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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6.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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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弔哭(1)-1960년대 현대미술의 실험과 좌절

구정화 | 회원
<b>연재를 시작하며 ......</b>

얼마 전 어느 아침드라마에 큐레이터라는 전문직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필자가 약간 놀랐던 건 아예 갤러리(미술현장)가 그 드라마의 배경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인데 물론 주된 이야기는 두 여성과 한 남성의 삼각관계였다.
과거 드라마에서 유행하던 전문직 여성의 직업 변천사를 보면 가장 신비화되어 있는 직업들이 망라되는데 여비서→패션디자이너→모델→큐레이터 등의 순으로 변화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중 큐레이터는 최근 가장 각광받는 전문 직종이 되었으니 미술이라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더불어 아직까지 신비화되어 있는 몇 안되는 직종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TV드라마를 통해 생산되는 미술관과 그곳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당연히 아름다운 외모의 지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실제 현실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채 많은 부분을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입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최악의 교육여건 속에서 성장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미술관에 가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실수하지 않고 밥을 먹을 때와 별반 다름없이 불편한 일임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미술관에 가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마치 커다란 문화생활을 누리고 대단한 성취를 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매스미디어의 과잉된 홍보 역시 조금은 불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황금 같은 주말에 기껏해야 몇 개 안되는 미술관을 돌다보면 노래방이나 오락실 가서 스트레스를 해소한 것보다 과연 더 훌륭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문화야말로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최종 단계가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망상을 하며 최근 붐처럼 일고 있는 미술관 관람 역시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부추키고자 부풀려지고 조작된 측면이 있다는 점도 글을 시작하기 전 밝혀두고자 한다.

이 글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대한 필자 나름의 조곡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나마 미술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전적인 반성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은 언제부터 미술관의 미술만이 예술작품으로 인식되었는지 그리고 애초에 사회적 산물인 예술작품이 왜 특정 계급의 전유물로 전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지난한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통해 권력에 아부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이 대중의 것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련의 흐름을 되짚어보고자 하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는데 어쩌다 보니 조곡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우선 미술관 안의 미술을 거부하였던 1960-70년대 실험미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1920-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 그리고 이제는 박제가 되어버린 1980년대 민중미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치장된 1990년대 이후 미술계의 동향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에 제작되었던 여성인물화의 여성이미지 분석을 통해 인텔리 여성이 어떻게 권력과 결탁해 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b>미술관 안의 미술작품을 거부한다. </b>

미술관에 가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실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한국에 미술관이 설립되고 공모전을 통해 서열을 매겨 화가들에게 상을 주고 이를 일반인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이 시작된 것은 일제시대부터였다. 이러한 방식은 미술작품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정부)관에게 맡기고 상을 주고 심사위원의 평문을 신문에 게재하여 예술의 서열을 나누고 구분 짓는 근대적 미술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 이후 각 대학에 미술대학이 세워지고 과거 공모전을 통해 이름을 날렸던 화가들이 교수가 되면서 미술은 상아탑 속에 안주하게 되었으며 일부 화가들은 자신의 화풍을 세습하여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지금이야 집회장소에서도 퍼포먼스를 하고 여름 방학을 겨냥해 열린 호암미술관의 백남준 비디오 아트전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회화나 조각이 아닌 미술작품에 대한 인식이 있지만 오직 '캔버스에 유채', 또는 '종이에 먹'만이 미술작품의 전부라고 여겨지던 시절 기성미술계에 염증을 느끼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예술정신을 표현한 이들이 있으니 바로 실험미술이라고 불려지는 일군의 작가들이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잠깐 동안 활동하다 사라졌는데 내적, 외적 역량의 부족과 사회적인 억압 속에서 금세 잊혀져 간 불운의 예술가들이기도 하다. 몇 명은 여전히 미술계에서 존경받는 선배 예술가이기는 하지만 과거 이들이 보여주었던 실험정신이 유지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b>불운의 예술가들 </b>

1960-70년대 한국사회는 엄혹한 군사독재시절로 전 국민을 기형적인 군사문화로 길들이던 시절이었으며 예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더불어 기아에 허덕이던 일반인들에게 이들의 행동은 배운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 하는 짓거리 정도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몇몇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힌 김구림, 정찬승, 이건용, 정강자 등 일련의 젊은 화가들은 미술관 안의 정제된 캔버스만이 진정한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다양한 실험을 통해 형식을 파괴하고 미술과 사회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였다. 이들은 필요한 경우 거리행진을 하거나 퍼포먼스, 해프닝, 대지미술이라는 탈장르적이고 실험적인 행위예술을 통해 기존미술계에 반발하였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68혁명과 히피, 프라하의 봄 등에서 보여준 자유에 대한 갈망과는 대조적으로 암울한 군부독재시절에 자신의 청년기를 보내야 했던 한국의 젊은 미술인들의 소극적이지만 소중한 자기 표현이었다.

장발족과 미니스커트에 대한 처벌이 구속으로까지 이어지던 시절, 김구림, 정찬승 등으로 구성된 <제 4집단>은 히피 장발족들과 함께 "머리를 깎은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머리를 기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며 <기성 문화 예술의 장례식>(1970.8.15)을 가졌다. 이 행사는 광복 25주년을 맞아 사직공원 율곡 이이 선생동상 앞에서 한국문화의 독립을 선언하고 기성문화예술과 그릇된 기존체제의 장례식을 연 것인데 여기에는 백기와 태극기가 각각 4장 생화를 얹은 관 1개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선언문 낭독 후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광화문까지 행진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경찰관에게 잡혀 즉결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이 <통행방해>와 <도로교통법 위반>이었으니 지금이나 그때나 죄목은 비슷했던 듯하다.

한편 이들은 <無體는 예술로서 가능한가>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하려 했으나 애초에 경찰이 <조각전으로 신고한 이들이 해프닝을 벌였다>며 전시를 취소하여 하루만에 전시는 철거되었다. 이들이 벌인 퍼포먼스는 전시장에서 석유난로에 물을 끓여 드라이아이스를 넣고 구름을 만들어 바닥에 깔리게 한 뒤 사이렌 소리를 크게 틀어 당황한 관객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작품으로 간주한 것이다. 드라이 아이스로 긴장상황을 만들고 사이렌소리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을 통해 당시의 전체주의적 한국상황에 대해 비판했다.
1970년대 정찬승, 방태수, 김구림 등에 의해 벌여진 <콘돔과 카바마인>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는 서울대 문리대 앞에서 이들이 만든 작은 봉투 4개와 약품, 쪽지가 든 흰 편지봉투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1. 5월 15일 오후 8시 40분에 1번 봉투를 개봉하시오 라는 메모지
2. 색종이로 싼 1번 봉투를 열면 색색의 작은 봉투들이 계속 나온다.
3. 마지막 봉투에는 가루약과 '가루를 20cc의 냉수에 타고 자기 이름을 3번 반복한 뒤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어 2번 봉투를 8시 50분에 개봉하시오'라는 메모지
4. 2번 봉투를 열면 다 뚫어진 실버텍스를 자기의 국부에 끼고 제 3번 봉투를 9시에 개봉해야 합니다. 라는 메모지가 있다.
5. 3번 봉투를 열면 '여기 첨부된 종이의 구멍을 통해 심호흡을 4번하고 4초간 남산 하늘을 중심부를 본 다음 4번 봉투를 9시 5분에 개봉하시오'라는 메모지
6. 4번 봉투를 개봉하면 '1번 김구림 작, 심주. 2번 정찬승 작 <콘돔>, 3번 방거지 연출작 <0+1+1-1-1×>이라는 결론이 쓰여있다.


이들은 201개를 만들어 2개는 국내의 평론가들에게 81개는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찌보면 마피아 조직의 택(비밀전술)이나 보물찾기의 암호같은 문구는 일반 학생들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는데 혹자는 '이 가루약은 쥐잡는 날이라서 나누어 준 것이 아닌가' 하였으며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너희는 이런 장난을 하느냐'는 현실적인 반응까지 나왔다고 한다. 당시의 사회분위기 상 이들의 행동은 미친 짓이거나 또는 할 일 없는 철부지들의 행위로만 보여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독재정권 시절 금기시되었던 마약과 성을 연상시키는 상징물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문리대 생들에게 나누어줌으로 해서 일상과 편견에 갇힌 젊은 지식인들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이 벌인 퍼포먼스나 해프닝은 종종 경찰의 제재를 받는 정도를 넘어 안기부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는데 지금 보면 정말 유치한 수준의 해석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을 북에서 남파된 정찰기를 위한 암호라는 해석으로 작가를 구속하기도 하였으며 간혹 작가들의 부모님까지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에 예술이 정권의 하수인이길 포기하는 것도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테니 이후 실험미술가들이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일세대 실험미술가들이었던 이들이 벌였던 다양한 행위들은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하나의 오브제를 남겨 상품적 가치를 매기는 주류시스템에 대한 반대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이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다시 이루어진다 하더라고 남겨진 작품이 없는 상황에서 회고전조차 열릴 수 없는 상황이다. 어찌보면 젊은 지식인들의 치기어린 반항으로 볼 수도 있는 이들의 행적은 19800년대 민중미술이 동시대에 평가를 받았지만 빠른 시일 안에 정권의 품에 안긴 것과는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기도 한데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고자 한다.

척박한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우환에게서 배운 후 전향한 김구림, 미국으로 건너가 행방불명이 된 후 사망했다고 전해지는 정찬승, 그 외 이건용, 김차섭, 등등의 많은 실험미술가들은 최초로 미술이 부루조아지들의 실내장식으로 전락한 것에 반대하였으며 재산가치로 거래되는 캔버스가 아닌 다른 형식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들의 작업이 미국을 비롯한 당시 선진국의 미술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이들이 벌인 실험미술은 그것 자체로 독자적인 해석을 유보시킨 채 후손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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