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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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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인가?

채은수 | 회원
현재 상태에 대해 반대하며 좌우를 넘나드는 정치

최근 들어 우리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특이한 현상들을 지속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집단으로 인식되어온 의사 집단이 노동조합의 '파업'을 모방하고 있으며, 무수한 관변 단체들이 NGO로 변신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반대하는 정치 집회를, 그것도 반공의 논리를 들고 추진하고 있다. 요컨대, 모두가 서로 다른 이유에서, 현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적 지향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의 표출은 종종 기존의 좌와 우를 넘나들면서, 비이성적인 '반대' 그 자체를 위한 정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이고, 범세계적인 현상이 바로 '세계화 반대'라는 현상이다. 단적인 예로, 미국에서는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가 극우 보수주의의 상징인 패트릭 뷰케넌과 손을 잡고 세계화에 반대하고 민족 경제(national economy) 수호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몇몇 환경주의자들도 동참하고 있다.

이는 단지 미국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미국과 경쟁하는 훨씬 더 많은 나라들에서 노동조합 및 좌파 정치세력의 일부가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민족적 이해'를 실현시키려 투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에 반대하는 투쟁에 '질서경제학회'라는 보수우파 단체가 참여한 것이나, 모리 일본 총리 방한 규탄집회에 민중운동 진영과 각종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이 연대하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공유할 대안이나 정치적 전망은 부재하지만, 현재 상태에 대한 반대와 원한을 공유하며 좌우를 넘나드는 정치, 이는 새로운 정치의 탄생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 손쉽게 긍정적인 답을 내릴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의 '세계화 반대'는 현 상황의 불투명함과 민중운동 진영의 과학적 인식과 실천의 부재를 드러내주고 있다는 게 더 현실적일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화'라는 모호한 현상의 본질과 그것에 내포된 모순은 무엇이고, 왜 그것이 극우와 좌파의 전망 없는 동거를 낳게 만드는지, 나아가 민중운동 진영의 과학적인 투쟁 방향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토론해야만 할 것이다.


세계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화려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본질은 제국주의의 특수한 국면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제국주의적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1). 하지만,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국주의인지', 그리고 '어떤 특수한 국면인지'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 제국주의는 20세기 초 유럽에 뿌리를 둔 제국주의가 아니라,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의 제국주의이고, 오늘날의 국면은 1970년대 이후 '일반적 위기'에 도달한 미국 자본주의의 금융적 팽창의 국면이다. 각각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첫째,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영국의 그것과 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소위 '민족 자결권'이라는 형태로 수용했다2). 그 결과, 비록 형식적이지만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국제관계는 자유롭고 평등한 민족간 체계라는 외피를 띠게 되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국 자본주의는 더 이상 주변부나 반주변부에서 잉여를 수탈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 형태가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헤게모니에서의 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처럼 자유무역을 내세운 식민지 수탈의 '자유무역 제국주의'가 아니라, 법인기업이라는 미국식 자유기업의 다국적 팽창에 입각한 '자유기업 제국주의'이다3). 미국식 법인자본은 영국식의 가족(개인) 자본이나 독일식 독점자본4)과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독점자본과 달리, 법인기업은 은행이 아니라 주식시장을 통해 자신의 재원을 조달하며, 전후방 산업의 인수·합병을 통해 스스로 연계망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것은 무역의 자유보다는 기업 활동의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법인기업은 수직으로 통합된 자신들의 기업 체계 중 일부를 해외직접투자 등을 통해 언제든지 손쉽게 해외로 이전시킬 수 있다. 자유무역을 통해 상품을 수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업 자체가 해외로 이동하는 형태로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5).

미국은 이러한 자유기업 제국주의를 냉전에 기반한 '자유세계주의'를 통해 정착시켰다. 즉, 형식적으로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섭해서 민족자결권을 승인한 후, 냉전체제를 형성하면서 사회주의권에 대당하는 '자유세계(?)' 민족 국가들의 연대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소위 '발전주의'가 전면에 부상했는데, 이에 따르면 자유세계의 일환이 되는 국가는 언젠가는 미국처럼 풍요로운 사회로 '근대화'될 수 있다6). 이러한 자유세계에 미국의 자유기업들은 '민족 자결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손쉽게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오늘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자유기업 제국주의가 '일반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떠한 형태의 자본주의의 이건 궁극적 위기를 향한 경향, 즉 이윤율의 저하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헤게모니가 대체되면서 드러나는 것처럼, 몇 가지 역사적 상쇄요인들 -- 가장 대표적으로 법인자본이라는 자본형태의 변화와 케인즈주의라는 경제 정책의 변화 -- 에 의해 일시적으로 상쇄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쇄요인은 결국 1970-1980년대에 소진되고 마침내 일반적 위기에 도달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반적 위기는 두 번의 위기 국면과 그 사이의 '금융적 팽창'7)으로 구성된다. 즉, 물질적인 팽창이 위기에 처했을 때가 첫번째 위기이고, 자본은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서 금융적 팽창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금융적 팽창은 결코 장기간 지속될 수 없는 허구적 축적이며, 따라서 종국적인 위기에 도달하게 된다. 이같은 역사적 과정에서 지금 미국 자본주의는 금융적 팽창을 통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초민족화를 추진해온 법인기업이 그러한 금융적 팽창의 주체가 되고 있다.
이들의 주요 무대는 전세계의 주식시장이며, 여기서 '소액주주'의 외피를 둘러쓴 각종 펀드들을 동반자로 모시고 있다. 이에 따라 발전주의는 철회되고, 기존에 물질적 팽창의 주요 방식이었던 해외직접투자는 사실상 금융투기와 구별되지 않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몇몇 반주변부 국가들은 '신흥시장'8)을 형성하도록 구조조정된다.


첫번째 일반적 위기와 그 속에서의 모순

오늘날 제국주의적 세계화의 모순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과거 첫번째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 시기의 모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당시와 오늘날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여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당시의 위기에 대한 관념들을 정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 양상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 전쟁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자본축적의 모순이 '민족-국가간 전쟁'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급속한 금융적 팽창을 통해 가공 자본을 수취했던 영국의 금융가 집단과,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민족적-산업적 역량을 동원했던 독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던 것이다9). 이러한 위기의 역사는 결국 특수한 자본의 형태와 정책의 결합이 제국주의적 모순의 양상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당시 자본 축적은 민족적 형태와 민족적 정책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민족간 경쟁은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시기에, 기존의 발전 경로와 정치에 반하는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인 자기-부정의 정치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결국 정치적으로 '자유주의 정치'의 위기를 의미하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위기 시기에 기존의 자유주의적 발전 전망에 대한 회의가 폭발하게 된다. 예컨대,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바이마르 시기에, 극우와 극좌는 소위 '민족적 갱생'을 부르짖으면서 연대했고 기존의 자유주의적 정치에 도전하면서 '좌와 우'를 넘어서는, '고대와 미래'를 넘나드는, '선과 악'을 넘어서는 정치를 주창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정치의 결론은 파괴와 광기로 점철된 파시즘의 등장이었다.


오늘날 일반적 위기와 제국주의의 모순

과거의 위기와 모순과 오늘날의 그것을 비교하기 위해, 먼저 오늘날 자본축적의 특수한 형태가 지적되어야 한다. 오늘날 자본의 일반적 위기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자본의 금융화는 민족적 자본들이 아니라 초국적 법인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초국적 법인기업'이라는 말 그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현재의 자본운동은 '민족적 토대'를 지속적으로 침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오늘날 자본에게는, 안정적인 '민족 경제'와 케인즈주의로 대표되는 '민족적 경제정책'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초국적 법인자본의 금융세계화는 20세기 초반과 같은 격렬한 민족 국가간 경쟁을 동반하지 않는다.
초국적 자본들은 새로운 상품 시장으로 기능할 식민지를 요구하지 않으며, 당연하게도 식민지를 둘러싼 열강 국가들 사이의 민족적 경쟁도 동반하지 않는다. 대다수 무역 거래는 몇몇 중심부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며, 그런 면에서 중심부 국가들 사이에는 경쟁과 협력이 공존한다. 게다가, 대다수 중심부 국가들에서 주요 자본들은 민족적 차이와 경쟁이라는 외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초민족화와 금융화라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국가나 동아시아 국가들에 요구하는 구조조정이나 '자유화'와 '개방'에 있어 핵심은 기업활동 및 투자의 자유화와 금융 개방이다.

따라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공격성은 영토적 식민지배라는 형태가 아니라 포섭과 배제의 이중 칼날이라는 형태를 띤다. 아프리카나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투자나 착취로부터, 따라서 구조조정으로부터도 사실상 배제된다. 초국적 법인자본은 소위 '글로벌 시티'의 금융적 네트워크를 중심적 거점으로 활용하고, 투기를 통해 잉여 확보가 기대되는 몇몇 지역들에 선별적으로 투자한다. 세계 전역에서 발생하는 국지전이나 인종 분쟁은, 이러한 금융적 네트워크 속에 포섭되기 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이 가난한 지역을 짤라내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유럽에서의 갈등이다. 그리고 오늘날 제국주의는 이처럼 배제된 자들의 침투를 막기 위한 통제와 국지전의 관리에 주력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민족-국가 내부적으로도 이러한 포섭과 배제의 이중적 칼날은 작동된다. 그 결과 민족-국가 내에는 그것의 통일성을 파괴시키는 상반되는 두 가지 힘이 형성된다. 즉, 금융적 팽창에 주력하는 금리생활자, 골드칼라 등 성공한 자들의 공동체와 불안정 노동자, 실업 노동자, 사회적 외부자 등 패배한 자들의 자기-게토적 공동체가 그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연구들이 세계 주요 금융 도시들의 세계적 네트워크의 형성과 민족 내 대다수 도시들의 슬럼화 혹은 피폐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부유한 자들의 '담장 도시'의 출현이다10).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 변화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형성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이었다. 트루만 시대 미국의 한 고위 관료는 한국 전쟁이 미국을 살렸다고 말했다. 즉,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통한 냉전 질서의 수립은 정치적 패권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자본축적에 있어서도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이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미국 자본주의가 냉전 혹은 반공-발전주의에 기반을 둔 '세계적인 군사적 케인즈주의'의 성격을 띠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발전의 쇼케이스'라는 매우 특이한 지위를 가졌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발전주의'라는 당근을 제시하고, 이들을 자신들의 '자유세계주의'에 포섭시켰다. 보다 구체적으로, 먼저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전쟁 전 지배구조를 적극 활용했다. 일본에서 보수적이고 군국적인 지배 질서와 재벌 체제는 사실상 청산되지 않았고, 전후 일본 성장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과 한국, 대만 등의 보호무역을 용인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시장을 개방했다.

나아가 초국적 기업의 진출보다는 이들 지역의 억압적 국가 체제와 재벌의 동거를 권장했다. 바로 이러한 냉전의 특수한 요소들이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 -- 사실상 파시스트적 국가 --가 강력한 산업정책과 국민 동원을 통해 물질적 팽창의 엔진이 될 수 있었던 역사적 요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냉전의 해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전략을 변화시켰다. 즉, 냉전 시기의 정치-군사적 논리가 약화되고, 경제적 논리가 지배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를 초국적 법인기업의 금융적 팽창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구조조정 전략'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이러한 양상은 전면화되어서, 중국의 인권문제나 북한 핵 문제 등과 같은 정치군사적 문제들도 기실 동아시아 구조조정을 위한 정치적 압박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11).

특히 한반도의 경우, 이러한 구조조정 정책은 북한에 대한 정책과 체계적으로 결합된다. 냉전 질서 하에서 동아시아는 발전의 쇼케이스로서 지속적인 미국의 냉전 체제 관리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일종의 '성장의 엔진'으로서 금융체제의 지속적인 관리를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국지전 등과 같은 정치군사적 갈등을 촉발시킬 수 없고, 따라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해야만 한다. 예컨대, 아프리카나 동유럽처럼 배제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을 일종의 자유무역지대로 포섭하고 관리하고자 하며, 이를 위한 과정으로 '상호주의'에 근거한 '페리 프로세스'를 제시한다. 남한의 정부 또한 이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군사적 대결'도 '흡수통일'도 아닌 '햇볕정책'이 등장한다. 그것의 지향인 자유무역지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과 멕시코 마킬라도라의 관계처럼 사회통합없는 자본통합으로, 자본은 손쉽게 이동하지만 사람은 손쉽게 이동할 수 없는 체제이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전략은 사실상 분단체제를 고착시키는 성격을 가진다.

이와 같은 모든 변화들은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파시스트적 국가주도의 '발전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12). 이제 동아시아도 '배제와 포섭'의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 포섭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에서의 고도 성장은 끝이 났고, 자본의 금융화와 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초국적 법인 기업의 도박장에 포섭될 때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치군사적 긴장완화라는 표면적 흐름 이면에서 작동하는 폭력은 바로 이러한 금융구조적 폭력이다.


세계화가 상징하는 범세계적 '시장 질서'의 확립이란

구조조정을 통한 금융 세계화로의 포섭이라는 전략은 종종 상품과 서비스 교역이라는 문제에 의해 은폐된다. 그리고 무역은 그들 민족의 경쟁력을 위해서 노동의 억압과 불안정화를 정당화한다. 예컨대, 몇몇 경제학자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증가하는 불평등과 실업이 '남'과의 광범위한 무역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배제의 위협을 항상적으로 경험하는 반-주변부 국가들은 무역수지 흑자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단으로 인해, AFL-CIO 등은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반세계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중심부의 일자리는 과연 자유무역으로 인해 상실되고 있는가?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과연 무역수지 적자로 인해 발생했는가? 사실 자유무역에 대한 즉자적 투쟁은 두 가지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자유무역과 무관하게 자본의 금융세계화가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금융적 팽창의 정책이 기실 일국적인 계급적 정책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사실 금융세계화의 국면에서는 전세계 모든 노동자들이 패배자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간의 경쟁과 일자리에 대한 자본의 통제에 더욱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대량 정리해고는 거대한 초국적 법인기업들의 실천이며, 그것은 자신들의 금융적 수익률이 하락하면 이에 대한 대응으로 비용을 절감하면서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계화가 상징하는 범세계적 '시장 질서'의 확립에서 '시장'은 상품 시장이 아니라 기실 금융시장 혹은 주식시장이며,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금융과 자본 이동성의 자유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유로운 자본 이동이 노동에 미친 결과는 자유 무역의 효과보다 형태가 덜 분명하며, 이로 인해 전세계 노동자 민중 진영은 '자유 무역'의 쟁점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일종의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는 다양한 집단들 -- 노동자 농민 뿐 아니라 몇몇 자본가들과 극우 민족주의자들 --이 기묘한 형태로 연대하게 된다13).

특히 한국에서 과거 발전 국가의 기생 집단들은 '강력한 국가'를 외치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퇴행적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사실 이들의 정체성은 모호해서, 한편으로는 박정희식 반공-발전주의나 부국강병주의를 옹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회창식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국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연대가 금융의 자유화와 세계화에 대한 반대와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을 경우, 단순히 현재의 상태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원한의 정치'는 세계화를 일종의 허구적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우익 민족주의적 논리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올바른 투쟁의 방향을 찾기 위하여

명심해야 할 것은, 현재 진행되는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의 핵심에는 구조조정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금융적 팽창의 놀이터로 만들겠다는 전략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국내 재벌들도 이러한 금융화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면서 과잉축적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전략은 현재 전국민적 거품을 형성하고 있는 통일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이 된다.

사실 현재 제국주의 세력이나, 정권, 그리고 자본은 어느 누구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북한의 붕괴나 흡수통일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금융적 팽창이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가장 저비용의 효과적 방안은 북한을 일종의 '자유무역 지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체제는 결코 민족적 통합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실 서신이 교환되고 종종 왕래한다고 해서, 철도가 연결되고 항공기가 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통일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통일이라면, 유럽은 이미 오래 전에 통일된 하나의 나라이고, 심지어 전세계는 모두 통일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재 미국과 정권의 전략은 자본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1체제 2국가의 제도화를 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 제시하는 '반세계화 = 반미 = 미군철수 = 통일'이라는 투쟁의 과제는 오늘날 제국주의와 그 성격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제국주의는 단순한 국제 관계와 민족간 체계라는 협소한 외피로 설명될 수 없는, 보다 구조적인 현상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금융 세계화 속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의 공세는 변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한반도 정책은 사실상 자유무역지대를 통한 준영구적인 분단 질서의 구축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주한미군이 오키나와로 철수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제국주의의 전략이 면면히 관철된다면 종속의 상황이 완화되거나 통일이 성취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반미 투쟁은 현 정권과 그들의 구조조정 전략에 대한 반대투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 반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계화'의 외피를 둘러쓴 제국주의적 공세에 맞서는 데 있어, 노동자 민중이 투쟁의 중심세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는 세계화에 대한 민족적-수구적 거부가 아니라 오직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가치와 이념의 정립을 통해, 개별 국가를 변화시킴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은 비이성적인 민족적 감정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에 근거한 민중적 연대와 새로운 국제주의14)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념적 전제 위에서 구조조정과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를 심화시키기 위한 전민중적 투쟁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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