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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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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이 아니라 생시에 다녀온 평양

홍근수 | 운영위원, 향린교회 담임목사
<b>멀고도 가까운 '서울에서 평양까지'</b>

'친북인사'로 널리 알려져 온 나같은 사람들, 그것도 적은 숫자가 아닌 42명이 한꺼번에 10월 9일(월)부터 5박 6일간 북을 다녀왔다. 비록 북에 가서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고 다만 '참관'만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이남의 제 정당·단체대표들이 정부당국의 허락을 받아 이북을 방문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이북 최대의 정치적 명절인 10월 10일 노동당창건 55돍 행사에 가게 했다는 것, 비록 판문점 통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3국을 경유한 게 아니라 직항로를 이용하게 했다는 것, 북에서 특별기를 보내와 초청인사들을 실어가고 또 남으로 보내주는 방식에 남북당국이 합의했다는 것 등은 확실히 대담하고 통큰 결단이었다. 격세지감의 이러한 일은 모두 6.15 이후 가시적인 한반도의 변화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음을, 우리는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9일(월) 1시경 우리는 북의 특별기 편으로 김포공항 상공을 떠서 평양을 향했다. 6.15 남북정상회담 때 개설되었다는 직항로의 거리는 약 530여㎞, 비행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다. 비행기에서, 이남은 점점 멀어지고 이북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한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가는 거리·시간과 비슷한 이 거리를, 우리는 반세기가 넘도록 가지 못했다니 정말 한심하기까지 하였다.

이내 평양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라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김포공항을 이륙한지 1시간 남짓,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약 5백여명의 이북 환영객들이 붉은 가화를 흔들고 '조국통일' 등의 구호를 연호하면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우리는 이북의 시민들 옆을 한 줄로 서서 지나가며 일일이 답례하였다.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던 환영객들의 얼굴은 깡마르고 영양이 그리 좋지 않은 혈색들이었다. 화장품도 얼굴에 바르지 않은 모양에 마음 한 곳에서 뭉클함을 느꼈는데, 이는 이남에서 간 다른 분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b>이남에서는 이적단체 요원, 이북에서는 영웅이고 '귀빈'</b>

우리는 공항에서 간단히 단체별로 사진을 찍은 후, 아무런 공식행사 없이 숙소로 향했다. 사진에서만 보던 평양과 이북 땅을 실제로 보고, 깊은 감회에 젖었다. 인구가 3백만명도 못 되고, 녹색지대의 비율이 40% 가량이라는 평양시는 온통 노동당 55돍 경축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6.25 후에 독일인의 설계로 새로 건설되었다는 평양은, 공기 맑고 물 맑고 거리도 깨끗하고 서울같이 조밀하지 않아 넉넉하게 보이는 도시였다. 확실히 아름다웠고 여유있어 보였다. 아무리 도시라도, 사람다운 생을 살려면 이 정도 환경은 갖추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 대한 이북의 대접은 특별하였다. 42명 전부를 벤츠 승용차로 모셨다는 것, 숙소를 외국국빈이 머무는 초대소로 했던 것 등 이북에 체류하는 동안 그야말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내심 우리가 과연 그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그 동안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투쟁했고 그 '덕분'으로 고문과 감옥신세 등을 감수했으며, 사회적으로 온갖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왜 우리는 이런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남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분단의 북한 당국으로부터는 이렇게 칙사대접을 받아야 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이 민족분단 때문이었다.

우리는 '평양에서 36㎞/ 강동에서 8㎞'라는 이정표가 있는 큰 길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갔다. 우리가 머물 '봉화 초대소'였다. 나는 백기완 선생과 김영대 민주노총 부위원장과 같이 핑크색의 17동에 배치되었는데, 2층의 큰 집은 아래층에 회의실 등을 갖추고 2층에는 큰 침실방 세 개가 있었다. 한 사람이 한 방씩이었다. 침실은 더할 수 없이 훌륭하였다. 큰 방에다, 자리는 아주 편했다. 나는 이북 땅에서의 첫날 밤을 편히 곤하게 깊이 잤다.


<b>비 맞으며 참관한 조선노동당 창건 55돍 축하행사</b>

10월 10일(화)은 이북 최대명절인 조선로동당 창건 55돍이었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비가 뿌렸다.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무력부와 조선로동당평양시위원회가 공동초대하는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경축열병식 및 군중시위에 참관하였다.
군인들과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더니, 마치 열광상태에 빠진 광신도들 같이 행동하였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십만명의 군인들, 비록 무장은 하지 않았으나 무리를 이루어 열병식을 하는 광경을 보고 우리는 또 아연실색하였다. 정면 끝쪽에 대동강 강둑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많은 군인들이 그 언덕을 계속 넘어왔고, 나중에는 꽃을 든 수많은 인민들의 떼가 끝이 없는 듯 계속 넘어왔다. 그 많은 숫자의 군인들과 인민들의 일사불란한 행진에 우리의 열린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일찌기 그런 광경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신기하게 보였으리라.

두어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 내내 비를 맞으며 서서 비무장한 이북 군인들의 열병식을 관람하면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본 "위대한 선군정치(先軍政治) 만세! 총진격" 등의 구호를 상기하면서, 이북이 과연 어떤 인사가 평하는 대로 '풀을 뜯어 먹는 사자'인가? 아니면 자신을 뜯어먹으려는 '사자를 먹는 풀'인가?하고 속으로 '논쟁'하였다.


<b>평양 거리에 대한 인상</b>

입장이 허락되지 않은 곳들 - 김일성 생가(고향집?), 김일성 시신을 모신 금수산 만경대, 김일성 동상 등 - 은 차치하고 우리는 여러 곳을 가 보았다. 김일성 광장에서의 경축식 외에 인민궁전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만찬, '홰불' 시위, '영생탑,' 개선문, 지하철역, 예술창작사, 애국열사릉, 5월 1일 경기장, 10만명이 연출한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 평양의 쑥섬(1948년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장소), 주체탑, 개선문, 묘향산 국제선물전시관, 묘향산 자락에 있는 보현사(普賢寺), 1만 5천명의 학생들이 벌이는 카드섹션, 평양학생소년궁전, 평양 단고기점, 옥류관 등이었다.

평양에 일주일도 머물지 못했기에 우리가 이북이나 평양을 말한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식일 것이다. 그러나 가보지 못한 곳을 제쳐놓고 우리가 본 것만 말한다면, 앞으로 남북 통일이 되었을 때 이북은 이남에 비해 내놓을 만한 명물이 아주 많다고 하겠다.
또 평양 거리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소비도시인 서울과 전혀 다르게, 일체 광고가 없었다. 중요한 광고가 붙어있을 자리에는 구호들이 대신 붙어있었다. 그것이 아마 이 사람들에게는 '복음'인 것 같이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는 구호는 우리의 눈을 끌었다. 정치색이나 이념적 성격이 없는 일반적인 교훈성 구호였기 때문이었다.


<b>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북미 공동커뮤니케 소식</b>

우리가 평양에 가 있던 중, 10월 13일 두 가지 큰 역사적 소식들이 전해졌다. 하나는 남에서 온 기자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단독수상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미 공동커뮤니케의 발표였다.
노벨평화상 수상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남북 두 정상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 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었다. 결국 노벨평화상 수상소식은 북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것 같다.
우연이겠지만, 같은 날 이북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소식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북미 공동커뮤니케 소식이 발표되었다. 그 긴 공동커뮤니케는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북미관계를 총체적으로, 근본적으로 개선한다는 것, 정전협정 대신 평화보장체제를 구축한다는 것,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것 등 엄청난 합의사항들이 들어있었다. 이북 지도자들과 인민들이 열광할만 했다.

그 공동커뮤니케가 한반도의 새로운 정세, 큰 변화를 몰고올 것은 틀림없는 사건이지만, 과연 북이 남과 달리 미국에 예속되지 않고 민족자주를 지킬 수 있을만큼 북미관계를 조절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걱정이었다.

우리는 떠나기 전날 점심식사를, 그 유명하다는 평양 단고기점에서 했다.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집 같았으나 들어가니 어마어마한 저택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은 모두가 대리석이며 집이 넉넉한 느낌을 주었다. 단고기 점심을 즐긴 후 그 자리에서 유흥판이 벌어졌다. 온갖 시름을 잊고 함께 노래를 부르던 즐거운 한 때. 북측 대표인 김영성 선생은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김용태 선생, 지은희 선생과 함께 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노래솜씨가 수준급 이상이었다. 김영성 선생이 이남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이중창을 한 노래는 '심장에 남는 사람'이었는데 그 노래의 함의가 진지한 것이었다. 누가, 무엇이 이렇게 하나로 어울려 노래하고 웃고 기뻐하는 우리 동포들을 갈라놓았단 말인가?

점심 후 평양학생소년궁전 앞으로 서해갑문까지 뻗었다는 평양-남포 고속도로를 달렸다. 바로 그저께 조선로동당 창건 55돍을 기념하여 개통되었다고 했다. 이 도로가 평양에서 서울까지 이어지고 남북이 서로 그 길로 달린다면 그것이 통일이 아니겠는가.


<b>확실히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것</b>

올 때처럼 떠날 때도, 환송객들은 공항에서 붉은 가화를 흔들며 "조국통일, 민족대단결" 등을 연호하였다. 오전 11시경, 비행기는 평양을 이륙하여 1시경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내리니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범민련, 장기수들, 전국연합, 자통협 등 반가운 동지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비공식적인 환영식을 아주 약식으로 마친 후 우리는 각기 흩어졌다. 나는 마중나온 자통협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간단히 평양 다녀온 보고를 하였다.
떠나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5박 6일의 역사적인 이북여행은 모두 마감되었다. 지난 5박 6일 동안 내가 꿈꾼 것이 아닌가, 실제로 우리가 이북을 가서 보았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북의 안내원들이 말하였듯이 정말 우리는 좋은 때에 이북을 다녀왔다. 이 글을 쓰면서 이북에서 만났던 우리의 많은 동포들, 이북에서 보았던 산하와 역사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있다. 그 곳에는 분명 우리의 고유한 풍속과 문화가 덜 오염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었다. 또 거기에는 새롭게 변화된 세계상황에서 민족자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온갖 투쟁을 다 하는 위대한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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