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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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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셈(ASEM)내에 '사회포럼'을 설치한다는 것의 의미

정종권 | 정책기회국장
'사회포럼'을 제기하는 것은 과연 타당하가?

10월 20∼21일 열리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아셈)에 대해 '아셈2000한국민간단체포럼'(이하 아셈민간포럼)은 정부간 공식회의에 '사회포럼'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아셈민간포럼 국제조직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제기한 것으로 아셈 공식회의의 주요 사안과 의제들에 대해,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전달하고 또는 주도적으로 의제를 개발하고 제출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측 아셈 회원국, 아시아측 아셈 회원국 그리고 주최국인 한국 정부에, 정부간 공식 회의구조에 '사회포럼'을 설치해줄 것을 공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사회포럼'에 대한 아셈민간포럼의 시각에는 한가지 전제가 깔려있다. 정부간에 진행되는 의제와 논의에 대해 시민사회단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압력을 가하면서 시민사회의 의제를 공식 과정에 반영시키는 것이, 시민사회운동의 기본적 권리이자 내용이라는 전제이다. '사회포럼'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아셈에 공식적으로 개입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핵심 통로가 되어야 하며, 그 실체적 내용은 시민사회단체들의 효과적인 개입과 견제, 참여를 위한 정보 청구, 문제 제기, 비판 등의 입장 개진과 협의 권한, 의제 설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뜻한다는 것이 아셈민간포럼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셈민간포럼은 유럽과 아시아 정부와 한국 주재 대사관들을 방문하여 '사회포럼' 제안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각국 정부들의 태도들을 보자. 유럽측 정부들은 '사회포럼'에 우호적 태도를 밝혔으며, 아시아측 정부들은 대부분이 소극적 반응으로 일관하였고, '사회포럼' 설치와 관련하여 관건적 지위에 있는 한국 정부는 초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사회적 의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 정부의 예민한 태도로 인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아셈민간포럼의 평가이다. 이러한 현재 상황으로 볼 때 2000년 3차 회의에서 '사회포럼'이 공식화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포럼'이 설치되느냐 안되느냐의 실물적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노사정위원회가 실물적으로 움직이는 노사정 회의체계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운동진영내에서 노사정체제에 대한 이해와 실천방침을 둘러싼 노선적 대립과 갈등의 근원지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사회포럼' 제안의 문제의식에는, 아셈이 여타의 다른 경제협력기구나 지역협력체와는 달리, 시민사회운동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틈에 개입하면서 각국 정부를 민중진영으로 견인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아셈민간포럼이 제기하는 '참여 속의 비판' 또는 '비판적 참여'가 의미하는 핵심적 지표가 바로 '사회포럼'이다. 그러기에 '사회포럼' 속에서 어떻게 민중의 주장과 전망을 담아낼 것인가?' 라는 문제접근이 아니라 '사회포럼'을 제기하는 것은 과연 타당하가?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본의 지구화에 저항하는 민중진영의 올바른 실천방침인가?'라는 접근법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셈회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자

"아셈은 회원국 정상들간의 자유로운 의견 교환의 장으로서 정치, 안보,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시아와 유럽 양지역의 공동발전과 번영을 지향하는 정부간 협력체이다. 그러나 아셈은 구속력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협상기구가 아니며, 탄력성과 역동성을 가지고 논의하는 열린 기구이다. 이러한 점이 무역, 투자등 경제협력에 주안점을 두는 일부 지역협력체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정부측 아셈기획단 자료 'ASEM2000이란 무엇인가' 중)
아셈민간포럼은 이러한 사고의 기본틀을 정부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셈이 의제를 무역와 투자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 문화적 다원성 등 폭넓은 시민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국제공간이며 구속력있는 정부간의 공식 결정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시민사회를 넘나드는 국제적 의사소통의 공간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결국 시민사회적 의제와 민주적, 민중적 개입을 조직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며, 이러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을 통해 아셈 자체를 민주적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셈은 정부정상간의 회의와 의견교환 기구라는 외형을 띠고 있지만, 그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셈은 정상회의외에 외무, 경제, 재무장관회의 등 각료급 회의를 정상회의가 열리지 않은 해에 개최하고 있으며, 실무급인 고위관리회의(SOM: Senir Official's Meeting)를 수시로 개최하여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의 이행 현황을 점검하고 다양한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준(準)지역협력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지역협력체와의 차이는 질(質)적인 것이 아니라 양(量)적인 것이다.

또한 아셈이 탄생하게 된 배경 자체는 경제적(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1990년대 급성장하기 시작한 아시아의 경제신흥국에 대한 유럽측의 관심 고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셈의 성격과 국제적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와 국제질서에서 큰 지역적 축을 형성해 온 북미와 유럽, 아시아의 상호관계에서, 북미와 유럽은 범대서양자유무역지대(TAFTA)의 구상을 비롯하여 정치, 안보,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북미와 아시아 관계도 1989년 발족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중심으로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협력과 교류의 틀이 미흡하였던 것이 아시아와 유럽간의 관계였다. 이것은 미국의 국제질서에 대한 정치경제적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상황에서,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지역협력 구조가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연계성 자체가 미약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이완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급진적으로 전개되고 아시아의 경제적 가치가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의 물질적 경제적 연계성이 확장된 것이 아셈 탄생의 핵심적 배경이다. 아셈 회원국의 GDP가 세계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아셈회의의 국제적 비중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는 2차 아셈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아시아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고위기업인 투자촉진단'을 제안하여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외국인투자 유치를 위한 세일즈 외교의 장으로써 아셈이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아셈이 여타의 지역협력체와 달리 열린 공간이며, 경제와 무역, 투자의 문제를 뛰어넘는 다양한 의제에 대한 의사소통의 공간이라는 자기도취적 평가는 마치 삐뚤어진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자신이 쓴 안경이 삐뚤어진 것은 모르고 세상이 삐뚤어져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것만큼 황당한 것도 드물다.


'사회포럼'에 대한 쟁점과 이견

'사회포럼'을 제안하게 된 몇가지 전제에 대해 살펴보면 세가지 점에서 심각한 쟁점과 이견이 드러난다.
첫째, 아셈은 아펙이나 나프타와 같은 경제적 지역협력체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동하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장치의 하나라는 점이다. 지배장치에는 당근과 채찍이 있으며, 규율성과 강제력이 강한 지배구조와 느슨한 협의와 합의의 형식을 강조하는 지배구조는 언제나 동시에 존재한다. 아셈의 외형적 성격 몇가지를 두고, 다른 지배구조와 질적인 차이를 갖는 것으로 인식하는 건 올바르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세계화 반대가 WTO나 IMF, 그리고 APEC을 반대하고 해체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ASEM 반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은 자기모순적이고 분열증적인 사고에 다름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반대를, 핵심적 활동기조와 방침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레토릭으로 사고하는 것일 뿐이다.

둘째 아셈에서 '사회포럼'을 설치하자는 주장은 WTO 협상에서 '무역'과 '노동'기준을 연계하자는 북반구의 노동운동 일부가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사회포럼' 설치 제안이 '비즈니스포럼'이라는 자본 자유화와 개방화, 경제활동와 투자, 무역문제를 의제화시키고, 정부간 회의에 의견을 강력하게 개진할 수 있는 기구가 공식화된 것을 주요한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이런 비교가 가능하다. 경제인들의 포럼이 있다면, 이것이 친자본과 경제일변도로 아셈이 흘러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사회(활동가)의 포럼을 공식적으로 설치해야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가 뒤바뀐 사고방식이다. WTO를 해체하거나 WTO 국제 체제로부터 이탈하자는 주장과, WTO 체제라는 자본의 호랑이굴 내에서 무언가 친노동적이고 친민중적인 기준과 흐름을 창출하자는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셈이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국제적 지배장치에 다름 아니라면, 아셈은 반대와 해체, 이탈의 대상이지, 결코 그 안에서 진보적, 민주적, 반자본의 근거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공간은 될 수 없다. 이러한 지적을 마치 원칙만을 강변하면서 대중적이고 유연한 전술 구사를 방기하는 본질환원론이라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빗나가도 왕창 빗나간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권인 김대중 정권이 야심적으로 추진했던 노사정위원회를 어떻게 판단하고, 전술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정권이 요구하는 노사정위원회를 민중운동이(!) 제안하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의 차이를 혼동하는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사회포럼' 구상은 시민사회단체를 국제적 포섭체제로 수렴할 의사와 전망을 가지고있는 부르조아들의 구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비록 그 수순과 추진과정이 약간 이질적이더라도 말이다. 노사정위원회에 어떻게 전술적으로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노사정위원회를 민중진영이 제안하고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는 발상. 여기에 무슨 비판이 필요하겠는가?

세째, 이러한 점들을 살펴볼 때 '사회포럼'의 설치 제안은 최근 브라질의 민중운동단체인 '땅없는 농업노동자의 운동'(MST)이 전세계 시민사회단체와 민중진영에게 주도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대항하는 세계'사회포럼'의 건설"이라는 제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시각에 서 있는 것이다. 자본의 교두보 '안'이 아닌 '밖'에서 자본의 교두보를 허물고 해체시켜 낼 수 있는 민중진영의 교두보를 만드는 것, 이것은 결코 '사회포럼'의 문제의식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은 아셈과 다른 것이라고? 아셈은 열린 공간이라고? 삐뚤어진 안경을 벗어야만 이러한 왜곡된 사고를 정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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