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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6.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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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와 대면할 것인가.

『래디컬 에콜로지(Radical Ecology)』,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 이후

이수열 |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와 대면할 것인가.
:『래디컬 에콜로지(Radical Ecology)』.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 . 이후.


이 수 열*| 사회진보연대 회원


*이수열은 현재 진보적 삶을 고민하기 위해 꾸린 모임에서 생태주의에 대한 세미나를 격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세미나에서는 생태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와 지적 재산권, 특허를 통한 생물 해적질에 대한 내용을 검토했고, 이후에는 사회주의 생태론에 대한 저작물들을 검토할 예정이다.

#1. 봄날의 만화방
1999년 어느 늦은 봄날로 기억한다. 농활인지, 동아리 전수인지는 갸웃하지만, 답사 문제로 동아리 집행국 동기 둘과 함께 춘천에 갈 일이 생겼었다. 아침 기차를 타려고 청량리역으로 향했지만, 한 녀석의 늦잠으로 기차를 놓쳐버렸다. 이른 시간, 녀석이 도착할 때까지 마땅히 할 것이 없던 나와 친구는 근처에 보이는 만화방 간판을 향했다. 아무 생각 없이 쥐색 철문을 당겼다. 학교 앞 만화방 같지 않은 육중한 철문, 꽉 끼였던 문이 제 몸을 콘크리트 바닥에 긁어대며 내는 세된 소리,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 어라, 뭔가 이상하다.
얼룩덜룩한 바닥, 군데군데 뜯겨나간 소파, 아무리 만화라지만 누구도 읽는 것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볼륨이 키워진 TV, 여기저기 널린 빈 라면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몸을 누인 사람들. 만화방이라고는 학교 앞에서만 가본 것이 대부분인 내가 알고 있던 만화방과는 전혀 다른 모습. 친구와 난, 순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2. 성폭력
운동 사회 내에 ‘반성폭력’과 ‘여성주의’라는 화두가 제대로 회자되기 전, 학교에서 성폭력 사건 하나가 공개되었다.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본 성폭력 가해자 공개 대자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해자는… 총학생회장.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할 만한 것이 못되는 술자리 안주 같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 선배의 말이 있다.
“우리가 보위를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 미리미리 해결해드렸어야 하는 건데......”
왜곡된 대표자 보위에 대한 관념 그 자체는 일단 제쳐두자. 그 때 우린, 정말 후졌었다.

만화방과 성폭력 사건. 전혀 매칭(matching) 되지 않는 두 가지 경험. 개연성도 없고, 시간도, 상황도 전혀 다르지만, 그 전혀 다른 두 가지 경험에서 내가 얻은 건,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범한 진실이었다.
춘천 가는 기차, 그 안에서 청량리 역전의 만화방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스물을 갓 넘긴 아이가 이해하고 있는 세상의 크기란 너무도 작았다. 내가 알고 있던 만화방은 그곳에서 전혀 다르게 재현되고 있었다. 그곳에는 녹차 티백(tea bag)도, 구룩구룩 소리를 내는 커피메이커도, 뮤직비디오와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여주는 커다란 벽걸이 TV도 없었다. 그들에게 만화방이란, 만화를 보며 삶의 여유를 찾는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값싸게 잠자리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생존의 공간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아니 정확히 말해 그런 눈을 가질 수 있도록 살아야한다는 소중한 진실을, 역전의 허름한 만화방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첫 번째 경험이 내게 ‘삶의 자세’를 기쁘게 가르쳐주었다면, 두 번째 경험은 내가 세상을 더 이해하지 못한다면 ‘억압자’의 위치에 남게 될 것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든지 누군가를 억압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을까? 혹시 애써 외면하고 있진 않을까? 동지에 대한 배신감,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자괴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은 떠나가야 했을까? 우리는 우리의 세 치 혀로 그들에게 또 얼마나 많은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나. 그토록 피억압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해석해온 우리들은, 어째서 우리 스스로가 구조적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그 조그만 가능성을 열어 둘 수는 없었을까?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 성폭력 문제뿐이었나? 장애, 이주, 비정규직. 그들에 대한 무지로, 혹은 나와 다르다는 생각에 그들의 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 우리는 진보의 가면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억압해 왔나. 더 이상 참지 못할 수준이 되어버릴 때까지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서 있었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들면,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한 듯하다.
자본주의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의 자연 정복’은 인류 진보의 척도가 되어왔다. 자연에 대한 정복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공유지에 처음으로 나무 말뚝이 박힌 이래 그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빨라져, 이제는 인간의 세포에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서구의 진보주의자들은 야생을 살리고 환경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생태주의자들의 활동이, 굶주리고 집 없고 일자리 없는 사람들은 소외시키면서 백인 중산층 엘리트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더 많이 발전하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자연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굶주리고 집 없고 일자리 없는 이들의 삶이 충분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산업 발달로 인한 생태의 파괴는 그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과 함께…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에 대한 정복이 이미 통제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 버렸음을. 과학 기술의 발달이 집단적 가치를 옹호하는 쪽이 아니라, 사적 이윤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사유화되고 있음을. 그들이 순진하게 인간 진보를 상상하고 있을 때, 굶주리고 일자리 없는 제 3세계의 여성과 아이들은 썩은 물을 마시며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작년에 난데없는 폭염으로 우물이 말라버려, 가족들이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걸어가다 물동이를 인 채 황무지에서 죽어가야 했던 인도의 여성들을. 현재의 전지구적 생태위기 속에서 ‘빈곤’의 문제는 결코 우회할 수 없는 핵심적 쟁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남한의 지식인들,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달랐었나? 천성산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하라는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외침을 경제 논리로 왜곡했던 모 정당의 지지자들. 그들은 부안의 주민들이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설에 맞서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솔직히 얼마를 원하는 거냐?’는 (부안에 버리려 하던 쓰레기보다 더 더러운) 말들을 던졌다고 한다. 얼마 전 개봉했던 ‘투모로우’라는 재난 영화를 보며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네티즌들에게, 환경 파괴의 주범인 제 1세계 국가들이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거라며, 또 지금의 환경 관련 국제 협약들이 결국 제 3세계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술책이라며 준엄하게 가르치던 지식인들은 과연 생태 문제의 심각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이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만큼은 알고 있었을까? 이 영화의 배급사는 영화의 제목을 ‘모레(The day after tomorrow)’에서 ‘내일(Tomorrow)’로 바꿔, 환경 재앙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더욱 강하게 어필하는 센스를 발휘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우리는 서구의 진보주의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운동 사회 내에서조차 여성주의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보며, 환경 문제 역시 그러할 것이라 예상하는 건, 단지 나의 오버일까?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을 통하지 않고 학생들과 농활을 진행하는 생태영농 농가들을 ‘부르주아 집단’이라 매도했던 건, 다름 아닌 남한의 진보주의자들이었다.
반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YWCA의 테트리스 사건이나 읊어대며 여성운동 단위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마초들처럼, 환경운동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인식이 ‘부르주아들의 휴양림을 지켜주는 데에 생명의 가치를 팔아먹고 있다’는 무지와 편견의 수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그들에게는 거대 자본의 돈으로 백인들의 휴양지를 지키는 주류 환경운동 단체들과, 벌목을 막기 위해 불도저 앞에 자신의 몸을 던졌던 브라질의 농민들이 동일한 범주의 사람들일까? 여성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식할 수도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알아보기나 하고 비판하려는 생각조차 없는 마초들처럼 말이다.
『래디컬 에콜로지』는 급진 생태론에 대한 소개이며, 동시에 생태주의에 대한 종합적인 입문서다. 이 책은 전지구적인 생태 위기의 현실에서부터, 과학과 세계관의 문제, 생태주의의 사상과 운동의 흐름까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가 산업자본주의의 출발이었음을 보여준다. 17세기 과학혁명과 함께 등장한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던 르네상스의 세계관을 대체하였으며, 자연에 대한 통제와 지배의 윤리를 수반하여 결국 산업자본주의의 중심 교의인 자연의 상품화를 정당하고 있음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생태위기에 있어 저자는 ‘생산과 생태 사이의 모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모순’이라는 두 가지 모순을 중심축으로 분석하여, 생산과 인간 진보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고는 현재의 생태위기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러한 모순들이 각국의 역사와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의 위상, 그리고 현재의 발전 경로에 따라 특수한 근원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며, 환경 문제가 전지구적 정치·경제와의 연관 속에서 뿐 아니라 그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는 세심한 조언을 주고 있다.
조금은 매끄럽지 못한 번역과 불명확한 도표 정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진보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와 대면할 것인가.
주제어
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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