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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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THINK TANK [2]

박준도 | 편집부장
앞서의 정리과정에서 나는 미국정치사에 있어 급격한 지각변동을 가져온 민주당(혹은 민주당연합)의 뉴딜정책과 지성사적인 맥락에서 Think Tank의 성립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수준이나마 이 두 과정이 20세기 초반 혁신주의의 완성으로서 수렴되는 과정으로 보인다며(짐작 수준에 불과한) 스케치한 바 있다. 그러나 스케치 수준도 여전히 불충분한 것이, 20세기 초중반 민주당의 황금기 속에서 보여진 이면에 대한 그림이 빠져있다. 이는 필자의 의무 즉,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정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판단이 서게끔 아니, 주의를 환기하는 계기가 되도록 미력하나마 도움을 준다는 취지에 비추어 보더라도, 지극히 함량미달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이는 이후 계속될 싱크탱크의 전성기와 연이어 등장하게되는 보수주의적인 싱크탱크들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기도 하다.


<b>민주당의 황금기 </b>

1932년 뉴딜정책이 제시된 이후 민주당은 과거에도 없었던, 그리고 현재조차도, 그랬던 역사가 있었던 게 사실인지 의구심이 일만큼 황금기를 누렸다. 1932년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이후 1980년 레이건 행정부이전까지 단 두 번(아이젠하워, 닉슨)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민주당의 집권기였다. -그 두 번의 사례도, 공화당이어서라기보다는 개인적 명망에 기인한 바가 큰, 그나마 상·하원 모두 압도적으로 민주당에 의해 주도된 시기였다.- 이 때를 제외하고서는 일단, 뉴딜정당체계라 불리우는 시기의 민주당 전성기(루즈벨트의 4선재임)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1932년 이전 민주당의 상황은 남부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지역정당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반전할 수 있었던 극적인 정치적 기회가 바로 1929년부터 발발한 대공황이다. 10월 주식 대폭락을 시작으로 평생 모아둔 저축도 날리고, 상점들은 문을 닫고, 공장이 폐쇄되면서, 미국인 1/4는 실직자가 되어버린 상황, 농가 소득은 50%나 줄어든 상황에서 당시 정치가들(주되게 공화당)과 기업가들은 낙관적인 예언만을 했다. 민주당 입장에서 이는 명백한 하나의 기회였으며, 조정과 계획을 미덕으로 보면서 정책적인 대안 위주의 혁신주의적인 흐름(설사 그것이 급진적이었다 할지라도 인종적, 계급적 보수성이 저변에 흐르는)과 마주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지역정당의 외양을 벗고 전국정당의 흐름을 창출하게 된다. 이는 새로운 지지기반의 확충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루즈벨트 행정부의 전반적인 장려, <와그너>법에 의한 법적지지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코포라티즘적인 합의를 끌어내(물론 이면에 이를 제한하는 노사관계법과 쟁의에 대한 국가경찰력의 집행력을 강화하는 것을 한축으로 한다) 민주당이 이들을 자신의 주요한 지지기반으로 포섭한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는 그간 산업화과정에서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였던 흑인들을 주요한 지지기반으로 전취했다. 흑인들에 대한 보편적 권리에 대한 흐름보다는 오히려 산업화와 빈곤의 맥락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링컨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인해 공화당 지지가 보편적이었던 흑인을 놓고, 공화당을 상대로 하는 대역전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거기에 CED같은 think tank의 눈부신 활약과 경제정책의 일정한 성공하에서 기업가들의 지지까지 끌어냈다. 전통적으로 최고부유층과 기업가들의 지지정당이었던 공화당에서조차 일정한 범위내에서 사회보장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맥락하에서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양당체계가 확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남부(대부분이 백인우월주의자인)와 부유층에게, 흑인과 노동자에 대한 당의 정책은 매우 불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종문제가 그 중핵에 있었는데, 북부 민주당과 대통령선거에서의 민주당이 지극히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흑인들에 대한 지위증진을 언급할 때마다 이 갈등은 증폭된 것이다. 이는 1948년 대통령선거에서 남부의 민주당원들이 제3당인 서먼드 후보에 대한 지지로, 공화당 다수파와 공동보조를 취하여 입법처리과정에서 수시로 통제 및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b>풍요의 사회 그리고, 행동파 지식인</b>

풍요의 사회, 1950-1960년대 대미국 경기호황의 별칭이다. 케인즈주의와 리버럴간의 연합이 가져온 이 경제적·정치적 변화 속에서 세계대전이라는 특수까지 겹쳐 이룩한 것이다. 물론 이는 헤게모니국으로서 식민지배의 초과착취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겠으나, 미국의 지성, 심지어 노동자들에게조차 이것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풍요의 의미가 소비생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결정적인 다수가 생존에 관련된 문제에 직면하지 않은 상태, 즉, 생필품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의 문제가 된 이 때, 미국의 지성은 이제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즉, 대다수의 빈곤상황과 대다수의 풍요상황이라는 상황인식의 변화 말이다.
이미 양차대전, 그리고 대공황을 거쳐 위기관리 능력에 있어 체계적인 분석과 이에 대한 과학적인 정책 마련에 있어 일정한 확신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 현재의 풍요를 뒷받침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믿음은 더욱 분명해졌다. 즉, 과거 수많은 가설과 검증이라는 실험(실천)의 맥락에서 더 나아가, 가설과 정설 사이의 차이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이 차이의 정치적 중요성을 제기해나간 것이다. 역대 미대통령 중 최고학력 소유자인 케네디 행정부시대에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Think Tank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랜드연구소의 현실능력이 검증된 상황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예일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지식과 정치적 행동이라는 주제연설에서, 이제 이념적인 분쟁은 줄어들 거라고 관망하며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는 철학이나 이념을 둘러싼 근본적인 대립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 복잡하고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 세련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지식인들의 상황인식을 웅변하는 것으로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전문지식, 즉 과학에 대한 믿음에 찬 주장인 것이다.

예컨대, 빈곤과 관련하여 작금의 상황에서 빈곤의 문제는 소수의 문제이며, 이 문제에 대한 처방은 부의 재분배 혹은 게으름과 능력부족이라는 고전적인 대립 즉, 자유주의/보수주의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오히려, 빈곤의 사이클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며, 빈곤은 부자들의 음모에 따른 희생이 아니라 순환적 주기 그 자체이며 이러한 원인분석하에 특수한 형태의 사회적 대책을 공약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념의 종말을,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대책마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는 스스로의 이미지(하바드 명문대생의 대통령 역임)와 함께 행동파지식인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분야를 망라하고 지식인들을 대거 영입한 것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결과와 정치학자 리차드 뉴스태트가 마련한 정책의견서를 중심으로 정권이양계획도 세우고, 단지 최고위뿐만 아니라, 제2위 제3위 자리, 자문 구, 조정기구까지의 인사에도 깊은 배려를 했다. 심지어는 국무회의나 보좌관회의보다 특별보좌관들이 직원을 거느리며 대통령과 직접 회의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 각각의 담당부서가 나름의 자문기구를 통해 정책을 입안하게끔 하여, 이들 행동파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알력이 생길만큼 말이다. 이를 통해 케네디는 미국 사회가 직면한 이념의 부재를 "뉴프론티어"로 대신한 것이다. 바로 케네디 시대 Think Tank가 꽃을 피웠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b>새로운 갈등의 전개와 실용주의의 한계</b>

1960년대 미국은 풍요의 사회라는 것과 함께 새로운 갈등이 전면에 부각되는 시기이도 했다. 인종차별의 문제, 학생운동,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반전평화운동, 그리고 성적 자율권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운동,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응축되어서 드러난 반문화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풍요의 사회가 마감되는 서곡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과학기술의 문명 앞에서 끊임없이 배제되고 소외받는 이들이 존재함을 알리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의미가 미국정치사 혹은 지성사의 맥락에서 그리고 본 주제인 Think Tank의 형성사를 그려보는데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되려 이 운동의 이면에서 일어난 흐름이 관건이었다.

특히, 인종차별의 문제는 이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게 보아야 할 문제였다. 산업화의 진행 속에서 도시빈민가를 중심으로 흑인 슬럼가들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이는 과거와는 또 다른 빈곤과 가난의 상징이자, 미천한 신분의 상징이었다. 문제는 똑같이 배제되고 있는 미국 중산층, 심지어는 백인노동자에게조차도 이들은 공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들과 도시공간에서 동거한다는 사실이 백인들에게는 불안감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자신도 함께 기회가 박탈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민주당내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1968년 대선에서 반동적인 우익호소를 내걸고, 제3당의 후보로 출마한 알라바마 출신의 왈레스후보로의 백인 민주당당원들의 이탈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갤럽의 한 통계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의 노동자, 노동조합도 15% 정도가 이탈되었다. 남부를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백인들이 민주당의 지지세력에서 멀어진 것이다.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였다. 20여년 사이 5배 가까이 늘어난 대학생들이 과거 신분적 특권이 주어졌던 것과는 달리, 일반대중의 위치로 전락하고 마는 상황과 마주치면서,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학생들에게 심리적으로 반대자의 입장에 나가게 하는 동기도 제공한 것이다.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 주장과 관련하여, 민주당 창당 때부터 전통적 지지자였던 카톨릭교계가 이탈하여 공화당 지지로 나서게 된 것도 이 때에 즈음한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미국의 제한적 평등주의조차 그 본색을 드러낸 시점이라 할 것이다.
한편, 존슨 행정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조금더 실용적이며 조금더 활용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내걸었다. 하지만 존슨 행정부가 내걸었던 '위대한 사회', '빈곤과의 전쟁' 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임기기간동안 4백 개의 법안을 제정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실효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빈곤과의 전쟁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 바로 이 운동의 성패를 측정하는 방법과 미국 자유주의의 실패를 재는 기준에 대한 지식인들간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다는 혹평도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시끄러울 정도로 테크노라트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된 것에 비해 별 실효성이 없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논쟁의 결과이다. 바로 정책의 목적이나 가치보다 수단을 중시하는 전문가중심의 실용주의에 지식인들이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평가를 둘러싼 지리한 논쟁도 논쟁이거니와, 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불완전하다며, 보다 많은 자료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나 아연실색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때를 즈음해 전문적인 사회과학과 정책분석의 전통적인 이론이나 조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연구기관들이 몇 개 생겨났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지닌 사회과학자들간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랜드연구소에서 분화되어 보수주의적 색채를 보다 분명하게 띈 허드슨연구소가 위치해 있게 된다.


<b>보수주의 Think Tank의 등장과 경쟁</b>

1964년 베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유세는 대통령 선거유세라기보다는 미국정치사에 있어 하나의 사회운동이라는 인상이 매우 짙었다. 남부의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이기도 한 이 공화당 의원은 이 유세를 통해, 한세기 동안 미국정치를 지배해 온 정책들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사고와 논의 자체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윤리적, 지적 분노와 거부감을 표현하고 집결시키려 했다. 유세기간 내내 그들은 체제가 대표하는 주요 정치이념들을 낱낱이 공격했다. 뉴딜, 페어딜은 물론이거니와, 허수아비 공화당대통령이라고 혹평받는 아이젠하워의 '구멍가게 뉴딜'조차 비난한 것이다. 반공노선의 강화, 군비팽창 방지에 대한 반대, 반공산주의적인 자유 투사들에 대한 지원, 유엔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 등 거칠 것이 없었다. 모든 보수적인 세력들의 단결을 외쳤다.

그러나, 이런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골드워터는 존슨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들은 대통령 선거패배의 원인으로 자유주의 체제의 견고성을 첫번째로 꼽았다. 이 리버럴리스트들의 여론을 이끄는 힘을 알고 있었고, 설사 대선에게 이긴다 할지라도 리버럴리스트들이 행정각료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 과거 아이젠하워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처럼 견고하게 조직된 적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의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요새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정치조직보다 학문적 하부구조를 만드는데 주력하였고, 그로부터 10년동안 후버연구소, AEI연구소, 헤리티지재단 등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보수주의적인 색체를 띄게 된 연구소들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런 저간의 사정에, 앞서 언급한 지식인들의 실용주의적 정책에 대한 회의가 마주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보수주의적인 싱크탱크들에게 있어 또다른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이들 스스로가 직접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행정관료에 있어 조언(물론, 케네디시절 일정하게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수준을 넘어서, 이념을 매개로 출판·홍보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자신의 연구소를 알리고 정책을 직접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헤리티지재단의 경우, 보수주의 정책의 발원지로 자처하며 레이건 행정부의 입각 때 <지도자의 조건>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들은 이 보고서를 통해 '뉴딜정책이라는 정부의 닳아빠진 옷자락을 움켜쥐고 48년동안 지속된 자유주의 정책을 탈탈 털어낼 청사진'이라는 기자 명명에 걸맞는 1천여페이지의 정권이양 계획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해리티지 재단은 출판예정 브리핑을 통해 여론을 사전에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당 연구소의 위상을 배가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는 이후 Think Tank들간의 여론을 매개로 한 직접경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하나더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수적 Think Tank의 경우(특히, 헤리티지재단) 정치활동 자체가 주업무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제3세대 보수주의 지도자들을 직접 길러내는 프로그램조차 자처하고 있다. 대학생과 워싱턴에 온 정치견습생들을 직접적으로 후원하고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담당한 것이다. 이는 젊고 재능있는 보수주의 운동가들이 대학이나 정당활동보다도 이런 정책네크워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정치입문에 더 빠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흐름에 자유주의적인 색채의 Think Tank연구소 역시 자극받았음은 굳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런 Think Tank들간의 극심한 경쟁의 한복판에 있는 미국 정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주제어
국제 이론
태그
여성 빈곤의 여성화 폭력 북경 플러스 세계여성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