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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11-12.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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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이후

류주형 | 정책위원장
잔여 임기를 100여 일 남겨둔 1997년 11월 7일, 김영삼 정부는 사실상 붕괴했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자기 손으로 만든 신한국당을 탈당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날 한국은행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을 검토함에 따라 정부는 경제적으로도 파산 선고를 받았다. 이후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50여 일 간 펼쳐진 대선 레이스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환호작약 속에 마무리되었지만, 같은 날 ‘무정부 상태’에서 한미 경제관료들에 의해 밀실 합의된 ‘IMF 플러스’는 한국사회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1997년 초부터 이미 김영삼 정부는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농산물 협상과 농민의 저항, 1996년 노동법의 ‘날치기 통과’와 1997년 총파업, 그리고 1997년 초부터 연쇄적으로 폭발한 재벌체제의 위기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증폭된 데다, 차남 김현철씨가 구속되는 등 친인척 비리가 터지면서 대통령은 심각한 권력누수를 겪고 있었다. 집권여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총재는 현 정부와 차별화하려는 자신을 대통령이 견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내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 및 독자 출마를 감행한 이인제 후보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지원설을 제기했다. 아울러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의혹 수사를 검찰이 유보한 것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0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종용하는 기자회견을 한 후, 정확히 한 달 뒤인 11월 21일 한나라당을 창당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신군부와 야합함으로써 문민정부로의 ‘협상된 이행’에 성공한 김영삼 정부는, 1993년 집권 이후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군사정부 시절의 정치가와 군부를 제거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한다. 1986-1988년 ‘3저 호황’ 이후 재벌 중심의 고도성장이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면서 실질임금 상승과 ‘정치적 민주화’를 배경으로 재야세력과 노동자운동을 선별적으로 포섭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재벌의 과잉중복 투자가 야기한 이윤율 급락에 따라 1997년 초부터 재벌들이 연쇄 부도에 처하면서 경제위기가 가시화된다.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에 이어 7월 재계 8위 기아자동차그룹이 부도에 몰렸고, 재벌의 위기는 다시 시중은행의 위기로 전이됐다.
경제위기의 근저에는 1990년대 본격화한 금융세계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매개로 한 금융자유화와 시장개방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 1995년 역플라자 합의에 따라 일본에 비해 수출경쟁력이 약화되면서 한국은 1996년 237억 달러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5월 태국 바트화의 대대적인 평가절하를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외환위기가 확산되었다. 그러자 일본 엔화를 단기 차입하여 동남아시아에 장기 투자했던 종합금융사의 사정도 악화되었다. 일본 자금이 회수되면서 종금사의 국외 차입과 단기부채의 만기연장 통로가 모두 막혀버리고 외화 부족이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원화 가치도 10월 말부터 폭락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1월 3일 원화가 2.25%의 일일 등락 한도를 넘어 폭락함에 따라 외환거래가 중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 등 외국인 채권자와 투자자의 패닉과 뱅크런으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11월 초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당시 1,200억 달러의 외채 중 절반 이상이 만기 1년 이하의 단기부채였으며, 그 중 3분의 1인 200억 달러는 1997년 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상황이었다. 외환위기, 즉 원화 가치 급락은 정부가 1996년 OECD 가입을 촉진하기 위해 실시한 인위적인 고평가 정책의 이면에서 한국경제와 미국일본경제 사이의 생산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여 환율이 폭력적으로 조정된 결과였다.
하지만 원화 가치 급락과 국제 투자자채권자의 자금 회수에 대처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은 극히 미미했다. 자산담보부증권이나 통화스와프 등 과거에 통용되어온 국제적 해결책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미국일본중국 등과의 양자협상을 통한 금융지원은 모조리 거절당했다. 미 재무부는 오직 IMF의 틀 안에서만 지원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구제금융 지원조건(conditionality)이 부가되지 않거나 사적 금융기관 및 금융시장을 매개로 하지 않는 국제적 자금 지원, 가령 두 나라의 합의에 의한 공동차관 등은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기본적으로 허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식물상태에 빠진 대통령과 대선 경쟁에 몰두한 정치권을 대신해서 구제금융 협상을 진행한 것은 강경식 부총리를 비롯한 고위 경제관료들이었다. 강경식 부총리는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향적 중화학 공업화가 내적 한계를 드러낸 1978년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특별팀에서 성장보다 물가안정, 규제보다 민간자율, 봉쇄보다 수입개방으로 경제정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선구적’인 신자유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1979-1982년 불황 속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권 초기 관치금융과 재벌체제로 왜곡된 미시적 산업구조가 거시적 불안정성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며 정책개혁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1997년 초 재발한 재벌체제의 위기 속에서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복귀한 강경식은 재벌 연쇄부도의 원인을 통합적 금융감독의 부재에서 찾으며 한국은행의 독립과 한국은행으로부터의 금융감독기능의 분리 등 일련의 금융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11월 18일 금융개혁법안 처리가 실패로 돌아가자 김영삼 대통령은 법안 처리 실패와 함께 외환위기의 책임을 물어 다음 날 강경식 부총리를 전격 경질했다. 그동안 강경식 경제팀이 IMF와 비밀리에 합의한 구제금융 내용을 이날 발표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후임 임창렬 부총리는 합의를 번복하는 해프닝 끝에 21일 이미 결정난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12월 3일 IMF 캉드쉬 총재는 임창렬 부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대선 후보의 IMF 프로그램 이행 보장 각서를 요청하며 당일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로부터 각서를 받았다. 이날 발표된 최종 합의 내용은 583.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대가로 하는 긴축적 통화·재정정책, 외국인 투자 자유화, 수입 자유화, 금융개혁, 기업지배구조 개혁 등의 지원조건이었다. 하지만 구제금융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는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IMF 지원금이 국외투자자들이 대출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자본이탈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외환보유고가 또 다시 바닥을 드러냈다. 원화 가치가 추락하여 외환시장은 마비되었다. 또한 IMF 프로그램에 따른 고금리 정책과 금융구조조정의 여파로 유동성 경색이 시중은행에까지 파급되었다. 1998년 1월까지 추가로 120-150억 달러의 부채가 만기 도래하는 상황에서 추가 적인 조치 없이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대외 채무불이행에 내몰릴 것이 분명해졌다.
말 그대로 국가부도 상황에 몰린 한국 정부는 대선 당일이던 12월 18일 미국 재무부에 경제협력 특별대사를 급파했다. 특사 김기환은 IMF와 미국 측에 추가로 제시할 개혁안에 ‘IMF 플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12월 3일 합의된 IMF 프로그램에 더해 더욱 강력한 구조조정과 노동신축화를 스스로 약속한 것이었다. 한국 시각으로 19일 미국에 도착한 그는 당선이 확정된 김대중 후보 측으로부터 구체적인 협상 방향에 관한 지시나 문의 없이 “대통령 당선자가 귀하의 협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들었고, 김기환은 이 간단한 메시지 하나로 새 정부를 대신해 미 재무부와 협상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IMF 플러스’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거 시기 정리해고를 6개월 간 동결할 것이라고 공약하기도 했던 김대중 당선자는 확약을 받고자 내한한 미국 경제관료를 기대 이상으로 만족시켰다. 김대중은 “IMF가 권고하는 협약을 IMF 플랜이라기보다 ‘한국 플랜’으로 받아들이겠다”며 부실 은행과 재벌을 구조조정할 때 불가피한 정리해고와 노동신축화를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마침내 12월 24일 ‘IMF 플러스’가 발표되었고, 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불렸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사상 초유의 비상 위급 상황을 틈타 김영삼 정부가 실패한 미완의 정책개혁을 강력히 시행한다. 김대중은 경제위기외환위기를 ‘국난’으로 호도하며 고통분담을 호소하는 인민주의적 수사를 남발했고, 그를 통해 대중의 저항을 미연에 봉쇄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가 표방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 발전’ 또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위해 노사정 위원회나 개혁적 비정부기구(NGO)가 동원되었는데, 이는 정책개혁의 실행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일종의 완충장치였을 따름이다. 이를 통한 재벌개혁이란 것도 실은 기업지배구조를 미국화하여 재벌을 지주회사를 핵심으로 하는 기업집단으로 변모시킴으로써 금융세계화로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정부가 시행한 금융자유화 정책은 초민족자본에 의한 국민경제의 지배 및 국부유출이라는 문제와 함께 국내자본의 국외도피라는 문제를 낳았다. 또 강력한 구조조정에 동반하는 정리해고파견근로변형근로 등 노동신축화 법제화와 평가절하를 통해 한국경제는 수출경쟁력을 회복하여 막대한 무역흑자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이는 수출-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강화했다.

그렇다면 당시 민중운동의 대응은 어떠했나? 1995년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모토로 출범한 이후 1996-1997년 총파업의 한계를 ‘국회의원의 부재’에서 찾은 민주노총은 1997년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 그러나 IMF 위기의 격랑 속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진보주의자’를 표방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는 선본 내부에서 ‘일어나라 코리아’와 같은 어이없는 논란을 거듭하며 1.2%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는 데 그친다. 1998년 1월 민주노총은 김대중 당선자가 제안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의 합법화 및 노조의 정치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를 수용한다. 노사정합의는 2월에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탄핵당하지만, 이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 진입과 탈퇴를 반복하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에 주5일제에 따른 40시간 노동주와 변형근로제를 교환한다.

1997년 11월로부터 15년이 지난 오늘, 유비(類比)의 한계를 무릅쓰고 당시와 현재의 정세를 비교해보자. 당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내포한 위기의 징후였다면, 지금 미국유럽을 비롯한 세계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위기가 폭발한 것이다. 당시 ‘민주화 세력’이 경제위기외환위기와 지배분파 내부의 분열을 배경으로 집권에 성공하였다면, 현재 이들은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일말의 비판적 평가 없이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보완책에 다르지 않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앞세우며 재집권을 노리고 있다. 민주노총은 공언했던 총파업이나 정치방침 재수립은커녕 지도부의 공백 속에 표류하고 있고, 민주노총 정치세력화 운동의 토대 위에 정파연합으로 건설된 진보정당 운동은 2011-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를 경과하며 사분오열된 채 대선에서 야권연대에 몰두하고 있다. 15년 전이 비극이었다면 이번에는 웃지 못할 희극으로 되풀이되는 것일까.
민중운동이라는 정체성마저 희미해진 지금, 우리의 반성은 15년 이상의 깊이를 요할지 모른다. 이번 『사회운동』이 현 정세의 엄중함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2013년 이후를 함께 예비한다는 뜻에서 독자 여러분의 열독과 토론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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