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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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4.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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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햇볕정책의 위기와 민중운동의 과제

임필수 | 정책기획부장
<b>미국의 대북정책 조정과정의 장기화</b>

미국의 대북정책 조정과정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지난 3월 6일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틀 후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현 시점이 북한 정부와 대화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면서 파월 장관의 말을 사실상 뒤집어버렸다. 이처럼 미 정부내에서조차 정확한 의견조율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남북간 공식일정도 사실상 마비되고 있다. 미국이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속히 재개할 의사가 없고, 남측이 미국과의 합의 없이 북한과 중요 정치일정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갖고 있다는 게 확인되면서 2차 정상회담의 2월 조기개최가 좌절되었다는 언론보도도 나왔다.

또한 3월 중순 예정된 남북 장관급회담이 북측의 일방 통보로 연기됨에 따라, 북한이 이러한 진행경과를 매우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 조정이 장기화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대북정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선결요구조건들 즉 미사일 개발 및 수출 중단, 이에 대한 확실한 검증, 북한 재래식무기의 감축 등에 대해 북한이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는 북한과의 대화를 중단한다는 '무시'(neglect) 전략과 동일한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시정부의 대북정책 구상의 근저에는 前 클린턴정부가 북한에게 협상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정서가 깔려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과거 북한이 포괄적 협상의 자리로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긴장상황을 조성하는 행동도 불사했다고 한다면(예컨대 1998년 탄도미사일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인공위성 발사실험), 역으로 현 부시정부는 '힘에 바탕한 외교'를 표방하고 있는 바, 이제는 자신이 긴장고조를 불사하면서 북한을 압박해 추가적인 양보조치를 받아내겠다는 뜻이다.

북한은 지난해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을 통해 미사일협상의 타결방식을 제안함으로써 북미관계의 '해결' 국면에 진입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북한과의 대화를 다시 중단하려는 미국의 의도에는 북한에게 좌절감을 주어 협상주도권을 다시 뺏을 수 있다는 기대가 녹아있다는 말이다.


<b>DJ 방미외교의 모순</b>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방미과정에서 미국이 기존의 페리프로세스로 복귀하기 바란다는 메세지를 여러 번 피력하였다. 그는 방미기간 동안, 부시대통령 및 행정부고위관리들과의 회담을 비롯하여 미국내 주요싱크탱크 및 상·하원 외교위원회소속 의원들과의 연속간담회 자리를 가졌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포괄적 상호주의'를 제안하였다고 밝혔는데, 이는 "북한으로부터 제네바합의 준수, 미사일문제 해결, 대남무력도발 포기 등 세 가지를 받고 북한의 안전보장, 적정한 경협, 북한의 국제기구 진출 등 세 가지를 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물론 이는 페리프로세스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기조가 미국 국익에도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미국의 추가요구를 받아들이는 한편,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수위를 협의·조절하겠다는 태도도 분명히 표현하였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는 우호적인 회담분위기 조성을 위해 NMD문제에 대한 부시 정부의 요구사항을 사실상 수용하였다. 방미를 며칠 앞둔 3월 2일,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이 급작스럽게 NMD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의 입장을 양해한다"는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발표문에서 NMD찬반여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입장표명을 피했지만, 2월 한-러 공동성명에서 "ABM조약(방공망제한협정)이 핵무기감축 및 비확산의 중요한 기반"이라고 밝힌 대목과는 실로 어긋나는 내용이었다.
또한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간에 합의하고자 한 '서울평화선언'이라는 형식을 폐기함으로써, 부시 정부의 우려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 '평화선언'은 △남북 군사분계선상의 상호전력감축 △남북 군사핫라인 개설 △군사옵서버 교환 등 '군비통제'라는 접근방식을 따르는 초보적 군사적 신뢰구축조치 이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남북간 협상구도가 북한 전략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김대중정부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합의를 재확인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입장을 변경하고, 미국과의 지속적인 정책협의를 약속하였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이러한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는 부시 정부가 기존 페리프로세스 또는 햇볕정책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으며, 당분간 북한과의 긴장고조를 의도적으로 유도하고자 한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따름이다.(3월 27일 부시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한국-미국-일본은 3자정책조정그룹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변화를 발견할 수는 없다)


<b>페리프로세스의 상대적 진보성?</b>

따라서, 이처럼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과정이 문제화되면서, 기존의 페리프로세스 또는 햇볕정책의 '상대적' 진보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새삼스레 부각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월든 벨로(필리핀대학 교수)는 한겨레칼럼(2001.3.19)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동북아시아의 냉전구조를 녹이는 데 가장 유력한 길임에도 지금 난관에 봉착해 있다"면서 "국민들이 모든 부문에 참여하여 남북 화해과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또한 기존 통일운동단체들은 오히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이 조기에 실현되어 국내 수구세력과 부시정부의 강경책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통일연대, [국민들께 드리는 호소문], 2001.3.15)

특히 '6·15 남북공동선언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이하 통일연대)는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에 즈음해 대대적인 환영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취지의 사업을 제안하였다. 통일연대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 답방에 대한 환영행사를 제기하는 맥락은 단순명료한데, 첫째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김 위원장 답방에 환영의 뜻을 표현할수록 국가보안법 체제는 무력화될 것이며, 둘째는 공화당정권의 강경흐름을 약화시켜 북미관계가 페리보고서의 방향으로 재진입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국민대토론회}, 2001.3.5;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사업계획서], 2001.3.15) 특히 현재 시점에서 "당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 화해를 실현하며 교류협력의 기운을 높이는 것"이며, 이 점은 '6·15 남북공동선언에 동의하는 세력들간의 전략적 교집합'이라는 것이다.


<b>2차 정상회담의 구조적 제약</b>

그렇지만 현재 상황에서 볼 때,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구조적인 제약은 더욱 커진 셈이다. 애초에 페리프로세스는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협상을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해나가며, 한-미-일 3자정책조정그룹을 통해 남북간의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교류를 포함한 3국의 대북지원 및 교류를 조절해나간다는 구상이었다.(페리프로세스가 한반도 냉전구조해체의 진보적 대안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이러한 틀에서 김대중 정부의 역할은, 과거 김영삼 정권과는 달리 남북대화의 진행을 북미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한하지 않음으로 인해 북미관계 개선을 지지하며, KEDO에 대한 자금지원을 비롯해 북미협상에 대한 재정적 지원으로 뒷받침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햇볕정책은 이처럼 미국과의 역할분담론에 기초한 만큼, 그 기초가 흔들리게 될 경우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김대중 정부에게는 북미협상의 매개자 혹은 후원자 이상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자임하지도 않았던 것이다.(이는 현재 상황이 뜻하지 않은 미국에서의 정권교체에 따르는 '불운한' 사건 탓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김대중 정부는 이번 방미외교를 통해 어떻게든 과거의 역할분담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지만, 부시 정부는 냉정하게 그 대가를 요구하였다. 이는 한반도문제를 둘러싼?여러 쟁점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관할권'을 늘리며,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을 일괄적으로 용인하도록 만드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회담결과는 남북문제는 한국정부의 주도하에 풀어져야 한다는 외교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궁극적으로 증대시키는 방향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상대적 진보성이 부각되어야 할 때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가 내세운 햇볕정책의 자기모순이 한계에 봉착한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면,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과 투쟁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비상한 시기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설 때, 민중운동이 자신이 해결해야 될 과제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b>햇볕정책의 위기, 민중운동의 위기로 확산되는가? </b>

따라서, 이번 2차 정상회담에 즈음한 민중운동의 대응은 그 초점을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에 맞추는 게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다른 판단을 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오히려 현재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맥락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과정의 장기화가 가져올 한반도에서의 불안정성 수위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도 북한에게 딜레마적 상황, 즉 한편으로는 미국의 추가 요구사항들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부시정부가 진정으로 관계개선을 위한 진전된 조치들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다고 대외관계 개선을 위해 지난 수년간 벌여온 노력을 백지화하고 다시금 장거리미사일 실험에 나설 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견하기 어려운 상황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북한이 어떤 판단을 하는가는 큰 변수가 될 터이지만, 어느 것이든 더 큰 불안정성을 야기할 위험도 함께 따라가게 될 것이다.('강경책'이란 어떤 단계적 프로그램이 아니며, 대결과 갈등을 끊임없이 조장함으로써 모종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취득해나가는 방식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의 정책조정능력이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쳤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주 다른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김대중 정부의 위기 상황과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속되는 경제후퇴와 구조조정의 '상시화' 속에서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이 매시기 쉬지 않고 터져나오면서 현정부의 통치능력에도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최근 민중운동은 '정권퇴진' 구호를 들고나오면서, 김대중 정부에 대한 집중투쟁을 펼칠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힘에 의한 외교'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려는 부시 정권 및 그에 대해 결국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현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과 투쟁의 목표를 맞추고, 현재의 '정권퇴진' 운동과 적극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정치전선을 확대하는 방식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자의 흐름이 분리된다면 그 결과는 총체적인 운동의 갈등과 위기로 현상될 수 있지만, 그 운동이 일관된 흐름으로 형성되어 간다면 대안적인 길은 분명히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평화 국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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