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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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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3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돌아본다

홍석만 | 편집실장
들어가며

1997년 말 IMF 구제금융신청으로 구조조정은 시작되었다. 당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만이 한국경제의 살 길이라고 선전하던 자본과 정권의 외침과는 달리 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그 위기가 한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 동남아시아와 미국 유럽으로 확대일로를 치닫고 있다. 우리보다 10년이나 앞서 구조조정을 감행한 소위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실업률은 최고치를 갱신하고 위기는 지속된다. 동시에 외자유치와 해외매각을 통해 한국경제의 금융종속은 더욱 심화되어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IMF 관리체제 3년 동안 노동자 민중에게 남겨진 것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지속적인 노동법 개악을 통해 축소되어 왔고, 구조조정과 기업퇴출로 정리해고된 사람들은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노동자들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동일노동에 절반임금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들이 조용히 이를 수용한 것은 아니다. 지난한 투쟁을 통해서 그들의 요구, 그리고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내용과 수위도 지속적으로 상승되어 왔다. 한편에서는 노동조합 지도부들의 오류가 있었지만 노동자 민중들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반대투쟁으로, 공기업 민영화·해외매각 반대투쟁과 비정규직·실업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연대의 흐름들도 일부 굴절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글은 3년간에 걸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진행과정과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 목적이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과 관련해서 시기구분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97년말 IMF 구제금융신청을 시작으로 재벌개혁과 정리해고제 반대투쟁이 핵심적으로 진행된 1998년 9월, 정부의 1차 구조조정이 완료되는 시점까지를 1기로 본다. 둘째, 1998년 10월부터 1차 구조조정 완료이후 경제회복 국면의 등장과 신자유주의 재편이 노동에 이어 사회 전부문으로 확장되어 안착된 2000년 4·13 총선을 전후로 한 시기까지 2기로 본다. 셋째, 4·13 총선이후 경제위기의 부상과 2차 금융구조조정과 기업퇴출을 특징으로 하는 현재까지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말에서 1998년 9월까지

1997년 11월 IMF의 구제금융신청으로 한국경제의 위기는 본격화, 공식화되었다. 이어 IMF는 1997년 12월, 한국정부와 맺은 양해각서를 통해 재벌지배구조의 개혁과 기업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구조조정을 핵심으로 하는 IMF관리체제의 처방을 내놓게 된다. 1997년말 대통령선거과정에서 IMF 구제금융신청에 따른 경제위기 책임론을 둘러싼 공방이 진행되고, 이 과정에서 김영삼정권의 경제관료들에 대한 정책실패와 더불어 재벌책임론이 강하게 제기된다. 이에 따라 경제관료들에 대한 청문회 개최도 언급되면서, 재벌책임론은 김대중 집권이후 다시 소유지배구조의 개선과 빅딜 그리고, 기업퇴출의 수순을 밟게 된다.

또한, 김대중 정권은 대통령선거 당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구성하여 극도의 긴축정책을 요구하는 IMF의 요구를 충직하게 수행하고자 한다. 저성장에 따른 일자리 축소와 기업도산, 정리해고와 명예퇴직 등 대량 실업사태가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 정부는 노동자의 고통분담을 강요했다. 즉, 재벌개혁과 노동자 고통분담이라는 양날의 칼로 경제위기 극복의 국민적 대안을 형성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정권과 자본은 경제위기를 하나의 국민동원의 계기로 삼았다. 금모으기와 달러모으기운동을 통해 경제위기 극복을 구호로 국민적 동의절차를 하나하나 밟아나갔다. 그리고,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위기의 책임을, 재벌과 이전 정권의 정책실패로 돌리고 국민적 차원의 고통분담과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주요슬로건으로 제출하였다. 아직까지 정리해고와 명예퇴직 등 노동시장 유연화의 공세가 전면화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주로 노동자에 대한 위기책임의 전가를 방어하고자 했던 의도였으며 노동자 고통분담의 최소화를 목표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소위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노선에 입각하여 사회적합의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놀랍게도 1997년 12월 3일,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극복과 고용안정을 위한 노사정 3자기구'의 설치를 정부에 요구하게 된다. 1998년 1월 7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 제출된 '1998년 투쟁방침'에 따르면, "IMF 경제위기의 정세조건을 고려할 때, 상층교섭과 대중투쟁의 결합에 의한 공세적 투쟁을 배경으로 노동자의 사회적 참가를 관철하고 전반적인 사회구조개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언급되어 있다.

이 배경에는, 정세적 특수성에 의한 투쟁역량의 급감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신정부에 대한 잠재적 기대감이 작용하여 상층교섭투쟁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존재했다.
김대중 정권은 재벌개혁에 대한 구호를 목청껏 외치면서도 노동진영에 대해서는 차분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1998년 1월 중순까지 표면상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노사정위에 대한 불참선언을 반복했지만, 물밑교섭을 통해 1월 15일 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하게 된다. 노동시장의 동요와 노동계의 반발을 의식한 자본과 정권은 노동진영을 주요한 협상파트너로 삼아 압박해 나갔고, 노사정위원회의 구성을 통해 합의를 통한 고통분담 체제들을 완성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참여와 합의를 통한 구조개혁 노선은 새로이 당선된 김대중 정권과 호흡을 맞춰나갔다.

결국, 2월 6일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수용과 근로자파견법 법제화를 핵심으로 하는 노사정 합의를 전격수용하게 된다. 민주노총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의 수용은 1996-1997년 총파업을 통해 잠시 늦춰졌던 노동법 개악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정리해고제를 전 사업장으로 확산시켰고 이에 따라 노동진영은 대혼란을 겪게되는 결과를 낳게 된 노사정합의는,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된다. 2월 9일 민주노총의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지도부의 합의는 부결되고, 민주노총 1기 지도부의 전원사퇴와 비상대책위 구성 그리고 2월 13일 총파업이 결의된다. 그러나, 비상대책위는 2월 12일 역량부족을 이유로 다시 파업을 철회하고 재교섭을 선언하는 등 혼란은 극에 달한다. 이 상황에서 2월 13일 대우조선의 최대림씨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 도입에 항의하며 분신, 결국 운명하는 등 노동운동 지도부에 대한 불신은 계속되었다.

한편, 자본과 정권의 구조조정은 발빠르게 속도를 더해 갔다. 1998년 김대중 집권과 함께 구조조정의 출발로서 재벌 빅딜논의를 개시한다. 동시에 그해 5월 공기업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6월 18일 55개 기업의 퇴출명단을 발표하여 구조조정을 본격적인 일정에 올린다. 또한, 6월 29일 1차 은행 퇴출기업을 발표함으로써 금융권구조조정을 본격화하는 등, 9월말까지 1차 구조조정 완료를 목표로 박차를 가했다. 당시 재벌책임론과 재벌개혁론은 경제위기하에서 당연히 규명되고 실행되었어야 하는 일이다. 나아가 재벌재산의 몰수 및 부정축재 재산의 환수의 요구도 정당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이후 진행된 재벌개혁의 절차와 과정들을 고려해 볼 때, 재벌개혁은 고통분담의 명분으로 제출되었고 노동진영을 압박하기 위한 구호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재벌개혁론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을 정당화시켰다. 재벌개혁의 대가로 기업의 투명성 확대와 재벌지배체제의 개혁이라는 과제는 기업차원의 구조조정을 인정하는 결과로 나타났고, 급기야 철저한 재벌개혁과 경제위기의 재벌책임을 전제로 한 정리해고의 수용이라는 기조로 흘러가게 되었다.
정권과 자본의 움직임에 따라 1998년 초반 정신없이 내둘리기만 하던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은 차츰 조직대오를 정비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에 대한 대응을 준비해간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조직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각 연맹은 산별체제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자동차, 현총련, 민주금속이 통합한 금속산업연맹(98.2.15)과 보건의료산별노조(98.2.27)가 건설되고 공공연맹(98.4.19)의 출범으로 공공연맹, 민주철도, 공익노련의 3자통합연맹의 기초가 이루어진다.

또한, 1998년 5월에서 1996-1997년 총파업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맥을 잇는 '고용실업대책과 재벌개혁 및 IMF 대응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가 52개 단체로 구성되어 5월 30일 제 1차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활동을 전개한다.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에 대한 혼란을 정비하고 1998년 5월, 제 11차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동자의 고용, 생활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 및 정치·사회·경제구조의 전면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총력투쟁방침을 확정한다. 이는 IMF 초반기 민주노총의 주요슬로건인 경제민주화와 재벌해체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우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정리해고제의 전면도입으로 인해 노동자 생존권의 악화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는 요인이 있겠다. 또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노동자뿐만아니라 농민과 빈민 등 기층 민중의 생존권 요구투쟁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기조는 대략 1998년과 1999년 초까지 관통된다. 하지만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진행되던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의 폭과 수위는 그다지 향상되지 못하였다. 1998년 5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파업투쟁, 만도기계 노동조합의 공장점거 투쟁도 양보교섭과 정권의 무력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지도부는 1998년 6월 5일 정부와 양보교섭 수용, 6·10총파업 철회, 다시 7월 23일 총파업 투쟁을 철회하는 등, 양보교섭과 총력투쟁을 오락가락하면서 단위노조차원에 대한 대응력을 점차 상실하게 된다.
이 와중에,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분할은 더욱 가속화된다. IMF 직후 실업자 수는 200만을 상회하였고 정규직의 축소와 불안정 노동의 일반화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체 취업노동자의 절반을 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기본적 노동조건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 시기 구조조정 대상 사업장들의 투쟁이 본격화되었는데, 1998년 5월부터 9월까지 제1차 금융구조조정으로 4만 2천명 금융노동자들의 감원이 있었다. 그리고, 1998년 7월 3일 1차 공기업 민영화방침으로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등 5개 공기업이 즉각적인 민영화에 착수하고, 한국통신, 한국전력 등 6개 공기업의 단계적 민영화에 돌입한다는 방침이 밝혀지면서, 공기업의 노동조합의 민영화 반대 투쟁에 불을 당기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의 구조조정 일정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왔다.


1998년 9월에서 2000년 총선까지

1차 구조조정이 완료되면서, 자본과 정권은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의 해외매각을 시작으로 공기업, 금융권, 제조업의 해외매각을 본격화한다. 주로 외자유치라는 이름하에 진행된 해외매각은 공기업 민영화와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을 반드시 동반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저항은 필연적으로 야기되었지만 당시의 대응은 '무분별한 해외매각 반대'라는 다소 불분명한 투쟁기조로 진행된다. 해외매각 반대투쟁의 분명한 대응기조를 수립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미 매각된 사업장이 존재한 데다, 부실기업의 해외매각을 저지할 명분이 약했고 해외매각의 문제점이 조합원들에게 깊이 인식이 안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에 대한 운동진영의 인식이 눈에 띄게 성장한다. 이미 다자간투자협정(MAI) 반대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것을 세계화 반대투쟁의 국제적인 흐름과 접합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주로 국제연대운동단체와 몇몇 사회단체들 중심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의 국제적인 운동이 이시기에 다양하게 소개되고 확산된다. 특히, 1998년 9월 서울국제민중회의 개최는 하나의 전기가 된다. 이 회의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세계민중들의 저항전략을 모색하고, 각 부문운동의 투쟁을 활성화시키며 세계 민중운동과 연대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진영은 한·미, 한·일, 한·칠레 투자협정의 파괴력을 인식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을 하나의 과제로 인식하게 된다. 당시 투자협정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은, 주로 개방농정과 투자협정에 따른 농업파괴의 영향에 대해 먼저 인식했던 농민단체와 한·미투자협정의 스크린쿼터제 폐지에 맞선 영상문화운동단체에 의해 대중적으로 확산된다.

1999년 2월 하순, 노사정위를 통한 양보교섭과 총력투쟁을 반복하던 민주노총은 14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탈퇴를 결의한다. 이에 따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바꾸자는 취지로 '세상을 바꾸자'라는 주요슬로건이 등장한다.

또한, 민주노총은 공공연맹을 중심으로 투쟁력을 복원하면서, 민주노총의 4대요구를 ◇ 생존권을 박탈하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중단, ◇ 노동시간 단축, 고용안정 보장, ◇ 실업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 ◇ 임금·단체협약 안정, 산업별 교섭체제 보장으로 정식화 한다. 그러나, 1999년 4월 공공연맹의 총파업투쟁이 서울지하철의 8일간 파업에도 불구하고, 별반 성과없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노동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된다. 정권과 자본은 공공연맹의 총파업 투쟁을 호도하면서 노동운동 지도부에 대한 대규모 구속과 수배를 자행하고 투쟁은 점차 움츠려들었다. 그 상황에서 진형구 대검공안부장이 조폐공사노조의 파업유도 발언을 한 사건이 터지고, 옷로비 사건 등 각종 부패사건이 발생하면서 부정부패와 민생파탄에 대한 대중적 규탄 분위기는 12월 2차 민중대회에까지 이어진다.
1999년 중반기 들어 경기회복국면이 완연해졌다. 당시의 경기회복은 정부 구조조정의 성공적인 수행결과라기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과 같은 제3세계의 신흥(금융)시장이 확대되면서 생긴 일시적 호황국면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경제가 국제적 금융시스템에 깊숙히 편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권은 미국 신경제론에 근거한 경제성장론을 유입하면서, 벤처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다. 벤처산업의 육성은 경제성장의 주도산업으로 그려지고 일자리 창출의 희망산업으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벤처산업의 활성화는 벤처산업 자체의 성장 잠재력 때문이 아니라, 투기적 자본이 주식시장과 코스닥시장으로 몰리면서 금융적 팽창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투기적 자본의 소비처로서 벤처산업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대우그룹의 부실이 사회문제화되면서 정부와 채권단은 1999년 8월 26일 대우차에 대한 전격적인 워크아웃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파장은 대우그룹 전체로 확산되었고 김우중의 퇴진과 64조에 달하는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 그리고 해외매각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우차 사태는 경기회복 국면에서 하나의 불안요소로 자리잡았고, 정부는 대우차에 대한 해외매각을 통해 사태 해결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중공업, 대우조선, 만도기계, 대한중석 등 노동진영의 해외매각 반대투쟁도 본격화된다. 그러나, 1998년 하반기부터 진행된 해외매각은 2000년 상반기까지 제조업과 공기업, 금융권에서 상당정도 진행되었다. 제조업에서는 외국인 지분이 50% 이상인 업체가 140개에 달하며, 한국중공업, 포항제철, 담배인삼공사, 한국통신, 한국전력, 한국송유관공사, 가스공사, 열발전소(난방) 등 기간산업과 관련 자회사들의 매각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금융권의 경우 제일 서울은행, 제일 대한생명, 서울증권 등은 이미 매각되었고 국민 외환 한미은행, 국민생명, 한일투신, 조흥증권 등에서 외국인이 최대주주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투신사 증권사 보험사 등이 지분매각 또는 합작을 추진하고 있어, 순수한 국내은행은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 되었다.

해외매각의 결과로 인해 국내 자본시장의 외국자본 유입은 더욱 확장되었다. 2000년 상반기까지 상장기업의 외국인 최대주주비율은 평균 37.4%이며, 5%이상 주식보유 외국인투자자비중은 18.8%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금융시장의 종속은 더욱 심해지고, 회복추세를 유지하면서도 금융부문은 국제금융시장의 요동에 따라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금융팽창에 따른 일시적 회복국면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재편은 사회 전부문으로 확대되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초국적 자본은 국내 주요산업의 1/3을 장악했고, 5대 재벌의 시장지배력은 45%로 최대를 기록하였다. 또한, 빈민이 1천만명을 돌파하고, 신규채용인력의 92%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는 등 통계집계 후 최고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30조에 달하는 농가부채에 짓눌린 농민들은 IMF 위기로 인한 소득급감에 따라 자살 혹은 파산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정부는 WTO 협상과 투자협정의 지속적인 논의과정에서 농산물 개방을 약속하여, 농민생존을 파탄으로 이끌고 있었다. 게다가 협동조합의 통합논의를 시작으로 농업금융구조까지 개편되었다.

농업뿐 아니라 교육에서도 교수계약제와 BK21사업의 도입, 7차교육과정 시범실시 등 교육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단행되어 4·19 이후 1천명 교수가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보건의료부문에서는 한편으로 의보통합과 의약분업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공공의료기관들의 민영화와 경영수지 개선을 위한 구조조정이 감행된다. 그에 따라 공공의료기관들은 민간위탁 또는 자율책임경영제가 도입되어 사실상 민영화가 이루어져 공공의료의 질은 날로 하락되어 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에 대한 민중연대전선은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갔다. 2000년 들어 IMF반대 범국민운동본부는 3월 14일 '신자유주의반대 민중생존권 쟁취 민중대회위원회'로 개편된다. 이에 따라 사회단체 중심의 기자회견과 조사단 구성 등 상층연대사업 중심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사회단체 중심의 비상설적인 공동투쟁기구의 역할을 자임하고, 반신자유주의 공동투쟁전선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민중대회위원회의 사업성과를 토대로, 노·농·빈 등 기층대중조직이 중심되어 민중운동진영의 상설적인 공동투쟁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교란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1999년말부터 본격적으로 시민단체의 활동이 급부상하면서 일부 시민단체들은 김대중 정권이 내놓은 신자유주의 개혁의 파트너쉽을 부여받는다. 이전, 소액주주운동을 바탕으로 재벌개혁론에 힘을 실어오던 이들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정치적인 세력화를 도모하게 된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있기,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 정권은 파업유도사건과 옷로비사건 등 각종 부패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민중들의 분노로 김대중 집권 후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2차 민중대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고, 얼마 후 전국농민회의 의장과 집행부 전원을 연행하면서 민주노총, 전빈련 간부와 학생 등 민중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인 구속을 자행했다. 그러나 정권은 386세대와 총선시민연대를 파트너로 삼아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유지하면서 이 기조를 총선까지 이어간다.

노동진영은 이제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제도개선투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1999년 9월, 민주노총의 3기 지도부가 건설되면서, 노동시간 단축과 전임자 임금지급 등 10대 개혁입법의 요구, 공기업 해외매각 민영화 중단·구조조정 중단·신자유주의 정부지침 철회 등 노동시간단축이 투쟁 전면에 부상하고 제도개선 투쟁이 주요한 투쟁전술로 자리잡혔다. 2000년 들어 민주노총의 투쟁요구는 주5일제근무(주40시간제), 민주적 구조조정, 실업비정규직 생존권보장과 사회보장확대적용 등으로 나타났다. 이 배경에는 한편에서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한 노동시간 단축의 요구가 IMF 초기부터 제기되어왔다는 요인이 작용했다. 이 요구는 다른 한편으로 1999년 중반이후부터 경기회복 국면이 유지되면서 노동자 권리의 IMF 이전 원상회복의 요구와 맞물리면서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진영, 특히 민주노총이 내놓은 제도개선 중심의 투쟁요구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맥을 잇는 3기 지도부의 노선경향에 따라 주로 법, 제도개선에 무게중심을 두는 활동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또, 민주노총의 주요투쟁이 법, 제도 개선에 맞춰지면서 시민운동에 경사되는 경향을 보여온 점도 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이후로 시민단체의 정치적 위상이 상승하자, 민주노총은 시민단체와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한 개혁연대를 구성하며 이들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다. 급기야 2000년 10월 아셈반대투쟁에서 민주노총은 시민단체로 구성된 아셈민간단체포럼과 민중운동단체로 구성된 민중행동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하고 결국, 국제적 이목이 집중된 아셈반대투쟁에서 노동자 민중들의 강경한 투쟁의 요구를 뒤로 한 채 아셈회의 내 사회포럼개최 약속만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2000년 총선 이후 현재까지

총선 이후 경제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호황국면으로 돌아서려던 한국경제는 동남아시아와 미국 경기불안의 영향으로, 서서히 그 거품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이 위기설은 현대증권의 이익치사건, 현대건설 자금악화 등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대우차 처리문제와 함께 가중되었다. 정부는 현대를 중심으로 소유구조개편과 정씨일가의 개인자산 출자를 압박하면서 현대의 유동성 위기는 다시 10월로 늦춰진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번 고개를 든 경제위기설은 더욱 번져갔고 증시 요동폭은 커져만 갔다.

이 때, 김대중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6·15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악화될대로 악화된 민심과 기세를 꺾지 못한 경제위기설의 확산으로 불안했던 정국이 일시에 정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 피해는 노동자, 민중뿐만 아니라 과거 중산층이라 여겨졌던 금융노동자 그리고 의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6·15남북공동성명의 축포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의사들의 1차 폐업이 시작되고 의료대란이 발생했다.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란의 이면에는 의료시스템을 경쟁위주로 재편하면서 야기되었던 의사집단의 예견된 몰락이 있었고, 의사폐업은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재편은 중산층의 재편을 수반하는데, 이 과정에서 골드칼라로 불리는 신흥금융자본자를 탄생시키는반면, 의사계층과 같이 왜곡된 의료체계에서 상대적 수혜를 받던 계층의 몰락을 동반시킨 것이다.

한편, 노동진영의 제도개선투쟁의 기조는 계속 유지된다. 민주노총의 하반기 투쟁요구는 노동조건 개악없는 노동시간 단축,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한·미, 한·일투자협정체결중단, 국가보안법철폐, 주한미군철수,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 사회보장예산 GDP 10%를 중심 사안으로 제출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이 투쟁기조에도 불구하고, 롯데호텔 노동조합과 사회보험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은 전선의 긴장감을 유지시켰지만 장기간 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중앙으로서 지도력을 형성하지 못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업장투쟁도 3년을 이어오는 정부의 구조조정 공세속에서, 조직 피로도가 누적되고 관성적인 대응이 계속되면서 별반 성과 없이 진행되었다. 다만,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 방침이 확대되면서 공기업 노동자들의 민영화 반대투쟁은 공기업 노동조합의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산하 연맹들은 '공공부문노동조합연대투쟁대표자회의'를 건설하고 기간산업의 민영화와 해외매각 철회를 위한 공동투쟁들을 활발히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공공부문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연대투쟁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2000년 노동대중의 투쟁은 과거와는 다른 명백히 양상을 보여주었다. 신생노조들 특히 비정규직, 임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이들의 투쟁에 의해 주요한 전선이 형성된다. 비정규직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랜드 노동조합의 건설은 물론, 시설관리 노동조합, 대우조선 사내하청 노동조합 등 사내하청 노동조합, 기존 정규직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속에서 방송사 비정규직, 한국통신 비정규직 등 비정규직의 독자적인 노동조합 건설도 이루어졌다.

재능, 구몬 등 학습지교사 노동조합, 골프장 캐디 노동조합, 보험설계사 노동조합 등 자영업자로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 노동자로서 이중의 착취를 받아오던 노동자들의 조직화도 이루어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는 정규직의 축소와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으로, 자본이 끊임없이 노동자권리를 악화시켜왔던 대노동 정책에 따라 당연하게 나타난 결과였다.
투쟁주체라는 측면에서 IMF 초기 주로 대공장과 퇴출기업을 중심으로 진행된 노동자 투쟁이 2000년 들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활발히 전환되었고, 노동진영의 비정규직 조직화가 이루어지면서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대립 또한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미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수용하면서 발생한 문제는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조합과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건설·투쟁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는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과정에서 진행된 일련의 양보교섭 결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호를 대가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일정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현재까지 노동운동의 대응은 자본과 정권의 노동분절화에 맞선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형성하지 못한 채 진행되고 있다.
2000년 중반기 들어, 정권은 금융기관의 겸업화와 대형화를 핵심으로 금융지주회사설립 등 제2차 금융구조조정을 단행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금융노련은 1차 금융구조조정 당시 무기력한 대응에 따른 금융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에 대한 반성으로 2차 금융구조조정에 반발, 총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7월 11일 총파업 당일 오후, 금융노련은 정부와 협상을 통해 은행의 책임경영보장, 강제합병 불가, 단체협약 존중 등에 합의하고 총파업 하루만에 이를 접게 된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서 주가 폭락, 환율급등, 반도체 가격급락, 유가상승, 동남아 통화 불안사태가 이어지고 미국경제마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보이는 등 경제위기의 조짐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에 10월 30일 현대건설의 1차 부도사태로 현대 위기가 재발하고, 동아건설은 10월 31일 부도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한빛은행 불법대출사건과 정현준-동방금고-금감원 사건, 진승현 금융비리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일련의 부패사건들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그동안 생산시설의 축소를 통한 과잉생산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정권과 자본의 구조조정은 과잉자본을 역으로 더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치권과 금융자본의 부패고리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은 위기상황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려고 하였다. 대우차 해외매각의 대상으로 삼았던 포드가 협상포기를 선언하면서, 대우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채권단은 대우차 노동조합에게 워크아웃 동의서제출을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한 노조에 대해 일방적 여론몰이가 몰아치고 결국 11월 27일 대우차 노조는 동의서를 제출했다. 또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연대가 확대되고 한국전력 노동조합이 쟁의에 들어가게 되자 자본과 정권은 다시 언론을 동원해 공기업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를 매도하고 나섰다.
지금 상황은 제1차 구조조정의 실패로 빚어지는 현재 위기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이다. 어찌되었건 2000년 11월 3일, 제 2차 기업퇴출이 이루어졌고 금융부문과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이 다시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IMF 3년을 정리하며

이제까지 살펴 본 바대로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는 치밀하고도 집요했으며 전방위적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대응은 상대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신자유주의 공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사회의 전부문으로 확대되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한국경제의 위기는 과거보다 더욱 심화되었으며 민중들의 생존권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을 평가하면서 노동자 민중운동에 요구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조조정 반대투쟁과 관련하여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노동진영의 일관되고 집중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IMF 관리체제 초기 재벌개혁론을 통해 경제위기 극복과 함께 고통분담의 국민적 동의구조를 형성해 갔다. 그러나, 재벌개혁은 대우자동차와 같이 과잉생산시설의 축소와 함께, 기업소유지배구조의 개선과 경영 투명성을 요구하며 주식시장에서 주주 요구에 부합하는 금융세계화 체제에 편입시키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재벌재산의 몰수를 통한 재벌해체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벌일가들의 분가를 통해 가족적 경영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결론맺고 있다.

반면, 재벌개혁을 빌미로 노동자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한 자본과 정권은 노사정위원회의 건설을 통해 사회적 합의구조를 형성해 갔다. 그러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기치아래 이에 호응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통해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법을 수용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비록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이러한 과오를 수정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바꾸자라는 기조를 형성했으나 여전히 양보교섭과 총파업 사이를 배회하면서 단위 사업장 투쟁들은 힘을 잃어간 것이고, 민주노총 3기에 이르러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보장 확대적용 등을 요구하며 투쟁의 전열은 후퇴하고 만다. 자본과 정권은 구조조정의 폭과 수위를 조절·확산시키는 상황 속에서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해당 단위사업장과 해당 연맹의 과제로 축소시키고 중앙교섭력을 강화한다는 미명아래, 양보교섭을 구조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있다. 그 동안 자본과 정권은 구조조정을 오직 개별단위노조와의 양보교섭을 통해 확보해 나가면서, 오히려 노동배제적이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는 정책들을 적절하게 구사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위기가 구조조정의 결과와 금융종속 심화의 필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를 전제로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양보교섭 수용분위기를 일소하는 것이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자본과 정권 그리고 시민운동의 일부가 결합해서 형성하는 신자유주의 개혁, 구조조정에 대한 명확한 태도와 입장을 전제로 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재편에 대항한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상승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 민중의 요구와 슬로건은 대응과정에서 꾸준히 향상되었다. 초기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에서 '세상을 바꾸자'는 기조로 그 과정에서 민영화, 해외매각 반대는 노동자 민중진영의 구체적 투쟁과제로 인식되었다. 공공부문의 개혁을 통한 공기업의 유지와 공적자금 투입기업의 공기업화라는 요구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본질이 금융세계화의 확대에 다름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가, 한국을 넘어 국제위기속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구조조정과 해외매각이 진행될수록 금융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에 따라 한국경제의 위기 또한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의 요구와 대안이란, 단순히 공기업화로 제한될 것은 아니다. 시장을 통제하고 독점자본을 해체하며 사회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들을 끊임없이 확보해 나가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재편의 주체로서 권력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제기되는 구조조정 중단요구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 하더라도, 구조조정이 한국사회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한, 그 추진주체인 권력에 대한 분명한 반대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반대와 생존권 사수투쟁의 전선을 확대시킬 수 있다.


셋째, 자본과 정권의 노동분할 및 노동시장 유연화 공세에 맞서 노동자 전체의 계급적 단결을 이루어내는 것이 과제이다. 자본과 정권의 구조조정 방침은 노동자 내부분할을 끊임없이 강제해 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하고 업종별 이해를 달리하며 업종간 노동자들의 갈등을 심화시켜 왔다. 또한, 정규직의 비정규직으로의 전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강화를 통해 양자간 상호대립을 유지하는 한편, 노동시장 유연화를 지속시켜 왔다. 그러나, 이 문제가 단순히 산별건설로 해결되리라는 확신을 갖기는 힘들다. 따라서 그동안 보였던 제도개선 중심의 투쟁에서 벗어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적극 지지엄호하고, 구조조정에 대항하여 견결한 총파업 전선을 유지해나갈 때만이 해결가능할 것이다.


넷째, 신자유주의에 의한 사회적 생존권의 파괴에 대한 전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하는 점이 관건이다. 민중대회위원회의 경우, 이러한 전선주체의 맹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노·농·빈은 각각 민주노총과 전농 등 대중조직의 일정을 중심으로 여전히 독자적 활동을 강화하고 있기에 민중대회위원회는 위상과 달리, 실질적인 공동연대기구로 강화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민중대회위원회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국가보안법철폐투쟁, 매향리 미군국제폭격장과 주한미군 철수투쟁 등 주요투쟁사업들을 민중대회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율하는 데에 상당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2000년 민중대회위원회는 지난시기 범국민운동본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상설공투체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멈춰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민중대회위원회에 남은 과제는 노선상의 이견을 극복하고 노·농·빈의 생존권에 기반한 사회적 연대의 전국적 확대를 통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전선의 주체로서 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경제위기 국면의 도래와 함께 다시 자본과 정권은 2단계 기업구조조정과 금융구조조정을 시작하고 있다. 위기탈출을 위한 구조조정이 다시 위기를 심화시켜 결국 파탄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구조적 위기극복의 계기들을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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