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1-2.61호
첨부파일
61_칼럼_백승욱.hwp

홍콩에서 본 WTO 각료회의 반대 운동

백승욱 | 운영위원, 중앙대 교수
홍콩은 동방의 진주라고 불렸다. 1840년 아편전쟁에 승리한 영국은 1842년 난징 조약을 맺어 홍콩을 영국령으로 편입했고, 이후 홍콩은 155년 동안 영국령으로 유럽 자본주의가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동방의 진주는 동방의 신천지를 바라보는 유럽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유럽 자본주의가 동아시아와 마주친 상징적 장소이자,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는 중국을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화의 상징적 장소로 변신한 홍콩에서 2005년 12월 13일부터 일주일 동안 WTO 각료회의와 이에 반대하는 투쟁이 동시에 열렸다. 이 투쟁에는 한국의 투쟁단을 포함해 WTO가 주도하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민중들이 참여하였다.
WTO 회담은 다보스 포럼과 더불어 세계화를 통한 새로운 지배구도를 형성하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의 결집체가 되었다. 1999년 시애틀을 필두로 제노바, 칸쿤으로 이어진 WTO 각료회의는 늘 WTO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발언권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혀왔다. 저항이 커질수록, 회담 자체의 개최지는 저항을 피해갈 수 있는 지역을 찾아 나섰다. 카타르의 도하에 이어 홍콩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린 회의 역시 WTO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이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홍콩의 반WTO 투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동)아시아 속으로 WTO와 신자유주의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가온 계기였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세계적 연대 내에서 특히 동아시아의 연대가 향후 어떻게 가능할지를 고민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국의 투쟁단이 계속 입국하고, 12월 12일에 기자회견과 13일 시가행진 이후 홍콩의 언론들은 WTO 반대 투쟁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신문들은 대부분 제1면부터 시작해 많게는 20면에 이르는 지면을 투쟁단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도에 할애하였고, 특히 관심은 한국 투쟁단에게 쏠렸다. 많은 홍콩 신문들이 한국투쟁단을 '한농'(한국농민)이라 부르면서 관심을 쏟았다. 12일 오후 회담장 근처 시위지역에서 전농 회원들이 물에 뛰어든 시위와 이어서 벌어진 한국 투쟁단과 홍콩 경찰 사이의 충돌에 대한 보도는 14일 모든 신문의 1면을 뒤덮는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무엇을 주장하는지 보다는 어떤 형태의 투쟁을 전개하는지가 홍콩 언론의 주요관심사였다. 그들은 투쟁을 전개하는 방식과 조직적인 대응들에 대한 소개에서부터 어디에 머물고, 무엇을 먹는지, 휴식 시간에는 어떤 일을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자잘한 관심사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도하였다. 이런 관심은 WTO 각료회담이 끝나고, 1천명 이상이 연행되고 석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례적이라고 할만한 관심은 홍콩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홍콩 자체적으로 WTO 각료회담을 반대하는 적극적 참여가 크게 조직되지는 않았다. 현지의 투쟁 동력이 주력이 되기보다 한국의 투쟁단이 현지 싸움을 주도해 갔다는 이례성 두드러졌지만, 이 투쟁단의 움직임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홍콩의 현실이 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홍콩은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지역이다. 홍콩은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이른바 남한, 타이완, 싱가포르와 더불어 '네 마리 작은 용'의 발전 신화를 공유한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홍콩은 동아시아와 함께 있었다기보다는 언제나 동아시아 외부에 놓여있는 공간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현재로 보더라도 홍콩은 분명 중국이면서도, 중국이 아닌 지역이기도 하다. 홍콩에 투쟁단의 일부가 억류된 이후, 한국에서는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중국이면서 중국이 아닌 홍콩이라는 특성은 여기서도 무엇인가 어색함으로 나타난 바 있다.
1980년대 말 홍콩의 산업구조가 빠른 속도로 개편된 이후, 홍콩의 제조업 비중은 빠르게 줄어들고, 홍콩은 금융 무역 중심지로 빠르게 자기변신 하였다. 1970년대이래 '홍콩의 밤거리'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꿈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남아있었지만, 그 밤거리의 이면에는 외부에서 '홍콩의 꿈'을 좇아 이주해 단순조립의 전자와 섬유산업의 번성을 지탱해온 저임금 노동자들이 있었다. 산업구조의 빠른 전환 속에서 이들은 어느덧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홍콩 노동운동의 전통이 없었던 바 아니지만, 중국 화남지역과 맞물린 생산의 재배치가 빠르게 진행된 데다가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회귀'되면서 홍콩의 정체성의 변화 또한 빠르게 진행되어 홍콩 사회운동의 방향에도 정향점이 분명히 나타나기 힘들었던 시기가 오래 이어졌다. 마치 홍콩이 무역중개지로만 인식되었던 것처럼, 홍콩에 근거지를 둔 동아시아 사회운동의 수많은 네트워크들이 있지만 사회운동 차원에서 홍콩은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듯한 존재로만 인식되었다. WTO 반대 투쟁이 벌어지기 직전 홍콩에서 25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 선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음에도, 그것과 외부를 연결하는 고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홍콩은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자본 이동의 흐름 속에서 고정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중간역으로만 나타나거나, 아니면 외부와는 무관해 보이는 흐름 속에서 단절된 공간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홍콩 언론이 보여준, 그리고 홍콩 주민들이 보여준 WTO 반대 운동에 대한 상당한 관심은 이런 배경 속에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이후 필름 느와르를 통해서, 주윤발과 유덕화의 영화들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자잘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넘쳐나지만, 정작 홍콩을 외부로 이어줄 관심사에 시선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워 했던 곳이 홍콩이었다. 아마도 홍콩의 중국 회귀 이후, 단일 사안으로서는 최대의 관심사였을 WTO 각료회담에 대한 반대 시위는 홍콩과 세계를 잇는 고리에 대한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을 알게 모르게 강요한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까지는 그런 주장들이 없었고 그런 형태의 시위가 없었던 것처럼 새삼스럽게 놀라는 홍콩은 아시아의 고립된 사회들 내에서 이미 서로를 연결하고 있던 사회적 전지구적 문제를 새삼스럽게 재발견하는 놀라움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WTO와 신자유주의 문제가 홍콩의 문제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 정치에 대한 민중의 요구와 그것을 위한 새로운 방식들의 추구가 홍콩 사람들의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 아마 홍콩 사람들이 안게 된 화두였던 것 같다. 시위대가 행진하는 도로가에 나와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연신 찍던 사람들로부터, 시위대에게 박수를 치고 지원 물품을 전해주던 사람들, 그리고 시위대가 연행된 이후 항의에 참석한 사람들까지, 그리고 경찰과의 충돌이후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를 두고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자신의 삶의 공간과 이미 연관되어 있던 전체와의 고리를 새삼 발견하는 사람들의 곤혹스러움이 느껴진다. 물론 그것은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계기일 수도 있다.
투쟁단이 묵은 침사추이 주변의 건물들에서 보았듯이 높은 집 값 때문에 열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두세 세대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홍콩섬 남부의 멋진 해안의 별장촌이나 신계(新界)의 수려한 산자락에 세워진 고층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양극화한 사회적 틈새, 그리고 오래 전부터 홍콩의 꿈을 안고 다양한 이웃 나라들에서 흘러든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에 이르기까지, 이미 홍콩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 신자유주의의 예견자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홍콩이 아시아의 자본과 물류를 연계해 주었듯이 이런 홍콩을 거쳐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을 외부와 연계시켜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WTO 반대 투쟁이 홍콩에 던져준 화두가 적지 않았다면, 홍콩이라는 공간에서의 싸움과 이 투쟁에 참여한 한국 투쟁단이 한국에 던져주는 함의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그처럼 대규모의 투쟁단이 해외의 투쟁에 참여한 것은 처음일 텐데, 이는 앞으로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국내에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세계 전체는 물론이고, 지역적 차원에서도 더불어, 함께 나아가지 않고서는 문제를 문제로서 제기하고 풀어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삼 다시 제기한 측면이 있다. 한국의 농업문제가 생존위기에 직면한 농민의 집단적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사회적 위기와 삶의 기반의 피폐화라는 전체구조 차원의 일반적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는 아시아 타 국가의 농민 노동자를 포함해 아시아의 민중들의 문제와도 같은 틀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몇몇 국가의 희생아래 일시적으로 문제를 봉합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정작 해외 참가자들과의 직접 교류는 적었던 것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국제적 교류와 국제주의는 반드시 유려한 외국어를 배경으로 직접적 대면 접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신뢰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 투쟁이 남긴 결과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주제어
국제 민중생존권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