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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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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수호'가 아닌 반미반전의 관점으로!

정희찬 |
‘독도수호’가 아닌 반미반전의 관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재편전략 비판의 현재성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반일여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3월 16일 일본의 시마네현 의회는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를 상정, 가결한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 부활을 규탄하고 독도수호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와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극우단체의 일장기 화형식,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생들의 독도농성투쟁에 이르기까지 반일과 독도수호는 지난 3-4월 동안 한국사회의 핫이슈였다.
정부차원에서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는 ‘대일외교 4대 기조와 5대 대응방향’을 발표하면서(3월 17일)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고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라고 사태를 규정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3월 23일)을 통해 “일개 지자체나 일부 몰지각한 국수주의자들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집권세력과 중앙정부의 방조 아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일본의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단호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는 중국에서 대규모 반일시위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지난 4월 9일과 16일에 걸쳐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는 수천에서 수만 명의 군중이 과거사 왜곡에 항의하면서 일본인 가게를 습격했다.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동북아는 한·중 양국의 대중적인 반일여론과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 등 현안을 둘러싼 한·일, 중·일 간 국가수준의 외교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여부, 동북아에서 한·미동맹의 위상을 둘러싼 논란(소위 ‘균형자론’)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과연 사회운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개입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일본이 한 축이 되고 남한이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에 대한 비판의 현재성을 분명하게 부각하고 있으며, 사회운동은 바로 이러한 현재적인 의미에 주목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반미반전 투쟁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도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맥락: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의 일본으로의 편입을 선포한 이후 독도는 40년 동안 시마네현에 속해 있었다. 당초 독도가 양국 간에 논란이 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1946년 맥아더 연합군 사령부가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일본의 행정권을 정지할 때는 제주도 및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명기되어 있으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될 당시에는 독도에 대한 영토의 포기가 명시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한국정부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은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해양선언”을 통해 이른바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1953-54년 울릉도 민병대와 일본 해상보안청의 무장충돌을 거쳐 1956년 정식으로 한국의 경찰이 경비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다.
일본정부는, 독도가 카이로 선인이나 포츠담선언에서 규정하는 ‘침략에 의한 약취(掠取)’ 지역이 아니라 1905년 ‘무주지 선점’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고 오히려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설정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정당한’ 주권행사를 제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이미 독도는 ‘무주지(無主地)’가 아니라 울릉도와 더불어 조선의 영토였음이 각종 고지도와 일본막부의 인정 문서를 통해 증명된다는 점1), 또한 1905년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귀속된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은 1954년 무장충돌 이후 독도영유권에 대한 시비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가리자고 줄곧 제기하면서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독도영유권 분쟁은 무엇보다 냉전기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과 맺고 있었던 불가분의 관계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직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급속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루즈벨트의 ‘하나의 세계’ 구상을 폐기하고 트루먼의 ‘봉쇄정책’을 실행한다. 반소·반공을 기치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복구에 주력하면서 패전국인 독일(서독)과 일본은 오히려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세계구상에서 ‘교두보’로서 새롭게 평가되고 미국은 이들 국가의 경제부흥을 물심양면으로 총력 지원하게 된다. 전후 책임보다 시장경제로의 재통합과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전략적 가치에 훨씬 무게가 실린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패전 이후 계속된 미군정을 종식하고 주권을 회복한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전면강화와 단독강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소련의 원폭실험(1949.9), 중국에서 국민당의 패배와 공산당의 인민공화국 수립(1949.10) 등 일련의 정세 속에서 아시아로 확대됨에 따라 일본에 대한 강화조약은 소련과 중국을 배제한 ‘단독강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당시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의 평화운동은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들과의 전면강화, 중립·비무장, 군사기지 제공 반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보수우익 일색이던 일본의 지배계급은 민중의 평화와 비무장을 향한 염원을 오히려 재군비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억압하고 재군비(경찰예비대 및 군대의 창설)를 공공연히 거론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군사기지와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미군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는 일본이 미국의 긴밀한 정치·경제적 파트너로서 적극적인 반공의 보루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조선과 중국 등의 아시아 인민에 대한 책임문제가 유보된 상태로 체결되었다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한국이 처음에는 ‘승전국(연합국)’의 지위에서 이후 누락되는 과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후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의 자격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제국주의 비판의 현재성: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

이번의 시마네현 의회의 조례제정은 일본의 ‘우경화’, 즉 국가주의/민족주의의 강화가 현재진행형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2)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의 특징은 대부분 주변 국가와의 ‘과거사(근현대사) 왜곡’ 혹은 ‘섬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세력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극우세력의 단골메뉴는 특히 이른바 ‘북방영토 반환’ 문제3)를 둘러싸고 러시아에 보다 강경한 정부의 태도 촉구하거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비판하는 전후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구 소련과 러시아와, 후자의 경우는 총리 및 각료,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한국·중국 등과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곤 한다.
대표적인 극우인사로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된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무엇보다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의 의무화였다. 현재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주변국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줄곧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올해 일본의 극우세력은 ‘잘못된 60년’을 청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자민당 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보수세력은 극우파의 각종 활동을 묵인·방조하거나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우경화’를 추진하는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로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군국주의 부활’로 지칭하는 현상은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를 과거 ‘대일본제국’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 지배계급의 의도를 피상적으로 분석한 결과이다. 일본의 지배계급이 의도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상징(국가/국기/영토)을 중심으로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는 단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종전 직후 일본의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관통하는 주된 쟁점이다.
일본 내 우익세력의 목청이 커진 이유는 장기불황과 청년층의 실업자 급증,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총평-사회당 블록을 주축으로 한 이른바 ‘혁신세력’의 몰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그동안 극우세력이 꾸준히 주장하던 방향과 일맥상통하게 접근하면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쟁점이 이른바 ‘보통국가론’인데,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을 금지하는 현재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헌법은 미점령당국(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SCAP)4)의 초안에 기반하여 1946년 11월 공포된 이른바 ‘평화헌법’이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정부에게 천황제를 (상징적으로) 유지하는 대가로 자유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제시한 원칙 중의 하나가 이른바 ‘전쟁의 포기’였다. 헌법 9조에는 전쟁의 포기와 육·해·공군 등 전력(戰力)보유 금지를 명문화하고 있는데5) 이는 한편으로 천황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억제책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 당시 소·중·미·영 연합국에 의해 합의된 일본의 비무장화가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평화헌법은 약 60년 동안 유지되어왔는데, 보수세력의 개헌시도는 이미 1950년대 미국의 적극적인 방위분담 요구에 발맞추어 줄곧 제기되어왔지만, 항상 혁신세력(사회당, 공산당)이 개헌저지선(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잠복하거나, 개헌을 반대하는 국민여론에 밀려 일시적으로 제기되는 정도였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일본 민중의 놀라운 반전여론인데, 사실 그동안 보수우익 세력의 개헌을 중단시킨 것은 1959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 1966년 베트남전 반대투쟁 등 노동자의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과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한 시위로 드러난 민중들의 반전투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사회당의 침체와 급격한 몰락 (이는 일본 대중들의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후 일본의 정치지형이 ‘보수-혁신구도’에서 자민당-민주당 중심의 ‘보수-보수 구도’로 재편되면서 개헌의 가능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월 15일 <마이니치> 신문에 이른바 신헌법의 대강이 보도되었는데, 여기에는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의 명문화는 물론이고 천황의 국가원수화, 국방의무의 부과, ‘유해도서’의 출판과 판매의 금지 등이 포함되어 명실상부한 천황제 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고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북한이나 중국의 명시적이거나 잠재적인 위협을 강조하며 미국과의 연대를 ‘보통국가화’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미 미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시도를 지지하고 있는데 이미 1982년 나카소네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과 굳건한 반공동맹을 맺은바 있거니와 1990년대 들어 미-일 안전보장 공동선언(1996), 미-일 신방위협력지침(1997), 주변사태법(1999) 등을 통해, 미·일 안전보장체제의 필수불가결성을 역설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본틀로 규정하는가 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유사시’ 주일미군과 공동으로 일본의 자위대가 개입할 단초를 마련함으로써 미·일 관계는 ‘21세기의 지도력 분담’(power-sharing)을 지향할 정도로 강화되어왔다.6) 일본은 또한 이라크에 자위대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미국의 안보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3월18일 미국의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일본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일본정부의 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연내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일본의 시도는 UN 개혁에 대한 충분한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다수 회원국들의 요구에 의해 무산되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의 ‘의지연합’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지지와 참여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냉전 시대부터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요구해왔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현재 일본의 ‘우경화/재무장화’는 세계적인 수준에서 공동의 방위역할 분담을 추구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 나아가 세계전략 속에서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대한 반대,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비판, 나아가 ‘무한전쟁’과 ‘무한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사회운동의 반전-대안세계화의 과제 속에서 위치 지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비판하지 않는 ‘반일’은 민중의 생존을 담보로 추진되는 현재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간과, 내지 은폐하고 오히려 민중의 시선과 관심을 오로지 과거로만 맞춘다는 점에서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민족국가에서 영토와 국경의 의미: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부르주아의 탄생

뿐만 아니라 ‘독도수호’라는 논리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민족국가의 형성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영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향후 사회운동의 발목을 잡는 지배계급의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토주의’는 특정한 지역의 인구와 자원에 대해 국가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권의 관념을 모사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영토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민중들의 보편적인 권리와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의 ‘영토주의’는 대외적으로는 다른 국가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 독립성을, 대내적으로는 그 어떤 권위라도 도전할 수 없는 초월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중들 스스로의 발언과 조직화를 가로막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기제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민족-국가의 등장은 순수한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도시국가 모델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혹은 ‘한자동맹’을 매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독일의 자치도시가 그 전형), 순수한 영토주의를 대변하는 제국 모델 (여기서는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원형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결합됨으로써 가능했다. 최초로 근대적인 형태로 자본과 영토주의를 결합한 국가는 엘리자베스 2세 이후의 영국이었는데 통화의 안정에 기여한 왕립증권거래소의 설립(1560-61)은 이른바 ‘총과 돈의 동맹’을 의미했다. 이후 영국은 산업적 팽창과 영토적 팽창(해양과 非유럽 세계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주도하며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자본은 민족국가 안에서 강력한 보호자이자 동맹자를 발견했고, 국가의 지배자들은 자본의 안정적 유치를 통한 산업적 팽창이 곧 국가의 부의 증대로 귀결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7) 영국이 성공을 거둔 자본과 영토주의의 성공적인 결합은 18세기 이후 영국을 따라잡으려는 유럽 열강에 의해 모방되었으며8) 20세기 중반 이후 식민지의 경험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성립한 민족-국가는 경계와 영토라는 제도를 통해 민족주의라는 허구적 종족성의 신화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즉 현재 국가의 경계와 경계는 자연적인 것이며 이 범위 내의 인구집단들은 초-역사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의 ‘자본가 계급’을 포함하는 부르주아, 즉 정치, 경제, 문화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진짜 부르주아들은 모두가 국가 부르주아이며, 이들은 국가를 민족 형태로 재구성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의 지위를 오직 그 안에서만 유효한 방식으로 부여하였다. 여기서 전제는 국가의 등장에 앞서 존재했던 초역사적 집단으로서 ‘민족’에 대한 충성/봉사이며, 이는 곧 애국주의/민족주의라는 신념을 통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모두에게 부과되는 ‘의무’가 되었다.9)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애국주의/민족주의의 ‘문턱’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으며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전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붕괴시키고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켰다.
민족-국가 모델의 이식은 매우 폭력적인 과정이었는데 20세기 중반 식민지들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할 때에도 경계와 영토라는 관념은 그대로 기계적으로 수용되어 다양한 주변부·반주변부 국가들이 종교적·종족적인 분할을 따라 서로 분쟁을 벌이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카슈미르나 팔레스타인처럼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복수의 집단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은 2차대전 이후 만성적인 분쟁지역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기존의 국가가 사실상 ‘해체’ 된 이후 인종적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등 극단적인 폭력이 지배하기도 하였다.
세계화 시대 ‘경계’의 의미는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경계’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집결하는 중심부와 빈곤과 기아, 그리고 AIDS와 같은 끔찍한 폭력에 노출된 주변부를 가로지르는 ‘요새의 성벽’과 같은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자와 여성, 농민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기업들의 각종 투자에 의해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속에서 호황을 거듭하는 중심부의 금융시장의 혜택은 극소수의 ‘주주’에게만 천문학적인 부의 형태로 집중될 뿐이다. 사회의 최상부에 위치한 부르주아에게 더 이상 국경의 의미가 남아있지 않지만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려는 노동자들에게 국경은 배제와 억압의 대표적인 장벽으로서 그/녀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하고 시민권을 부인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바로 오늘날 민중들을 극한적인 생존의 위협으로 몰고 가는 영토/국경에 대한 지배계급의 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독도수호’는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없다!
-한·일 지배계급이 공명하는 ‘미국과 군사동맹’이라는 암묵적 카르텔

우리는 영유권 주장의 논리가 첫째는 근대국가의 영토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지배계급의 동원전략에 조응한다는 점, 둘째는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공명하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남한의 지배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운동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독도수호를 위한 캠페인을 반대한다.
‘영토주의’에 대한 호소는 내부의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과 봉쇄를 사전에 봉쇄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의 청산은 해방된 조선에서 해방 직후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 해체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 의해 폭력적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군정이 필요로 했던 것은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구 지배계급의 부활을 꾀한다. 조선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총독부, 경찰, 군대)의 관료들은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의 역사적 기원을 형성한다. 즉 역사적으로 한국의 지배계급에게 제국주의 전략에 동참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공·발전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 남한의 집권세력들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은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를 청산하기는커녕 유지·온존하는데 급급했던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전후 처리의 부차적인 산물에 다름 아니다. 미국은 전후 일본의 구 지배계급에게 면죄부를 부여했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인적청산에 그치지 않는 착취와 수탈로 점철된 사회구조의 변혁을 동반한 ‘과거사 청산’은 결국 대다수 민중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던 구 지배계급의 복권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최근 각종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밝혀지는 바에 의하면 역대 한국의 정권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하여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희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측의 논리를 얼마나 수수방관했는지 드러난다. 19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당시 박정희 정권이 ‘청구권’을 포기한 결과 얼마나 많은 징용노동자, 정신대 할머니들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가? 김대중 정권은 한·일 新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독도를 양국의 중간지역으로 설정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일본을 방문하면서 “‘과거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던? 언제나 말로만 일본을 규탄하던 지배계급이었다. 오히려 이들은 일본의 보수화되고 우경화된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의 신성함을 강조하면서 패권을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부담을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남한의 지배계급과 일본의 우경화가 암묵적으로 공명하는 동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이다. 보수적인 신문의 칼럼이나 사설에서는 미일동맹보다 강고한 한미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출되고 있지 않았던가? “독도는 우리땅” 식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회운동은 지배계급의 전략에 종속되어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고,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나아가 그들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려면, 일본의 우경화를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 이에 공명하는 남한의 지배계급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군사동맹이라는 동아시아 지배계급의 암묵적 카르텔이야말로 오늘날 민중들이 투쟁해야할 대상이다!

동아시아에서 반미반전의 국제연대를 구축하자!

사회운동은 제국주의라는 지극히 현재적인 쟁점을 한국과 일본 중 누가 더 미국의 충실한 파트너가 될 것인가 하는 양국의 지배계급의 경쟁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드러내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에서 오늘날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그 책임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극우세력은 과거 일본 민중이 반핵·반전 여론이 드높을 때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극소수의 집단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를 막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재편과 일체의 전쟁과 군사적 폭력에 반대하는 민중의 단호함이다.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를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 속에서 설명하며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 이라크 철군투쟁 등 당면한 반전반미투쟁을 선전하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를 끌어올릴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의 제국주의 재편전략과 미국과의 파트너를 꿈꾸는 한국과 일본의 지배계급의 암묵적인 공명을 ‘아래로부터’ 분쇄해가는 민중들의 반미반전투쟁이 오늘날 가장 유효한 제국주의 비판이며 사회운동이 가장 우선적으로 착목해야 할 지점임을 잊지 말자. PSSP


1) 애초 조선 시대 일본과의 분쟁은 울릉도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동래 어부 안용복이 일본인을 쫓아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 울릉도는 1430년 이래 왜구(倭寇)의 침략을 우려한 공도(空島)정책으로 인해 섬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17세기 후반 인근의 풍부한 어장을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하지만 지난 해 ‘경국대전’을 전거로 활용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던 ‘행정수도 위헌’ 판결에서 드러나듯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조선’이나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존재한다. .본문으로

2) 일본은 이번 시마네현의 조례제정이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1970년대 연호법제화 당시 사정을 살펴보면 지방의회의 결의가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동시에 법제화의 명분을 제공한 전례를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천황의 재위기간 중에 사용하는 연호(年號)를 법제화하는 결의가 1977년 9월부터 1978년 말까지 1170개의 시·군·면 의회에서 자민당의 주도로 통과한 이후 1978년 10월 각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이후 드디어 1979년 6월 ‘연호법’이 참의원을 통과함으로써 공표되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북방영토’란 일제가 러일전쟁(1904년) 이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획득하였으나 패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사할린 남부의 쿠릴열도(지시마 열도)의 네 개 섬인 쿠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지시마 열도 및 포츠머스 조약으로 획득한 섬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였으나 이후 1950년대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네 개 섬 모두의 반환을 주장했다. ‘북방영토’ 문제는 홋카이도에 속한 시코탄 하보마이 두 개 섬을 반환할 수 있다는 당시 소련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아직까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본문으로

4) General Head-qua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일본에서 미군정은 조선의 미군정과는 달리 내각을 통해 지배하는 간접통치방식을 채택하였다..본문으로

5) 헌법 9조 1항: “정의와 질서에 바탕한 국제평화를 열망하여, 일본 인민은 국가 주권으로서 전쟁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헌법 9조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타의 잠재적인 무력이나 육·해·공군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6) 일본은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 첫날에 3개의 ‘유사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무력공격사태법’, ‘자위대법 개정안’, ‘안전보장회의 설치법 개정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자위대의 출동요건은 “무력공격 발생·임박 및 예측사태”로 포괄적으로 규정되었고, 방위출동 명령 발동 이전이라도 자위대의 진지구축·무기용 토지· 식량 강제수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했으며, 총리 및 각료가 참석하는 안보회의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산하에 일상적으로 위기관리 대책을 연구·제언하는 전문위원회를 신설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일본 주변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주변사태법’(1999.5)에 이어 “일본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법률적 토대를 완성하였으며 관련하여 방위청 승격, 테러·괴선박 대책관련법 등 후속 유사법제의 정비와 미·일동맹의 강화 및 국제사회에서의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위한 집단자위권의 인정 등을 추진하는 데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배정호, 「일본의 안보개혁과 유사법제 정비」, 통일연구원, 2003 참조. .본문으로

7)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성립과정에서 자본과 국가의 다양한 결합의 시도로서 제국 모델, 민족-국가 모델, 도시국가 모델에 대해서는 Geovanni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Verso, 1995 3장 참조..본문으로

8)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세력은 또한 다름 아닌 가장 강력한 민족-국가들이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을 보라. 영국은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제국’이었다. .본문으로

9) 민족-국가의 역사적 형성과 ‘허구적 종족성’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민족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이론》6호 (서관모 옮김) 참조.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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