려는 노력은 현재적 과제다. 둘째, 동아시아 민중이 반핵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미중갈등과 북핵 문제로 동북아 군사위기가 고조되는 정세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주관적 역사인식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한일 민중연대를 가로막지 않도록 객관적 역사인식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 정부가 담보할 수 없으며, 한일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실현할 수 있다.  
 

2)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민족주의적 쟁점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단체다. 1990년 설립된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는 ‘몸을 더럽힌 치욕’이 아니라 ‘일본군의 성범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힘입어 피해자들이 오랜 침묵을 깨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피해자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정대협은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비 건립이라는 7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피해자를 지원하고 위안부 문제 진상을 밝히기 위한 연구조사를 진행하였으며 한국 정부의 역할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대중적으로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1992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시위를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고, 2012년 ‘전쟁과 여성 박물관’을 건립해 역사를 기억하는 교육공간을 마련하였다. 국제적으로는 유엔 등의 국제기구를 통해 전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는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통해 천황을 비롯한 책임자들을 상징적으로 처벌하고, 아시아 위안부 피해자들과 연대하였다. 정대협은 2016년 설립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통합하여 2018년에 정의기억연대로 출범하였다.

이처럼 정대협은 지난 30년 동안 전시 성폭력의 문제를 고발하고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활동,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를 교육하는 활동,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 일본에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보상의 법적 형식에 집착하면서 현재적 과제가 상대화되고 있다.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는 성폭력을 야기하는 구조를 성찰하기보다 가해자 일본이 법적 배상을 하면 해결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민족 피해를 부각하는 운동방식이 반일감정을 부추겨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인식이 민족주의적이라, 정대협은 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침묵을 깰 수 있던 것은 대중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피해로 받아들여서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적인 인식은 현재도 지배적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전략을 비판했다.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배라는 조건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자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적 피해를 강조하면 위안부 문제가 조선 여성의 정조가 유린당한 피해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대중들의 분노가 여성의 정신과 육체의 훼손이라는 피해보다, 민족(남성)의 재산으로서 여성의 성을 타민족에 빼앗겼다는 피해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점령지·식민지(남성)가 남성의 소유인 여성의 성을 침탈당하는 것을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기고, 이 때문에 침략국이 점령지 여성을 전리품으로 삼는 관념과 같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의 피해를 정조의 상실로 인한 개인과 민족의 수치로 여겨 침묵시킬 수도 있지만,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민족적 피해에 대한 분노로 전환하기도 한다.  

조선의 여성들은 강제로 ‘끌려간 처녀’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로 주로 창기 출신을 모집한 반면 식민지나 점령지에서는 그러한 규제 없이 위안부를 모집한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 논리는 위안소에서의 강압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로 모집된 여성이 순결한 처녀였냐 아니냐에 따라 피해 여부가 달라진다는 관념을 전제한다. 이는 공창 출신 일본인 위안부를 침묵시키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위안부 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당시의 공창 제도이며, 그 전제로서 여성을 성욕 배출구로 비인격화하는 문화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양산한다는 객관적 인식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또한 피해 여성들이 위안소에서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귀국한 이후 강요된 침묵과 사회적 배제 속에서 빈곤하게 살아야 했던 고난의 배경을 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끌려간 처녀’라는 상징은 당시 역사적 맥락과 여성 억압적 구조를 사상하고, 가해자로서 일제와 피해자로서 식민지 조선의 순결한 누이라는 구도로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하였다. 이는 위안부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기폭제가 되어, 전국 각지와 해외 교민사회로 소녀상 건립 열풍이 이어졌다. [출처: 연합뉴스 2011.12.13]

‘평화의 소녀상’은 ‘빼앗긴 순결한 누이’를 표상하기 때문에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졌다. 이는 위안부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2014년 9월 20일 전국 대학생 프로젝트 동아리인 ‘평화나비 네트워크’ 발족으로 이어졌고, 전국 각 지역에서 ‘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가 속속 발족했다. 소녀상 건립 열풍은 해외 교민사회로도 퍼져갔다.4 이는 정대협이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를 운동의 중심적 전략으로 삼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정대협과 반성폭력 운동 쟁점

물론 그렇다고 정대협 활동 전체를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단적으로 정대협은 전시 성폭력을 고발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국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국제기구를 통한 활동이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거나, 국제적으로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부각하지만 국내에서는 민족의 피해에 호소하는 전략을 취하여 한계적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정대협의 활동은 반성폭력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은 여성단체들이 1980년대 공권력이 자행하는 성폭력에 대항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부터 성폭력특별법 입법운동을 추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학칙 제정운동과, 2000년대 초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를 위시한 운동사회 성폭력 반대운동으로 확산해 갔다. 1990년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서 출범한 정대협도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다. 

하지만 성폭력을 감축하기 위한 운동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쟁점이 형성된다.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고발하고 남성 중심적인 성적 실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성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핵심전략이 되면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을 상품화하는 사회가 폭력을 양산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 노력이 필요하다는 합의를 창출하는 데에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대협도 성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핵심적이라는 인식을 견지하고 있다. 전시 성폭력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중 강간은 범죄가 아니라는 풍토가 조성되었고, 그래서 전시 성폭력이 여전히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근거로, 전시 성폭력인 위안부 문제의 가해자들에게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범죄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여성을 성욕 충족 수단으로 여기거나 재생산 수단으로 여겨 정조를 강요하는 문화가, 전쟁 시기에 ‘병사의 성욕은 억제할 수 없다’는 인식과 타민족의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어져 성폭력을 유발한다. 따라서 범죄자를 처벌한다고 해도, 여성 억압적 문화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전시든 아니든 성폭력은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일본군의 잔혹성을 부각하여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운동 전략은 한국 사회의 성찰 필요성을 간과하게 한다.     

한편 반성폭력 운동은 남성 중심 시각의 사건 해석이 지배적인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피해 여성의 경험, 기억, 고통에 주목할 것을 주장하는 ‘피해자중심주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피해자중심주의를 성폭력 사건 해결에서 ‘피해자의 요구 수용’으로 등치하면서, 사건 해결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공동체를 성찰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의 과제인데, 성폭력 사건 해결이 단순히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면 해결되는’ 문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정대협은 위안부 피해자의 요구대로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피해자중심주의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1995년 일본이 국민기금 사업을 실시했을 때, 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들과 거부한 피해자들이 나뉘었다. 2015년에도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하여 한일합의를 반대한 피해자들이 있었으나, 생존한 피해자의 상당수가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을 수령했다. 정대협은 국민기금과 2015년 합의에 반대하는 피해자를 앞세워 피해자의 뜻이라고 주장했으나, 국민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들은 정대협이 자신들을 배제했다고 반발했다.

위안부 문제에서 피해자중심주의는 일본이 피해자들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고 일본군의 책임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책임을 부정할 때, 피해자의 기억과 경험을 신뢰하며 역사적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대협은 피해자중심주의를 피해자의 뜻에 따라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 인식한다. 문제는 피해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해석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일본의 사죄·보상으로 축소하고, 사회 변화를 다짐해야 할 시민사회의 역할을 일본 정부 압박으로 제한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일본의 사죄·보상을 받는 것으로만 환원할 수 없다.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한일 시민사회의 다짐이 동반되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 개인의 아픔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아픔으로 기억하여 후세대에 교훈을 남겨야 한다. 그러려면 사죄·보상의 법적 형식에 집착해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한일 시민사회의 변화를 위한 현재적 과제 모색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시민사회가 자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4. 일본에 책임을 물을 방법과 역사인식

 

1) 일본에 책임을 물을 방법

현재 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합의 이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우선 위안부 문제를 외교적 쟁점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①입법에 따른 해결, ②중재재판소 구성에 의한 사법적 해결, ③기금설립을 통한 해결, ④한일 양국 정부 간 외교협상을 통한 해결로 나눌 수 있다.6

첫째, 입법에 따른 해결은 일본 국회가 법률을 제정하여 위안부 문제를 공식 사죄하고 법적으로 보상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일부 일본 참의원들이 「전시 성적 강제피해자 문제의 해결 추진을 위한 법률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법안 발의에 주도적이었던 오카자키 도미코 의원이 2009년 민주당 집권 시 각료로 취임했음에도 법안이 방치되었다.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강력하여 사실상 국회에서 논의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설사 법안을 상정했더라도 자민당의 거부로 통과가 어려웠을 텐데, 민주당조차 당론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정치지형을 고려했을 때 입법에 의한 해결은 요원하다. 

둘째, 사법적 해결은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라 양국 간 해석상의 이견이 발생하면 중재재판소를 구성하는 방법이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양국 간의 이견이 있음에도 한국 정부가 해결 노력이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작위 위헌판시를 내렸다. 이에 외교부는 청구권협정 제3조에 입각하여 일본에 양자협상을 제안하였으며 응하지 않을 시에는 중재재판소 구성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거절하였고, 일본 정부에 이를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가 중재위 구성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양국이 중재위원 선출에 있어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다. 설사 중재위가 구성되어도 판결에 구속력이 없어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기금설립을 통한 해결은 독일의 ‘기억·책임·미래 재단’ 모델이 있다. 독일은 재단을 설립하여 약 100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기금을 마련해 167만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보상금으로 지불했다.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재원을 마련했으며 기업은 피해자로부터 배상 관련 소송을 면제받는 조건으로 참여했다. 

넷째, 외교협상을 통한 해법이다. 양국정부가 어느 선에서 타협을 모색하면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 지도자나 정책당국이 외교적 타결을 위해서 국민 여론이나 관련 단체의 반발, 비판을 감수할 수 있어야만 선택할 수 있다.

국민기금이 세 번째 방법에 해당하고, 2015년 한일합의는 외교협상 형식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실현가능성이 높은 해법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론이라는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2) 고노담화와 국민기금

1990년 정대협의 발족과 김학순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되자, 일본 정부는 자체조사를 진행하고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군의 관여 아래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다. …… 종군위안부로 많은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걸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즉, 위안소에 대한 군의 관여가 있었고, 모집과정에서 본인의 의사에 반한 사례가 많았으며, 위안소 생활이 강제적이었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역사교육을 하여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1995년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담화를 발표하여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전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국민기금을 설립하였다. 국민기금은 일본 국민의 모금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위로금(200만 엔)을 지급하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의료복지 사업을 지원하며, 일본 총리의 사죄 편지를 전달하는 사업이었다. 1995년에 시작하여 2007년까지 진행하였다. 일본 정부는 전후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법적인 배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위안부 문제에 일본군이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사죄와 보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정대협은 국민기금에 강력히 반대했다. 배상의 주체가 일본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 모금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며, 배상의 이유 역시 법적인 책임이 아니라 도의적 책임에 따른 사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식민지 피해 보상의 상징으로 여긴다면 국민기금이 모자란 보상일 수 있지만, 위안부 피해당사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제로 인식한다면 국민기금 거부만이 능사는 아니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국회가 결의한 사죄가 아니더라도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는 피해자의 고통을 덜 수 있었을 것이고, 일본 시민이 모금한 기금도 동정과 시혜로 폄하되기보다 식민지배와 전쟁에 대한 성찰의 노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7

실제로 당시 국민기금에 비판적이었던 일본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가 2007년 기금해산을 앞두고 밝힌 평가가 이와 비슷하다.8 우에노는 국민기금을 추진한 무라야마 정권이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 연합정권이었기에, 정당 간 타협의 산물로서 국민기금 사업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국가보상은 끝났다는 자민당의 전후 처리 틀은 유지하면서 실리를 취하는 전략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 결과 피해자에게 전달된 위로금은 국민성금으로 마련했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의료복지를 명복으로 300만 엔 상당의 직접 지원을 얻어내기도 했다. 또한 위로금과 함께 전달되는 사과 편지에 역대 총리(무라야마 도미이치,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리고 보상금을 수령하더라도 청구권이나 소추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조치했는데, 독일 민간기금은 보상금을 수령하면 소송을 포기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국민기금이 피해자를 배려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기금 관계자들이 사회당 당수가 총리로 있을 때 전후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존하는 동안 다시없을 기회라고 판단하여 한계적이나마 사업을 진행한 바에 대해서도, 그들이 사후적으로 옳았다고 평가했다. 무라야마 정권 이후 정치 상황이 보수화하여 사태가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정대협의 완강한 거부와 다르게 국민기금에 대한 피해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정대협이 국민기금 수령을 거부하지 않는 피해자들을 배제하면서, 국민기금 수령을 원하는 피해자들과 정대협의 갈등이 첨예화했다. 정대협은 국민기금을 거부하기 위해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 지원금 대상을 국민기금 미수령자로 제한했다. 피해자들에게 국민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도 요구했다. 이는 마찬가지로 국민기금 반대 입장을 표명한 필리핀의 위안부 지원단체와 대조적인 태도였다. 필리핀 지원단체는 국민기금에 대한 입장이 다를지라도 생존자의 개인적 삶과 상황을 존중하기로 했다. 생존자들이 고령에 노쇠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금 수령자를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대협의 활동으로 인해 활동가와 피해자만이 아니라 피해자들 간에도 분열이 발생했다. 기금을 수령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기금 수령자에게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정대협에 항의했다. 피해자들은 의심과 불신, 비방으로 사분오열되고, 갈등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달았다.9
 

3) 2015년 한일합의 

고노담화와 국민기금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 문제에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현안으로 재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비공식 교섭을 일본 노다정부와 두 차례 진행했으나 합의하지 못했다. 뒤이어 박근혜정부 역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아베정부에 촉구했고, 2015년 12월에 외무장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합의안을 발표하였다.  

이때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의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총리 명의로 사죄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보상조치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해당 조치를 이행한다는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고 선언했다.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좌)와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외무상(우)가 2015년 12월 28일 한일위안부 합의 타결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대협은 피해자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무효를 주장했다. 민주당은 합의파기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문재인정부 출범이후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출처: 연합뉴스. 2017.12.26]

정대협은 이 합의안에 반발하면서 협상 무효를 주장하였다. 대선시기 문재인 후보도 한일합의를 보수정권의 적폐 중 하나로 여기며 재협상을 공약했다. 하지만 집권 이후인 2018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015년 합의가 진정한 해결은 아니지만, 일본 정부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일본 정부가 출연한 기금 10억 엔은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향후 처리방안은 일본과 협의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까지 기금을 일본에 반환하지 않았으며, 합의를 인정하지 않지만 재협상도 요구하지 않는다며 사실상 손 놓고 있다.

합의 파기는 아니지만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않겠다는 문재인정부의 결정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 보고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 보고서를 통해 문재인정부가 한일합의를 인정하지 않는 주요 이유를 살펴보자. ①일본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도의적’이라는 수식어 없이 책임을 명시한 점이다. 일본 정부 예산 출연을 전제로 한 재단 설립이 포함된 점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법적’ 책임이라는 말을 끌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②일본 정부 사죄에 대해서는, 아베 총리가 내각총리대신 자격으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여 과거 국민기금보다 공식적이며 진전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내각 결정을 통한 사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③일본 정부의 금전적 조치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 예산만을 재원으로 개인에게 지급될 돈을 받아낸 것이 이제까지 없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이 법적 책임에 따른 배상금은 아니라고 하고, 피해자 관련 단체들도 배상 차원 돈이 아니므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④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구절의 전제가 논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협의 과정에서 한국 쪽이 일본의 사죄에 불가역성을 담보하기 위해 요구했으나, 오히려 일본 정부의 예산 출연만으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⑤소녀상은 민간단체 주도로 설치된 만큼 정부가 관여하기 어렵다고 해왔음에도 합의 내용에 포함하여, 소녀상 이전을 약속하지 않은 의미가 퇴색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2015년 합의에 중요한 진전이 있음에도 성과가 폄훼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2015년 합의는 일본 정부가 군의 관여라는 역사적 사실과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총리 명의로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반성을 표명한 것과 더불어, 정부 예산으로 사실상의 배상조치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핵심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3대 요구에 최대한 근접한 것(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공식적 사죄와 반성, 그 이행조치로서 순수 일본 정부 예산 사용)으로 과거 고노담화와 국민기금보다 진전된 측면이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법적 배상이 완료되었다는 일본의 기존 입장에 대항하여,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하여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고노담화를 훼손하려는 등 초강경 자세를 유지하던 아베정권으로부터 얻어낸 결과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소녀상 문제의 처리 노력이나 합의의 최종적 불가역성은 핵심 부분 이행의 전제로 약속된 부수적 합의라는 점을 강조한다. 최종적 해결의 의미는 합의이행을 전제로 앞으로 한일 양국 정부가 외교 의제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는 의미로, 외교에서 일종의 일사부재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도 시민사회 단체 활동이나 학술연구 기념사업 등은 이 합의로 인한 제약 없이 활발하게 지속해야 한다. 소녀상 철거 역시 약속한바 없으므로 합의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10

문재인정부의 입장은 2015년 합의가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나며, 법적 배상이 아닌 제2의 국민기금이라며 반대한 정대협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시민단체와 다르게 실현 가능한 방안도 책임 있게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정부는 박근혜정부가 실현하지 못한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을 강제할 방법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합의 파기는 아니지만 재협상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 방법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대선후보 시절에는 박근혜정부를 비판하고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데 위안부 문제를 활용하다가, 막상 집권하고 나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것은 기회주의적 태도다. 피해자중심주의도 문재인정부가 한일합의를 비판한 주요한 근거였다. 그러나 합의에 반대하는 할머니도 있지만 합의를 수용한 피해자도 상당하다. 기금을 신청한 할머니들이 합의 당시 생존자 47명 중 34명에 달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명되지 않았다. 그분들의 뜻을 존중하는 것은 어째서 피해자중심주의가 아닌지 의문이다. 
 

4) 과거사 청산에 매몰된 역사인식

지난 5월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열어 윤미향 의원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총선에 출마했고, 정의연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모금한 돈이 할머니들에게 쓰이지 않았고 회계처리가 불투명하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2015년 한일합의 이후 위안부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불만이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대협 활동으로 경력을 쌓아 정치계로 진출한 사람은 많음에도 정작 문제 해결은 진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특히 문재인정부가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도 여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한 윤미향 의원의 행보가 문제라고 여긴 듯하다. 

기자회견의 파장은 상당했다. 정의연의 모금액 사용처와 정부지원금 사용내역 등에 대한 각종 의혹이 제기되었고, 안성 쉼터 매매 과정 의혹, 윤미향 의원 남편의 신문사가 정의연의 일감을 수주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겼다는 의혹, 주택 매입과 자녀 유학비용 논란까지 제기되었다.

이에 윤미향 의원은 신상이 낱낱이 공개되는 자신의 처지를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비교하면서 “친일이 청산되지 못한 나라”에서의 숙명으로 알고 당당히 맞서겠다고 페이스북에 입장을 밝혔다. 또한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에 대한 공격은 친일세력인 “보수언론과 미래통합당이 만든 모략극”이라며 진영논리로 맞섰다. 
 
윤미향의원은 각종 의혹에 대해 소명하기 위해 21대 국회 시작 하루 전날인 5월29일에 기자회견을 열었다.윤미향 의원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정의연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관련하여 검찰에서 조사가 진행중이다. [출처: 이데일리. 2020.05.29.]

민주당도 진영논리로 윤미향 의원을 두둔했다. 민주당 국회의원 우상호, 남인순, 고민정 등 16인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길에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성명을 발표(5.14)했다.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해온”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에 대한 공격은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을 폄하하려는 부당한 공세”라며 방어한 것이다. 문재인정부 지지 세력들도 이에 가세하여 이용수 할머니가 치매라거나,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노욕 때문에 정의연 비판에 나섰다는 등의 인신공격을 해댔다. 김어준은 배후세력이 있다는 음모까지 제기했다. 

졸지에 이용수 할머니가 친일파로 몰리는 구도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인가. 윤미향 의원과 민주당 세력이 과거사 청산에 몰두하는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청산은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장한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되었고, 노무현정부 시기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각종 법 제정 및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특히 친일파 척결에 주안점을 두었다. “일제시대의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함으로써 친일분자들이 주도한 민족 분열과 한국전쟁기의 집단학살과 같은 불행을 막지 못했고, 나아가 독재정권의 등장을 막지 못했다. 독재정권의 등장을 막지 못함으로써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막지 못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11

한국 사회 원흉으로서의 친일파가 단죄되면 앞으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이룩된다는 생각은, 군부독재가 타도되어 민주정부가 수립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민주화 세력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다. 여기에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민족과 역사의 법정 앞에 정의와 불의는 판가름 나 있다. 불의의 화신(친일파, 군부독재)을 단죄하면 정의는 자동으로 실현된다. 친일파 청산을 필두로 하는 과거사 청산은 그 무엇보다도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도덕적 정언 명령이 되어, 과거사 청산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정서까지 만들어진다.12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에서 과거사 청산 세력은 친일파와 군부독재에 대한 반정립만으로 정의로움이 입증된다. 자신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정의실현이고,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모두 친일파-보수 세력으로 몰아간다. 윤미향 의원과 민주당도 한국 사회 질곡의 원인인 친일파를 척결하고,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식민지배 배상을 받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 배상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반드시 ‘법적인’ 형식을 취해야 한다. 현실적인 실현경로는 중요치 않다. 이것이 2015년 한일합의를 거부한 이유다. 2020년,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 대한 숱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과거사 청산이라는 근거로 정당화하거나 두둔한다. 비판하는 세력은 친일파로 매도된다. 이용수 할머니에게 퍼붓는 인신공격을 보면, 위안부 피해자라고 해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 시기 조선에 도입된 공창제도의 연장선에 있으며 일본군의 주관 하에 실시된 제도였고, 귀환 이후에는 성폭력을 여성의 수치로 여겨온 한국 사회가 침묵을 강요한 역사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당연히 일본의 법적 사죄·보상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로 간주된다. 결국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의 다짐과 이를 통한 피해자의 상처 치유도 요원해져만 가게 된다. 정의연을 중심으로 한 위안부 운동의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미주
1. 야마시타 영애,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한울아카데미, 2012. 제1장과 제2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2.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역사공간, 2013.
3. 본고에서 성폭력 개념은 ‘성적인 폭력’(sexual violence)으로 국한하지 않고, 여성 억압을 지속 시키는 제도 및 관행 등을 포괄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일반을 가리 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4. “여성계가 잡아끌며 30년을 달려온 ‘위안부 운동’이 어쩌다가”, «한국일보», 2020.06.03.
5. 윤미향,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 정의, 배상실현과 재발방지를 위하여」, 《이화젠더법학》 제5권 제2호, 2013.
6. 이원덕, “제9장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방안과 실행을 향한 험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보고서」(여성가족부 보고서), 2017
7. 김정란, 「일본군'위안부'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 2003.
8. 우에노 치즈코, 「3부 국민기금의 역사적 평가를 위하여」,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현실문화, 2012.
9. 김정란, 앞의 논문.
10. 이원덕, 앞의 보고서.
11.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2008.정승현, 「포괄적 과거사 정리: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향해」, 2014에서 재인용했다.
12. 정승현, 「과거사청산의 정의(正義) 논쟁과 그 사상적 함의」, 《현대정치연구》 7권 2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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