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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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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무너져야 하는가

정은교 | 21세기진보교육연구소 소장
일본에서 건너온 '학교붕괴론'

우리 사회에서 '학교 붕괴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 전교조가 이 문제를 내걸고 토론회를 벌이면서부터였다. 그 무렵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교실이 난장판이 되어있는 꼴을 화면에 비추어 뭇 백성들을 놀라게 했고, 한 TV토론회에서는 참가 학생들이 권위적 교사에 대한 불만을 맹렬히 털어놓아 토론진행을 어렵게 했다. 신문에도 이 문제가 화두로 올라 한겨레 심포지엄이 열렸고, 칼럼이 여러 편 실렸다.
이 '붕괴론'은 일본에서 건너왔다.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이지메(집단 괴롭힘), 등교거부, 학력저하, 학급 내 수업질서가 흐트러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그쪽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끔찍스런 사건마저 여럿 터져나오는 것으로 보아(…이를테면 학교에 대한 원한을 푼답시고 어린애를 죽여 그 시체토막을 교문 앞에 내건 한 중학생!…), 그쪽 학교의 병리징후는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듯하다.


발본의 개혁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수업질서가 흐트러지는 상황'을 '학급 붕괴'라 일컬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고 하여 '학교 붕괴'란 표현이 들먹여진 것이다. TV카메라가 선정적인 화면을 골라담은 면도 없지 않지만, 우리네 '일부'학교에서 수업질서가 흐트러져 가는 현상이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실업계고교나 저소득층자녀가 다니는 변두리학교에서 그렇다.
이른바 '학교 붕괴'가 왜 생겨났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얽혀 있겠으려니와 요즘 몇 년 사이에 부쩍 심해진 것으로 보아, 엉사미(…YS) 때부터 법석을 떤 '교육개혁 난리굿'이 문제상황을 와락 덧들였음도 분명하다.
'열린 교육'이 더러 교육효과를 거두기도 했겠지만 규율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를 불러온 점도 있을 터요, 무엇보다 이해찬 장관이 교원집단을 마구 공격하여 무언가 개혁합네, 어리숙한 백성들 앞에서 생색을 내려했던 탓이 크다.
체벌을 일삼거나 촌지 밝히는 교사들은 서슴없이 112에 신고하라고 코흘리개 학생들에게 요란스레 선동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신고도 잇따랐고, 선생 앞에서 "신고할 거예요!" 철없이 입 놀리다 혼난 아이도 꽤 되었으리라. 선생 꼴이, 체면이 형편없이 구겨졌으니 애들이 선생 말 듣겠는가.
물론 '개혁 난리굿'만 탓할 일은 아니다.
우리네 학교는 아이들에게 베풀어주는 것 없이 가둬두고 억누르기만 해왔다. 언젠가 터져나올 일탈이 터져나온 게다. 70∼80년대처럼 '졸업장'을 따면 일자리가 웬만큼 보장되던 시절에야 그것 바라보며 견디고 살았겄다. 웬만한 졸업장 아니고선 명함 못 내미는 요즘에 우라질 학교가, 학습노동의 고역은 예나제나 다름없이 잔뜩 떠안긴다.
세상살이에 별 쓸모도 없는 죽은 지식이 변함없이 커리큘럼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금의 부르주아정권처럼 '개혁 시늉'만 엄벙뗑 벌일 게 아니라, 수업시수를 대폭 줄이고, 커리큘럼을 온통 뜯어고치는 발본의 개혁이 간절한 시절이다.


정작 무너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붕괴론'에는 조심스레 되짚어야 할 구석이 있다. '붕괴'라는 표현자체가 꽤나 선정적이라서 섣불리 쓰다가는 빗나간 내용을 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우리네 학교에 문제가 많아요. 무너질 것은 빨리 무너져야 해요!" 하고 축수(祝手)한 이가 여럿 있었다.
정말로 자발없는 이바구 아닌가. 케케묵은 커리큘럼이랑, 여전히 쥐꼬리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주의랑, 교육범죄자 집단(…상당수의 부실사학 경영자들)이랑, 그 환호작약의 축수에 화들짝 놀라 와르르 무너진다면야 작히나 좋으랴? 그런데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은 교육마피아도, 사학 모리배도 아니올시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교실의 수업 질서'요, 그로 말미암아 애먼 곤욕을 치르는 쪽은 ('큰 죄'를 짓지는 않은) 일반 교사들이오.
무너뜨리는 아이들 곁에서 '빨리 무너지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이는 아이들더러 더 열심히 교실을 휘젓고 개판치라는 얘기 아닌가?
물론 아이들을 힘껏 부추기고, 북돋아야 할 때가 있기는 있다. 그들이 여럿의 뜻을 모아 '학교의 변화'를 당당히 요구할 때!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고교생들이 '교사 없이 교육 없다! 교원 숫자 늘려 달라'고 당차게 시위를 벌이지 않았던가. 그런 당찬 집단적 정치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무너뜨린다면 이는 지극히 좋은 일이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이 수업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짓은 그저 '눈먼 일탈'일 따름이다. 물론 이것도 넓은 뜻에서는 반항의 하나이겠고, 지금의 학교에 짓눌리고 갇혀 답답해 미치겠음을 온몸으로 토로하는 뜻이라고 어른들이 슬기롭게 읽어야겠지. 하지만 집단규율 자체를 안 받아들이고 그저 제 감정 내키는 대로 나대는 아이들 꼴이 건전한 것일리는 바이 없다.
세계를 온통 휩쓰는 자본주의 쾌락소비문화가 이들에게 얍삽한 심성을 길러준 면도 놓쳐서는 안 된다. 소비가 중심이 되는 '후기 근대' 사회에 접어들었으니 이는 당연한 흐름이라고 '오냐 오냐' 봐줄 일만은 아니다. 어떻게든 건전한 대중문화의 기풍을 더디게라도 일으켜 세워야 할 터. 무엇보다 명분 없는 행동, 눈먼 일탈은 바람직한 개혁을 부르기보다 더 완고한 통제·반동을 불러오기 십상 아닌가.


학교가 몽땅 문닫았으면 좋겠다니?!

'부분적 붕괴 촉구론(?)'보다 한 술 더 뜨는 쪽도 있다. "학교는 무너져야 해!" 염불을 외는 사람들이다. 나이잡순 분들이야 학교 제도를 싸그리 폐지하는 것이 현실에서 이뤄지기 까마득함을 잘 알기에 그런 과격한 주문은 삼가지만, 젊은 축 중에는 70년대 이반 일리치 같은 탈학교론자의 외침을 다시 들고나오는 이도 있다.
일리치의 생각 중에는 귀담아야 할 대목이 많다. 대량생산공장을 모델로 한 여지껏의 관료적 학교체제가 학생들 저마다의 개성이 자유로이 꽃필 너그러운 틀로 바뀌어야 함은 분명하고, 그 대안을 더듬는 데 일리치의 사상은 '솔차니' 영감을 준다.
하지만 '탈학교'를 눈앞의 일정(日程)으로 꺼내드는 것은 한참 섣부르다. 더구나 교실 통제의 전열(?)이 뒤죽박죽된 틈을 타 아이들이 난리굿 벌이는 꼴을, 마치 강력한 교육개혁세력이 진군해온 양 환호작약하며 "학교야, 이참에 무너져라!"하고 주문(呪文)을 거는 것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들이 까맣게 잊은 점은 '진취적인 교사층과 어깨 걸지 않고서는 어떤 학교 개혁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니, 앞으로 한참동안 개혁을 밀고갈 세력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학부모도, 제 권리 누릴 날 까마득한 어린 학생들도 아니요, 학교사회를 실제로 꾸려나가는 교사 집단이라는 사실을 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다.
학교가 몽땅 문 닫았으면 좋겠다니, 그럼 일껏 고생해온 교사들은 '교육문제'에 대해 입 다물고 국으로 처박혀 있으라는 얘긴가? 몇몇 지식꾼과 똑똑한 학생 여럿이 '학교 폐지'를 설파해 내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물흐르듯 술술 풀리는가?


섣부르고 흐릿하기 짝이 없는 몽상들

'붕괴론'을 까놓고 들먹이지는 않지만 생각의 핏줄이 많이 닮아있는 담론이 있다. '근대기획은 몽땅 실패했다'고 늠름히 못박는 이바구가 그것이다. 이들은 요즘의 학급붕괴상황이 몇몇 나라의 실패라기보다 '근대적 국민'을 만드는 훈육의 장이었던 근대학교의 몰락과정이라 여긴다.
'감시와 통제기구'로서의 학교, 획일적 교육과정은 근대성의 본질적 지표이며 이제 그 생명력은 다했다는 얘기다. 푸른 보리밭 위 하늘을 쏘는 종다리처럼, 젊음과 '자유'만을 노래하는 락카페 가수처럼 살고픈 사람에게야 학교가 온통 감시/통제기구로만 비치겠지.
하지만 프랑스혁명 때 콩도르세에게는 학교가 '계몽의 도구'였으며, 19세기 미국과 소설 '상록수' 속의 백성들에게는 학교가 풀뿌리 민초(民草)에게도 배움을 베풀어주는 고마운 기관이었다. 외눈을 뜨고 오로지 한 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근대사회의 본질적 특징을 '자본주의 체제'라 본다. 그 이윤추구의 맹목성과 시장기구의 무정부성이 근대의 주된 병폐와 모순을 빚어낸다고 여긴다. 하지만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실험이 한 차례 시행착오로 마무리된 지금, 우리는 온전한 사회주의체제를 현실에 세우기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무언가 구체적인 체제원리, 살림살이의 양식을 모델로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그 '현실화'는 무척 까다롭다는 말이다. 사회주의 이념은 '전망'으로만 간직하고 기를 뿐이요, 한참동안은 여지껏 맞닥뜨린 자본주의체제를 어찌 개혁해갈 지 궁리하기도 바쁘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탈근대'사회란 어떤 세상인가? 무슨 체제원리에 터하여 굴러가는 사회인가? '근대사회라는 것은 되.에.에.게 글러 먹었어!'하고 도매금으로 깎아내리는 얘기야 내뱉기 쉽지. 시원시원하게 들리기도 하지.

하지만 그 다음에 어찌 된다는 얘기누? 그저 '벗어나면' 되는 일일까? 감시와 통제와 푸코가 말하는 '원형감옥'에서 벗어나는 운동을 벌이기만 하면 새 세상이 슬렁 뚝딱 굴러올까? 온세계에 그물망을 뻗치기 시작한 자본가계급이 '꽃피는 동백섬'의 새 세상을 가만 놔둘까? 이들의 경제권력을 어찌 견제·축소·삭탈해야 할 지 궁리함 없이 '새 세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

'탈근대'만큼이나 '탈학교'도 흐릿하기 짝이 없는 목표다. "'산업사회'가 끝났고, '국민국가'의 시대도 끝장났으며, 그러니 '국민'을 훈육할 것도, 산업인력을 기를 필요도 없어졌으이. 학교밖으로 나가 '문화자본'을 자유로이 주고받는 것으로 너끈하이." 이들은 아마 이렇게 여길지 모른다. 지금 '후천개벽'이 엄청 벌어졌으니 학교를 '용도폐기'해도 된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되, 이런 논리에 터한 이바구라면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그들의 입나팔에 휘둘리는 꼴이다.
정보의 중요성이 커지기는 했어도 산업사회는 끝나지 않았으며 국민국가도 금세 무너지지 않는다. 진보적인 세계질서가 자리잡지도 않은 마당에 '국민국가야, 무너져라!'하고 자발없이 떠들어서도 안 된다. 학교를 백성의 것으로 거두기 위하여 '공교육'의 영역을 넓혀야 할 마당에, 학교와 무슨 웬수가 졌길래 '근대의 바깥으로, 교문담장 밖으로 탈주하라!'며 공염불을 외는 것일까.
지금은 근대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근대, 자본주의 제도의 역사 중에서도 그 무정부성과 폐해가 극에 다달아있는 시절 아닌가? 섣불리 '탈근대'를 몽상할 때가 아니다.


민중적 개혁전망을 논의하자

지난 5년간 부르주아정권이 밀어붙인 '보수 개혁'은 말잔치만 무성했을 뿐, 교사집단을 학교의 주인으로 존중해줄 뜻도, 학생들에게 교육복지를 베풀 능력도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의 교육부 수장(首長)은 이해찬씨만큼의 열정도, 지혜도 갖고있지 못하다.

학교를 온통 들쑤셔놓은 얼치기 개혁으로 말미암아 '개혁'의 앞날은 오리무중 상태다. 지금의 '새교육공동체위원회'처럼 들러리 나팔꾼 노릇하는 세력이 아니라, 민중적 개혁전망을 가진 세력이 밑에서 치고 올라와야만 무언가 달라져도 달라진다. 섣부르게 '붕괴론'을 꺼내는 분들께서도 지금의 엄중한 정치지형을 숙고하여 서로 힘을 보태는 쪽으로 이바구를 펼쳐 주시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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