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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7/8.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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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선택’하는 사회는 멀고 험하다

김원정 | 회원,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정책연구원
얼마 전에 우연히 모 뉴스 채널을 보다가 한 공익광고에 깜짝 놀랐다. 한국수양부모협회라는 곳에서 만든 광고인데, 낮은 출산율이 이대로 계속 되면 한국은 수년 안에 아시아 소수 민족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늘어나는 중국, 인도 인구 규모와 줄어드는 한국, 일본 인구 규모를 대비시키는 화면이 나왔다. 결론은 아이는 행복이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아서 부모도 자식도 행복하자는 것이지만 실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저출산 극복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과제로 담론화되어 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구정책의 비전과 목표는 ‘지속적 국가 및 사회경제발전’이 되어야 한다는 모 박사의 주장, 저출산·고령사회에 적절히 대응해 국가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경제단체 대표의 발언, 저출산과 고령화가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미래재앙’이 될 것이라는 종교계 인사의 경고.
그뿐 아니다. 현재의 출산율로 가면 22세기 말에는 한민족이 소실할 것이라는 한 정부관계자의 협박과 한민족 경제권을 만들려면 한반도 인구가 최소한 8000만 명 이상 돼야 한다는 모 연구기관 관계자의 예측 등에서 정부를 비롯한 우리 사회 각계각층이 저출산을‘위기’로 인식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그 공익광고는 지배계급의 위기의식을 국민들에게 솔직담백하게 표현한 선전물일 뿐인데, 뭐 그리 놀라웠을까 싶기도 하다.

굳이 70-80년대 국가 주도의 인구억제정책의 담론을 끌어오지 않아도, 수출만이 살길이며 나라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 믿고 자란 우리 세대의 기억에는 한반도 지도 밖으로 넘쳐나 바다에 떨어지는 사람들을 그린 포스터,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족계획 실천으로 복지사회 앞당기자’표어 등 이른바 ‘가족계획’의 잔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자기 삶의 주체로서 출산을 통제하여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어머니의 권리 보장?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도 없다. 가족계획 속에는 말 그대로 ‘가족’을 인구정책의 실천 단위로 규정하였을 뿐 여성의 지위와 권리의 문제는 없었다. 가족계획의 목표 역시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장이 아니라 나라 발전과 경제 성장이었을 뿐이다.
그 당시의 담론과 지금의 저출산 ‘위기’담론을 비교해 보면 ‘인구억제’가 ‘출산장려’로만 바뀌었을 뿐 논리 구조, 목표와 지향이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출산통제가 출산장려로 바뀌어 온 긴 과정에서도 여전히 출산문제가 여성과 분리되고 국가와 민족, 가족과 더 친화력을 갖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까지가 소위 저출산‘위기’담론을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사회를 꿈꾸는 사람의 시각에서 비판하려는 나의 이성적인 불평·불만이라면, 결혼으로 시작된 내 생활의 변화와 그 속에서 겪는 출산을 둘러싼 환경들은 현실적인 불평·불만으로 이어진다.

임신·출산은 나에게 ‘예측 불가능한 두려움’이다. 얼마의 기간이 될지 모르는 직장과 사회생활과의 격리, 아이 엄마가 된 후 달라질 남편과 시댁·친정식구들·지인들과의 관계는 많은 엄마들이 이야기하듯 겪어보지 않고서야 미처 다 준비하고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다.
셋째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겠다는 대책도 아닌 출산장려대책을 비판하는 많은 여성들은 더 이상 ‘일이냐 아이냐’를 택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설령 질 좋은 보육시설 등 아이를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주변 요건이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아이로 인해 생길 내 삶의 변화는 이전과 쉽게 견줄만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하고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이미 가졌어야 할 아이를 갖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질문들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는 죄다 ‘아직 2세 계획 없냐’이고 몸이 좀 피곤해서 골골할 때마다‘임신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정말 몸이 안 좋은 이유가 임신해서가 아닐까 하고 있지도 않았던 인과관계를 수없이 반추하다 보면 이러다 상상임신이 되기도 하나보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지인들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가족들은 어떻겠는가. 출산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나의 가족들에게 말 그대로 폭탄선언이 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나의 ‘예측 불가능한 두려움’을 설명하고 이해시킬 언어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결혼=출산'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결혼을 하고도 출산을 기피하는 나는 마치 돈주고 뷔페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지 않는 사람처럼 매우 엉뚱한 존재일 뿐이다. 내가 내 삶의 변화를 만들어갈 권리가 있음을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충분히 납득시키기 못한다. 아니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내가 우리 사회, 결혼으로 구성된 이성애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의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언젠가 자녀를 갖게 될 ‘미래의 어머니’만 있을 뿐이다.

이쯤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의 이성적인 불평·불만과 현실적인 불평·불만을 합체하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수 십 년 간 나라 발전과 경제 성장, 가족의 행복을 위해 출산억제를 장려했던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우리의 어머니들은 출산조절을 위한 실천을 해왔다. 그것이 정말 나라 발전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하더라도 여성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한 욕구와 결합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와서 저출산이 사회 문제가 될 만큼 강한 출산억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여성들의 실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권리’의 문제로 가시화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정부와 지배계급이 국가경쟁력 강화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여성들에게 출산을 촉구하고 있는 현실은 당장 ‘아이를 안전하게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약간의 진전을 가져올지 모르지만 결코 여성의 주체적 권리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결코 단일한 생애 주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 여성‘들’의 다양한 정체성이 인정되고 그들의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국가 발전과 경제 성장과는 전혀 다른 논의 지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7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출산율 1.19 쇼크]라는 10회 기획 기사를 쓴 한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여성들의 출산장려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매우 크다는 점에 놀랐다는 후기를 썼다. 정말 오죽 하겠는가.
그 글을 보면서 효과적인 저출산 대책을 위해서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주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껏 저출산 대책 마련을 위한 설문조사, 인터뷰, 취재 등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통계화되고 각종 보고서와 언론매체에 오르내렸는가. 그러나 그러한 조사들은 ‘어떻게 해주면 당신이 더 많이 출산을 하겠냐’는 질문들이 주를 이루었을 뿐, ‘당신에게 출산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은 없었을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구성해 나갈 권리, 그 권리를 가시화하고 실현해나갈 수 있는 맹아는 이미 많은 여성들의 출산장려정책에 대한 불평·불만 속에서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정말 필요한 운동은 여성친화적인 방식으로 출산장려정책을 재구성하는 것을 뛰어 넘어 여성 스스로 재생산의 권리를 구성해나가는 새로운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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