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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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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에서 씨떼의 권리로

양창렬 | nomade02@hotmail.com
들어가며: 정상이 되어 버린 비상사태

클리시 수 부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의 방리유로 번져 나간 소요 사태가 발생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지난 17일 프랑스 경찰은 소요 사태가 완전히 진정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이 정상적인 (치안) 상황을 회복했다고 발표했다. 지배자들은 이렇게 하나의 국면 혹은 시퀀스가 끝났다고 선언하려 애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 70% 이상의 국민이 비상사태의 선언 및 그것의 연장에 찬성하면서 '비상사태는 정상적인 것이야'라고 말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된 것은 오히려 비상사태가 아니던가? 사고, 소요,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 시청자들의 '두려움 혹은 공포'라는 '정서의 모방', 비상사태 선언, 그것에 대한 인정. 이번 사건은 9.11 사태에서 우리가 경험한 '이미지화된 (공포) 정치' 메커니즘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공포 정치 및 자발적 예속 혹은 복종 논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가? 내무부 장관 사르코지의 '쓰레기' 운운하는 발언들 및 클리시 수 부아에서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두 소년의 죽음, 그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무성의한 대응은 방리유의 저조한 생활수준 및 대규모 청년 실업 문제에 휘발유를 끼얹은 것일 뿐, 이번 사건의 원인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누적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 혹은 이민자들의 반란쯤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분명히 프랑스 국적을 가진 자들 - 우리는 아마도 그들을 반은 프랑스인(fran ais)이고 반은 외국인( trangers)인 fran trangers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1) - 이 '무장경찰-국가'를 자처하는 프랑스 정부의 폭력, 백인 프랑스인들의 미묘한 인종차별 규정, 계속되는 사회 보장 예산 삭감 및 대규모 청년 실업이라는 장기적인 불안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비록 그네들이 어떠한 정치적인 모토도 내세우지 않고 제도화된 시위 문화를 보여주지 못한 듯이 보이더라도, 어떠한 주모자도 없이 순식간에 우발적으로 확산되는 폭력적 소요의 형태를 띠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봉기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이 짤막한 글에서 방리유 청소년들이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까발리고 싶어했던 프랑스의 비가시적인 차별들의 원인을 보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성찰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는 방리유 혹은 씨떼의 공간-정치적 작동 원리를 살펴보고, 그 경계에서 발명해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씨떼의 권리'의 가능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지금도 재판을 받고 있는 100명이 넘는 청소년들 그리고 강화된 불심검문 및 경찰(폭)력에 의해 긴장된 삶을 살고 있는 방리유 거주자들에게 이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빚을 지게 되었다.

방리유 그리고 씨떼: 포함적 배제의 논리

프랑스에서는 도시 외곽지역을 방리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히 방리유에서도 대규모 HLM(서민임대주택) 단지들을 씨떼(cit )라고 부른다. 일단 이 단어들이 갖고 있는 정치철학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은 현 사건의 주체들이 형성되고 있는 '장소'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방리유(Banlieue)라는 단어는 ban과 lieue의 합성어이다. 옛 게르만어에서, ban이라는 단어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하는 동시에, '주권자의 명령 및 휘장'을 뜻하는 단어였다. 옛 프랑스어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ban이란 proclamation, 즉 포고령인 동시에, 역사적으론 추방을 의미했다.2) 그리고 lieue란 거리의 단위로서, 4km에 해당한다. 따라서 방리유란 'ban의 법이 실행되는 도시 주변 4km 내의 공간'을 의미한다. 물론 오늘날 4km라는 규정은 더 확장되었으며, 법의 실행 역시 아감벤의 말을 빌자면 포함적 배제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따른다. 우리는 이 단어의 정의 자체 내에서 도시와 그 주변의 배치 문제, 그리고 그 공간을 구획·배치하는 원리로서의 법 혹은 포고령의 문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권이 실행되는 패러다임의 한 형태인 방리유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방리유는 어떤 역할을 해 왔던 것인가? 그것은 도심지(중심으로서의 도시)의 외곽이자 하위도시 역할을 해 왔다. 방리유는 단순히 교외지가 아니라 '외곽'이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도심지를 보호하는 성곽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필립 아리에스는 도시의 경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이것은 전시에 성벽 역할을 하기도 했음을 밝혔다.3) 바로 이런 지역에 거주하는 방리유 사람들은 평시나 전시에 도시를 방어하는 보호막 역할을 했으며, 역설적이게도 그네들은 유령(!)들과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위'인가? 방리유 거주자들은 도시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이자 하부, 기층 노동자였다. 방리유라는 공간은 각종 공장과 작업장, 도살장, 벼룩시장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현재 프랑스 방리유의 근간을 이룬 19세기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러한 미묘한 위상학으로부터 파생되는 병리학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로부터 대중들의/에 대한 공포를 말했듯이, 우리는 방리유 거주자들의/에 대한 공포를 말할 수 있다. 방리유 거주자들은 언제나 도심지로부터 파견된 경찰력에 의해 위협을 받는 반면, 도시민들에게 그들은 일종의 유령이었으며, 낮과 밤에 '출몰하는 자들'이었다. 낮에는 노동을 하러 출몰하고(그네들은 '죽은' 노동을 하기 때문에 유령이다), 밤에는 (실제의 여부를 떠나서) 잠재적으로나마, 일종의 도적으로서 출몰했던 것이다.4)
씨떼라는 단어 역시 다의적이다. 첫째,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polis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번역어이다. 그런데 폴리스는 좁은 의미의 '도시'를 지칭하는 동시에, 정치적인 의미에서 '도시-국가'를 지칭하기도 한다. 도시-국가(polis)는 원래 정치적, 종교적, 상징적 중심으로서의 도시(polis)와 생산 및 거주지로서의 대지(ch ra)를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도시-국가와 도시가 모두 polis로 명명되는 가운데, 도시가 곧 도시-국가를 대표하는 논리가 발견된다. 둘째, 씨떼는 영어의 city와 마찬가지로 도시만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적인 도시-국가 체계가 국가(Etat) 대 도시(ville)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뤄진 것이다. 셋째, 1848년부터 노동자 계급의 가족들을 위한 저렴한 주택 단지를 cit ouvri re라는 단어로 부르기 시작했고, 오늘날 방리유의 공영 주택 단지에 대해서도 프랑스에서는 씨떼라고 부른다.
씨떼라는 단어에 함축된 역사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씨떼의 전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1) 도시-국가 = 도시 [사적인 영역(oikos)을 사회적으로 포함하나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공공 영역(polis)], 2) 국가 對 도시 [공공 영역 대 사적 영역의 이분법적 구분], 3) 국가+도시 對 씨떼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불가능과 유기된 주변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정부의 대응, 씨떼를 마치 국가 안의 (내부적 적으로서의) 국가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전쟁 및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것 속에서 우리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단지(씨떼)가 도시-국가(씨떼)로 상승 혹은 중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재현 혹은 대표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지만, 국가, 정치, 법의 메커니즘으로부터는 늘 통제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하는 동시에 버려지는 곳으로서의 방리유 혹은 씨떼는 평상시에는 '무이거나 공백'이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시기에는 '충만한 적'으로 둔갑하게 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역으로 반란과 봉기는 이러한 내부의 외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인종주의?

이러한 공간 분할 및 (위로부터 규정된) 국가 안의 국가 구도는 철저히 프랑스인 대 외국인, 이민자, 무슬림의 대립 구도에 기초하고 있다. 무슬림 = 잠재적 테러라는 손쉬운 등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채, 이미지를 통해서만 이번 사건을 경험하는 시청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그리 놀라지 않는다. "쟤들은 원래 저러니까"라는 낙인에 대한 재인(再認)만이 존재할 뿐. 그러나 이번 소요 사태의 주체는 서두에서도 지적했듯이 엄연히 프랑스 국적을 가진 혹은 가질 청소년들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간극이 존재한다. 비록 '법적인' 차원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적인 차원에서는 그네들의 시민'권'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법의 힘'의 아포리아뿐 아니라 '권리의 힘'의 아포리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법적인 차원에서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명목적일 뿐,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권리는 그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한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방리유의 '프랑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몫소리'를 요구하고 외친 것뿐이다.
그렇다면 방리유 청소년들 나아가 이주민들(특히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출신들)의 시민권을 무력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에 대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라고 답해야 한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의 경계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주장하는 주요 테제는 인종주의의 제도적 구조이다. 모든 인종주의가 공식화된 국가적 인종주의는 아니지만, 그것은 제도들의 구조에, 이 제도들과 개인 및 대중의 의식적, 무의식적 관계에 정박해 있다. 따라서 제도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평등한 형태와 불평등한 메커니즘 사이의 모순, 시민(권)(citoyennet )과 주체화[복종](sujetion)의 모순이 결정적으로 된다."5) 덧붙여 그는 '민주주의'의 경계들에 대해 그곳은 민주주의가 정지하는 지점이자, 그 지점 너머에서는 민주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곳이라고 규정한 뒤, 바로 그 경계야말로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곳이자 위험을 감수하는 가운데 새로운 공간이 발견되는 곳이자 정치가 발명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방리유는 분명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경계라 불릴 만 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민주주의 뿐 아니라 '공화국'이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에 부쳐야 한다. 발리바르와 오질비 등이 11월 16일자 『뤼마니떼』에 기고한 기사는 "공화국의 목을 쳐라!"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6) 왜 '공화국'이 문제인가? 오늘날 프랑스의 민족주의, 제도화된 인종주의가 바로 '공화국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두건) 착용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문제제기였다. 이는 여성 차별 반대라는 페미니즘적 외양을 동원함으로써 이뤄졌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이 프랑스의 정교분리주의 교육 정신에 위배된다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Res publica, 공적인 일을 일컫기도 하는 이 공화국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의지가 아닌 보편적인 이익과 의지에 입각한 통치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보편이 도대체 무엇인가?7)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0조에 따르면, "누구도 그의 의견이 법률에 의하여 정해진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그의 의견이 비록 종교상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 스카프 착용이 그리도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던가? 오히려 그 배후에는 '수용 가능하고, 동화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이 들어있지 않은가? 발리바르가 폭로하듯이 유럽의 백인 이민자들은 쉽게 동화되지만, 북아프리카의 흑인, 아랍 이민자들의 문화는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동화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오히려 후자가 전자와 달리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동등한 문화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또 다른 예는 비상사태. 68혁명 시기에도 선언되지 않았던 '비상사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비상사태'가 소위 포스트 911, 미국의 애국자법(Patriot Act) 이후 유행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에는 프랑스인들 내부의 분란과 프랑스인 대 외국인의 그것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전제되는 것이며, '그들'이 우리 '공화국'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함축되어 있다.
아감벤은 희생물이 될 수 없으나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에 대해 말한 바 있으나,8) 이런 형상은 고대 그리스에도 이미 존재했다. 도시-국가에 반하는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처벌을 atimia라고 했는데, 이런 죄인(atimos)은 법정, 재판, 의회에 참석할 권리는 물론 그곳에서 말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종교도 금지되며, 모든 시민권을 상실한다. 무엇보다 이들을 때려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씨떼의 신이나 법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도시 내의 이방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바,9) 우리는 현재 씨떼 거주자들 속에서 이 형상을 재발견할 수 있다. 공화국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씨떼에 소속된다는 것, 즉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하나의 가정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동일화 과정을 수반한다. 오늘날 프랑스의 이주민 통합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는 자들 중 일부는 프랑스가 사실상의 두 시민권을 인정한 것을 비판하며 더 강도 높은 공화국 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공화국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는 가장 많은 이질성을 인정하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독특성을 거세하면서 동화되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고정된 문화적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이 구성되어 가는 이질성의 공존이 사유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변화

작금의 방리유 지역 청소년들의 대규모 실업 현상은 그곳의 열악한 교육 환경, 빈번한 유급 및 문맹, 대학 입시에서의 차별 - 프랑스의 그랑제꼴들에서 아랍 출신자나 방리유 출신자들을 찾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 취업시 서류 전형에서부터 배제되는 상황들에서 그 표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만 주목하는 현재 프랑스 내 좌우의 토론들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내놓은 청소년 실업 대책은 이전 16세부터로 되어있던 직업 교육을 14세부터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회당의 일부 의원들이나 방리유의 교사들은 이 안을 방리유 뿐 아니라 전 학교로 확장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16세까지의 고등 의무 교육 기한을 14세까지 낮추는 것뿐 아니라, 제대로 판단을 하기도 이른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만드는 현대판 산업혁명 식 인력 동원을 통해 이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것인가? 일부 의원들은 서류전형 시 이름을 기입하지 않고 직원을 채용하도록 강제하자고 말한다. 이른바 익명 이력서. 그러나 어차피 면접 때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은밀한 차별이 이뤄지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나마 자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기피해온, 쿼터제를 아랍 출신자들에게도 적용하고, 교육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차별 정책(discrimination positive)을 써야 한다는 공동체주의적 대안들이 이제야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국 현재의 시장 경쟁 논리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나마 평등한 기회를 마련해보겠다는 궁여지책들에 그치기 쉽다. 왜냐하면 현재의 위기는 비단 프랑스만의 위기가 아니라 포스트-포드주의 하의 유연화된 고용 시장이 가져온 자본주의 전반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씨떼 청소년들이 인터뷰에서 요구한 바람은 한결 같았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 남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싶다." 이들이 그네들의 주거 공간인 씨떼 내에서 자기 파괴적인 봉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빼앗겨야 했던 장래에 대한 요구와 평범한 삶에 대한 요구 때문이다. 오늘날 평범한 것은 오히려 드물고 어렵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요구가 그네들만의 것일까?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강화되는 노동 강도 및 조기 퇴직을 비롯한 일자리의 위협은 모든 노동자가 직면한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 봉기에 대해 어떤 연대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프랑스의 노조는 그네들의 민족주의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포드주의-복지국가 형태 내에서 제도화된 노동 운동은 '국익 우선'(pr f rence nationale) - 이는 동시에 국민 선호를 의미한다 - 을 얻어내는 대신 '시민권=국적'을 공고히 해 주었던 것이다.
도시와 방리유의 구분은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의 구분과 유비적이다. 기간의 노동 운동은 노동자들이 생산을 하는 한에서 공적인 일의 물적 토대 형성에 기여하며 그런 한에서 정치적인 몫소리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논리에 근거했다. 그러나 오늘날 방리유에 있던 공장들의 해외 이전 등으로 인해 사용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방리유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탈중심화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현재의 자본의 흐름은 오히려 대도시의 재현성을 높이는 다국적화로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지식 기반 경제 혹은 비물질 노동의 경향적 우위는 도시의 교환 가치가 보다 생산적이라고 자처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상대적으로 방리유는 그 몫소리를 더욱 상실하고 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갈수록 중심화되어가는 도시 중심의 발전 논리에 맞서 도시의 위상도를 줄이는 탈중심화 및 국지적인 망건설을 통해 독점적 교환 체계를 민주적으로 확장하는 것이자, 갈수록 감소되는 전통적인 일자리로부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강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는 기존의 교환 가치냐 사용 가치 혹은 노동 가치냐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존재 가치' - 기하학적 평등론에서 산술적 평등론으로, 훌륭함(aret )의 논리에서 평등(isonomia)의 논리로의 전화 - 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 방식은 '사회 보장 임금'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야 한다.

나가며: 씨떼의 권리

사람들은 시민권(droit de cit )에 대해 말해왔다. 우리는 앞에서 cit 라는 개념의 이중성 및 그것의 재현 논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적어도 그런 규정 하에서 보자면, 시민권이란 공적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함축하며, 그것의 적용 방식은 도심지를 경계 쪽으로 좀 더 확장하는 것으로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씨떼의 권리(droit des cit s)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시민권이 갖는 재현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며, 씨떼들 사이의 이질적인 독특성을 간직한 채 공통된 것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불화의 힘을 간직한 민주주의든, 네그리의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역량이든, 발리바르가 말하는 '프랙탈'적인 구조를 갖는 비-전체적인 경계(fronti re non-enti re)든 그들은 공통되게 국가자본주의의 일괴암적 주권성을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는가이다. 물론 공리(公理)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자들'의 정치 참여에의 권리이자, 그들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존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발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각주]

1) 국민과 외국인의 중첩 혹은 구분 불가능은 이번 사태와 같이 위로부터 부과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국민적 동일성(정체성)을 비판하는 한 방법, 즉 불가능한 동일화 전략이 되기도 한다. 발리바르가 "알제리, 프랑스 : 하나 혹은 두 국민?"에서 말한 "무슬림적인 프랑스인(Fran ais musulman)", "프랑스적인 무슬림(musulman fran ais)", 랑시에르가 언급하는 1968년의 슬로건, "우리는 모두 독일인 유태인이다" 같은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Etienne Balibar, Droit de cit : Culture et politique en d mocratie, Paris, ditions de l'Aube, 1998, p. 81과 Jacques Ranci re, Aux bords du politique, Paris, La Fabrique, 1998 : Gallimard, 2004, p. 120 참조.본문으로

2) 죠르지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예외의 관계가 추방의 관계이며, 추방당했던 자는 단순히 법의 바깥에 놓이는 것(법과 무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유기된 것이라고 말한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 le pouvoir souverain et la vie nue, Paris, Seuil, p. 36-37 참조.본문으로

3) 필립 아리에스 지음, 유선자 옮김,『죽음 앞에 선 인간』, 서울, 동문선, 1997.본문으로

4) 물론 프랑스에서 방리유는 이중적이다. 파리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의 방리유는 오히려 부자들이 도시로부터 거리를 취하면서 부촌을 형성하고 있고, 문제가 되고 있는 방리유는 대부분의 경우 동쪽과 북쪽의 방리유들이다. 따라서 방리유라는 단어를 일의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본문으로

5) Etienne Balibar, "avant-propos", Les fronti res de la d mocratie, Paris, La D couverte, 1992, p. 11.본문으로

6) Etienne Balibar et al., "Casse-cou la R publique!", L'Humanit , 16 novembre 2005. 본문으로

7) 프랑스 정부가 말하는 '보편'은 가톨릭 십자가 착용도 안 되니, 히잡도 안 된다(ni ... ni ...)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내용 없는 순수 형식으로서의 부정적 보편성이 아닌, 동시에 ... 이고 ... 이다를 요구해야 한다( la fois ...et ...). 물론 바디우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대립시키면서, 특수성을 부정하는 부정적 보편성을 독특성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부정적 보편성을 봉기적 보편성의 형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부정적 변증법을 전유하는 한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부정적 보편성이냐 독특성들의 긍정적 연접(conjonction) 혹은 불가능한 동일화냐 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자.본문으로

8) Giorgio Agamben, 앞의 책, p. 81이하.본문으로

9) Fustel de Coulanges, La cit antique. tude sur le culte, le droit, les institutions de la Gr ce et de Rome, Paris, 1864 : Flammarion, 1984, p. 232. 영예를 박탈당한 자를 의미하는 atimos에는 여러 등급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아테네에 계속 머무는 그들이 공적인 장소로부터 배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Claude Moss , Politique et soci t en Gr ce ancienne : Le "mod le ath nien", Paris, Aubier : Champs-Flammarion, 1995, p. 23-24.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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