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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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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났던 눈동자들을 기억하며

『스물네 개의 눈동자』, 쓰보이 사카에 지음, 김난주 옮김, 문예출판사 (2004)

문설희 |
얼마 전에는 문득, ‘카싼드라(Kassandra)’가 생각났다. 그리고 생뚱맞게도, 우리가 그 꼴이 아닌가 싶어졌다. 신통한 예지력의 소유자였음에도,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는 이가 없어 결국 괴로움에 미쳐버렸다던가 죽음을 맞았다던가하는 고대의 예언가 ‘카싼드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전세계 민중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현시기 위기는 맑스주의의 전화를 통해서 극복된다”...어언 십 년째 ‘과학적’인 분석을 해왔다지만 어째 점점 더 초라해지는 것만 같은 우리네. 이 둘을 연관짓는 것은 너무 비관적인 걸까? 너무 냉소적인 것일까?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슴이 냉랭해진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는, ‘처음’을 생각하게끔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금의 나를 있게 했던 ’처음‘, 나름의 기대를 걸어보게끔 했던 소박하지만 진실된 ’원칙‘ 같은 것을 하나하나 되짚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가슴이 풍성해지곤 하니까. 그래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손에 쥔 책이 『스물네 개의 눈동자』이다.
작년 가을 접하게 된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뛰어난 반전문학으로 손꼽히는 동화이지만, 내게 있어선 반전의 메시지를 포함하여 ‘현실에 발 딛고 선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기도 하였다. 운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론적인 부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고나 할까.

1928년 한적한 갯마을의 작은 분교에 막 부임한 젊은 여선생과 12명의 학생들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수업시간, 출석을 부르며 하나하나 눈을 맞춰나간 12명 아이들의 스물네 개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가슴에 소중하게 담게 된 오오이시(大石) 선생. 그녀는 교사라는 위치에서 자신의 삶과 아이들의 삶을 진실하게 관계 맺고자 노력해가면서 현실의 모순을 깨달아간다.


『언젠가 고토에는 글짓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항상 분해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 대신에 추운 겨울날에도 무더운 여름날에도 바다로 일하러 나갑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엄마한테 효도하고 싶습니다.

오오이시 선생은, 이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마치 여자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듯 자책하고 있는 고토에. 그 자책감이 고토에로 하여금 무슨 일에든 소극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어봐야 소용이 없다. 고토에는 이미 6학년에 학업을 그만두는 자신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고토에.”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장하다고 말하려다 그것도 그만두었다. 안됐다는 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할 수 없었다.
“안타깝구나.”
가장 적절한 말이기는 했지만, 고토에는 그 한마디에 기분이 가벼워진 듯했다. 삐죽하게 나 있는 커다란 앞니를 드러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신 좋은 일이 있어요. 내후년에 도시에가 6학년을 졸업하면, 이번에는 나를 바느질 집에 보내준대요.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면 오사카로 고용살이 가서, 월급 받으면 전부 내 옷 살거예요. 우리 엄마도 그랬거든요.”
“그 다음에는 시집을 가겠단 말이니?”
고토에는 수줍은 듯이 쿡쿡 웃었다. 이미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운명이기라도 하듯 고토에는 순종하고 있었다. 고토에의 그런 모습에 벌써부터 주어진 운명을 두말없이 받아들이는 여자가 엿보였다. 스무 살이 되면 그녀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 한 장에 고향으로 다시 불려와, 위독해야 할 엄마가 미리 손을 써둔 대로 열심히 일하는 농사꾼이나 어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랬다. 그리고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다섯 번째까지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그게 마치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듯 남편 앞에서는 기가 죽어지냈다. 그런 엄마의 자책감이 고토에에게 옮아 그녀 역시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오오이시 선생님은 답답하기만 했다. 고토에가 고등과로 진학한다고 해서 가난한 어부 일가족의 사고가 바뀔 리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도리밖에 없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이래도 괜찮을까 싶은 의문이 솟구치면서, 《풀의 열매》를 만든 이나가와 선생님이 떠올랐다. 역적 취급을 받으며 형무소에 갇혀 있는 이나가와 선생님이 가끔씩 옥중에서 깨알같은 글씨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하는데, 별 내용이 없어도 학생들은 절대 읽을 수 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런 것일까, 교실 안에서 교과서를 통한 관계밖에 허용되지 않는 선생과 학생. 학생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 선을 넘어오면 선생은 반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함정에 빠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비밀을 탐색하려 눈을 붉히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지켜내고 싶었던 오오이시 선생은 공황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내며 숨막혀한다. 그녀의 아이들을 불행한 삶으로 내모는 시대의 모순에 대해 분노하고, 교사로서 너무나 당연한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이 봄에 징병 적령이 된 젊은이들은 경매장에 나온 채소와 무처럼 보고서와 대조되고, 병종(兵種)이 정해졌다.
(…)
방금 전에 헤어진 옛 제자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짐승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검사관 앞에 선 젊은이들. 군인 묘에 하얀 묘비가 늘어날 뿐인 요즘, 젊은이들은 그 묘비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묘비 이상의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아니 그렇지 않다. 큰 관심을 보이고 칭찬하고, 똑같은 길을 따르는 것을 명예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길, 남자들이 걸어야 하는 길. 그리고 여자는 또 어떤가.
(…)
고등학교에 올라가지 않고 장래 신부가 될 꿈을 품고 식모살이를 떠났던 고토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토에는 시집을 가기도 전에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폐병이었다. 뼈하고 가죽만 남아서 광에 혼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꽤 오래되었다.
(…)
후지코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았다. 니타가 후지코를 만났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은, 화류계 여자로서의 후지코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 후지코는 팔려간 것이었다. 후지코의 부모는 가구나 옷가지처럼, 오늘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 후지코를 팔았다. (…)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마쓰에나 후지코나, 여자가 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15년 간의 전쟁이 끝나고 선생은 분교로 다시 부임한다. 젊었을 시절에는 ‘작은돌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 그녀는 ‘울보 선생님’으로 통한다. 귀여운 학생들 사이에는 옛날에 가르친 제자의 자식이나 동생들이 있었는데, 그네들을 볼 때마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게된 눈동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전쟁통에 죽어 학교 옆 동산에 초라하게 묻혔고, 그나마 살아 돌아온 아이는 두 눈을 잃었다. 여자아이들 중에도 공황과 전쟁의 시대에 병들고 지쳐 살아남지 못한 아이가 있는가 하면 행방이 묘연하게 된 아이도 있다. 제자의 자식들이나 동생들을 보면서 회한으로 눈물을 흘리는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울보 선생님’이란 별명을 붙인다. 울보 선생님의 심정이 곧 작가의 마음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이름도 없고 가난한 민중의 아이들이 힘들게 전쟁과 공황의 시기를 살아가는 모습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안타까움으로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그토록 힘겹게 하는 전쟁과 가난, 그리고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이들에 가해지는 탄압을 고발한다. 그리고 역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삶을 일구어내는 아이들, 즉 시대의 민중들의 강한 생존력을 따스하게 그려낸다.
꾸밈없지만 매력적인 필체로,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를 전하는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읽으면서 울고 웃다보면 어느덧 가슴이 풍성해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진실한 관계맺음, 애정에 기반한 적극적인 개입...그리고 그러한 것에서 시대의 모순을 끄집어내는 삶에 대한 진지함....결국 현실에 발 딛고 선 운동은 소박하지만 진실한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 그러한 것들이 새삼스레 가슴 속 깊은 곳에 다시금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인 쓰보이 사카에는 그 자신이 가난한 민중으로 살아가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청년들과의 교제를 통해 작가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사카에가 고향인 쇼도 섬 이야기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하는 터라,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받았고,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써본 작품을 시작으로 세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데, 솜씨 좋은 이야기꾼 쓰보이 사카에의 『스물네 개의 눈동자』가 혹여 냉랭해졌을 그리고 필시 지쳐있을 다른 동지들의 가슴도 풍성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이러저러한 것을 다 떠나서, 가슴 찡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촘촘히 짜여져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 중의 매력이다. 모름지기 훌륭한 동화란, 술술 읽게되고, 읽으면서 가슴이 촉촉해지게되고, 촉촉해진 가슴 위에 남는 화두가 두어 개 있기 마련이라고 했을 때,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만나지 않았다면 참으로 안타까웠을 그런 멋진 동화임에 분명하다. 나에게는 마쓰에와 나리꽃 도시락에 얽힌 이야기가 가장 가슴 찡했는데, 책을 직접 보실 동지들을 위해 그 이야기는 남겨두도록 하겠다. 이 글을 보는 분들이 모두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읽어보시길. 그리고 풍성해진 가슴으로 힘차게 살아가시길. 만났던 눈동자들을 기억하며 그/녀들과 함께 행복하시길!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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