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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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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영역에서 노동자 민중은 무엇을 할 것인가?

백석근 |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정책기획실장
신자유주의적 복지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현 정권은 국정이념의 하나로 '생산적 복지'를 주장하였다. 아주 추상적 개념으로 제안된 '생산적 복지'라는 새 패러다임은 '자활'이라는 내용으로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생산적 복지란 무엇인가? 대통령 비서실 삶의 질 향상기획단에서 나온 '자활지원'이라는 책자에 의하면 "생산적 복지는 모든 국민이 인간적 존엄성과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함과 동시에, 자립적이고 주체적으로 경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 분배의 형평성을 제고함으로써 삶의 질 향상과 사회 발전을 추구하는 국정이념"이다. 그럴듯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첫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시장 속에서의 복지, 즉 공정한 시장질서 속에서 모든 국민이 생산과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시장질서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복지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질서의 공정성이라는 것은 노자간의 동등한 관계가 형성되고 인정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이나 몇 가지 정책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이란 전제에 대해 이념적 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적 복지란 곧 말 뿐이다.

두번째 요소로 시장경쟁에서 실패한 사회적 약자 계층에 대해서 국가가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배려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사회보장이라는 원칙에서 보면, 시장경쟁에서 실패할 확률에 대한 최소화를 위한 노력은 기회 향유라는 것으로 얼버무려지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배려하겠다' 정도로 그치는 것이다. 이 '배려'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자활의지 극대화를 유도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어 더욱 황망하다.

이는, 세번째 중심내용이 일자리창출과 직업능력개발을 통해 일할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취약계층의 자활을 지원한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용에 숨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생산적 복지의 사상적·이념적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이다.


말 뿐인 복지

복지란 아주 단순한 논리로 정리하자면, 사람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나 교육받고 노동하고 죽을 때까지, 전 과정에서 구성원 모두가 누려야 할 사회적 권리라 할 수 있다. 흔히 복지국가라 함은 국가의 이념을 국민의 행복한 삶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복지사회라 함은 사회구성원의 생존권적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제도나 체계가 인간이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을 말한다.
생존권이 지켜지는 행복한 삶이란 인간이 사회에 태어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불어 살기 위한 기본적 권리로써, 의식주의 해결과 교육, 의료, 근로, 여가, 노후 등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장은 사회적으로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해결의 주체는 구성원 모두이다. 구성원들은 나름의 체계를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스스로 세운 국가 권력을 갖게 되고, 생산을 통한 부의 축적을 위하여 경제 주체를 이룬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 권력이 세금을 걷는 것, 사회적 안정을 지키는 것 모두는 구성원들의 권리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행위이어야 하는 것이다.

복지의 기본적인 원칙에서 보았을 때 '생산적 복지'란 인간을 사회 구성원의 주체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대상화하였다는 것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는 이념적 동질성이 없는 두 단어의 합성으로 본질적 의미를 왜곡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일방적·시혜적 차원의 복지가 아니라 소외를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생산적인 삶을 살게 하겠다는 논리. 이것은 사회적 보호가치를 시혜라는 것으로 비하하고 극복할 조건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서, 복지사회의 기본 체계와는 거리가 있다.


사회보장의 객관적 현실

노동자 민중의 관점에서의 사회복지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에 사회복지의 구체적인 내용과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현실을 살펴보자.
기본적 권리로서 일할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가? 사회의 재화의 축적은 사람의 노동에 의해서 마련된다. 그 대가는 올바른 원칙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구성원들은 사회의 이익을 위한 모든 곳에서 일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에 비해 일할 자리가 부족할 경우, 여러 방안을 통해 생활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생활의 유지는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기본적 수준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의 일할 권리에 대한 부문은 철저히 경제주체 중 일부분인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정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독선에 대해 일정한 조정역할을 맡았던 정부도 법·제도적 차원에서 결국 자본의 독선에 복무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자본의 성격은 일국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물결은 초국적자본의 무차별적 횡포를 앞세우고 세계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실업은 장기화·고착화되고 있으며, 자본의 이익은 확대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절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할 기회에 대한 일방적인 억압으로 사회구성원의 삶은 위기에 봉착하며,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사회적 위기가 나타날 것이다. .
일을 하게 됨으로써 사람은 사회 성원의 책임자적 위치가 된다. 책임자의 위치라는 것은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면서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되어야 하고 인정되어야 한다.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책임을 다하면서 다음세대가 책임질 위치에 오기까지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는 일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여가가 보장되어야 하며, 안전한 삶이 약속되어야 한다. 곧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며,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하고, 다쳤을 때 생활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불균형에 의해 일자리의 일시적 박탈이 있을 시에는 당연한 사회적 보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일방적 경제성장 논리 속에서 산업재해 왕국, 최장 노동시간 등의 기록을 갖고 있다. 의료보험이니 산재보험이니 고용보험이니 하는 것들이 마련되었다고 떠들면서도, 노동자들의 삶은 변화하지 않았다. 이 제도들은 보호해야 할 부분은 보호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사회적 분배 원칙과는 무관하게 설계되어 있다.
사회보장은 사회 구성원이 책임을 다하고 은퇴하였을 때 여생을 즐길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늙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쓸모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하였기에 사회적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국민연금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는 빈익빈 부익부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자유시장 경쟁 논리에 맡겨져 있다. 기본적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보다 제한적으로 주어진 일할 권리가 무시된 채, 일한 소득만큼만 갖고 여생을 살아가라는 논리이다.

이제까지 우리사회의 사회보장 정책에 대한 문제점 중에서도 꼭 짚어야 할 부분은, 사회 주체들의 역할이 철저하게 불균형하다는 것이다. 조세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삶을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책이 관리와 운영에 머물고 있으며 자본은 최소한의 비용만을 부담하고 있다. 대부분은 민중들이 스스로 극복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민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사회보장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것은 IMF경제위기 이후이다. 200만에 이르는 실업 군이 발생하자 사회전반의 붕괴를 우려한 모두가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이 역설하였다.
정부는 급한 대로 한시적 실업대책 사업에 3년째 수조원을 투자하고 있기는 하다. 물론 구조조정이라는 미명아래서 외국 투기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100조가 넘는 돈을 쏟아부은 것에 비하면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기간 사회복지 예산에 비교하면, 만만한 돈은 아니다. 이러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안과 민중들의 삶의 위기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그 원인은 다름아니라 현재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이, 민중의 삶을 위기의 나락으로 이끈 신자유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하에서 정부는 노동자들의 삶의 위기로 내모는 전사회적 구조조정 정책과 이들을 최소한으로 보호한다는 사회안전망 구축이라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적 복지, 사회안전망 구축이라는 말은 결국 모든 문제의 본질을 왜곡 호도하고 있다.
하기에 "전세계 민중들을 억압하는 초국적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놀음 저지"라는 명제가 현재 사회보장운동의 중심이념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사회적 안전망이 강조되는 이유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의 결과로 인해 민중들의 생존권이 위기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권의 기본은 일할 권리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고용안정을 기본으로, 일할 맛이 나는 현장을 만들어 가는 가운데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연히 누려야할 삶의 질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실업의 확산 그리고 일자리 창출없는 실업대책 속에서 민중들의 생존권에 대한 요구는 나날이 확산되고 있다.

민중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가장 크게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은 바로 사회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다. 모든 복지정책에 있어서 사회적 역할 분담의 원칙은 당연한데, 국가권력은 이 원칙을 만들어 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회복지 예산의 확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사회안정 기능과 통합기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복지에 있어서 국가 책임의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사회복지에 투입되는 정부 예산이, 외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니, 최근의 실업예산의 삭감을 보면서는 정부의 무원칙한 정책에 대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비정규직이 54%에 이르고 실망실업자들의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장기실직자들이 피폐해지는 과정에서, 모호한 통계 수치에 현실파악을 의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보장운동은 국가의 책임아래 사회적 공동의 선인 안정과 통합을 이루는 차원에서 진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곧 사회복지 예산 확대와 올바른 분배의 책임을 정확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부 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끊임없이 유도해야 하지만, 더욱 관건적인 것은 노동자 민중들의 사회복지 영역에 대한 주체적 자각과 사회적 연대의 실현에 있다. 사회보장운동은 흔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위에서 밝혔듯이, 사회보장운동은 이 사회의 인간적 삶을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보장을 책임지겠다는 합의의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며 희망이다. 일하는 현장의 차이, 삶의 모습의 차이, 세대간 차이, 운동의 주체적 처지의 모두를 극복하고 연대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사회보장을 위한 사회복지 확보운동은 민중의 자성적 힘과 연대의 정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중심에 서고 소외받는 모두가 한길에 서는 사업을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사회복지운동에서 주체 형성의 문제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권 쟁취라는 구호는 일하는 현장에서, 도심 한 복판에서, 삶의 현장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총체적 고민과 근본적 힘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이 사회보장운동도 주체의 형성과 발전에 의해서 가능하다. 사회보장운동에 있어서 중심에는 당연히 노동자들이 서야 한다. 그리고 실업자, 농민, 빈민, 신념으로 민중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 운동에 함께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체들의 문제를 분석하고 그 해결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노동자들의 문제점과 더불어 실업자들의 운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연대적 질서에서 사회보장운동의 주체형성과 역할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다. 물론 농민, 빈민, 제 민주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사회의 과제를 올바로 인식한 주체들에 대한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겠으나 운동 주체들의 과제로 남기기로 하겠다.

사회보장운동에 있어서 노동자가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분절화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사회의 생존권 확보운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이미 취업자들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사회복지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4대 사회보험이 적용되고 기업복지의 혜택을 받으며 개인적으로 복지를 챙길 수 있는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우리 노동자들을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 내부에서 계급적 동질감이 점차 흐려지면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정서적 이질감이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 문제를 지적하자면 노동자들의 분절적 단속성은 결국 '가진 노동자'들마저 위협하고 있다.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조건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어도 해결대안을 못 찾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몇몇 조직이나 개인이 해결대안을 제시한 경우도 있으나 실천을 담아내지 못하여, 근본적 해결책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분절적 모습을 깨고 대동단결의 기치아래 사회보장운동의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 철학을 세우고 노동자간의 사회적 연대라는 원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우선, 노동자의 조직적 과제는 모든 노동자를 하나로 묶어세울 수 있는 내용과 조직을 가지는 것이다. 최근 노동조합운동 내에서는 산별노조건설과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비정규의 조직내화를 위해 많은 조직 노동자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주체 형성에 있어서 긍정적 노력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별 동질성이나 여러 정치세력의 이익을 펼치는 장을 마련하는 정도가 중심사업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세력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회복지 영역에 있어서 노동자간의 사회적 연대를 위해서는 실업자들의 주체적 조직화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실업자는 곧 노동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유는, 일자리를 한시적으로 잃은 것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 속에서 실업·반실업이 수시로 반복되는 사람들과 노동시장에서 아주 퇴출되어 노동할 기회를 박탈당한 장기실직자 그리고 포괄적 의미에서 사회보호 대상자들을 총괄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들은 사회복지에 의한 보호가 절실한 사람들이다. 곧 이해 당사자일 수 있다. 당연히 사회보장운동의 주체이다. 그러나 이들을 사회보장운동의 주체로 세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실업자들을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갖는 특징과 절실한 바램을 기초로 조직화를 고민해야 한다. 실업자들의 생계 유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곧 공동의 요구안이나 단일한 조직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말이 될 수 있으나, 역으로 말하면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요구안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뜻이 된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는 근본적이고 정치적 이슈이다. 곧 생존권 쟁취를 위한 정치적 힘과 조직을 만들 수밖에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실업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조직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고, 조직화의 최종 목표지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00회' '**협동조합' '실업자 사업단' 등을 만들 수도 있으며, 나아가 이들이 정치적 집단의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노동자, 실업자 조직화의 방향 제시에 있어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민중들의 총체적 연대이다. 노동자들간의 연대, 실업자간의 연대, 실업자와 노동자의 연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전국적으로 나아가 전세계적 민중연대 전선에 대한 사고가 있어야 한다. 주체의 힘이란 여러 제반 조건이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최대화될 수 있다.


진정한 사회보장을 일구기 위한 당면과제

노동자 민중들의 사회보장운동의 방향과 조직화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원론적 제안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결코 현실을 무시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 사회보장운동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만 정책적 요구안을 정리해보자.(물론 이외에도 교육, 조세, 의료 등에 대한 개혁 과제가 있다)
첫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비정규직의 차별철폐(사회적 보호)가 필요하다. 일할 권리란 안정적인 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사회 구성원인 노동자들의 삶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안정적 일자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는데도,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으로 대체시켜 노동자, 실업자들의 일할 기회를 늘릴 수 있고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자본의 논리에 맞서야 한다. 노동자들의 일자리 확대는 다른 방향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사람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적 이득은 없어도 공공적 이익이 있다는 차원에서 가능하다.

둘째, 4대 사회보험 전면적용 및 통합운영이 요구된다. 생존권 쟁취의 측면에서 봤을 때, 4대 사회보험 제도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보호되어야 할 생존권적 요구 모두를, 노사가 분담하는 방식으로만 설계되어 있는 현 제도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또한, 4대 사회보험이 모든 국민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시급하다. 현재 적용제외 혹은 예외대상으로 되어있는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써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제도가 소외된 사람들을 스스로 배제하고 있는 꼴이다.

이 이유에서는 예산 타령도 있겠으나 각기 운영되는 체계상의 문제도 심각하다. 예를 들어보자. 스스로의 고용증명이 불명확한 일용 노동자들의 경우, 조건이 되는 사업장을 이동하면서 일년 열두달 놀지 않고 일해도 보험대상에서 제외된다.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은 자영업자들처럼 지역적 편재가 되어있고 고용보험의 경우는 대부분 사용자들의 편법에 의해 제외되어 있다.

셋째,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전면 개정이 요구된다. 2000년 10월부터 시행되는 새로운 생활보호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한번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면 영원히 생보자 일 수밖에 없는 구조속에서 생보자의 조건과 대상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생활보호대상자라면, 생존권적 요소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의료면 의료, 교육이면 교육 등 부문적으로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을 보장받기를 원할 수 있다. 특히 일용노동자들의 경우,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 지 모르는 상황이라, 조건부 급여수혜자로 몇개월씩 묶인다는 것은 기능이나 노동조건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모순은 곧 생존권 보장받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만다. 과연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보호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섯째, 사회복지 예산이 대폭 확대되어야 한다. 현 수준에서 사회보장운동의 요구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정부의 예산 문제이다. 어느 부처의 예산을 늘려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남아도는 예산을 달라는 요구도 아니다. 현재 기초적 삶의 유지를 바라는 모두에게 사회적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선별체계는 결국 사회의 불평등구조를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

여섯째, 무엇보다도 올바른 실업정책이 수립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업률이 떨어져 정상적 궤도에 이르렀다는 정부의 발표는 2000년대 들어와 줄곧 선전되고 있다. 그러나 실업률에 의한 실업대책의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다. 결국 현재 실업관련 정책의 문제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실업 문제는 빈곤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다. 장기실직자들의 증가와 중년 실직자들이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서 초래되는 심각성이 있다. 단순히 숫자의 개념으로 실업예산을 대폭 삭감한다든지, 어려울 때 실시하였던 생계보장 대출을 무조건 상환하라는 것은 현실인식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주제어
노동 빈민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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