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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2.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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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_시론_김윤영.pdf

故 김주영 동지를 추모하며

오늘 다시,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생각한다

김윤영 | 빈곤사회연대 조직국장
지난 10월 26일 한 장애여성이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이후 화재가 발생한 자택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 그녀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던 김주영 활동가다. 중증여성장애인으로서 스스로 자립생활을 꾸려나가며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보조인 제도 확충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투쟁했던 그녀는 결국 그 문제를 넘지 못해 생명을 잃었다. 화재는 10분 만에 진화되었지만 24시간 활동보조인이 제공되지 않아 화재가 난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숨지게 된 시간은 단 5분, 나오지 못한 거리는 3미터였다.

그녀의 삶

197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그녀는 1998년 2월 삼육재활학교 고등부를 졸업하였지만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2004년 정보처리전공 학사자격을 취득하고 2005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문화센터를 통해 직장체험연수에 참가했다. 2005년에는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이야기를 다룬 작품 <외출 혹은 탈출>을 연출해 그 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수여하는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후 2007년 9월까지 영상운동단체 <다큐인>에서 상근자로 활동을 하고 해마다 <장애인권영화제>의 스태프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07년 9월까지 RTV에서 방영된 ‘나는 장애인이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故 김주영 동지는 활동보조제도조차 없던 환경에서 2005년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시작한 자립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2006년 활동보조제도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2008년 자립생활센터활동가를 구한다는 소식에 광주의 <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1년간 상근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최근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위해 한양사이버대학에 다시 입학할 정도로 역량강화에 힘썼다. 최근까지 그녀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해왔다.
계속되는 투쟁 끝에 한 달 360시간, 하루 12시간의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24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의 자립생활은 여전히 험난한 일이었다. 12시간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하루 12시간씩 방치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언니, 요즘 행복해요”

장애와여성인권연대 <마실>의 김광이 대표는 故 김주영 동지를 보내는 추모의 글에서 그녀가 최근 ‘언니 요즘 행복해요’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장애여성으로서 자립생활을 꾸려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화재나 높은 문턱, 좁은 폭의 인도도 위험하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자립생활은 더욱 험난하다.

“1년 전 밤길에 집에 오는데 누가 도와준다며 따라와서는 집에 있는 내 가방을 들고 가버렸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요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어떤 술 취한 아저씨가 날 보고 그러더라고. ‘남들 하는 거 다하네?’” (어느 40대 장애여성)
장애인, 여성,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멸시는 끝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주영 동지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한 사람이었다. 자립생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많고, 과정은 지난하다. 가족의 품이나 시설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는 가족들과 투쟁해야 하고, 소득보장이 되지 않는 세상에 맞서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휠체어나 목발사용자의 접근권이 닿지 않는 공간에 맞서 싸워야 하고,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 홀로 있다는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집을 구하는 일부터 이용 가능한 교통수단을 찾는 일까지 비장애인보다 더 오랜 시간 더 많이 노력하지 않으면 한 가지도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해서 쟁취하려는 자립생활의 권리란 어떤 것일까? 지난 해 겨울 청와대 앞에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며 한 장애인 동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가진 집 한 채 때문에 내가 수급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부모님은 집이라도 팔아서 나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억압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억압받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원합니다.”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억압받지 않는 삶. 남들의 절반인 하루 12시간의 삶을 살면서도 김주영동지가 행복을 느꼈던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차별 없는 삶, 낙인 없는 삶,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삶

김주영 동지는 떠났지만 광화문 농성장에서는 여전히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장애등급제는 비장애인의 신체를 기준으로 장애인의 신체에 ‘손상’정도에 따른 등급을 매기는 제도다. 의학적 기준인 등급제를 사회적 필요에 따른 서비스 제공에 무조건 적용함에 따라 무수한 부조리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장애연금은 소득보조를 위한 것이지만 현재는 등급에 따라 (즉, 신체 손상 정도에 따라) 지급되고 있다. 활동보조인 역시 1급 장애인만 신청할 수 있는데 이는 장애인들의 개별 욕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장애등급제는 최근 재판정시기마다 30%씩 하향 조정되는 등 예산논리나 행정편의주의에 의해 장애인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용도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부양의무제는 아무리 가난한 개인이 있더라도 약간의 재산과 소득이 있는 가족이 있으면 수급권을 보장하지 않는 제도다. 국가가 ‘부양능력이 있는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에 대한 책임을 미루는 것이다. 부양능력이라는 기준 역시 현재 시점에선 현실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한 부모 가장과 살던 수급가정 자녀가 20살이 넘어서 부양의무자가 된다면 자녀의 소득이 100만 원만 되어도 의료급여 등을 포함한 수급자격은 완전히 박탈당한다. 이를 지연시키고자 따로 살더라도 150만 원이 넘어가면 부(혹은 모)친을 완전 부양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제도의 비현실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부양의무자기준은 가난의 책임을 개인과 그 가족들에게 떠넘기는 악법이다.
이런 제도들이 존속하는 한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에게 타인을 억압하지 않거나 억압당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시설에서 나오면 수급권을 빼앗기니까, 장애등급제 때문에 지원이 부족해서 평생 가족에게 부양을 의탁해야 하거나 시설에서 ‘보호’받으며 생활하는 것은 결코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은 부양의무자의 소득재산과 무관하게 지원받아야 하고, 장애인들은 손상정도에 따른 등급으로 자신의 신체를 증명하지 않아야 한다. 24시간 활동보조인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이를 온전히 지원해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몫

얼마 전까지 함께 거리에서 투쟁하고 농성장을 지키던 동지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다. 지난 10월 17일 빈곤철폐의 날에 진행한 <불안사전만들기>에서 한 장애야학학생은 자신이 불안한 이유에 대해 ‘활동보조인이 퇴근하고 나면 집에 불이 나서 죽을까봐 두렵다’라고 썼다. 얼마 뒤 정말 故 김주영 동지가 이렇게 떠나버렸다. 바로 얼마 전에는 한 근육장애인이 호흡기가 빠졌으나 이것을 추슬러 줄 사람이 없어 사망했으며, 지난 겨울에는 수도관이 터진 방의 물이 얼면서 누워있던 장애인이 죽었다. 남은 자들의 두려움 역시 여전히 그대로다.
야권 대통령 후보들은 故 김주영 동지의 장례식장에 모두 방문했다. 이들은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 필요한 만큼의 활동보조인 지원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들이 故 김주영 동지의 장례식장에서 ‘신체가 부자유해 안타깝게 생명을 잃은 사람’을 보았다면 그들은 결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해 부당하게 생명을 빼앗긴 사람’을 보았다면 이제는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가 미처 폐지되기도 전에 최근 보건복지부는 장애등급심사 강화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근로능력평가 강화를 통해 수급자를 더욱 강하게 선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바쁜 걸음을 멈춰 세우고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에게 낙인과 차별을 강화하는 모든 조치에 맞서 함께 싸우자.
주제어
빈민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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