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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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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후?

장귀연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20세기 후반 19XX년 초등학교 교실

"옛날에는 왕, 귀족이나 양반, 평민, 노예라는 신분이 있었지. 신분이란 건 높고 낮은 게 정해져 있는 거지. 왕족이나 귀족은 높은 신분이고, 평민은 천한 신분이고, 노예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해서 사고파는 물건 취급을 받았지. 그러니까 귀족이라면 아무리 어리고 멍청해도, 평민들은 그 앞에서 굽신굽신대면서 존댓말 쓰고 그래야 했던 거야. 노예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너희들도 영화에서 봤지? 어린 귀족 도련님한테 할아버지 평민이나 노예가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쩔쩔매고, 귀족은 이래라 저래라 막 명령하고 그러잖아. 낮은 신분 사람들은 높은 신분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지."

선생님의 특기는 옛날 얘기하듯 구수하게 이야기로 가르치는 거다. 그래서 역사 시간이면, 아이들은 더욱 눈을 빛내며 수업에 열중한다.

"이 신분은, 능력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왕족, 귀족, 평민, 노예라고 무조건 정해지는 거야. 부모가 노예면 무조건 노예인 거지.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나도 평생 노예야."

어린 아이들이지만, 사실 영화나 동화책에서 보고 들어 대강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수업 시간에 얘기를 들으니, 이상하고 기괴하게 들린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니, 그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부 열심히 잘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잘 살 수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나라에는 법이 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나쁜 짓 하면 잡혀간다'라는 말과 함께 그런 얘기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진짜로 옛날에는 그렇지 않은 세상이 있었다니….

아이들은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서로 킬킬댄다. '히히, 난 왕자로 태어나서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면 좋겠다. 공부할 필요도 없을 것 아냐. 공부 안 해도 다 내 맘대로 될 테니까.' '웃기고 있네, 넌 분명히 노예로 태어났을 거야. 나 영화에서 봤다. 노예들은 막 채찍으로 얻어맞으면서 일하더라.'
아이들의 수군수군 속삭이며 떠들어도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수업을 계속한다.

"나라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라는 것 배웠지? 그렇지만 옛날에 나라의 주인은 바로 왕이었단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왕이 온 나라를 가지고 있는 셈이고, 왕 맘대로 나라 백성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할 수 있었던 거지."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왕이나 귀족은 파티만 나가고 놀고 먹지요?"
"아니야, 몸을 써서 하는 일들은 천한 평민들이 했지만, 귀족들도 나라를 다스리거나 죄 지은 사람 벌주거나 그런 일들을 맡아서 했지. 음, 하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귀족들도 있기는 했어. 어쨌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아무것도 안하고도 부자로 살 수도 있고, 자기보다 낮은 신분 사람들에겐 맘대로 명령할 수 있었으니까."
"왕이 자기 맘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형할 만큼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요?"
"하하, 너희들도 배운 것처럼, 법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 하지만 그건 요즘 얘기고,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때도 있었단다. 사실 원칙적으로는 왕의 말이 곧 법이었지. 왕이 이렇게 해라 하면 그게 곧 법이 되는 거니까."
"그럼 왕한테 잘못 보이면 죽겠네요."
"그런 일도 있었지."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히히, 내가 귀족이고 선생님이 평민이면, 선생님한테도 야, 물 떠 와라, 이렇게 할 수 있었어요?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더 똑똑하고 그래도요? 그럼 그 명령을 듣는 평민들이 되게 기분 나빴을 거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 안 했을 것 같은데요?"
"그 땐 그게 당연했거든.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지금은 이상하게 생각되고 기분 나빴을 것 같지만 그땐 그게 자연스럽게 생각되었지."
"노예는 어땠는데요?"
"노예는 물건 같았다니까. 말하자면 너희들 갖고 있는 책이나 가방이나 뭐, 그런 것 같이 주인이 있어서 시장에서 사고 팔고 선물로 줄 수도 있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수정이가 재혁이 주인이고 재혁이가 수정이 노예라면, 수정이는 재혁이를 시장에 갖다 팔 수 있는 거지. 아니면, 나한테 스승의 날 선물로 줄 수도 있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러고 말야."
"헤헤, 그런 게 어딨어요? 사람은 사람인데."
"예전엔 그런 생각이 없었다니까.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이 없었던 거야. 노예는 사람 취급 안 했어."
그 중 똑똑하다는 아이 하나가 결론짓듯 소리친다.
"말도 안돼요. 너무 불합리해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데 말이에요. 사람들이 가만 있었어요?"

선생님은 약간 우습다는 듯 미소짓는다.

"지금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도, 한 백여년 전만 해도 이런 게 남아 있었단다. 물론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없앤 거야.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고 자기 능력에 따라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


21세기 후반 20XX년 초등학교 교실

"옛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부자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단다. 이 사람들은 단지 돈만 대고 다른 사람들이 일해서 만든 것 중에서 많은 몫을 가져갔지. 그러니까 돈이 또 생기지? 그러면 그 돈을 또 내고, 또 돈을 벌고, 그렇게 해서 일단 돈이 있으면 계속 새끼를 쳐서 점점 더 부자가 되는 거야."

선생님의 특기는 옛날 얘기하듯 구수하게 이야기로 가르치는 거다. 그래서 역사 시간이면, 아이들은 더욱 눈을 빛내며 수업에 열중한다.

"그렇게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일을 해서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먹고살아야 했지. 그런데 이 일거리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었거든. 돈이 되는 일거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런 사람들은 나라에서 아주 쬐끔씩 주는 쥐꼬리만한 돈을 가지고 억지로 연명하거나 아니면 굶을 수밖에 없었지. 너희들도 영화에서 봤지? 그런 사람들을 실업자라고 부르지 않니? 이런 실업자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하지 못해서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공부시키지도 못하고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상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하루에 10시간, 12시간씩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바로 옆집에서는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일거리를 구할 수가 없었던 거지. 실업자가 직업을 구하면 또 그렇게 많은 시간동안 일을 해야 했고."

어린 아이들이지만, 사실 영화나 책에서 보고 들어 대강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수업 시간에 얘기를 들으니, 더 이상하고 기괴하게 들린다.
어른들은 일을 하고 아이들은 공부한다.
그런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생각한다. 하루에 4시간씩 일을 하지만, 그래도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신다. 10시간씩 일을 하라고 하면 엄마, 아빠는 기절하실 거다. 예전에는 그렇게 일을 했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일할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옆에 놓아두고 그렇게 일해야 했다니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세상이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서로 킬킬댄다. '야, 10시간씩 엄마, 아빠가 일하면, 언제 놀러가냐?' '그치만 엄마가 잔소리할 시간도 없겠다. 난 차라리 그게 좋겠어. 내 맘대로 놀 시간이 많잖아.' '그렇지만 너도 어른 되면 10시간씩 일해야 되는데?' '아냐. 아까 선생님이 돈 있는 사람은 일 안하고 돈만 내면 된다고 그랬어.' '그렇게 일 안 해도 놀고 먹을 만큼 돈 많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더라.' '히히, 그래도 난 분명히 그런 사람 중의 하나로 태어났을 거야.' '쳇, 너처럼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고 먹을 심보를 가진 놈은 분명히 실업자라는 게 됐을 거야.' '실업자가 더 좋겠다. 일 안 하잖아. 우리 엄만, 그럼 정말 좋아할 걸.' '모르는 소리 마, 나 영화에서 봤는데, 실업자는 진짜로 돈이 하나도 없어. 진짜다, 너.'

아이들의 수군수군 속삭이며 떠들어도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수업을 계속한다.

"사실 세계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어. 백년 전쯤을 보면 세계 인구 중 한 7분의 1 정도가 기아선상에 있었단다. 기아선상이란 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야. 그게 식량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거든. 너희들 그때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 알지? 그 나라가 제일 부자 나라라고 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걸 10분의 1씩만 줄여도 그걸로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사람들이 남겨버리는 음식만으로도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던 거지. 그 와중에서, 미국 같은 데서는 농산물 값이 떨어졌다고 식량을 막 바다에 버리고 하는 일도 있었단다."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2시간씩 일하고 어떤 사람은 일거리가 없으면, 반반씩 나누면 되잖아요? 그럼 둘 다 좋지 않아요? 12시간 일하던 사람은 6시간만 일하니까 조금만 일해서 좋고, 일거리가 없던 사람은 일거리가 생겨서 좋고. 그때 사람들은 계산을 할 줄 몰랐어요? 이상하다… 저번 시간에 선생님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이 생긴 건 그보다 훨씬 더 옛날이라고 하셨잖아요."
"글쎄, 계산을 할 줄이야 알았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어.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관리비용도 많이 들고 하니까, 일을 하는 사람 수는 줄이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오래 심하게 일을 시키는 게 더 낫다는 게 돈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었거든. 어쨌든 돈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가 일하는 것도 아니고 돈만 내면 되는 거니까, 더 비용을 적게 들이면 자기한테 돌아오는 돈이 많아지게 되니 그게 좋은 거였지."
"아니, 어떻게 자기 좋자고 그렇게 하죠? 되게 못됐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선생님 말씀이 돈을 가진 사람은 돈만 내면 더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돼요? 돈이 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지만 돈을 댄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일해서 나오는 것들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 때는 그랬단다. 지금은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그땐 그게 당연하게 생각되었지."
"다른 건 다 몰라도요,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식량을 막 버리고 했다는 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차피 버릴 거면 굶는 사람들에게 갖다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몰랐나요?"
"전혀 모르진 않았지. 그래도 그건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아니, 사실은 그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몰랐다고도 할 수 있지. 그때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거든. 돈으로 남지 않는 일에는, 사람들이 꿈쩍도 안 하던 때였으니까, 이 쪽에서는 남아버리는 걸 저 쪽에 갖다주고 할 수가 없었단다."

그 중 똑똑하다는 아이 하나가 결론짓듯 소리친다.

"말도 안돼요. 너무 불합리해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데 말이에요. 사람들이 가만 있었어요?"

선생님은 약간 우습다는 듯 미소짓는다.

"지금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도, 한 백여년 전만 해도 그런 식이었단다. 물론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없앤 거야. 그래서 지금은 평등하게 누구나 일을 나누어서 하고 그렇게 나온 것들을 나누어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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