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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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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구조조정 방안,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 다양화와 수월성 그리고 불평등

손지희 | 편집위원, 진보교육연구소 교육이론실
<b>'귀족학교'의 등장</b>

4월 28일 MBC는 '단독 보도'임을 강조하며 서울 시내에 새로운 학교가 세워짐을 알렸다. 이름하여 '국제고등학교'!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이름 아닌가! 속내를 들여다보면,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국제적 수준의 고등학교'보다는 '귀족 학교'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국제고등학교 설립 구상 발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국제고 설립구상이 발표되었을 때에는 지원대상을 해외귀국자 자녀와 국내 거주 외국인 학생으로 제한했었다. 당초 설립예정시기(2000년)는 물건너 갔지만, 설립 계획은 무산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막힌 내용을 담고 다시 등장했다. 계획상으로는 '평범한' 국내 중학교 졸업생도 입학할 수 있다. 학교는 수업료를 자유롭게 책정(보도 내용에 따르면 연간 납입금 500만원선)할 수 있고, 교사진 대부분은 외국 교사 자격증 소지지로 구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3년 내내 거의 모든 과목의 수업은 영어로만 실시된다. 그리고 이 학교를 졸업하면 외국 대학 입학이 수월해진다. 앞으로 사립재단도 심사를 거쳐 통과하면 국제고 설립을 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조기 유학 붐을 조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후 특정 계층의 조기 유학 열기가 사회이슈로 조명되었고, 높은 사교육비 지출을 강요하는 구조(함량미달의 공교육)를 탓하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인재의 해외유출' 문제도 제기되었다. 새로운 교육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고, 영재를 범재로 만드는 평준화 제도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것이 새롭게 단장한 국제고 설립계획 발표의 전후맥락이다.
문제는 거액의 공공재원을 투입(예상치 200억원)하여 설립될 이 학교가 사실상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99%라는 데 있다.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국제고 설립 움직임은 곧 추진될 예정인 고등학교구조개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5.31교육개혁안에서 제시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가 조만간 현실화될 기세다.


<b>교육에 의한 지위세습, 우울한 자화상...</b>

"… 서울 난곡 지구 산동네의 고단한 삶은 우리를 몹시 우울하게 한다. 그곳의 빈곤 3대 20가구의 가계를 추적한 조사에 의하면, 1대 20명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이하가 15명이었고 3대 12명 가운데에도 대졸자는 전무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직자의 비율이 70% 가량이었다. 하층계급은 자신의 현재 처지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숨은 상처(hidden injuries)'는 자녀 역시 교육에 의한 세습사회의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절망감이다." (문화일보 2001년 4월 24일 '지위세습 부추기는 교육', 전상인 한림대교수·사회학)

현실은 이러할진대,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은 종착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듯하다. '소수자'에게는 "박탈을 감내하라!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는 너희들을 먹여 살릴 확실한 20에 투자해야 하니까!"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의 완성은 '교육 (유사) 시장'의 창출로 판가름난다. 5.31 교육개혁안의 기조는 흔들림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기조에 터한 정책들이 문제투성이 교육을 더욱 흔들어놓았다. 교육에 '경쟁'원리를 도입함으로써 교육의 질은 높아질 것이라는 신념이 교육정책 곳곳에 배어있다. 교육 역시 공급자 - 소비자, 투입-산출이라는 경제적 틀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공급자들은 저마다 교육 '상품'을 시장에 내어놓고 고객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고객의 선택권 보장을 위해 고객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교육상품을 진열해놓는 것이 교육 시장 형성의 기본원리다. 자립형 사립학교는 바로 '교육상품의 다양화'라는 목적을 위해 고등학교구조를 재편하려는 시도이다.
자립형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제안 당시부터 현재까지 반대의견이 제기되었지만, 교육부는 이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자율학교 시범운영' 및 '특성화 고교 지정' 등의 정책이 자립형 사립학교 도입의 전단계로 추진되었고, 자율학교 시범운영 결과가 보고되기 시작할 무렵 잠잠하던 '자립형 사립학교'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자율학교 정도로는 (교육시장 형성이) 안 된다!'가 요지였다. 때맞추어 '평준화 정책'을 비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교육부의 설명에 따르면, '자율학교'는 탈규제 학교(regulation-free school)의 일종으로써, 영국의 국고보조(Foundation School) 학교나 미국의 헌장학교(charter school)가 그 모델격이다.

미국에서 Charter School을 지지하는 건 주로 공화당 계통의 보수층인데, Charter School 등 선택권 확대책은 사회적으로 불리한 계층의 교육권을 위협하는 제도라는 비판이 본토에서도 만만치 않다.
선택권을 강조하는 입장은 한국교육의 '경쟁력 약화'는 국가차원의 획일적 통제구조에서 비롯된다는 판단 하에, 단위학교(교육 공급자)의 자율성을 확대하여 교육의 다양화를 꾀해야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못박는다. 단위학교는 학교운영의 얻는 대가로, 책무성을 가져야 한다. 책무성의 대상은 상부기관(관료)에서 교육수요자(학부모 및 학생)로 바뀐다. '관료'의 지시보다는 '고객'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교육민주화와 혼돈해서는 곤란하다. '자율성' 부여는 교육 민주화 구현을 위해서보다는 '고객지향'을 학교와 교사의 행위지침으로 부과하는데 필요한 방편일 뿐이다.

시민은 소비자로 규정되며, 민주주의는 사고 파는 과정에서의 소비자 권리행사로 의미가 축소된다. 이런 틀 속에서 교육권 행사는 구매력의 제약을 받는다.
관료로서 군림해온 교육관료(학교장 등)은 기업가의 마인드로 무장하여 고객지향적으로 학교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국가는 '평가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재정조달 및 교육활동의 결과는 단위학교와 교사의 책임이 되며 국가는 이를 느긋이 평가하고 압력을 가하면 된다. 교사끼리는 성과급을 받기 위해, 그리고 소비자에게 선택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교사들 간의 수평적 유대가 약화되는 반면 경영자와의 수직적 결합은 강화된다. 학교의 민주화는 요원한 일이 되어버리며, 단위학교와 교사들은 평가를 의식하여 '눈에 보이는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는 자율성-책무성 틀을 일찍이 도입한 영국의 사례가 입증해준다.(「학교, 국가, 그리고 시장」, 내일을 여는 책, 2001)


<b>자립형 사립고가 도입되어선 안 되는 이유</b>

자립형 사립학교 도입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고 바라보는 측에서는 자립형 사립고 도입의 필요성이 다음의 두 가지 때문에 커지고 있다고 파악한다.(한국교육개발원(2000),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제도도입에 관한 공청회] 자료집 참조.)
첫째, '문명세계의 질적 변화'이다. 지식기반사회로의 이행과 포스트 포드주의(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변화된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가장 중시되어야 하는데 기존의 획일적 교육구조는 이와 맞지 않으므로 변화되어야 마땅하다. 둘째, 이미 한국교육은 '질적 심화기'에 돌입했다. 고양된 학부모의 교육적 의식과 양질의 교육에 대한 욕구, 그리고 다양하고 특성화된 교육에 대한 욕구를 수용해야 할 시기이다. 조기해외유학 열기가 보여주듯이 국제적 기준을 공유하는 질높은 교육을 제공할 학교들의 출현은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우며, 이런 형태의 학교는 민간 영역에서 제공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고교평준화 상태를 이대로 지속하다간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고양된 교육수요자의 욕구를 수용하기가 어려우므로 '자립형 사립고'를 하루라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고등학교의 다양화의 선결조건인 대학입학전형의 다양화가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았으므로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에 당초 예정시기보다 2, 3년 앞당겨 2002년쯤 도입을 해도 무리가 없다고 진단한다. 단, 평준화 제도를 일시에 깨기는 어려우므로 민간 영역에 속하는 사립학교부터 이런 움직임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대신 공립은 '자율학교'를 확대하여 다양화, 특성화를 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같은 보고서는 자립형 사립고 도입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라고 설명하는데, <고등학교 교육 다양화>와 학생 및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 보장을 자립형 사립고 체제로의 전환으로 일거에 달성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계층별로 평준화 해체에 대한 반응이 다소 차이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립형 사립학교 도입에 대한 반응 역시 계층에 따라 다르다. 교육개발원이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주로 소득과 학력이 높은 계층에서 찬성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기득권을 가진 계층일수록 자립형 사립학교에 대해 호의적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자녀가 '잡것들'과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 함께 앉아 공부하는 것이 내심 못마땅한 부유층과 신중간 계층일수록 자립형 사립학교의 도입을 반긴다. 여태까지는 특정 지역(서울의 강남 등)으로 '이사'하거나 위장 전입의 편법을 써서 '끼리끼리' 모이겠다는 욕구를 제한적으로 해소해왔다면, '자립형 사립고'의 등장은 이런 욕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고무시킬 것이다. 반면, 이 대열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낄 박탈감은 커진다.

공립(공공영역)은 사립(민간영역)과 비교되면서 경쟁의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학생이든 교사든 '후진 학교', '후진 학생', '후진 선생'이라는 자괴감을 갖게 된다. 실업계를 다니는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자괴감을 이제 대다수 공립학교의 구성원이 가지게 될지 모른다. 교육은 '잘 나가는 자립형 사립고'와 '슬럼화된 공립학교'로 양분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자립형 사립학교 도입 역시 7차 교육과정과 마찬가지로 계급적으로 이해를 달리하는 사안이다. 현재까지의 교육정책은 주로 교육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고 표현 또한 적극적인 중산층 이상에 의해 휘둘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립형 사립학교로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질 고등학교의 차등적 체계화가 낳는 문제는 불평등 심화 뿐이 아니다. 한국의 사학이 지금껏 보여준 모습이 그 대답이다. 비리 백화점 상문고, 밖으로는 '열린 교육'을 표방하며 안에서는 비상식적인 입시준비 교육(예컨대, 방학중 집단합숙프로그램 강요)으로 학생과 교사를 볶아댄 한가람고...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수준의 사학분규와 비리 백태, 파행적 입시교육기관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유상(有償) 중등 교육의 팽창'이라는 어느 교육학자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중등 교육기회 확대는 '사학' 및 '학부모의 재정부담'에 크게 의존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국가가 나서서 교육기회를 확대시킨 역할은 사실상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성 확보에 급급했던 정권은 상급학교 진학의 문을 넓히기는 했으되, 학교설립 및 유지에 드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사적 영역의 부담으로 충당했다.
교육기회 확대 요구에 밀려 역대 정권은 사학설립기준을 완화하고, 학교당 수용인원을 확대함으로써 교육환경의 질을 떨어뜨렸고 일부 학부모들은 비공식적으로 재정 후원을 하며 학교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학재단은 턱없이 빈약한 전입금 비율만으로 학교를 '내 것'처럼 여기며 좌지우지했다.

물론, '사심없는 투자'보다는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다. 각종 명목으로 잡부금을 거두어들이고, 교사채용시 음성적으로 기부금을 강요했다. 거두어들인 돈의 상당액을 재단주가 착복하여 가문의 재산을 불려나갔다. 현재 역시 대부분의 사학은 납입금 수입과 국가의 재정보조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취약한 재정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평준화 정책 실시 이후는 공립과 차별성이 없었으되, 재단측은 사학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마다 '사적 소유권' 내지 '자율성'을 이유로 비난에 맞서곤 했으며, 규제를 풀라고(등록금자율책정권, 학생선발권, 기부금 허용 등 요구) 아우성이었다.

이처럼 학교를 '자기 재산', 교사를 '고용 직원' 쯤으로 여기는 사학의 비민주성은 공립보다 심각한 수준이며, 이는 경험적으로도 입증되어 왔다. 한편, 완화된 설립요건 덕에 난립하게 된 상당수의 사학은 엄청난 비리를 뒤에 감춘 채 교사와 학생들을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작전에 동원하여 '명문'(더 정확하게는 입시 명문)으로 행세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립학교에게 등록금 책정 및 교육과정 운영, 학생선발 등의 자율성을 확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게다가 정책제안자는 사학이 재정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수익사업을 하도록 할 필요성이 있다고 대책을 제시한다.
기존의 사학이 자립형 사립고로 '거듭난들', 여지껏 보여주었던 반교육적, 반민주적 행태의 혁파는 불투명하다.


<b>민주화가 관건이다</b>

현재까지 교육정책들은 간단할 수도 있는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공급자-소비자 틀은 교육주체들의 동등한 관계에 터한 민주주의를 고양시키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힘을 모아야 할 교육주체들 간(특히, 교사와 학부모,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교육의 다양화와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교육수요자'를 현혹하며 추진되는 7차 교육과정(선택형 교육과정)과 자립형 사립고는 '교육과정의 차등화'와 '학교간 서열화'를 유발하는 위험한 정책이다. 친절하게도, 사립학교 관계자 및 정책제안자들은 공공성을 저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지만, 구조 자체가 공공성을 저해할 수 밖에 없는 탓에 복잡스레 '배려'를 하더라도 출발부터 문제를 노출할 것이 뻔하다. 이런 점에서, 불평등을 완화하고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과연 있기는 한 지 의심스럽다. 비난의 화살을 비껴가려는 구색맞추기가 아닐까?

학급당 인원수의 '획기적' 감축과 교사수 증원 등을 통한 교육환경의 실질적 개선 및 힘의 관계를 변화시켜 교육민주화를 앞당기면 한국 교육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해지고 민주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경쟁력', '수월성', '선택'의 논리와 특수계층 이익 옹호 전략 때문에 교육현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불평등은 심화되고만 있다.

정책 구상, 결정, 집행에서의 기본 원칙은 아무리 그럴 듯하고 이상적으로 보여도 현실적으로 '치명적 위험'을 안고 있다면, 당연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는? 여러 가지 수사를 동원하여 정당화되고 있지만, 결국은 불평등 심화와 직결되는 정책이다. 자립형 사립고로의 전환은 지금까지의 사학이 안고 있는 병폐들을 치유하기는커녕 심화시키게 된다. 원칙은 분명하다. 전체 교육구조와 학교를 더욱 민주적인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교육이 담지해내야할 교육의 과정이자 목적이다.
주제어
교육
태그
일본 지진 원자력 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