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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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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속의 논쟁] '제국주의'와 '민족-민중'이라는 화두-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에서 민족해방파의 등장까지

장석준 | 편집위원, 민주노동당 교육부장
한국 민중운동이 미 제국주의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항쟁 후반기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다가 얻은 실망감, 그리고 처참한 학살을 자행한 진압군의 작전권이 바로 미군에 있다는 진실 등. 이를 통해 민주화운동세력은 이 땅의 적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또 다른 적, 미국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나오는 화자(話者)의 선배가 말하는 것처럼 민주화운동의 막연한 지원세력 정도로 인식되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이는 1960년대 말의 통일혁명당이나 1970년대 말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을 예외 혹은 탈선으로 이해할 때에만 가능한 일반론이지만, 통혁당의 경우 확실히 1980년대와의 연관성보다는 해방공간과의 연관성이 더 강했고, 남민전의 경우는 당시의 반유신운동 일반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 민중운동은, 대중적인 수준에서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반제운동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됐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일단 미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겪고 나자 이제는 해방공간의 의미도, 분단 질서와 그 극복의 과제도 전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 호에서는 주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미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발전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그 과정이란, 분단의 낡은 껍질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 자신이 분단이 만들어낸 모순 속에서 표류하고 고통받는 아픔의 과정이기도 했다.


<b>'예언자적' 투쟁 -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b>

나는 광주사태를 놓고 늘 나 자신의 할 일에 대해 고민해 왔었는데, 그 사태의 조종이나 배후지원을 받고 있는 현 군부정권을 반대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을 고발하기 위해 그와 같이 행동했다.
-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피고 중 한 명인 김은숙의 진술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현관에 누군가가 불을 지르고 이로 인해 건물 안에 있던 한 대학생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문화원 주변에는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서울의 대학가마저도 전두환 독재초기의 억압 속에서 숨죽이던 당시, 이 사건은 한반도 남쪽을 뒤흔드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여겨지던 원주에 숨어있다가 자수한 이 방화사건의 주인공들은 문부식을 비롯한 부산의 어느 신학대 학생들이었다.

이들의 배후세력은 광주운동권 출신의 김현장이라고 발표됐다.
당시의 유인물과 사건 주역들의 법정진술을 살펴보면, 광주민중항쟁이 이들로 하여금 미국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 하지만, '방화'라는 충격적이고 선도적인 투쟁형태에 비하면, 이들의 반미인식은 그렇게 정돈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사건 당시 유인물)는 단호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 땅의 민주화를 실천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한미간의 호혜평등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문부식의 법정 진술)라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인식에서 그리 크게 벗어난 것 같지 않은 언급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1985년 이후에 등장한 반제운동 흐름에 비하면, 확실히 초보적인 수준의 반미인식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화운동의 '외적' 방해물 정도로 미국이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분단 질서와 미국의 연관관계가 아직은 분명히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이런 인식수준은 19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투쟁 때도 계속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양상은 이후 미 제국주의 반대운동이 대결해야 했던 벽을 일찌감치 보여주었다. 사건의 주역들은 그리스도교계통 운동권으로서, 이 세계의 고통 이면에 자리잡은 거대한 악에 대항한다는 심정으로 미국에 대항하고, 더구나 자신들의 투쟁을 잠자는 민중들을 깨우는 예언자적 상징의식('방화')으로 자리매김한 측면이 강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당시 사건의 한 주역--문부식--이 현재 전투적 자유주의 진영의 선봉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이들의 그리스도교적 심성의 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대결한 '미국'이라는 문제가 분단에 얽매인 남한 현실에서는 그만큼 대중들로부터 일정하게 유리된 상태에서 개인적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국주의 문제야말로 이 땅 민중운동이 정면대결해야 할 핵심 과제라는 새로운 인식과 미국 문제의 전면적인 제기는, 민중운동의 기반이 되어야 할 이 땅의 대중으로부터 운동세력을 일정하게 유리시킨다는 현실 사이의 딜레마. 이는 이후의 반제국주의 투쟁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b>민족해방(NL)그룹의 등장 </b>

학우여,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아직도 미 제국주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이 글을 이해했다고 말할 자격도, 이 글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시민적 관념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어서야 결코 올바른 인식과 실천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명심하라. 미 제국주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적의 모든 기만, 왜곡, 은폐 및 교란, 개량화 책동으로부터 우리 운동의 순수성을 보호해주는 유일한 파수꾼임을.
- [반제 민중 민주화 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에서

미 제국주의와의 대결이 변혁의 핵심문제로 본격적으로 제기된 첫 번째 계기는 1985년에 유포된 {예속과 함성}이라는 소책자였다. 이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 주역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소책자는, 분단 극복과 미 제국주의 반대를 민주화투쟁의 '한' 과제가 아니라 '중심' 과제로 제기했다. 이와 함께 1970년대 반유신 운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남민전 사건의 공소장이 유포되면서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계기는 당시 전체 민중운동이 제국주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해가던 과정 안에 통합되어 있었다. {예속과 함성}의 경우만 해도, 이 책이 {민중의 함성}이라는 제목으로 합법 출간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후 민족해방그룹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 황광우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생운동과 전체 민중운동에 커다란 단절선을 그으며 반제운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85년 말 서울대의 '단재사상연구회'라는 동아리를 통해서였다. 단재사상연구회를 중심으로 일명 [해방서시]라 불리는 문건이 유포되기 시작하면서, 1985년에서 198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서울대 운동권은 기존 써클체계에서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이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급속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 겨울, 연세대와 고려대 등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진행됐다. 우리가 흔히 NL이라 불리는 '민족해방그룹'의 등장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등장과, 이제까지의 반제국주의 인식의 발전과정 사이에 결정적 획을 긋는 것은 바로 NL그룹이 소위 '방송'문건을 통해 급격하게, 아주 급격하게 반제국주의 운동의 거대한 체계를 도입하고 수립했다는 점이다. 이 체계는 '반제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론이라 불렸으며, 한국 사회구성체에 대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적 인식, '혁명적 대중조직'론, '군중노선' 등의 일련의 새로운 사상내용을 동반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NL그룹이 기존 써클들(소위 MC)과 '깃발'그룹을 중심으로 한 NDR세력(소위 MT)에 심각한 파장을 그리면서 운동권에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 데는 여러 가지 차원이 한 데 뒤섞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에 대한 선명한 인식이었다. 미 제국주의 문제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들에 이르러 한국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20대 초반의 청년지식인들에게, 이는 남한사회 민주변혁의 고통스러운 과정에 대한 너무도 명료한 해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인식의 획득이 '방송'문건의 모종의 영향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은 이러한 입장의 등장이 과연 남한 민중운동의 주체적인 관점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데 일정한 의문을 갖게 한다.

둘째는 '민족민주혁명(NDR)'이라는 기존의 변혁론에 대해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NLPDR)'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2단계 혁명론에 기반한 NDR론은 당면변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서, 기계적인 계급분류에 그치는 감이 있었다. 이는 제1차 러시아 혁명 시기 레닌의 저작을 교조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서 민중의 대다수를 변혁세력으로 규합하는 계기가 무엇일까에 대한 논의로까지 고민을 진척시키지 못했던 때문이다. 가령, '헌법제정민중회의', '제헌의회' 등의 구호는 광범한 민중의 결집을 '선언적으로만' 제시할 뿐, 그러한 결집을 위한 구체적인 계기를 제시해주지 못했다.

이에 반해 NLPDR론은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혁명론, 북한의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의 직접적 연장선 위에서 무엇보다도 광범한 변혁세력으로서 '민족-민중'(이는 당시 통용된 용어가 아니라 필자가 적용한 그람시의 용어다)의 형성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민족-민중' 형성의 중심고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민족자본가를 비롯한 대다수 국민이 반제블록으로 결집한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반대투쟁이 198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겠는지를 일단 논외로 한다면, 이렇게 변혁의 중심고리를 진지하게 사고하는 NLPDR론의 등장은 한국 민중운동의 민주변혁 논의를 분명 심화시켰다.

(다소 논지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NDR과 NLPDR의 논쟁은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박헌영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BDR)'론과 김일성의 '인민민주주의혁명'론 혹은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혁명'론의 논쟁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의 논쟁과 1980년대 논쟁 사이의 연속성과 단절성이라는 문제는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대중조직(RMO)'이라는 조직론적 차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증언에 따르면, 1985년 겨울에 NL그룹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데는 한국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나 변혁론 논의보다도, 오히려 당시까지 운동의 중심체계였던 써클운동에 대한 조직론 차원의 문제제기가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구학련식의 급진적 활동가조직이 오히려 써클을 통해 형성된 상당수의 활동가들을 노출시키고 해체시키는 역할만을 했다는 비판적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써클 선배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저학번들에게 이런 주장이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1986년 1학기를 통해 '자민투'라는 이름을 NDR그룹의 '민민투'와 함께 유행시킨 NL그룹은 1986년 2학기 들어서는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이라는 전국조직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건국대 항쟁이 돌출하여 반제운동을 중심에 두는 학생그룹의 존재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강철서신]이라는 문건시리즈를 통해 학생운동 NL그룹의 논의는 수도권 지역의 현장진출 활동가들에게도 유포되기 시작했다.


<b>반제국주의 투쟁의 딜레마,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b>

그러나, 앞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지적하면서 언급했던, 남한 사회에서 미 제국주의 반대를 외치는 것의 딜레마는 1985년 이후 대규모로 형성된 반제운동그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론의 내적 긴장으로 나타났다.
NLPDR을 위해서는 남한 사회내에 가장 광범한 통일전선이 형성돼야 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국주의와 분단질서에 반대하는 투쟁은 그러한 통일전선의 형성에 핵심고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위분자들의 인식의 자각과는 상관없이 남한사회 대중의 인식은 여전히 분단질서에 깊이 얽매여 있었고, 따라서 반제투쟁 과제의 제시(주한미군철수 등)는 적어도 당장은 '민족-민중'의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운동의 전위주의 편향을 부추길 뿐이었다.

1986년부터 1987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이뤄진 NL그룹의 또 다른 변화의 과정은 바로 이러한 긴장으로부터 비롯됐다. NL그룹 형성 초기부터 내걸었던 '군중노선'이 보다 강조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 쟁취"라는 구호가 전면에 등장했다. 이는 6월의 가두투쟁 속에서 역사상 유례없이 광범한 통일전선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6월항쟁에서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과연 이렇게 형성된 통일전선이 PDR이 요구하는 그 변혁적 '민족-민중'이었는지에 대해 다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이 분열되고 양김씨의 도박에 의해 지역간 대립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혁 세력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문과 함께 대선을 거치면서, NL그룹 내에도 NLPDR의 구체적인 경로를 놓고 다양한 분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한 편의 글을 요구하는 주제다.

흔히 NL-PD 논쟁으로 알려진 이후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NLPDR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광범한 '민족-민중'이 형성될 수 있는 중심고리를 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투쟁이 아니라, 국내 독점자본과 파쇼세력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찾는 '또 다른' PDR 논의들이 등장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후자의 세력은 흔히 '범PD진영'이란 불린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선 현재의 한국사회 현실은 1980년대 중반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유일초강대국 미국의 오만이 폭로되고 있는 점(매향리 투쟁 등을 보라), IMF위기 이후 대중화되고 있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경계, 6.15 공동선언 이후의 남북 대화국면 등은 제국주의 반대투쟁의 오래된 딜레마를 한결 누그러뜨리고 있다. 또한, 그 동안 서로 대립하던 NL과 PD 사이의 새로운 접근 가능성도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변혁의 통일전선주체를 놓고서 격렬한 논쟁이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가령, 조국통일문제를 놓고 "가장 광범한 통일전선의 수립"을 주장하며 "재벌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는 주장들이 과거의 NL진영 일각에서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반제투쟁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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