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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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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종식'의 목표는?

임필수 | 한반도팀
-페리보고서와 북미협상, 의미와 전망-

지난해 9월, 북한과 미국은 베를린에서의 고위급회담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조치를 합의하였다. 또한 그 며칠 후, 이에 조응하여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작성한 대북정책검토문서의 의회 청취가 이루어졌다. 페리의 의회보고는 몇 달 전부터 미루어져왔던 것이기 때문에, 보고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는 것은 곧 미국이 앞으로 본격적인 북미협상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로써 98년 8월 북한의 다단계발사체실험 ― 처음에는 대포동1호 미사일로 추정되었으나, 이후 미국무부는 인공위성으로 확인 ― 과 미국측에 의해 제기된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의 핵관련 의혹을 계기로 불거졌던, 북미관계의 위기상황에 대한 온갖 우려들은 일단 진정된 듯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상황이 1998년 이전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페리의 대북정책조정관 임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미국의 핵심적 관심사이자 동시에 제네바 합의의 치명적 맹점으로 여겨지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하는 미국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94년의 제네바 합의는 영변지역의 핵관련 시설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의 북한의 핵관련 활동을 규제할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제재할 어떠한 국제적 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자국의 관심사를, 이번의 금창리 지하시설 조사를 위한 협상과 같은 일회적인 방식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협상에 나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리보고서는 기존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접근방식과 협상전략을 담고 있는 것일까? 페리보고서는 한반도의 정치 지형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인가?


페리보고서의 논리 - 북한의 협상의도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군사력 증강

페리보고서는 "북한의 핵보유와 장거리미사일의 계속적인 개발, 실험, 배치, 수출은 한반도의 '상대적 안정성'을 잠식하며, 미국의 사활적 이해에 반하는 지역적이며 세계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기본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지금까지 북한과 한미연합군이 각자 보유한 강력한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양측간의 전쟁억지력의 유지를 가능하게 했으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이러한 '절묘한' 균형을 깨뜨린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미국은 다음의 목표들, 북한이 핵무기 개발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완전하고도 증명될 수 있는 보장,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기준을 초과하는 미사일의 실험, 생산, 배치의 완전하고도 증명될 수 있는 중단, 그리고 미사일과 장비, 기술의 수출의 완전한 중단 등의 목표를 반드시 획득해야만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만약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을 종료시킴으로서 한반도의 안정성이 '보존'될 수 있다면, 미국은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점은, 1994년 북미간의 '전쟁위기' 이후에 미국은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한미연합군의 군사전략과 절차를 개선했으며 여전히 한반도에서의 제2의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실제 전쟁이 일어날 때 생길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최근 미국이 겪은 그 어떤 전쟁보다도 클 것이라고 평가한 점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히 중단시키기 위한 협상을 진행시킴과 동시에, 북한이 어떤 오판을 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전략을 협상의제로 상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한미군의 문제는 결코 북미협상의 의제로 설정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페리보고서는 스스로 이중경로 전략(Two-Path Strategy)이라고 이름을 붙힌 포괄적 접근을 통해, 협상이라는 경로와 군사력의 증강이라는 경로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즉 협상이라는 첫번째 경로를 통해서 "북한이 위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압력들"을 단계적이며 상호주의적인 방식으로 감축할 수 있다는 것을 카드로 삼아,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페리보고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의 유보가 그 초기 조건을 만드는 일이며, 이에 북한이 동의한다면 미국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무역금지조치들을 '가역적인 조건'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밝혔고, 실제 9월의 베를린회담을 통해 실현되었다)

두번째 경로는 협상의 진행경과와는 무관하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과 그 동아시아 동맹국들이 군사적인 조치들을 지속적으로 강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사력의 증강은 북한의 의도나 행동에 대한 추측, 그리고 협상의 성공이나 북한의 내부적 변화에 대한 추측과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며, 만약 협상이 실패한다면 가시적으로 단계화할 것이다.

페리보고서는 이와 같은 대북전략이 동맹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보고서는 이와 같은 전략의 이득이, 북한이 위협이라고 인식하는 정치적 경제적 압력의 포괄적 완화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협상력을 강화할 수 있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미국은 북한에게 어떤 '손에 쥐여주는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 셈이라고 한다.
또한 미국은 협상과정을 통해서 미국의 군사전략이 어떤 측면에서도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전역미사일방어(TMD) 프로그램에 대한 한국 및 일본의 참여는 이번 협상과 전혀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단적으로 말해, 이처럼 미국이 기존의 군사 정책을 유지·강화할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지원을 계획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포괄적 고위급회담의 틀에 참여하게되는 동인은 무엇인가?


페리보고서와 대북경제제재 완화 - 페리보고서는 직접적인 대북경제지원을 거부하는 대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해 9월 적성국 교역법, 방산물자법, 수출관리법 등 의회의 동의없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해제할 수 있는 대북경제재제 조치 일부를 풀었다. 이 조치로 인해 북한과의 무역 및 투자와 관련된 대부분의 제한이 철폐되었으며, 승객 및 화물수송을 위한 해운 및 항공이 허용됨으로써 인적·물적교류가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제제재 조치의 완화의 당장의 파급 효과는 매우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이번 경제제재조치 완화는 이를 계기로 미국기업을 비롯한 해외기업들의 대북투자가 이루어지고, 북한산 제품이 미국시장에서 팔려야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도 북한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한 북한제품이 미국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한 절차들이 요구된다.
북한이 자국 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함에 있어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혜국대우(MFN)를 부여받거나 일반특혜관세제도(GSP) 상의 특혜관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북한을 '비시장경제국가', '테러지원국가'로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미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대북전문가들은 대북협상의 초기에 북한에서 '시장원칙'을 증진시키고 북한의 정책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경제제재조치의 일부를 완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무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최혜국대우', '해외사적투자법인', '일반특혜관세제도', 수출입은행의 지원이나 예외규정, 또는 직물이나 다른 영역에서의 수입쿼터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들은 그 자체가 북한과의 협상 카드가 되면서, 동시에 북한에서 본격적으로 '시장원칙'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베트남과 미국의 예가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교역금지조치를 해제했고 1995년에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해 관계정상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최혜국대우가 거부되면서, 미국의 대베트남 수입액은 교역금지 조치가 풀린지 4년이 지난 98년에도 겨우 5억 5천만 달러 수준에 그쳤다. 베트남이 10여년 이상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현재의 경제제재 조치 완화가 직접적인 대북지원 효과를 내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언론 및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페리보고서는 '이중경로전략'에 입각한 협상의 구체적인 전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단지 단계적이며(step-by-step) 상호주의적인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향후 북미 포괄협상에서 미국이 '북한이 위협이라고 인식하는 정치경제적 압력의 감축'의 실제 내용은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앞서 살펴본대로 미국의 대북경제제재조치의 완화가 상징적 의미 이상을 갖지 못한다고 했을 때, 향후 포괄협상 과정에서 실제 북한을 끌어들일 만한 경제적 유인은 다른 부분에서 찾아질 듯하다. 예컨대 북미협상과 병행하여 진행될 북일 수교협상과 그에 동반하는 대북배상금 지불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북한이 일본에 받아야 할 대북배상금은 최소 50~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북한의 주요 경제부문을 정상화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규모로 평가되고 있다.




평가와 전망 - 페리보고서 구상은 단지 북한만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이제 페리보고서에서 주목되는 측면들과 그 의미를 요약해보자.
먼저 페리보고서가 기존의 미국의 대북정책과 다른 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전면적이고 완전하게 중단시키기 위해 즉각적으로 나서겠다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영변 핵시설 관련 쟁점이 타결된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은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구사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과 함께 4자회담을 추진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에 대한 김영삼정권의 사실상 비토권을 수용하는 한편, 김일성 주석의 사후 북한 붕괴론/연착륙론 등을 배경으로 북한의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곧, 북한이 정치·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고 인공위성발사 실험을 지속하는가 하면 핵개발프로그램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미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등 새로운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기왕에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틀을 구축하여서라도 이러한 북한의 변화전망을 봉쇄하겠다는 구상을 본격화한 것이다.

둘째, 그렇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의 기본적인 발상의 변화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어찌보면 북미협상을 염두해 둔 미국의 동아시아 및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적 전략의 변화의 조짐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난망한 일이겠지만, 오히려 미국은 협상과정과 무관하게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 하에서 기존의 군사전력과 전략의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미-일 군사동맹의 강화(미일 신가이드라인), 미국-일본-한국-대만을 잇는 미사일방어망 네트워크 추진 역시, 북한과의 협상과정과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다.
셋째, 북미 포괄협상을 통해 북한에 제공될 수 있는 '보상물'의 목록들은 뭔가 새로운 것들이 추가된 것이라기보다, 북한의 주요 관심사이나 그 실현이 지연되고 있는 사안들을 종합한 성격이 매우 강하다.

포괄협상에서 북한측의 핵심적 관심사는 북미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덧붙여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안전보장), 그리고 북일수교 및 대북배상금 지불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안들은 (그것이 최소한 정치적 '수사'의 차원일지라도) 이미 합의되었거나, 진행되는 도중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단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북한이 북미 포괄협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이 사안들이 미국-일본-한국의 공조체제하에서 고리와 고리로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미-일 공조체제 하에서는, 북한이 포괄협상의 틀을 거부할 경우 북일수교 협상의 진행을 기대할 수는 없다. 페리보고서는 미국-일본-한국 3국정부의 고위급관리들로 구성된 삼자조정감독그룹(Trilateral Coordination and Oversignt Group)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협상의 집중력과 효율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넷째, 페리보고서는 남한의 '독자적인' 관심사 즉 남북이산가족 상봉, 남북기본합의서 이행 그리고 남북공동위원회 가동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지만, 북미 포괄협상의 의제로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다시말해 이러한 사안에 대한 해결과정이 북미 포괄협상의 진전의 전제조건으로 제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과거 김영삼정권은 북미협상 과정에서 남북관계 개선, 예컨대 남북회담의 개최를 그 전제조건으로 삼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미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김대중정부는 이와 같은 사안을 해결해나가기 위해서 북한과의 독자적인 대화채널을 가동해야 하겠지만, 북한으로서는 이에 대한 강한 구속력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서해교전 사태 이후 남북대화가 언제 재개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한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북미 포괄협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한반도의 미래상은 무엇인가? 바로 이 문제는 북한이 협상과정에서 미국의 전략을 수용 혹은 용인하는게 가능하겠느냐의 문제에 못지 않게 주목되어야 할 쟁점이다. 페리보고서에서 명시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북한 군사력의 사실상의 무력화(無力化) ―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완전한 중단, 그리고 재래식무기의 재배치 ― 그리고 북한에서의 '시장원칙'의 증진을 염두해둔 경제적 프로그램의 제공 등은 결국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략을 수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공고화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국의 대북정책의 목표는 단지 북한에만 해당되는 문제일 수는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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