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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4.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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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노동자의 파업, 그 경이로운 투쟁의 현장에서

송유나 | 사무처장
1. 들어가며

2월 25일 새벽4시, 3사 파업이 비로소 선언되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3사 파업의 가능성, 현실성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파업선언 소식을 전해듣던 조합원들조차도 믿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 파업투쟁이 이미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있다. 이조차 믿기 어려운 일이다.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은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최초의 파업이라는 점에서, 산개투쟁을 너무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사업장이라는 점에서, 파업조합원들보다 더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가족대책위의 전례 없는 투쟁으로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열고 있다. 물론 수백 일이 넘게 파업을 지속하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무수하며, 지금도 비정규직·영세사업장 동지들의 눈물겨운 파업은 계속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원 없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전국의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총동원하여 지원하고 있는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은 어쩌면 행복한 파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개 단위 사업장임에도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은 국가와 자본의 사유화정책(구조조정)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향후 노동자·민중 투쟁의 목표와 기조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서서히 성장해온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운동의 주체로 등극하는 장이었다는 점에서 향후 투쟁의 판도에 미칠 영향 역시 지대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파업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글이 읽혀지는 순간, 지금의 파업대오가 어디에 어떻게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김대중정권은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전력대란이라도 일어나면 군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싹쓸이하겠다는 무모한 발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복귀율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지금, 발전노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복귀율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도 미미한 수준이라 놀랄 뿐이다. 그러나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의 투쟁이 결론과 상관없이 너무나도 의미 있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투쟁의 경과와 과정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이 투쟁의 의미-3사 공동파업과 발전노동자들의 파업-를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산개투쟁의 구체적 양상, 파업 투쟁의 과정 속에서 단위 사업장을 넘어서는 연대의 확장, 조합원들이 새롭게 단련·훈련되어 가는 모습, 가족대책위 활동과 지역적 연대의 구축, 범대위의 역할과 과제 등 금번 투쟁에서 남겨야 할 과제는 무수하지만 다음 기회로 넘기도록 한다. 지금 이 모든 것을 정리하는 일은 이르기도 하지만, 아직 외람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 투쟁의 조건과 전선의 특질

1) 구조조정 저지·생존권 쟁취 투쟁의 결합과 발전

외환위기 이후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모범적 사례이길 강요받아왔으며,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라는 시장화·개방화 정책의 핵심이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역사는 다소 길지만, 97년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공기업 사유화, 노동현장에 대한 각종 탄압, 공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세는 공기업 노동자들이 정권과 자본에 대한 즉자적 분노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급속히 공기업 노동자로서 강박의식, 소위 공복의식에서 탈피하여 노동자 계급의식의 저변을 형성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나아가 국가기간산업의 존폐와 공공성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모색까지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발전노동자들의 경이로운 투쟁의 신기록은 '느릿'하였으나 정도를 걸어왔던 투쟁 역사가 분출한 힘이다.

이 과정에서 사유화 저지 투쟁과 생존권 쟁취 투쟁의 접합고리가 강화되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이 관리한 의식적·조직적 환경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권리에 무감했으며, 자신의 특권화 된 허구적 지위에 만족해왔다. 그러나 자본의 재편, 구조조정의 전 과정에서 공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끊임없이 위협받아 왔고, 급속히 자신의 위상 하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공기업 사유화 정책은 이 모든 조건의 결절점이 된다. 사유화와 매각이 가져오는 전 사회적 폐해, 그리고 인원감축을 비롯한 각종 노동조건의 악화는 해당 노동자들과 전국민의 생존권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사유화 저지, 해외매각 저지 투쟁의 '과정'에서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99년과 2000년을 경유한 투쟁을 돌아보면, 공기업 사유화·해외매각 저지라는 슬로건은 다소 추상적이었고, 다분히 구호적이었다. 사유화의 문제점을 대중적으로 선전하는 투쟁을 전개해왔으나, 사유화 정책의 구체적 함의, 이것이 야기하는 노동조건 악화·생존권의 문제는 오히려 공공부문이라는 이유로 억압당해왔다. 이것은 '공기업의 관료성,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에 공기업 노동자들이 스스로수세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과 노동자 의식의 현실적 발전의 정도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광풍, 사유화 정책의 강행은 노동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증폭하였다. 이것은 매각 저지·사유화 저지 투쟁이 생존권 쟁취 투쟁과 실질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하였다. 열악한 노동환경, 죽음의 현장에 대한 분노가 철도의 사유화와 매각정책 저지 투쟁과 결합하였으며, 발전소 매각이 필연적으로 노동조건의 악화, 생존권의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인식이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능하게 하였다. 바로 지금 철도 현장에 가해지고 있는 탄압이 오히려 철도 노동자들의 2차 파업, '현장탄압 분쇄와 철도 사유화 완전철회 투쟁'의 토대를 만들어주고 있다. 또한 발전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와 징계, 파업 이후 닥쳐올 상상을 불허할 현장탄압이 발전노동자들을 더욱 단련시키고, 동지적 연대를 굳힐 것이며, 이를 통해 현장을 사수하는 전사로 거듭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실질적 내용은 이 투쟁의 연속적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만큼 체현되고 있다.

2) 구조조정·사유화 저지 투쟁 전선, 팽팽한 대립의 실체

자본과 정권은 발전파업에 무척이나 강경하다. 개혁으로 포장했던 수많은 정책들이 용두사미인 양 꼬리를 내리는 상황을 전혀 수습하지 못하던 정권이, 대처능력 없는 집권 말기 정권으로서의 허수를 숨김없이 드러내던 정권이, 오로지 구조조정 정책의 강행 문제에서만은 철통같은 의지와 힘을 과시하고 있다. 투쟁의 과정에서 발전소 매각과 사유화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국민여론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매각 정책을 강행하고자 하는 모습은 국가기간산업 구조조정 정책이 국내외 자본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사안임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작은 단서일 뿐이다. 투쟁 초기부터 정권은 탄압일변도를 달렸고, 무능력한 사측의 태도는 오만과 방자함을 넘어섰다.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측의 교섭태도는 발전노동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여관방을 뒤지고, PC방을 검문하며, 가택침해에 이어 불법 검문과 체포 등 상상을 불허하는 인권유린의 작태가 거듭되었다. 이러한 정권의 강경 대응은 오히려 발전노동자들이 중간타협과 협상의 여지를 전면 거부하고 오로지 매각 철회 투쟁으로 매진하도록 이끌었다.

사실 정권과 자본의 협상불가, 강경 진압식 대응은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의 의미와 그 힘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현재 노-자, 노-정간 형성된 팽팽한 대립전선이 이후 어떠한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 일보 후퇴한 자에게 어떠한 대가가 주어질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투쟁의 결과에 따라 향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정책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정책, 구조조정 정책의 추진 속도와 방향, 완급이 결정될 것이다. 즉, 정권과 자본에게 발전소 매각의 강행 여부는 구조조정 정책을 일정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냐 혹은 구조조정 정책의 중단과 파탄을 대중적으로 선언'당'하게 될 것인가의 기로이다. 특히 민영화 정책이 사회적 의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정책 강행을 위한 정권의 무리수는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발전소 매각 저지 투쟁은 해당 노동자의 생존권의 문제이지만, '전력의 공공성'이라는 국가의 공적 역할에 대한 공세적 요구를 담고 있다. 전선의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연대의 확장, 사회적 연대의 구축이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사실 3사 공동파업을 시작하면서 공히 주장했던 노-정 직접 교섭의 문제는 단지 교섭에 정부가 나설 것이냐, 교섭 테이블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현재의 사유화 저지 투쟁은 자본의 구조조정 정책 저지를 둘러싼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대정부·총자본과의 직접적 투쟁전선의 양상으로 확장·발전하고 있다 할 수 있다.

3) 구조조정 저지 투쟁 전선의 강화·확장의 가능성 여부

사실 지난 3-4년간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항해 이토록 강고한 '기조'로 맞선 투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미 시작단계에서부터 발전 노-자간의 대립을 넘어서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사유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을 강행하고자 하는 자본과 정권의 강고한 연합질서에 맞서기 위해 공투본 6사, 혹은 철도·가스·발전 3사의 연대투쟁의 필연성이 도출되었다. 이것은 그 동안 각개 분산되었던 투쟁의 패배가 가져온 뼈아픈 기억에서 비롯한다. 그 만큼 6사 투쟁, 혹은 3사 투쟁을 조직하는 일, 주체들이 실질적으로 연대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지난했다. 결국 3사 파업이 발전만의 파업으로, 전선의 분산과 고립이라는 일상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순간도 존재했다. 그러나 2월 28일 금속연맹을 중심으로 한 10만 대오의 부분파업은 비록 발전파업에 대한 지지와 엄호의 이름이었으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항하는 전선이 확장되는 시금석이 되었다. 더욱이 전국적 차원에서 사회운동이 전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동원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지역적 연대의 틀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주목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노동조합 운동간 연대조차 어려웠던 상황에서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운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현재의 경험을 향후 운동의 발전으로 반드시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성과에 감동하기에는 이를 정도로 여전히 노동조합 운동의 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외환위기 이후, 어쩌면 그 이전부터 노동조합 운동은 자신의 전투적·계급적 운동의 전통을 이어나가기 힘겨워 했다. 이것은 총파업 전선의 무력화, 연대투쟁·연대파업 조직화의 실패, 고립·분산되어 흩어지고 말았던 투쟁의 반복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일국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 운동의 정치적·조직적 후퇴를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전세계적 재편에 대한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대응부재와 무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실질적인 연대 총파업이 조직될 수 있을 것이냐는 끊임없는 논란거리이다. 그러나 사실 아무 조건 없이 타 사업장에 대한 지원의 의미로 연대 파업을 전개한 경험은 매우 희박하다. 단위사업장에서 수백 억의 손배, 해고와 수배 등 현장 탄압을 감내해야 하는 파업을 조직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총파업이 동지적 애정에서, 연대의 필요성에서 조직되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그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의 전선은 구조조정 정책의 완결일 것이냐 아니냐, 노동자계급이 대정부 직접 투쟁 전선을 확장시켜낼 수 있을 것이냐 아니냐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이제 투쟁의 몫은 발전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며, 투쟁의 공과 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진영은 이미 이 투쟁의 시작했고, 그 자체로 커다란 성과를 안고 있다. 비록 지금 전선에서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투쟁으로 획득한 자신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4)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의제의 형성

금번 투쟁을 통해 비로소 국가기간산업 사유화의 문제는 사회적 의제로 형성되었다. '민영화'는 노사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정부의 억지 주장은 사유화 정책이 국가정책의 주요한 영역이라는 점을 오히려 반증해주는 것이다. 3월 24일 결렬된 노사간 마지막 협상에서 정부 쪽은 사유화 관련 언급 불가를 주장하면서 거의 노예서약에 가까운 조항에 합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영화 정책이 노사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정부 주장이 강한 만큼, 민영화 정책이 국민적·사회적 의제라는 사실은 분명해지고 있다. 사실 발전소 매각 문제에 대한 공론화의 과정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과정에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정책이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장되고 있다. 이것은 부문적이건 전면적이건 이미 사유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타 산업에 대한 새로운 공론화의 가능성까지 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분명히 지적해야 할 쟁점이 존재한다. 이미 투쟁 초기 산자부 장관의 발언을 통해 발전소 매각을 통해 국민기업화의 가능성이 흘러나왔으며, 사유화 정책 반대의 주장 중에도 국민기업화나 주식분산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입장은 공기업의 관료성, 국가소유 구조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 주장이다. 공기업 운영구조의 문제점, 시장기능 활성화에 복무하는 공기업의 고착된 역할 등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기업·국가기간산업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소유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아님은 명확하다. 소유구조에 대한 불신에 근거해 주식분산 등을 합리적 민영화 방안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 동안 투쟁을 통해 쌓아온 성과는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국민기업화의 논리는 결국 사적독점으로 귀결되는 우회로일 뿐이며, 주식분산 정책 역시 매각을 합법화·합리화시키는 길 일 뿐이다. 물론 정권과 자본의 매각 강행의 철통같은 의지와 힘에 비해 저항의 주체들의 힘은 미력하다. 이로 인해 금번의 투쟁이 어떠한 결론을 낼 수 있을지 지금 당장은 미지수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냐의 여부는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일이다.


3. 2001년 10월에서 2002년 4월까지 : 투쟁의 경과와 과정

1) 공투본 건설과 3사 공동투쟁의 시작

철도·가스·발전·지역난방·고속철도·전력기술 6사와 공공연맹은 2001년 10월 31일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저지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를 건설하였다. 사실 공투본이 건설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철도와 가스, 그리고 발전노조가 상급단체를 달리하고 있는 조건에서 양노총 간 연대의 문제는 그 외연을 갖추는 일에서부터 예상했던(?)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2001년 김대중정권 퇴진투쟁과 그를 둘러싼 논쟁 이후 단병호 위원장이 구속되기까지도 별다른 정세적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있었던 운동 진영에 있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사유화 저지투쟁은 투쟁의 돌파구를 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확장되었다. 특히 50년 어용의 역사를 깨고 비로소 민주노조를 건설한 철도노동자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무척 컸다. 발전노조의 경우, 민주노조 건설, 민주노총 가입으로 이어지는 숨가뿐시간 속에서 발전 파업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철도·가스·발전 노조를 중심으로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이어졌다. 물론 많은 문제점들이 속출했다. 민주노조 건설 이후에도 상급단체 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등은 여전히 철도 노조 내·외부의 불씨로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각기 다른 조건에 있는 노조들이 실질적으로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더욱이 발전·철도·가스 3사는 취약한 조직력, 신생노조가 가지는 미숙함이라는 상황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가져오는 한계와 불확실성은 크다 아니할 수 없었다.

공투본은 결성되었다. 그러나 2001년 12월까지는 지난 수년간의 투쟁 속에서 극복하지 못했던 오류를 반복해야 했다. 사실 투쟁이 전개되는 양상, 투쟁의 쟁점, 연대의 수위 등을 고려할 때 '공동'투쟁본부라는 이름은 별반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투쟁일정의 분산에 따라 연대투쟁을 조직하기 어려운 고질적인 병폐는 고스란히 이어졌다. 각사의 투쟁계획은 법안상정 여부와 상정시기에 끌려 다녔다. 철도와 가스를 분리·타격 하고자 하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끌려 다니면서, 일정에 따른 수동적인 대처방안을 둘러싼 논의가 주축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2001년 공동투쟁은 철도와 가스산업 사유화 법안처리의 일자, 그것의 가능성 여부에 의해 투쟁의 시점과 투쟁의 수위가 조절(?)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철도노조의 규모와 파업의 검증(?)되었던 파괴력이 이후 투쟁의 판, 대응양상과 수위를 좌지우지해나가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철도냐 가스냐, 분리냐 아니냐를 점치는 과정에서 결국 법안 처리는 2002년으로 유보되었다. 이로써 공투본 소속 사업장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각 사가 자신의 조직력을 정비하고, 투쟁의 쟁점을 예각화 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철도·발전 나아가 가스 노조 공히 노조 민주화를 위한 투쟁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운영의 측면에서 그야말로 신생노동조합이었다. 대중장악력의 면에서 본다면, 지역적·직종별 불균등성 내지는 취약함을 여전히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사유화 저지라는 거대 쟁점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조합원 개개인은 사유화 저지 투쟁의 실질적 내용으로서의 생존권 쟁취·노동환경 보장 문제를 투쟁의 구체적 과제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해당 주체들이 실질적 투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물적 근거가 여전히 취약한 상태임을 말해주며, 결국 투쟁력 상승의 한계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12월을 넘기면서 각 사업장은 조직력 정비와 투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 질주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산개되어 있는 사업장이 가지는 특성은 집회 한번 성사시키기에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짧은 시간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기 위한 시간이 이어졌다. 1월 27일, 발전노조 대의원대회에서 2말 3초 투쟁이 결정되었다.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집중적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발전노동자들을 투쟁의 전선에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사실 발전노조가 투쟁 일정을 앞당기는 것은 조건상·시간상 매우 무리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철도와 가스노조의 결단 또한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철도노조가 예정했던 2월 25일 파업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냐, 가스노조 역시 동조파업을 할 수 있을 것이냐, 이미 결의한 발전노조가 실질적인 파업 대오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2) 철도·가스·발전노조의 조건

사실 여기까지 이어져온 과정에서 각 사의 고민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철도의 경우, 다른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사유화라는 사안의 중차대성, 철도산업의 공공성 사수라는 거대담론이 부각되었다. 이 상황에서 주체들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겨웠다. 노동환경 보장, 노동시간 단축, 인원충원, 해고자 복직 등의 사안은 부차화되거나 종속적 사안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럴 수록 사유화 관련 법안 저지 투쟁에서 국회일정 따라가기 식 투쟁 양상을 극복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지난 몇 년여의 투쟁은 국회일정에 종속된 투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확인시켜주었고, 투쟁일정의 분산으로 각개 투쟁을 고립시켜왔던 패배의 경험 역시 반복되었다. 더욱이 발전의 경우, 2000년 전력산업 구조개편 관련 법 상정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5개 자회사로 분사 당해야만 했던 패배의 경험이 현장에 짙게 깔려 있는 사업장이다. 투쟁의 울분과 그 울분을 풀고자 했던 '한풀이'가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고, 지금 투쟁의 생생한 힘으로 표출되고 있다. 발전 산별 노동조합은 조합의 건설 초기부터 5개 자회사의 투쟁이 분산·난립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산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의 중심축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각 자회사의 매각의 시기와 조건에 따라 투쟁의 전술·투쟁의 시점이 분산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5개회사 매각 시기가 분산되고, 매각의 조건이 달라진다면 이미 5사의 공동투쟁은 불가능하다. 매각 자체를 막거나, 매각 정책을 철회시키기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발전산별 노조가 투쟁의 시기를 2말 3초로 어렵게, 아니 무리하게 당겼던 것이다. 나아가 사유화 저지 전선의 집중·확산을 위한 계획이 요구되면서 발전노조의 결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발전산별노조의 공동투쟁을 위한 결단은 단위 사업장이 고민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결단이었다. 공투본의 '공동' 투쟁의 정신을 살려, 제대로 된 공동투쟁의 조직으로 불투명한 투쟁전선의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특단의 결단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가스 노조를 살펴보면, 99년부터 시작된 사유화 저지 투쟁전선에 지속적으로 결합해온 사업장이다. 그러나 가스산업 매각이라는 사안에 비해 노동조합의 덩치(?), 노동조합이 처한 조직적·정치적 환경은 가스공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별다른 쟁점을 형성하는 것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민주노조 운동의 기치를 세우며 출발한 노동조합은 3년 연속 투쟁을 결의하고도 투쟁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운이 좋았건 혹은 나빴건 사유화 저지 전선 속에서 묻히거나 밀려왔던 사업장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스 노동자들에게도 설욕의 계기는 절실했다. 결국 발전과 철도, 가스노동조합은 교차되고 어울어지는 상황에서 공투본의 이름으로 서로의 투쟁을 강제 받게 되는 조건에 처한 것이다.

발전노조의 투쟁 결의로 각 사의 긴장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국회 일정이 여전히 유동적이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투쟁의 시기 자체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걱정은 짙어졌다. 이에 따라 가스·발전·철도 3사, 나아가 사회보험을 포함한 7사에서는 투쟁의 적기를 놓칠 수 없다는 결의가 생겨났다. 더구나 사유화 저지라는 거대 담론이 이제는 노동조건 개선, 임단협 쟁취라는 현장의 구체적 생존권 요구와 서서히 결합되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넓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든 이 물음을 비껴갈 수 없었다. 철도가 파업을 할 것인가, 발전이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스는 어떠할 것인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고,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더 이상 발뺌하거나 딴 쪽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었다. 단사 중심의 사고를 몰아내고 '생즉필사 사즉필생'한다는 정신만이 자본과 정권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이다. 구정을 넘기고서야 3사 공동투쟁, 공동파업이 결정되었다. 어렵게, 힘겹게 시작한 공투본은 결국 공동요구안을 내걸고, 3사의 요구안이 공히 관철될 수 있도록 투쟁할 것이며, 3사의 요구안 중 어느 하나라도 관철되지 않을 시, 그리고 공권력의 투입이라는 자본과 정권의 물리적 탄압이 돌발했을 시, 즉각적인 연대파업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를 만들어나갔다.

3) 공동파업의 돌입, 그리고 가스와 철도의 타결

24일 전국노동자대회가 끝나고서 서울대와 건국대를 비롯해 전국 7개 거점에 가스·발전·철도 노동자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가스와 발전 조합원 5000여명이 운집하고도 여전히 상경하는 대오를 가슴벅차게 기다렸던 서울대, 철도노동자들이 운집해 나갔던 건국대·부산대·충남대·영주철도운동장. 명동성당에는 3사 지도부가 공동 투쟁의 거점, 상징적 거점을 둥우리쳤다. 24일 오후 개별 사업장 단위로 교섭이 진행되었다. 처음 결의한 바대로 개별교섭을 불가하고 공동교섭·노정교섭을 진행해야 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어느 사이 시간은 25일을 넘어섰고, 정부와 사측의 교란 작전 역시 거세어졌다. 그러나 파업 대오가 모여있는 현장에서 분출하는 투쟁의 열기는 그 어떤 교란작전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 곳에 비록 모여있지 않아도 분출하는 3사 조합원들의 어울어짐은 교섭당사자와 지도부들을 투쟁으로 이끌어내었다. 수많은 예측과 예단이 난무하면서 시간은 03시를 넘어섰고, 철도와 발전의 교섭이 중단되었다. 04시를 조금 지나, 3사 위원장들의 공동파업이 선언되었다. 공동파업, 동맹파업! 전국 곳곳의 파업 현장에서는 억눌린 한과 설움을 털어 내는 총파업 함성이 솟구쳤다.

날이 밝고, 25일이 시작되면서 가스노조의 협상타결 소식은 흘러나왔다. 언론은 파업 시작 이전부터 가스노조 타결 가능성을 흘려왔다. 전선을 분열시키기 위해 소위 약한고리부터 쳐내는 고전적인 공략 전술을 택했던 것이다. 명동성당을 나가 협상을 시작했던 가스노조 위원장은 26일 새벽, 합의안에 서명했다. 발전과의 공동투쟁, 공동투쟁의 교감이 가져오는 감동을 하루도 채우지 못한 채 가스노동자들은 서울대를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남겨진 발전노동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발전노동자들은 낮부터 파업전술에 대한 분임토론에 들어갔다. 옥쇄냐 산개냐. 공권력의 침탈에 따라 파업대오가 조기에 해산 당할 수 있는 위협, 단독 파업이 가져오는 장기투쟁의 가능성들이 산개투쟁의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철저히 아래로부터 자발적 투쟁 결의였다. 산개를 결정한 발전노동자들은 26일 20시를 기해 조용히 서울대를 빠져나갔다. 파업을 준비하면서 챙겨온 배낭과 침낭만이 조합원들이 빠져나간 서울대 노천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27일 07시 철도 역시 협상을 타결했다.

가스와 철도노조의 파업철회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며칠만 더, 아니 하루라도 더 버티어나갔더라면 발전노동자들은 아직까지 파업을 하고 있지 않아도 되었을 지 모른다. 사실 3사 공동파업이 어려운 일인만큼 사유화 철회라는 공동의 요구안 이외의 단체협상의 구체적인 내용과 목표를 설정하는 일 역시 어려웠다. 매각정책 철회, 사유화 저지라는 과제가 나머지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공동파업 이후 협상의 진행과 타결의 수위·시기 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그리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3사 공동파업이 선언되기 이전부터 가스산업 매각 정책은 실질적으로 유보된 상황이었으며, 철도 역시 3조 2교대와 인원충원 등이 가능하리라는 예측이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하루를 넘기지 못했을지라도 가스노조가 공동파업의 정신을 살려 파업에 동참했던 일은 일견 의미 있는 대목이다. 26일 서울대에서 지도부의 파업철회 결정에 반발하던 가스 조합원들은 3월 4일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 합의안 가결, 한국노총 탈퇴·민주노총 가입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3월 25일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하였다. 가스노조의 민주노총 가입은 '가입이라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2000년 12월 3일의 경험이 지금의 발전노동자들을 만들어왔듯이 가스노조는 민주노조 운동의 반열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철도의 경우,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합의안 인준투표'를 진행하여 70.83%의 찬성으로 합의안을 인준했다. 사실 파업철회의 시기와 합의안 내용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민영화 철회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고, 노동조건 개선의 구체적 내용도 빠져 있으며, 해고자 복직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는 불만과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를 소중히 지키고, 2차 파업·제 2의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합의안을 가결시켜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사실 철도의 파업 대오를 보면 당초 예상과 달리 승무지부의 파업참가율이 높은 상황에서 파업의 대오가 계속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이었다. 파업 참가 인원이 늘어나면서, 파업이라는 조건은 그 동안 고질적으로 누적되었던 직종간·지역적·조직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공간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철도의 협상 타결은 너무 빨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며, 조합원들의 민주적·대중적 참여 속에 투쟁의 힘을 더 조직했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앞서고 있다. 어쩌면 합의안의 가결은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의 일정한 불만과 파업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던 조합원들의 일종의 무관심의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50년 역사를 깨고 민주노조를 건설해냈다는 사실에 대한 조합원들의 믿음과 신뢰가 합의안을 가결로 이끌었다는 점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지금 철도 현장에 대한 탄압은 강화되고 있다. 합의안의 약속과는 정반대로 고소고발, 중징계, 직위해제 등이 이어지고 있으며, 조합비 가압류에 이어 현장탄압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에게 백주 대낮에 가스총까지 난사하기에 이르렀다. 철도노조는 철도산업 사유화 완전 철회와 현장탄압 분쇄를 위한 투쟁을 새롭게, 더 힘차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4. 투쟁의 의미와 성과

1) 3사 공동파업의 의미

총파업 투쟁이 어느 사이 선언식 공문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총파업이 계속 무력화되면서 자신감을 잃은 주체들은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이라는 신(?)문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총력투쟁 하는데 운이 좋으면 총파업도 할 수 있다, 혹은 총파업을 계획했다가 총력을 다해 투쟁을 하면 된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누군가를 지목해 평가를 하기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총파업, 아니 총력투쟁 자체도 힘겨워진 노동운동의 조건과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부문만을 살펴보자면, 공공부문 노조 운동의 발전 정도, 양노총으로 분할되어 있는 조직적 여건이 연대투쟁의 힘겨움으로 작동한다. 99년, 2000년으로 이어진 연대투쟁의 경험은 오히려 연대투쟁에 존재하는 '위험한 관계'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말았다. 연대의 필연성이 연대투쟁의 전선을 확장시켜 왔으나, 결국 '커버린' 전선에서 이탈한 사업장에 의해 전체 전선이 한순간에 얼어붙게 된다. 어느 순간 '발목을 잡힐 것인가, 잡을 것인가'라는 '산수'가 노동자들의 계급적 판단을 흐리게 했으며, 투쟁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단사 이기주의에서 비롯해 단사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경향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공공부문처럼 대규모·전국단위, 혹은 파업의 파괴력을 자신하는 사업장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연대의 두려움, 단사 이기주의가 발동하는 순간,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상급단체는 서서히 자신의 지도력을 관철하는 수단과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급기야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위로부터의 지도력과 아래로부터의 투쟁력이 결합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동요구안을 내걸고, 생사고락을 결의한 3사의 결단은 그 자체만으로 투쟁의 성사여부를 떠나 주목할만하며,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3사 공동동맹파업은 허덕이던 노동자 '연대'투쟁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연대투쟁을 위한 노력과 계획이 얼마나 중요하며, 실행과 집행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투쟁의 마무리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2002년의 투쟁은 94년 전지협 투쟁, 96년 공공 5사 투쟁, 그리고 99년 이후부터 불거진 사유화·해외매각 투쟁의 정치적·조직적 맥을 잇는 투쟁이다. 94년 투쟁이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정치적 파급력과 힘에 있어, 노동자 투쟁의 주체로 등단했음을 보여준 투쟁이었다면, 공동 요구와 시기, 전술을 내걸고 시작했던 96년의 투쟁은 공공부문 노동자 투쟁의 발전의 계기였다. 99년 이후의 투쟁은 사유화의 문제점, 공공성 쟁취라는 사회적·정치적 사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는 투쟁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 투쟁의 연대 양상을 살펴보면, 해당 사업장간의 자발적 연대로 시작해, 공공부문의 객관적 조건 상 양노총의 연대로 이어졌고, 범대위라는 사회적 연대의 틀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전선 자체의 '외형적' 확장을 이루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유화 저지, 신자유주의 반대의 실내용은 매우 취약했으며, 주체의 계급적 인식이 편차를 그리고 있는 상황에서 질적 확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투쟁은 정치적 일정에 의해 좌우되어 파탄나거나, 성과물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적 타협만으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나아가 정부와 자본의 무차별적·공세적 탄압에 노출되어 각개격파 당하는 양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속에서 자생적·필연적으로 생존권 쟁취 투쟁의 요구가 발전되어 나갔고, 공공부문 노동자 투쟁의 성장해 왔다. 금번 투쟁에서 철도·발전·가스노조 공히 사유화 법안 저지, 사유화 정책 철회의 실내용을 노동조건 개선, 생존권 쟁취 투쟁으로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2002년 투쟁, 3사 공동파업은 과거의 오류와 절연하고 새로운 투쟁의 맥을 시작한 것이다.

2) 발전노조의 강고한 투쟁, 산개투쟁과 가족대책위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은 매순간 새로운 역사를 그렸다. 5600명 조합원 중 5270명의 참가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시작한 파업대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한 달 넘게 지탱했다. 파업 일주일이 되도록 파업대오 이탈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 참가 인원은 늘어갔다. 조합원들이 능동적 주체가 되어 박차고 나간 작업현장에는 비주체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 발전기를 돌리며, 자책감과 부끄러움에 시달리는 4직급 직원들만이 남아 있다. 발전노동자들의 산개투쟁은 사회 전체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선정성을 추구하는 언론에서는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의 이유와 의미보다 산개한 조합원들의 동태에 더 관심 있어 했다. 사실 산개파업은 조합원 동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위험부담이 많은 전술이다. 파업은 파업거점을 중심으로 동지들간의 믿음을 높이고, 연대를 확장시키는 중심을 형성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고하던 파업의 양태이자 모습이다. 그러기에 산개투쟁이 시작된 순간 많은 걱정이 있었다. 산개한 대오가 얼마나 조직적인 결정에 따를 수 있을 것이며, 그 조직적인 결정조차도 일사분란하게 전달될 수나 있을 것인가. 그야말로 투쟁이 분산되는 일이 발생하지나 않을 것인가. 그러나 발전노동자들의 산개투쟁은 너무나도 굳건했다. 정권과 자본의 허를 찌르고 세상의 걱정을 일소시키면서 파업은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있는 것이다.

산개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조합원들과 지도부의 상호신뢰 때문이다. 발전조합원들은 가스가 떠나고, 철도의 타결이 임박한 조건에서 홀로 남아 싸워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공권력의 침탈 가능성, 공권력 침탈 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판단, 더욱이 3사 공동파업이 무너진 조건에서 단독파업을 '장기간' 지속해야 한다는 판단이 산개라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아래로부터 결의된 투쟁은 지도부의 결정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과감히 실행되었다. "나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러분도 배신하지 말아달라"는 위원장과 지도부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조합원들은 투쟁을 시작했다. 조장, 지대장, 지부장으로 이어지는 명령과 보고 체계는 투쟁 과정에서 더 확고해졌으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간의 신뢰 역시 강해졌다. 그러나 투쟁의 초기 조합원들은 그야말로 꼭꼭 숨어 지냈다. PC방이나 여관을 전전하면서 무차별 연행을 일삼는 공권력을 피해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조합원들은 대담해졌다. 자체적으로 선전전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연행된 조합원들은 몇 끼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으로 '연행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해내기에 이르렀다. 전국 5개 곳에서 번개 집회를 성사시키고, 연세대에 집결해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역사를 새로 쓰는 산개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발전노조에서 산개투쟁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택으로 밀집된 주거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산개한 조합원들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사업장 근처를 배회하거나 집으로 돌아가 숨게 된다. 그리고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개별화된 노동자들은 투쟁의 의지를 잃고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택에 거주하는 발전조합원들은 이미 투쟁 시작단계에서부터 가족대책위의 왕성한 활동과 접하게 되었다. 파업이 시작되는 순간, 그 파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가족들이 조합원들보다 더 강고한 결합력으로 투쟁해나갔다. 선전전, 항의방문, 집회 등 발전조합원들이 파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활동보다 더 많은 투쟁의 경험을 쌓아나갔다. 가족들은 가장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넘어 투쟁의 새로운 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발전조합원들은 5600이 아니라 그 3배-4배가 넘게 된 것이다. 이미 조합원들은 이 싸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집으로조차 돌아갈 수 없으며, 설령 돌아간다 한들 반겨줄 가족조차 없었다. 지금 현재도 복귀자를 막기 위한 가족대책위의 선전전과 감시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가족대책위의 활동은 아마도 파업 이후의 국면에서 더욱 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된다. 대부분 파업이 끝나고 현장에 돌아가게 되면 엄청난 현장탄압 속에 노동자들은 개별화되기 쉽다. 그러나 집단거주지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단결하게 될 발전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파업을 풀고 돌아올 조합원들을 두려워하는 비조합원(?)들의 가슴조림과 힘겨운 생활이 선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파업투쟁의 의미, 구체적인 전술적 문제 등에서 몇 가지 고민거리, 시사점을 뽑아 볼 수 있다. 사실 파업이 단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퇴각하는 것, 생산에서 손을 떼는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파업은 생산을 멈추게 하는 적극적 행위이자, 자본에 타격을 줌으로써 노동자들이 생산과 노동의 힘을 깨닫게 되는 장이다. 물론 발전소만 보더라도 생산을 멈춘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을 항상 힘겹게 하고 어렵게 했던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자본주의의 기술적 발전과 자동화는 파업의 수동적 효과마저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산개투쟁이 공간적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간'을 통한 파업대오의 단련, 연대의 확장이 불가능하리라는 걱정이 일소되었다는 점이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단체들은 숙식제공 등을 통해 발전조합원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로에게 있어 무척 큰 의미를 주고 있다. 그 동안 투쟁의 '공간'은 지도부들간의 상층 교감 이상이 형성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가스와 발전 노동자들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투쟁의 현장에서 서로를 느꼈으며, 비록 다른 공간으로 나뉘어 있던 철도 노동자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산개투쟁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많은 노동자들, 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고, 다른 조합원들이나 활동가들도 산개한 5000명의 조합원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양상이 이후 어떠한 모습을 나타낼 지, 이번의 경험이 발전조합원들과 연대한 주체들에게 어떠한 경험으로 남게 될 지 지금 당장 예측하기에는 무리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는 너무나 큰 성과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5. 글을 마치며

3월 30일 21시를 치닫는 시각, 글을 마치면서도 앞날을 예측하기는 힘들다. 아직도 투쟁은 진행중이고 토론도 부족했기에 다소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평가가 지배적일 듯하다. 이후 남겨야 할 많은 과제를 이 글에서는 다 담고 있지 못하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과제들은 필히 다음 기회에 정리하는 것으로 하면서 글을 마치도록 한다. 다만 발전조합원들의 경이로운 모습이, 그리고 연대하고 있는 모든 주체들의 힘찬 활동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사실만은 거듭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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