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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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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의료시스템의 변동과 의사들의 집단행동

도영경 | 민중의료연합 정책위원
민중들의 예리한 이해가 필요할 때

지금 의사들의 집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의사들은 우리사회 기득권세력의 대명사라 할 수 있으니 일단 곱게 보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의사들이 생존권확보를 이야기한다니 잘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그들도 예전같지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게 어떤 것이든, 특권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도 있다. 안정된 사회적 지위에 경제적으로 풍요한 저들은 도대체 어떤 불만이 있을까? 그들은 누구에게 뭘 요구하는 것일까? 의사들의 행동도 어떤 객관적 발전과정의 필연적 산물은 아닐까?

사회진보를 바라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여건이 닿는 한, 많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영역에 걸친 다양한 문제를 접하다보면, 때에 따라서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사안들 사이에 감추어진 유사성, 일반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폭넓고 깊게 우리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문간의 소통과 이해증진은 권장되어야 하고, 사회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은 보건의료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불가에서는 인간의 사고(四苦)를 생로병사라 했다. 견강부회니 아전인수니 하는 비난을 감수한다면, 보건의료는 그 모든 것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의료에 무심할 수가 있겠는가?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보건의료는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보건의료의 모순이 사회모순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고, 실제 계급투쟁의 장으로 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이나 서구처럼 보건의료문제가 중요한 정치쟁점이 될 시기도 그리 멀지만은 않다.

그런데 아직 우리사회 전체가 보건의료에 별 관심이 없듯이, 사회운동세력들의 관심도 그다지 높지않아 보인다. 민주노총이 사회보장에 대해 취하는 태도나 노동자들의 건강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심 등이 그 예이다. 운동세력들은 분명 보건의료문제에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우리사회는 아주 훌륭한 교재를 제공하고 있다.

의약분업과 의료보험통합을 축으로 폭넓은 제도적 변화가 진행 중이며 이를 둘러싼 계급계층의 이해다툼도 치열하다. 여느 부문과 마찬가지로 보건의료가 민중의 것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원칙은 '민중의 참여'이다. 민중적 통제와 감시가 해당부문 특히, 전문인들에 대한 관료주의적 억압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민중의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운동세력이 보건의료에 쏟는 관심은 장차 보건의료를 민중의 것으로 바꾸어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의사들은 왜 항변하는가

제목의 '항변'은 '집단행동'을 썼다가 바꾼 것이다. 두 단어의 어감은 전혀 다르다. 그처럼 여기서는 서술의 편의를 위하여 일단 의사집단의 목소리를 빌고자 한다.
의사들의 연이은 시위로까지 치달은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발단은 약가차액 폭로와 의약분업추진이었다. 부풀려진 약가로 인해 병의원과 약국에서 막대한 의료보험재정이 새어나가고 있다고 폭로된 이후 의약분업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이 단계에서 의사들의 불만은 다음과 같이 드러났다.

약가차액(마진)을 이익으로 취한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인가?
의사들은 자신들이 약가마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개운치 않고 좀 떳떳치 못한 정도지 범죄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극심한 저수가정책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강요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은 의사들의 인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검은돈, 의도(醫盜) 등의 표현이 신문지상에 등장했고 보험재정을 축내는 범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이를 계기로 약가마진은 공공연한 비밀에서 공론으로 드디어 그 성격이 바뀌었고, 약에 따라 움직이는 돈을 제어하기 위해 의약분업은 거스를 수 없는 당위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의사들이 입은 심리적 상처는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약가마진은 정부당국도 뻔히 다 알면서 묵인하던 사실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당해야 하는 현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힘들게 수련한 후 대출받아 개원하였고 성실히 환자보면서, 다른 의사들이 이제까지 해온 그대로 약가이익을 통해 수입을 보충했을 뿐,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없는데 내가 왜 범죄자인가라는 격한 반발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도둑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만큼 이 사회에서 의사들이 가장 부도덕한 집단인가라는 항의가 있었고, 구멍가게나 할인점이 재료를 구입하며 마진을 확보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병의원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도 있었다. 무릇 변명이란 원죄의 강도를 가중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의사집단이 변명을 하면 할수록 여론은 더 악화되기만 했다.
의사사회에서는 기존의 폐쇄적 경향과 함께 강력한 보호본능이 일체의 외부에 대해 형성되었다. 의료계의 오랜 관행을 범죄라는 한마디로 낙인찍은 시민단체, 의사들에게 더욱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국민, 어제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왜 국민의 보험재정을 축내느냐고 책임을 묻는 정부, 그들에게 이론적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고 의약분업을 이끄는 정책가. 이 모든 외적 상대가 의사집단에게는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할 뿐이었다.

주된 전선은 [의사 대시민단체·정책가]로 형성되었다. 얼마 후 의사들의 수입감소가 현실화되면서 보호본능은 외부에 대한 공격적 성향으로 변화한다. 의약분업은 이런 상황에서 출발했고 의사들의 차분한 태도를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힘들게 되었다.


약품 오남용의 책임이 의사에게 있는가? 약사의 임의조제가 더 큰 문제 아닌가?

의약분업은 말그대로 의사와 약사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약의 오남용 방지이다. 여기에 또하나 중요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약의 이동에 수반되는 돈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나 약사에 의한 약의 오남용 방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므로 이 두 가지 목적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의사의 이익 때문에 약의 오남용이 초래된다는 여론의 추이는 의사들에게 또다른 반발을 초래한다.
의사들이 보기에 약사의 임의조제는 엄연한 무면허 불법의료행위이며 오남용의 주범은 바로 그것인데, 오히려 여론은 의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의사들 자신은, 경제적 유인으로 인한 남용(overuse)의 책임은 어느 정도 있을지 몰라도 오용(misuse)의 책임은 적다는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약사들에 대한 비난으로 드러났다. 통신망의 게시판에서는 양측의 극심한 감정대립이 나타났고 네티즌들은 의약분업 문제가 밥그릇 싸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가벼운 질환이나 경질환은 약사가 볼 수 있다, 일반의약품은 약사가 '조제'할 수 있다는 일부 약사들의 논리에 대해 의사집단은 절망감을 표현하였다. 진단을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가볍고 무거운 것을 나눈다는 것이며, 진단과 처방이 없는 조제가 말이 되는 것이냐고. 전선은 [의사 대 약사] 사이에 놓여있었다.

약사에 대한 의사들의 이런 태도에는 동네의원과 약국의 경쟁이라는 오랜 문제가 깔려있다. 1차의료기관의 위상이 정립되어 있지않은 상황에서 동네의원과 약국은 문턱의 높고낮음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고, 의사와 약사도 협력보다는 적대적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 두 가지 불만은 꽤 오랜동안 의사집단의 정서를 대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사들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이런 서글픈 처지에 놓여있는가? 국민에게 약팔아 이익을 챙기는 파렴치한 범죄자로 낙인이 찍히다니… 사실 동네의원 수입의 상당부분은 약 마진이다.

그렇다면 약을 통한 이익에 의존하도록 만들어놓은 구조가 오히려 문제가 아닌가? 의사들의 '문제설정'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의사들의 수입이 왜 정상적 방법으로는 보장되지 않는가?

한국의 의사들이 보는 환자수는, 왜 미국 의사들이 보는 환자수의 두세배나 되는가? 그렇게하고도 왜 약가마진에 수입의 일부를 의존해야 하는가? 그것은 의사들 진료행위의 가격(수가)이 낮게 매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동물병원의 개돼지 치료비, 선진국의 진료비와 자신들의 진료비를 비교해 보니 터무니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낮은 수가를 보상하기 위해 의사들은 한번 올 것을 두 번 오게 만들고 보험적용이 안 되는 검사를 늘리고, 필요보다 많은 약을 쓰고 있었다. 진료가 왜곡되었고, 의사로서의 '직업적 양심'에 반하는 일들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사들은 보험자에 진료비를 청구하기 위해 요령을 부리고 심지어 부정을 저질렀고, 또 보험자는 의사의 전문가적 판단을 무시하는 획일적 기준으로 진료비를 삭감하였다. 이는 '직업적 자존심'의 문제였다. 낮은 수가와 보험제도의 문제점으로 인해 의학적 원칙에 따른, 이른바 '교과서적 진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의사들의 주장이었다.
단순한 수입저하에 대한 불만을 넘어, 직접적 양심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의사들의 요구였다. 의사들 대다수가 집단행동에 동참하거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조하고 있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의사들에게 이른바 '의권'을 침해하고 있는 가장 큰 위협은 소신진료를 가로막는 의료보험제도였다. 의권수호라 하면 의료사고를 당한 가족들의 난동을 떠올리기 쉬우나, 그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거의 모든 진료행위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보험제도의 부당한 강제에 대해 의사들은 넌덜머리를 낸다.

이 대목에서 의사들은 우리 의료체계가 '사회주의 의료'냐고 항변하는 엉뚱함마저 보인다. 아마 의학적 원칙에 따른 진료의 자율성이 존중되지 못하고 획일적 기준으로 재단되는, 부정적 현상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제 의약분업은 의사들에게, 의료보험제도를 핵심으로 하는 제도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비화하였다. 먼저 대폭적인 수가인상 요구가 제기되었다. 보험 약가의 인하를 통해 확보된 돈으로 수가가 인상되기는 하였으나, 당시 분위기에서 의사들을 무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또 의사들은 수가인상의 재원이 되는 의료보험재정을 확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의약분업 추진과정 내내 정부에 대한 불만은 쌓여있었고, 수가인상과 보험재정확충의 요구가 제기되면서 [의사 대 정부]의 대립이 형성된다. 여기서 정부란, 의약분업의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와 보험수가를 물가관리대상에 포함시켜 인상을 반대해온 경제부처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과연 의약분업이 만병통치약인가?

의약분업이 처음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는 오남용의 책임소재를 두고 의사-약사 사이에 공방이 있었다. 즉, 당시에는 임의조제의 주체인 약사에 대한 흠집내기가 주를 이루었다. 의사들의 이런 태도는 한동안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방향각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약의 오남용은 여러 요인으로부터 유발된다. 의약분업을 통해 직접적 효과를 볼 수 있는 요인은 의사-약사, 즉 공급자에 관련된 것뿐이다. 우리사회, 우리민족에게는 '약은 독'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문화적 인식이 있다.
또 신뢰받지 못하는 의료체계로 형성된, 진료와 투약의 오랜 관행은 쉽게 개선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의약분업 실시가 곧 약의 오남용을 근절하는 해결책은 아닌 셈이다. 한편, 의약분업이 의료비의 증가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회의적이다.
의사들은 이를 근거로 의약분업 자체를 문제삼기 시작한다. 약품 오남용을 막지도 못하는 의약분업이 왜 필요한가. 초기의 약사 흠집내기는 이제 의약분업 흠집내기로 바뀌었다.

물론 의사들의 반론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면도 없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약의 오남용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되므로, 의약분업이 약의 오남용을 하루 아침에 완전히 근절시킬 수는 없다. 의료체계의 정비 특히 1차의료기관의 정립, 소비자의 의식변화 등이 병행되어야만 하며 이는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또 여러가지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의약분업으로 의료비가 감소할 것이라고 쉽게 전망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현재 의사들의 의약분업 정부안 반대는 순수한 의미의 문제지적과 보완요구라기보다는 이미 '정치적' 반대의 성격이 짙다. 이렇게 진행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즉 약사들과 정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조차 지니고 있지않기 때문이다. 과연 약사들이 임의조제를 안 하겠느냐, 정부가 단속한다고 하는데 과연 단속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같은 비관적 전망 외에 또 다음과 같은 정치적 의도가 녹아있다. 의약분업 정부안의 권위를 훼손함으로써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유리한 협상고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정부의 경고 속에 병협과 의협이 의약분업 시범사업을 강행하려 하는 것, 휴진이나 폐업을 결의한 것, 추가재정 확보와 같은 정부의 준비미흡을 공격하는 것은 모두 그런 맥락이라 이해할 수 있다.

작년 11월 15일의 실거래가제 실시로 약가마진은 의약분업에 앞서 이미 소실되었다. 동네의원은 의약분업이 되지 않으면, 즉 처방료의 인상이 없다면 더욱 손해를 보게 된다. 의사들은 의약분업 개혁을 유실시킨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기세는 좀처럼 누그러질 것 같지 않다. 말하자면 의사들은 파국을 불사하겠다는 태세이다. 희미하나마 [의사 대 정권] 사이에 전선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정부가 의사들을 회유하고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의약분업 조항 몇 개를 손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대폭적인 수가인상과 같은 '당근'이 있어야 하나 현정권과 정부에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의사집단에게까지 한가롭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탓이다.


의약분업 반대하는 의사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처음에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현재의 의사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먼저 의사들의 행동을 객관적 발전단계의 필연적 산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제 의사라는 기득권세력도 몰락하는구나 하는 카타르시스나 허준, 슈바이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들이대며 의사들의 인격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의사들은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차라리 성직자들만 의사를 시키라고 비아냥댄다. 의사들은 부자이므로, 그들의 주장과 집단행동은 원천적으로 죄악이라는 관점은 본질을 통찰하는 데 이롭지 않다. 사실 의사들이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지극히 심오한 문제제기이다.

즉, 의사노동의 본질적 성격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의약분업으로 불거진 이번 사안은 그런 수준에서 이해될 성질은 아니다.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변수를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다. 의사들의 소득을 저하시키는 것이 의약분업의 본래목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의사들의 소득을 상수로 두고 출발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의사들은 원래 돈을 많이 버는 사람으로 전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 의사와 가난한 민중 사이의 계층적 갈등으로만 해석되는 경향을 피할 수가 없다.

바야흐로 한국사회도 오랫동안 누적된 보건의료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다. 의사들은 그 모순의 직접적, 인격적 담지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사들의 '운동'(저항이든 반발이든)이 어떤 식으로든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사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언젠가 한번은 터질 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의약분업을 계기로 해서 폭발하였을 뿐이다.


변화되는 상황에서 낡은 의료시스템이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그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사회변화의 일반성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료제도의 변화도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기존 시스템(체계)이 붕괴하고 새로운 체계가 구축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보건의료의 역사를 간단하게 되돌아보자. 과거에는 의업을 통한 엄청난 부의 축적도 가능했고, 민중에게는 가까운 병의원의 존재자체가 고마울 정도였다.
의사와 약사, 병의원과 약국이 경쟁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였으나, 개별단위 사이에 큰 충돌은 없었다. 의료의 '혜택'에서 소외된 대다수 민중만이 유일한 피해자였고,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조용히 시간은 흘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의사, 약사, 한의사 등 공급자의 폭발적 증가, 그에 따른 보험진료비의 급상승과 보험재정의 위기, 의료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대한 요구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급자들은 점점 격화되는 경쟁과 저하되는 보상수준에 위기의식을 느껴왔다. 민중은 높은 개인적 부담에 비해 실망스러운 수준의 의료서비스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기존 시스템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장애가 생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체계의 합리화와 정상화, 낭비적 요소의 제거, 효율성 제고를 위해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였다.

이런 현상은, 이른바 총량적 개념으로 접근한 기존 사회발전전략이 한계를 맞이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내실과는 무관하게 실적위주의 외형적 결과와 맹목적인 산출 극대화를 중시하던 가치체계는 붕괴해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최저가 입찰제가 양산하는 건설비리나 학교급식의 저질쇠고기 공급과 같은 사례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이런 예들과 우리 의료보험제도는 그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의료보험 역시 진료의 질이나 적정성이라는 내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전국민'에게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있다는 정치적 보호막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또 의사를 비롯한 의료공급자들의 편법과 비리가 보편화되었다. 권위주의적 정부와 무능하고 게으른 공무원, 권리의식이 낮은 민중, 그 사이에서 편법과 부정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만 바쁜 업자들. 과거 사회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우리 사회의 일반적 문제들을 보건의료에 대입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의사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의학적 원칙에 따른 소신진료, 이른바 '적정의료'에 대한 요구가 기존 의료보험제도의 낡은 틀과는 더 이상 화해할 수 없게된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현재의 의료서비스 수준에 만족할 수 없다. 허울좋은 전국민의료보험, 저수가-저급여체계, 그 이면의 편법과 비리의 보편화는 개발독재시대의 총량적 개념에 의한 사회발전전략의 전형적 예이다.
특히 보건의료부문 예산으로 표현되는 공적 책임은 최소수준의 복지를 지향하는 잔여적 복지개념에 의해 극도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비유하자면, 그동안은 주전자의 뚜껑이 잘 닫혀 있었는데 이제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수증기의 에너지를 감당하기 어려워져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의사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은 의약분업을 계기로 드러난 것과는 무관하게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경과해야 할 지점이었다. 결국 의약분업이 추진되어야 했던 이유도, 수가인상을 요구하는 의사들의 시위도, 의료의 질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는 것도 모두 기존 의료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는 현실의 단면이다. 의사들의 소득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으로는 현 시스템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의사들의 투쟁은 옳은 것인가?

그렇다면 객관적 발전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므로 의사들의 투쟁은 옳은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실' 기술과 '가치'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의사들의 '투쟁'은 수구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반민중적'이라는 평가는 선험적 규정일 위험이 크다. 또 '반개혁적'이라는 평가는 동어반복에 가깝다. 왜냐하면 의사들의 '투쟁' 자체가 의약분업, 곧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새로운 시스템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의사들도 그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시민단체나 정부를 설득하고 협상하는 것이 의사와 현재의 '개혁' 모두에 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주저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이 두려워, 거부부터 하고보는 기존 의사사회의 행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사사회를 찬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의사들의 '투쟁' 안에는 여러 가지 경향이 혼재되어 있다. 좋았던 과거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독점과 배제의 권위에 안주하려는 경향과 새로 구축되는 체계를 예감하며 합리적 변신을 모색하는 경향이 연합하고 있다. 현재는 이른바 '의권'이라는 개념에서 보듯이, 전자의 영향력 속에 놓여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의 의사사회를 조직하고 대변하는 힘은 분명 후자이다. 이는 '386'이니 '젊은피'니 하는 사회 일반의 '권력이동'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다. 이들은 기존 시스템의 문제를 말그대로 체화하고 있으며, 새로 구축되고 있는 보건의료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상을 갖고있다. 또 이들은 선배세대와는 달리,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내용의 권위를 확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기존 의사집단의 가치체계로부터 단절하여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약품 오남용의 가능성을 문제삼으면서도 사회적으로 기정사실화된 의약분업에 반대부터 하고보자는 지금의 모습은, 사실 기존 의사사회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신진세력들은 현재 의사들의 주장이 한계가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다만 현재의 정치적 계기를 의사사회 내외부에서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투쟁'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다른 부문에 비해서 이들이 의사사회 내에서 주도적 지위를 점유하는 속도는 느리겠지만 그러한 경향을 되돌릴 수는 없다.


민중적 보건의료체계를 위하여

새로운 의사집단은 기존 의사집단과는 분명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기존 의사집단은 사회적 관계자체를 형성하지 못하면서 '독점과 배제의 권위'에 머물렀다. 그것은 오랜 파시즘 사회를 거치며 국가의 권위 안에 안주하던 의사집단의 존재방식이었다. 반면, 신진세력이 주도하는 의사집단은 사회적 합의를 확보하며 권위를 창출하고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의사사회의 부르주아 혁명!). 현재 시민단체가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의사와 민중 사이에는 공급자와 소비자, 전문가와 일반인의 대립이 어떤 수준으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 새로운 의사집단은 현재의 주도적인 정치질서를 자기기반으로 삼으려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정치는 보건의료부문에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쓸 것이다. 그것은 제아무리 신자유주의 정부라도 피할 수 없는 경향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가동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환경에서 새로운 의사집단은 국민의 건강을 명분으로 자기지위를 구축할 것이다. 즉 새로운 의사집단은 새로운 시스템 안에서 정부 및 민중과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시스템은 민중적 보건의료체계와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존 시스템의 붕괴와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을 추동하고 있는 힘은 의료체계를 합리화하고 정상화시키는 것, 낭비적 요소를 제거하고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이지, 보건의료의 자본주의적 모순의 폭발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보건의료개혁을 열망하는 민중의 역량은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사집단이 보건의료의 민중적 개혁에 기여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보인다.
그들의 문제의식이 출발한 것도 민중의 건강현실 때문이기보다는 기존 시스템의 장애 속에서 드러난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존 의사집단과는 달리 훨씬 세련된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시스템의 전화라는 과도기적 국면에서 그들은 종종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겠지만 결국 새로운 시스템의 구성요소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보건의료의 성격과 보건의료체계가 조직되는 방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과 그 속에서 규정되는 정부, 민중, 의사의 관계는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질의 모순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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