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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잘린 손가락

이승철 | 회원
마치 남의 일처럼, 무덤덤한 대답이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조 위원장인 그는 지난해 경찰청 앞 집회 도중 전투경찰 헬멧에 끼어 오른손 넷째 손가락 첫마디를 잃었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가 응급조치를 받은 그는 병원으로부터 “자신의 복부에 잘린 손가락과 손을 넣어 봉합한 뒤, 세포를 살려 붙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치료와 재활기간이 1년 가까이 걸린다는 설명을 듣고 그만뒀다고 한다.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헛웃음 지으며 “뭐 괜찮다”고 대답했다. “당장 노조원들과 함께 아침선전전이며 집회며 투쟁이 줄줄이 있는데 어떻게 치료와 재활기간을 마음 편히 있겠느냐”는 게 그 뒷말이었다.
그날 집회에서 그와 시위대의 요구는 간단했다. ‘다음 집회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경찰청 앞으로 지나쳐가겠다’는 것. 하지만 경찰은 “경찰청 앞으로는 한발자국도 못 간다”며 이들을 막아섰다고 한다. 한판 충돌이 인 뒤에 앳된 얼굴의 겁먹은 전투경찰 하나가 “이거…이거…저, 여기요…”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헬멧을 집회참가자들에게 가져왔다. 잘린 손가락이 매달려있는 그 헬멧은 그렇게 어이없이 피해자에게 돌아왔지만, 누가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물론, 경찰의 사과도 없었다.

경찰폭행으로 숨진 두 농민과, 그로부터 촉발된 과잉진압·폭력시위 논쟁을 보며, 나는 그의 잘려나간 손가락을 떠올렸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강도만 다를 뿐,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권력의 핏빛놀음에 넌더리가 났다. 그물처럼 촘촘히 짜인 시나리오 속에 결국 걸려들 수밖에 없는 ‘폭력시위’의 덫에 쓴웃음이 났다.
‘폭력’을 사랑하는 이가 있겠는가. 문제는 애초부터 시위가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란 점이다. 그래서 때로 시위가 격해지는 것도 어떤 이의 주장처럼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는 없는) 남한만의 고유한 무엇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도 지난 1월16일 프랑스에 위치한 유럽의회 앞에서 항만 화물처리 분야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려는 유럽의회에 맞서 각국에서 몰려온 항만노동자 6천여 명이 돌과 유리병, 깡통, 새총 등을 동원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앞선 14일에는 당국의 토지수용에 항의하던 중국 광동성 남부 중산시 인근 농촌마을주민 2만 여 명이 경찰과 유혈 충돌했다. 이처럼 시위란 것은 본래 체제와 지역을 떠나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민의와 생존권을 배척하는 정책결정’이 그것.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우리나라만 두고 볼 때 시위가 격해지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앞서 말한 ‘일방통행 식 정책결정’ 이외에도 ‘지나치게 억압받는 집회의 자유’ 역시 적지 않게 작용한다. 민주노총에서 일하던 시절, 집회신고를 위해 경찰서를 들리면 얼굴을 붉히지 않을 라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이름도 낯선 각종 보수단체들이 무더기로 선점해 놓은 집회장소를 피해 운 좋게 장소를 잡아도 주요도로와 대사관 인근, 참가인원, 집회시간, 집회준비물, 소음규제 등 경찰과의 시비꺼리가 한둘이 아니다. 1천 명이 모이는 집회를 1백 명 앉을 수 있는 장소로 신고해야 불허 판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식이다. 말이 ‘신고제’지,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집시법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선택이 남는다. 무턱대고 ‘불법집회’를 감행하느냐, 아니면 “일단 이렇게 신고하면 관행에 따라 편의를 봐 주겠다”는 경찰의 말을 신뢰하고(?) 신고서를 제출하느냐. 이럴 경우 일단 집회참가자 조직을 위해 ‘장소확보’가 확실한 ‘일단 신고서 제출’로 결론 내려지기가 쉽다.
자, 이제부턴 경찰 마음대로다. 폴리스라인 슥 그어놓고, 인원이 넘쳐 이를 넘으면 적당히 봐주거나 강력히 대처하거나 순전히 경찰 현장지휘자 판단에 달려있다. 법의 허점을 이용해 일단 ‘불법’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뒤, 공권력의 입맛대로 처분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집회신고 때부터 성질 죽여 가며 경찰과 논리싸움을 하다보면 두 가지 벽에 말문이 막히게 된다. “우린 지침에 따를 뿐”이라는 말과 “다른 경찰서에서도 다 이렇게 한다”는 논리 아닌 논리다. 10년 전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갈 때 담당 경찰은 유치인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바지를 벗은 채 앉았다 일어나기를 세 번 반복하라고 요구했다. 항문에 흉기나 자해도구를 숨겨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인권침해가 아니냐”고 항의하던 나에게 그 경찰도 위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군에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 가야 할 예비군 훈련장에 가보면, 참으로 놀라운 풍경을 보게 된다. 그토록 점잖고 건전하던 사회인들이, 군복을 입혀놓고 한곳에 모아두면 그야말로 ‘개’가 된다. ‘익명성’이란 이런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거침없이 방패를 휘두르는 전경에게는 아마도 ‘뒤로 숨어있으면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익명성이 주는 위안이 있을 게다.
경찰이 과잉진압 대책으로 ‘진압경찰 명찰착용’을 내놓자, 갑자기 또 시끄러워진다. 반대여론이 목소리를 높이자 “명찰 대신 번호표를 달수도 있다”며 오락가락한다. 경찰은 공권력이다.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함에 있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불심검문 때 자신의 소속과 계급, 이름을 밝히도록 한 경찰관직무집행법 규정도 이 같은 이유다. ‘경찰도 인권이 있다’고 항변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전·현직 의경들이 많이 모이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명찰을 달면 마음대로 후려칠 수가 없고, 그러면 뚫리기 쉬운데, 뚫리면 고참한테 깨진다. 결국 피해보는 건 일경·이경들 아닌가.” 진압 일선에 나서는 전·의경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후려칠 일 없고, 뚫릴 일 없고, 깨질 일 없기 위해서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뜻을 정책결정에 올바르게 반영하면 될 일이란 이야기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폭력시위’ 논란이 우려스런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출발점이 ‘과잉진압에 대한 대응논리’로부터 시작됐다는 점 때문이다. 두 농민 사망에 따라 경찰청장이 물러나자, 신문과 방송을 필두로 시위와 진압 사이의 ‘닭·달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만히 보니 시위 자체를 타부로 몰아가는 목소리도 공공연하게 들린다. ‘공권력 추락, 이대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거침없이 튄다.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민주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다. 두 농민의 죽음으로 경찰총수가 물러났다고 해서 분통 터뜨리며 괄시할 성격의 권리가 아니다. ‘공권력의 권위’는 후려친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틀어막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고관대작 높으신 양반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우물 같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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