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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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실업, 생산적 복지 그리고 시민운동

조성은 | 실업운동 정책생산팀
누구나 말하는 사회복지, 그 이면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중반,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는 1999년 8.15 경축사에까지 이른바 '생산적 복지'가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사회복지라는 주제가 상당히 부각되고 있다. 이는 주요한 국정지표의 하나로 이야기될 뿐 아니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진영에서도, 3대 요구안의 하나로 사회복지(사회보장)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 사실들은 1990년대 들어 정치적 환경이 다소 나아지면서, 민중생활상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회복지(주로 사회보장)가 정부건 운동진영이건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반영한다. 하지만 정부입장에서는 새로운 관리주의정책의 일환으로 사회복지 재편을 꾀하고 있고, 운동진영에서는 생존권 확보와 사회개혁의 문제로 제기하고 있어, 동일한 관심이지만 별다른 접합점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이 대당되는 관계속에서, 시민운동진영은 다소 객관적(?)으로 자리한다. 이들은 급진적이기보다는 점진적인 이념 추구방식과 광범위한 중산대중을 대상이자 기반으로 한다는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일면 개량적일 수 있는 사회복지상의 요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다.

특히, IMF사태 이후 발생한 대량실업 속에서 시민운동이 보여준 대응방식은 경제.사회적 측면보다도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더 눈에 띄었다. '재벌해체'나 '구조조정 반대'와 같은 체제근간의 변화보다는 '실업극복국민운동'과 같은 다소 몰계급적인 활동이 전체 대중들의 입맛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몰계급적이나 실질적으로 물적 토대를 갖는 이러한 활동들은 사회운동진영의 요구들보다 '현실적인 효과'를 보일 수도 있다. 실직상태에서 당장 생계문제 처한 사람들을 '구호(救護)'하고 '갱생(更生)'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하지만 그 뒤에서는 그들의 자주적이고 정치적인 요구들이 현실의 급박함에 묻혀 사장되고, 국가의 역할이 시장수호에 경도되도록 방기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대규모사업의 성공적인 수행에도 불구하고 소득구조는 점점 불평등해졌고, 단기간에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 사이 그들의 갱생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불안정노동'으로 고착될 우려가 높아졌다.


생산적 복지 담론의 출현

이른바 '생산적 복지'담론은 김대중 정부가 추구하는 사회정책을 농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구제금융시의 경제적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사회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사회갈등이 부각되면서, 생산적 복지라는 큰 틀 안에서 각종 복지제도와 사회제도들을 재편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같은 사회보장 측면 뿐 아니라 교육, 문화, 환경, 조세 등 사회제반 사항을 '생산적 복지'라는 틀 안에서 정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생산적 복지'는 사회정책전반에 관한 담론으로 여겨진다. '생산적 복지'를 영어로는 'DJ Welfarism' 이라 표현하는 것도 김대중 정부의 사회정책구상에서 이 담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케 한다. (대통령 비서실 삶의질향상기획단, {새천년을 향한 생산적 복지의 길}, 1999, 참고)

하지만 '생산적 복지'담론의 출현을 '사회정책에 있어서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증가'라는 반가운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에 몇가지 이유를 들면 그 중 하나는 '생산적 복지'가 이미 세계적 주류가 된 신자유주의 사회개편 전략에 어느정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제3의 길' 논의와 비슷하게, 가보지도 않은 국가복지에 대한 거부감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가 비로소 하나의 사회정책적 주제로 여겨지기 시작한 시점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전반에서 사회복지의 개편 혹은 축소가 공공연히 주장되고 그 영향으로 현실화된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의 기간이었다.

우리가 영향받는 미국과 일본의 신보수주의는 국가기구의 팽창, 국가복지예산의 증대에 적대적이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특히 예산상의 불가피한 증가에 단서 조항을 덧붙이면서, 문제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노동시장으로의 강제 진입을 꾀하는 특징을 갖고있다. 1996년 이루어진 미국의 복지개혁은 복지에 대한 연방정부의 권한을 줄이고 복지수혜자들에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의무를 지운다.
이로써 빈곤가정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가정의 수혜기간에 제한을 두었다. 여기에 노동시장참여과 자녀의 학교출석, 부권의 확립 등 단서조항도 강화하여 저소득층의 문제를 그들의 성격적.능력적 결함에 두는 보수주의의 주장을 적극 수용했다.

대표적 신보수주의 정부인 영국의 대처정부는 국가의 경제개입을 성장저하의 주범으로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자유시장적 경쟁원리를 회복하겠다고 했다. 한편 복지부분에서 전국민을 생산적 부분과 비생산적 부분으로 나누고 전자에게는 가능한 한 능력에 따른 시장의존을 고취시키고, 후자에게는 게으르고 무능하며 기생적인 사람이라는 낙인과 함께 국가의존을 허용하는 '두 국민 헤게모니'전략을 취했다. 당연히 후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불평등이 강화되었다. 능력에 따른 불평등과 '2등 국민'으로의 낙오, 이는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할 것이고 이것이 경쟁을 추동하고 노동유인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게 대처정부의 기본구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주장하는 '생산적 복지'는 일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2000. 10월 시행)으로 국민들에 대한 복지지원을 늘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로능력이 있는 자'들의 취업훈련과 자활사업참여를 지원과 연계시킴으로서,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강제하는 근로복지의 성격이 강화되어 있다. 정부내에서도 저소득층에 대한 이전소득의 증가는 '근로의욕'을 저하시킨다는 반론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고 (최근에 세금 잉여분의 사용을 놓고, 분배개선이냐 국가부채감소냐 하는 논쟁도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언론에서도 복지혜택이 생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는 영국의 '두국민 전략'과 유사하며 아직도 구빈법시대의 강제작업장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시민운동과 사회복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국가성격의 변화로 인해서라기보다는 IMF사태로 말미암은 저소득층 생활이 붕괴되면서 논의되고 시행되었다. 이 생활보호법은 1961년 제정, 1969년 시행된 법률을 토대로 1982년 일부 개정된 제도로서 상당히 오래되고 최저기준에도 못 미치는 제도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 안정화와 함께 생활보호제도에 대한 학계의 개선요구들이 끊임없었지만, 정부는 예산상 문제로 개정을 계속 미루어오고 있었다.
여기에 1990년대 중반이후 성장해온 시민운동이 어느정도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6년 11월 생활보호법 개정을 청원한 이래로 계속적으로 입법청원해 온 참여연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재정추진 연대회의'를 구성하여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시민운동 내에서 주요한 의제로 부각시켰다.

그런 면에서 시민운동의 성장이 오랜 과제를 해결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내부의 취약한 개혁의지가 민중들의 생활요구에 직면하면서 사회적 불만을 포섭.통제할 필요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입장에서는, 성장한 시민운동들의 힘을 빌어 적당한 수준의(언제고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시혜적 제도를 구축하면서 시민운동진영에 대해 개혁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전국민적인 이데올로기효과를 확보한 것이다.

정부가 사회보장 측면에 관심을 보이는 범위는 저소득층 생활보호로 한정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하에서도 모든 취약계층에 대해 엄격한 자산, 소득조사를 기초하여 지원을 결정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수혜대상이 소수에 한정되어있고 대다수 일반시민에 대해서는 시장기제에 의한 보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정부가 추구하는 시장친화적 복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안인 것이다.

또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시민단체를 포함한 민간 참여를 추진하려 하므로, 시민단체가 제기한 기본적 사안에 대해 포섭하는 것은 장기적인 파트너쉽을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이었다. 삶의질기획단 보고서에서도 '사회연대에 기초한 참여형 복지체제'를 강조하면서 "NGO 등 민간단체에 재정을 지원하여, 의료.탁아.빈민층보호 등 공공서비스 일부를 담당하도록 하는 파트너쉽 제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복지다원주의는 "시민사회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가 국가 공공부문의 소관영역으로 치부"되었다고 말하는 데서 국가의 기본역할인 사회보장을 최소화하는 자유주의와 친화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간부문 특히 시민단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시민운동을 개혁추진과정에서 동원하겠다는 전략이 아니라 기존에 국가의 책임이었던 영역들을 포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시민운동에 상당한 책임과 지원을 통해 사회적 부담을 줄여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관철될 경우 시민운동은 국가가 획득하여야 할 '정당성 획득(legistimation)'을 대리집행하는 하부기관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그람시의 용어를 빌자면,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동의의 물질적 기초'를 시민단체를 통해 저렴하게 해결하려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국가 정당성 대리집행'은 단지 원칙적 우려에 그치지 않고, 대량실업사태에서 보여준 신속한 시민운동의 활동이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용이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민운동의 대량실업에 대한 대응방식 비판

대량실업사태에 대한 시민운동진영의 대응은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지만, 가장 눈에 띤 것은 실직자 지원 활동과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조직이었다. 경실련, 참여연대 등이 해외매각과 구조조정 등에 어느정도 개입하고자 하기도 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가와 민중생존권의 문제를 엄격하게 갈라세우지 못해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시민'들이 중산층의 지위를 잃고 속속 신빈곤층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냉정한 원인분석을 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공고화는 것에 어떤 대안도 제출하지 못했다.

반면, 급증한 노숙자 지원사업으로 시작한 시민운동진영의 대응은 한겨레신문이 주도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의 막대한 재정후원을 받아 수차례에 걸친 실직자 결연사업과 교육훈련비 지원 등으로 이어졌다. 이에 경실련의 지역조직을 포함하여 다수 시민단체들이 조직적 형태로 전국적인 운동을 펼쳐나갔다. 실업자들이 처한 생계의 어려움에 주목하여 최소한의 생계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의 좌절과 고통에 귀기울이는 상담활동에 주력하여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활동을 펼쳐보였다.
이러한 활동은 각 지역 실업지원센터의 건립으로 이어졌고 현재에는 실업의 장기화와 대량실업의 소강상태에 발맞추어 자활사업으로 대거 전환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들은 급속히 생존기반을 잃어간 한계계층에게 겨울나기가 가능하도록 쌀, 석유 등 물품을 지급하고, 결식자녀들에게는 급식을, 여성가장에게는 제과.제빵기술과 같은 직업훈련을 지원하는 등 상당한 차원에 걸쳐서 실직자들의 생존에 개입할 수 있었다. 겨울나기 사업에만도 전국 20여만 가구가 지원받았고, 실직가정돕기 범국민결연에는 전국 105개 창구를 통해 50여만 가구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단체의 활동은, 한계계층이 처한 어려움의 직접적인 원인인 한국경제의 모순구조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과거 지역 사회운동에 헌신하던 많은 인력들까지 흡수하여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지만, 그 근간은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가 지원하는 자금, 특히 일정 인원의 활동비지급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고 자체적으로 이들을 교육하고 정치적으로 고양시키려는 계획도 열정도 없었던 것이다. [영등포 산업선교회]만이 독자적인 교육과 지원사업을 연계시켜 문제의식을 심고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폭로, 조직하고자 했지만 아직까지는 조직력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경제위기에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재벌.정부에 대해 날카로운 위협이 되기보다는, 제도상 미비점과 재정 부족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정부를 대신해 전민중적 불만을 완화시키는 공로를 세워 1999년 말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가 국민훈장을 받기까지 하였다.
사회진보연대 실업정책생산팀은 이러한 활동을 '온정주의의 길'로 못박고, 그들이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한다. 아무리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그 대상자에 대한 태도는, 하나의 독립적 인격 혹은 총체적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무엇인가 부족하고 열등한 인간이기 쉬운 것이다.(사회진보연대 실업운동정책생산팀, {실업자 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1999 참고)

여기에 전국민의 인간적인 삶에 대한 국가의 일차적인 책임에서 각 개인들의 '자조'로 문제해결의 초점을 옮김으로서 시민권으로 주어지는 국가복지를 방기하고 개별적으로 조직되는 사회단체의 수급을 위해 여기저기 떠도는 복지수급자들을 만든 결과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사회의 책임인 경제위기가 이들에게는 일종의 무능력, 게으름 혹은 의존성, 아니면 가족이나 운명의 소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조 원칙의 강조"는 일종의 선별주의를 강화시키는 빌미가 되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잔여적 복지"로 갈 것인가

복지를 민간에서 제공하는 방식은 재원과 전달체계 전반을 국가가 책임지는 근대적 의미의 사회보장, 즉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사회보장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민간 재원이 가지는 불안정성과 전달과정에서의 임의성 등 기본적으로 근대적 방식의 사회보장제도로서 성립 불가능한 방식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노동세력 및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시민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 걸쳐 복지 제도가 다양하게 작동하는 사회 시스템을 확립해왔다. 이들 국가에서 제공되는 복지 서비스는 모든 시민들의 시민적 사회권에 기반해서 이루어지고, 이들의 지원에 드는 비용은 누진적 세금에 의한 국가 재정에 의해 지출되어진다.

이와는 조금 다른 유럽의 사회보험 방식에서도 국가는 각 사람의 소득에 기반하여 차별된 기여금을 부과하고 사회보험의 혜택은 전국민이 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기여를 높이고 시스템을 개선해왔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가가 지출하는 사회보장예산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고 4대보험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급하게 복지다원주의를 주장하며 민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저열한 사회복지수준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
이러한 '잔여적 복지' 혹은 '자유주의 복지' 형태로 전환해나가는데 필요한 정치적 부담을 시민운동의 참여를 통해 무마시키고자 하는 혐의가 짙다.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정부의 관료주의를 대신하여 복지 전달에 참여하는데 의의를 둘수도 있고, 활동기반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이유에서 이러한 국가의 파트너쉽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최저계층에 대해 선별적으로, 그리고 최소주의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복지는 일정정도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의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국가에 의한 복지공여는 대중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국가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측면이 강하다. 시장경제의 힘을 방임했을 때 나타날 폭발적인 사회적, 경제적 비용에 비하면 국가가 지출하는 복지비용은 차라리 저렴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 수준을 넘어서 '보편주의', '포괄성','급여의 관대성'등 "누구나"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비용과 광범위한 계급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통합을 둘러싼 마찰을 보더라도 '보편적 복지제도' 보다는 당장의 지출 증가가 더 민감한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민단체들이 활동의 기반으로 삼고있는 이른바 '화이트 칼라 중산층'가 이러한 마찰에 주요 당사자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단체들이 어떠한 일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는가가 장래 복지의 형태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다.



만일 시민운동단체들이 정부의 파트너쉽으로 복지제도를 개선하고 전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투명하게 수행하는데 만족한다면, 결국 정부를 상대로 청원하고 대정부 교섭을 통해 타협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방식으로 정부나 지배 계층이 부담스러워하는 수준의 사회복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순진함이다. 더욱이 자신의 기반인 시민들을 새로운 원칙으로 묶어내어 조금더 세금을 더내더라도 더 나은 사회적 혜택을 함께 누리는 방향으로 운동해내지도 못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방식에 의해서 양보되어지는 국가의 복지제도는 '최소주의'에 입각한 잔여적 복지에 국한되고 마는 것이다.


정부와의 파트너쉽을 넘어서

최근 수많은 실업관련 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화두는 "자활"이다. 정부가 공공근로의 일부분을 시민단체들에 할당하면서 활성화된 "자활"은, 정부의 기본적 지원을 바탕으로 자립할 수 있는 소규모 생산/서비스 단체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10월 시행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도 '근로능력이 있는 자'의 자활후견기관 참여를 의무화하고 이에 필요한 자활후견기관을 선정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할당된 후견기관 선정을 위해 각 지역 시민단체들로부터 접수를 받고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정부와 일정정도 파트너쉽을 갖는 것은 재정의 안정성과 활동의 공식성이라는 아주 좋은 이점이 있기 때문에 많은 단체들이 거부하기보다는 앞다투어 파트너쉽을 확립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의 파트너쉽에 매몰되어서 그 자신의 "운동"으로서의 원칙을 바로 세우지 못할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계가 부족한 것 같아 보인다.

앞서 언급한 수많은 실업단체들이 이제 운동본부의 해산을 앞두고 제각기 살길을 찾기 위해 공공근로의 시민단체 배분이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자활후견기관으로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만큼 장기화된 실업과 수급자였던 실업자들이 재취업되어서도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운동"이란 자신의 원칙과 성원들의 자발성에 근거한 활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시민운동단체가 정부가 해야할 정책개발이나 서비스 전달을 대행해주는 정부의 하부역할로 전락해서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하는, 그래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본연의 역할을 방기하는 길로 나아갈 우려가 높다. 특히 서구 신보수주의 복지개혁이 추구하는 "민영화"와 "지방분권화"에서도 시민운동이 참여할 여지들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즉 복지서비스에서의 민간생산 혹은 민간재정의 상대적 역할 증대라는 국가 책임의 최소화 방향에 시민단체가 파트너쉽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지방분권화는 각 자치단체별로 예산과 운영의 권한이 넘어감으로써 시민운동 단체의 교섭이 더욱 용이한 이점이 있지만 동시에 지역적 차원의 활동과 자기 영역에 만족하고 매몰될 위험성도 높은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방향이 결코 민중의 복지수준을 높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시장의존성을 더욱 높이고 선별적인 대상에 대해 시장친화적인 방식으로 복지급여를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적극적 복지로서의 사회정책

사회복지제도 특히 사회보장제도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사회적 전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 진보정당, 시민운동 등이 어떻게 결집하고 어떤 전망으로 국가를 압박하는가가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였음이 서구 복지국가의 역사를 통해 분명해졌다.
"복지"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관심은 단순히 제도 하나하나의 개선에서 벗어나 이러한 "사회적 전망"을 중심으로 보다 폭넓은 연대를 강화할 때만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 권력 관계 자체를 바꾸려는 원칙하에 이루어지는 활동이 결국에는 "사회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시민'이라는 모호한 계급체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운동 그룹들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원칙을 보다 분명히하는 것만이 시민운동이 놓인 정체상황을 극복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꿈꾸던 시민운동 초기의 지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탈시장적인 정책"을 강화하면서 국가에 의해 제공되는 영역을 넓혀가는 원칙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대망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사회보장제도는 그자체로는 결코 대안적이지 못하다. 계급 역관계 속에서 일종의 사회적 타협의 산물인 동시에 언제나 경제 성장에 한쪽 발목이 잡혀있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보장 제도는 그 제도 일면의 변화에 매몰되어서는 올바른 이해를 갖기 어렵다.
사회보장을 둘러싼 경제.사회적 변화속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스웨덴 사회복지의 발전단계에서 "연대임금정책"과 "완전고용"이 가장 우선적으로 방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 것의 함의를 볼 때, 노동진영의 요구들, 노동시장 정책에 시민단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어설픈 제3자주의를 취해서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보편적' '적극적' 복지정책을 위해 필요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즉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와 사회적 서비스(교육, 주택, 의료 등)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사회는 불가능한 수준의 사회가 아니다. 누구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던 꿈이 정치적 수준에서라도 이루어졌듯이 사회적 영역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꿈꾸기에 대해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 21세기 시민운동 진영에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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