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4.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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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1]-20세기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여명

염복규 | 서울대국사학과 박사과정
<b>2001년 3월 21일, 한국사회주의운동사를 이야기하는 것</b>

옛 사회주의 종주국의 여인들이 몸팔아 돈 벌러오는 일이 별로 신기하지 않게 되었다. 한 때 호색한에 미치광이쯤으로 알려져 있던 북한의 지도자가 호탕하고 재미있는 사람임을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은 못되는 것 같다. 필자는 작년 대학가를 풍미한 유행 중 하나였던 '체 게바라 현상'을 별로 재미없게 지켜보았다. 서점에서는 체 게바라에 관한 책들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다니는 학생들도 꽤 많이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멀쩡하게 의대를 다니다가 쿠바혁명에 뛰어든 체 게바라의 삶의 의미가 공유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잘생긴, 멋있는 풍운아로서의 그의 이미지만이 전부였다. 혁명이 패션이 되어버린 시대라고 했던가. 모든 사회운동과 혁명에는 미학적 요소가 있다. 그것이 두드러질 때 '퇴폐'가 된다. 정치의 미학화, 그것이 파시즘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은 그러한 시대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20세기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패션이 되기에는 너무 초라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운동, 세계최강국 미국과 싸워야 했던 해방정국의 운동들, 마침내는 '사회주의조국'에서조차 버림받아야 했던 불우한 그들,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운명에 대해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인간적 세계에 대한 꿈과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의 존재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서 우리는 인류의 오래된 염원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삶과 투쟁을 반추하는 의미를 찾는다. 그 가냘프고 끈질긴 믿음, 그것 없이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까?


<b>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의 사형집행에 숨겨진 의미</b>

무려 1년여를 끌어오고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휴전협상이 여전히 지리하게 진행 중이던 1952년 중반, 남과 북은 각자에게 유리한 휴전협정을 맺기 위한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군에 의한 일방적인 북한 폭격이 그 주된 실상이었다. 미 공군폭격기들은 수풍댐을 비롯한 10여개의 발전소를 폭격했다. 그 해 7월 11~12일에 행해진, 전율할만한 평양폭격에서는 이틀만에 7천여명이 사망했다. 1만여톤의 네이팜탄, 6만여말의 탄약, 700여톤의 폭탄을 쏟아부은 미군의 폭격목표는 북한 전역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북한군, 아니 북한주민 전체에게 전쟁은 미군의 폭격을 피하는 것, 그래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생존 그 자체가 곧 미제에 대한 투쟁과 동의어이던 그 무렵, 북한정권 내부에서는 '건국이래 최대의 사건'이 터져나왔다. 1952년 8월 3일 이승엽을 비롯한 12명의 남로당출신 당 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 연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후원자였던 박헌영은 부수상으로서의 지위가 참작되어 체포만 면한 채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듬해 3월, 결국 그도 투옥되었다. 박헌영 체포 직후 김일성은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박헌영의 범죄사실을 설명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 종파를 만들었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결국 그로 인해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곧 조선노동당에서 제명되고, 부수상 겸 외무상직에서도 해임된 박헌영은 평양북도 철산군의 어느 산 속에 연금된 채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자아비판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 요구는 단지 입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 보통 고문이라고 부르는 심각한 육체적 압박을 동반한 것이었다. 수많은 남로당출신 간부들에게는 박헌영를 비롯한 구속자들의 비위사실을 고발할 것이 요구되었다. 한가지라도 고발하지 않을 경우 돌아오는 것은 출당이었다. '남로당출신'이라는 '주홍글씨'에 덧붙여지는 출당이라는 처벌은 곧 완전한 사회적 매장, 나아가 죽음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존경과 믿음으로 따라오던 당의 최고지도자들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의 심리에 나설 때까지 자신의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심문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에게 이러한 심문투쟁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22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건설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하다가 중국령 안동에서 체포되었을 때, 일경의 무자비한 고문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서울행 목적을 감춘 바 있었던 박헌영은 그 후 무수한 체포와 투옥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심문투쟁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 자신의 자백여부는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죄목은 정해져 있었고 그것들은 전체 13권, 4천여페이지에 달하는 조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박헌영에게는 '미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 및 전재산몰수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은 이듬해 7월 19일 집행되었다. 전(前) 북한 고위관리 박길룡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안전상 방학세가 직접 자신의 권총으로 총살을 집행했으며, 처형직전 박헌영은 재혼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김일성에게 그 말을 꼭 지켜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21년 5월 상해 한인공산당 입당을 시작으로 30여년간 '조선혁명'을 위해 싸워왔던 박헌영은 이렇게 '사회주의 조국'에 반역한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그의 혁명동지였던 이승엽, 이강국, 김오성, 임화, 설정식 등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이로써 김일성 중심의 '만주항일무장투쟁그룹'은 그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남로당계열을 정권과 당에서 완전히 제거하였다. 남로당계열은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우기 위한' 미군의 무제한 폭격 속에서 북한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했던 시점에 '미제의 간첩'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과연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을까?(이러한 질문이 상당한 우문에 속한다는 점은 모두 알고있다) 아니면 소설 <태백산맥>의 주장처럼 남로당계열의 숙청은 패전 책임논란에서 벗어나 북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역할분담, 박헌영의 숭고한 희생이었을까, 혹은 미국과의 연결이 아니더라도 박헌영과 남로당계열이 권력을 잡기 위한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었던 건 아닐까? 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김일성그룹은 단지 권력강화를 위해, 넓은 의미에서 '혁명동지'인 남로당계열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던 것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움직이게 했던 것일까? 이러한 정황, 김일성그룹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를 제거하게 만들었던 이 아이러니하고 냉혹한 정황 속에는 북한체제가 만들어지고 움직여온 과정 전반을 관통하는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비밀이야말로 '조선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인 것이다.


<b>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결성</b>

1925년 4월 15일. 곳곳에 꽃이 만개한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 날 서울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는 이러한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단지 사람들만 모여드는 게 아니라 회관 구석구석마다 경찰들도 눈에 띄었다. 회관 2층회의장 벽면중앙에는 한반도 지도에 펜촉이 가로지로는 문양의 플랭카드가 걸려있었고, 그 옆으로는 각 신문사의 깃발이 걸려있었다. 당시 신문기자들의 모임인 무명회가 주최한 <조선기자대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조선에는 막 도입된 사회주의사상을 연구하고 그를 통해 어떤 행동을 취해보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수많은 사상단체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상단체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는 당시 비판적 지식인이 취직할만한, 몇 안되는 직장 중 하나인 신문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신문기자들은 매체가 한정된 상황 속에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주관하는 기자대회에 대해 일경이 최고의 경계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며칠 뒤에는 각 사상단체들이 연합해서 주관하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도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집회금지통고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전국각지에서 500여명의 활동가들이 이미 서울에 모여든 상태였다.
기자대회는 전국 20여개 신문, 잡지사 기자 639명이 참가한 가운데 오전 11시 개회가 선언되었다.

먼저 대회의장단을 선출했다.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의장에,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이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의안을 채택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 대회는 계속되었다. 많은 기자들이 시종일관 자리를 지키며 질문과 토론을 이어갔다. 그 속에는 당시 조선일보 지방부 기자였던 박헌영도 끼여있었다. 3년 전 중국령 안동에서 체포되었던 그는 그 전 해 1월에 석방되어 합법적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기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기자대회는 며칠간 계속되었다. 그런가하면 시내 도처에서는 민중운동자대회 금지에 항의하는 산발적인 시위도 벌어졌다.
그런데 그 이틀 뒤 4월 17일 서울 황금정 1정목(지금의 을지로 1가)에 위치한 중국음식점 아서원 2층연회실에는 지식인풍의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둘씩 모여들어 한 스무명 남짓이 연회실을 채우자 요리가 들어오고 배갈도 서너순배 돌았다. 다소 긴장된 표정들이었지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점잖은 연회분위기였다. 특히 그 날은 기자대회의 최종일이어서 일경은 그 쪽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연회실에 모인 청년들 중에는 러시아에서 온 김재봉(1차 조공 책임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대규모 사상단체 북성회의 영수 김약수(해방후 제헌국회 부의장 역임,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투옥, 납북됨)도 있었다. 한편 기자대회장에 있어야 할 박헌영의 모습도 보였다. 그 날 이들이 아서원 연회실에서 가진 모임은 조선공산당 결당식이었다. 기자대회와 민중운동자대회 때문에 일경의 감시가 흐트러진 틈을 타, 서울 한복판에서 감쪽같이 조선공산당 결당식을 마쳤던 것이다. 이 모든 계획을 기획한 것은 박헌영이 속해있던 사상단체 <화요회>였다. 조선공산당 결당식이 있던 그 시간, 동대문 밖 손병희의 별장 상춘원에서는 기자대회 집행위원장 이종린이 대회 최종일 개회사를 낭독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결당식이 있은 다음날, 종로 박헌영의 집에서는 조공의 이원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식이 있었다. 조공과 고려공청의 조직은 한국사회주의운동사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무엇보다도 무수히 난립해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반목하기까지 했던 사상단체들이 하나의 당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그 해 6월 조공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동호(1차 조공 중앙위원, 해방후 건준 선전부장, 민전 중앙위원)와 조봉암(해방후 초대 농림부장관, 진보당 당수)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모스코바도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내분을 그치고 공산당을 결성한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b>1928년 12월 10일, 일명 12월테제의 의미와 혼란</b>

비록 결당에 성공했고 코민테른의 지부승인도 받았지만 조공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이미 뿌리가 깊어진 사상단체들간의 알력을 조정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고 안정적인 당의 재생산을 유지해가는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는 사이토 총독이 제창한 바 문화통치의 시대였다. 3.1운동으로 열려진 공간에는 수많은 합법, 준합법단체들이 '민족'이나 '민중'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정치운동의 시대였던 것이다. 조공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여러 가지 합법단체에서 공개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합법적 지위와 '공산당원'으로서의 지위를 너무 자주 혼동했다. 사상적으로도 미숙할 뿐더러, 지하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조공의 구성원들은 이런저런 사소한 사건들에서 자신의 정체를 너무 쉽게 노출시켰던 것이다.

대규모 검거와 파괴가 거듭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은 앞서 말했던 조공 구성원들의 부주의 탓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당시 조선사회라는 물에 떠있는 기름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조공 역시 다른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타도와 노동자·농민의 세상건설을 내걸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노동자·농민들과 소통하지 않고 있었고 소수의 지식청년들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기층에서 협력자를 구하지 못한 공산당은 권력의 추적을 벗어나기 힘든 법이었다.

이에 대한 반성은 조공 내부에서도 제기되었지만, 명시적으로는 코민테른에서 나왔다. 1928년 코민테른 제6차대회에서 '좌선회' 방침에 기반해나온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일명 '12월테제')가 그것이다. 12월테제는 먼저 조선혁명의 성격에 대해 "그 사회경제적 내용은 제국주의 타도와 농업문제 해결에 있으므로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이지만, 그 수행은 반부르조아적으로 할 것"이라고 되어있었다. 여기에서 반부르조아적이라는 말은 조선의 부르조아지들은 혁명의 동맹군이 아니며 타도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12월테제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기층민중조직의 강화보다 신간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부르조아지와의 상층통일전선에 더 힘을 쏟아, 위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조공의 코민테른 지부승인을 거절한 것이며 이는 곧 조공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조공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참가하고 있던 신간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켜야만 했다.

젊은 이론가 고경흠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당에 눈이 멀어 노동대중과 긴밀히 연계된 독자적인 투쟁조건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문제를 풀어나갔다. 따라서 이제 급선무는 "노동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계급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신간회는 "소부르조아 정당조직으로 현재의 국민혁명 단계에서는 공산당의 반대당파"이며 "이 집단에 대한 공산당의 임무는 이 반대당파를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동맹적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고 미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설정되었다.(김민우 <조선에서 있어서 반제국주의 협동전선의 제문제> ; 김민우는 고경흠의 필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유명한 신간회 해소운동이 시작되었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신간회 해소 → 노동자·농민 중심의 대중운동조직의 결성 → 이에 기반한 조공의 재건으로 모아졌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12월테제 이후 사회주의운동의 방향전화에 대해서는 "계급지상으로 내세움으로써 민족 전체의 이익을 등한시했다"는 평가와 "계급적 대중운동의 발전을 추동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질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이 두 가지 평가는 객관적으로 볼 때 둘 다 가능하며 어떤 점에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과연 '민족 전체의 이익'이라는 것과 '계급적 이익'이라는 것이 어떤 관계냐 하는 점이며, 당시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는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사이에 놓여진 '거리'와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한 대답을 들어보자. "민족혁명과 사회혁명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만리장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혁명의 현단계는 반제국주의 민족혁명단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토지문제를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 노동자 및 농민의 민중독재의 수립을 전제로 하는 혁명이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변경되는 혁명이다."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혁명 사이에 거리는 없다는 인식, 반제투쟁은 곧 반자본주의투쟁이며 토지혁명이라는 인식, 따라서 노동자 및 농민은, 이제는 같은 것이 된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유일한 담지자라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비록 코민테른의 방침에 의해 현실화되기는 했지만,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에서 '최초의 공산당 결당'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의 이론적 최고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엄연히 '다른' 것인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을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이론적 혼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b>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의 발발</b>

그리고 1930년대가 시작되었다. 세상도 바뀌었고, 사회주의자들 자신도 바뀌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가키 총독의 부임과 더불어 농촌진흥운동과 조선공업화정책이 시행되었다. 흡사 새마을운동과 중화학공업 건설이 그랬던 것처럼 1930년대 전반 일제의 정책은 사회전체를 급속도로 공업·건설·경제·도시화·잘살기 분위기로 몰고갔다. 3.1운동 이후 열렸던 정치운동의 시대는 닫혀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소 어설퍼보였던 조선의 자본주의는 비록 '식민지'라는 수식어에 한정되겠지만,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거리에 밝혀진 휘황한 자본의 네온사인은 또한 본격적인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알려주는 바로메터이기도 했다.

정치운동의 시대를 자신들의 것으로 뜨겁게 살았던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두 갈래의 길을 걸었다. 한 부류는 그들이 도달한 이론적 지점을 충실히 따른 사람들이었다. 공장 속으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표현대로 "노력인민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반제·반자본 투쟁의 부대로 조직하고, 그것을 토대로 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했다.
다른 한 부류는 전선에서 퇴각했다. 사회적, 이론적 변화에 대한 부적응과 더불어 몇 차례의 투옥경험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운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신문, 잡지 등에 조선사회와 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쓰는 '전업문필가'가 되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모든 활동을 멈춘 채 칩거에 들어갔다. 이것은 일정하게 세대적 교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사회운동이 그러했듯이.

그런 중에도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일제는 전쟁초기 중국대륙을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이제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 제패는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일본공산당은 해체를 선언하고 천황제의 슬하로 귀의했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싸울 것인가, 꺾을 것인가. '전향'이라는 문제가 그들의 목전에 대두했다. 이것은 단지 권력에 의한 물리적 압박의 문제가 아니었다. 심각한 사상적 고민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 무렵 멀리 만주에서는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전개와는 무관하게 중국과 소련의 혁명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한 세대가 '무장투쟁'이라는 방식으로 일제에 대항하며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이었다. 이들과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소통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느날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font color="##003366">* 이 글은 임경석의 <박헌영과 김단야>([역사비평]2001년 봄호), 류준범의 <1930∼40년대 사회주의운동가들의 '민족혁명'에 대한 인식>([2000. 역사문제연구] 4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1996, 창작과비평사) 및 곧 출간될 예정인 [박헌영전집]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다음달에는 1930년대 이후 '두 사회주의세력'의 대두 - 조공재건운동과 항일무투 의 주제로 계속됩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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