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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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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볼크먼, 이마고, 2003)

권태훈 | 회원
초등학생 무렵이었는데, 당시 저녁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면서 TV를 틀어놓으면 늙은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생방송 되고 있었다. 야간투시경으로 보이는 녹색 화면에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방공포탄이 하늘을 뒤덮고 곳곳이 불타는 장면들. 당시 언론에서는 전쟁의 정당성 혹은 인류가 나아가야할 방향-이의 결론은 당연히 반미반제이다-에 대해서는 한마디 진지한 이야기도 없었고, 단지 과학기술의 승리를 축하해주는 선정적인 기사만 내보내었었다. 녹색화면에 가득한 하얀 섬광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그리고 그 후 이라크 경제봉쇄와 2차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피흘리며 쓰러져갔가. 그때를 다들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는억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장면 #1

로마군대에 끝까지 항전하던 마사다 열심당원들은 과거 수백년간 이어져온 고래의 공성전투를 생각하며 수년간 버틸 것이라 기대했지만, 최첨단 공성기계(발리스타 - 강철화살이나 바윗덩이를 성벽에 날려보내는 기계)로 무장한 로마군단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징발된 그리스 수학자들은 어느 지점에 발리스타를 설치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주의 깊게 측량하고, 몇 미터 높이의 경사로를 쌓아야만 하며, 그 경사로를 쌓는데 정확히 얼마의 진흙이 소모되는지 장군에게 알려준다. 철저하게 훈련된 로마 공병부대는 충차(성벽을 부수는 기계)를 열심히 조립한다. 그리고 “토션(비틀림현상)”이라는 당시로선 최첨단 과학지식을 이용한 발리스타가 마사다 근방에 나타났을 때, 열성당원들의 패배는 예견되었다. 수학자들은 발리스타의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하여 도표로 만들어 병사들에게 알려주어 한 치의 실수도 없게 만들어준다. 로마의 숙련된 장인들은 가장 원형에 가깝게 바위를 깎는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고, 성벽이 모조리 깨져나갈 때까지 열심당원들은 단 한명의 로마병사도 죽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죽여야만 했다. 차례로 자결하였고, 그 시체 위에 로마군단은 입성한다. 그 시간동안 로마 장군 실바는 조용히 주둔지에 머물면서 가끔씩 명령이나 하달하고 있었다.

장면 #2

1415년, 프랑스 정예군대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영국군과 마주친다. 200야드 앞에 멈춘 프랑스군은 경멸의 뜻으로 엉덩이를 까보였다. 순간 영국군 진영에서 무수한 화살이 날라들었으니, 프랑스군이 듣도 보도 못한 신무기 장궁이었다. 채 2시간이 되지 않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이끌던 ‘1000년의 군사체계’는 괴멸하였다.
35년 후인 1450년, 프랑스군은 영국군 앞에 다시 섰다. 프랑스군은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수백 개의 돌덩이를 영국군 진영에 날려보냈으니, 이것이 화약의 전성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와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프랑스는 잔다르크가 구원한 것이 아니라 화약이 구원한 것이었다.

장면 #3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밀라노에 들어갔다. 밀라노를 비롯한 군소왕국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재산의 일부를 자신들을 군사강국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과학적 소양을 지닌 지식인들에게 기꺼이 베풀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것은 간파한 다 빈치는 ‘군사기술에 통달한 자’임을 강조한 자신의 이력서를 밀라노의 통치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제출했다. 다빈치는 밀라노의 군주 앞에 비책들을 열거했다. 이를테면 탱크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전쟁용 철갑마차, 휴대용 대포, 성을 보호하는 해자에서 물을 배수시키는 기계 그리고 대포에도 끄떡없는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제작 체계 등이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포르차는 시큰둥했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실용적이고 바로 입수 가능해서 실전에 즉시 써먹을 수 있는 그런 무기와 장비였지 그런 과학적 상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빈치는 다양한 작업에 몰두하면서 계속 밀라노에 머물렀다. 평소에는 걸작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으나, 1494년에 엄청난 위기(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가 닥쳐오자 그는 그림 그리는 일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다빈치의 노트에는 미래의 무기 목록에 실린 개략적인 그림들도 있었다. 그 목록에는 독화살, 큰 낫을 단 전차, 로켓 발사기, 박격포, 소형 무기용 탄약통, 공기총, 증기동력 캐터펄트, 헬리콥터, 철갑차량 그리고 독가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현실화되진 않았는데 오로지 다 빈치가 살아있던 시대에는 그런 무기의 생산을 가능하게 해줄 과학과 기술력이 부족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뿐이다.

장면 #4

최초의 우주인은 어떤 종류의 우주 유영이나 비행 훈련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비행기도 한번 타본 적이 없었다. 식료품가게의 점원이었다고 하는 그 'L'이라는 유대인 남자는 1942년 독일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 설치된 감압실(減壓室)이라는 방에 떠밀려 들어갔다. 그는 실험실의 공기압이 대기권 밖의 수준으로 떨어지자 남은 생애의 마지막 몇 분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죽음은 그에게는 오히려 자비였다. 그의 고통이 종식되었을 때 그는 방에서 질질 끌려나와 소각장으로 내던져졌다. 흰색의 가운을 걸치고 L의 끔찍한 죽음을 지켜보면서 녹화까지 하고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에게는 L은 소위 과학적 연구의 미명하에 폐기되어 버리는 인간 쓰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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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인류에게 많은 걸작들을 남긴 유명한 화가이다. 그런데 이 자의 또 다른 면모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전쟁기술자’였다. 우리가 만약 ‘고문기술자’라는 말을 들으면 “아니, 그런 흉악한 놈이 있다니!”라고 곧장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기술자’는 어떠한가? ‘고문기술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녀석들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고문기술자’는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빠르게 그리고 더 깊이 파괴할까에 주목하는가에 반해, 전쟁기술자들은 양적인 측면(주로 얼마나 손쉽게 대량살상을 할 것인가)에 주목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기술자’들은 자신들이 ‘고문기술자’보다 더 낫다고 변명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나는 수많은 과학자들을 굳이 다른 호칭으로 부르자면 ‘전쟁기술자’라고 부를 것이다. 다 빈치 역시 마찬가지다. 다 빈치의 시대는 ‘과학자’라는 직업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그냥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주로 신무기를 개발하는데 보냈다. 소중하게 보존되어야할 문화유산을 남겨준 ‘걸작 화가’와 ‘전쟁기술자’의 양단을 오가던 다 빈치. 단지 다 빈치 개인의 인격 내지 신념의 문제였을까. 그래, 이게 어디 다 빈치뿐일까. 다 빈치는 ‘과학자 = 전쟁기술자’라는 등식을 보여준 전형적인 예일 뿐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신의 조국이 해대던 잘못된 일들에 진저리를 쳐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어처구니없는 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지지하였던 사람들 역시 조국이 하는 모든 어이없는 일들에 국익의 이름으로 몸을 던질 사람들이다. 그들은 분명 국익이라는 추상적 표현을 주요 구호로 내세웠었고 진실이고 뭐고 간에 일단 황우석을 끝까지 지지해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과학-아니 모든 학문-의 진실성은 보장될 수 있는가. 이러한 분위기가 결정적 위기상황에서 결국 인간을 완전절멸상태에 이르게 하는 모든 방책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하고야 말 것이다. 그것도 국익의 이름으로. 국익이라는 이름은 모든 사태에 대한 주문서와도 같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끄집어내질 것이다.
모든 문제를 과학자의 양심으로 돌려버리지 말자. 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수학자인 타르탈리아가 미치광이 전쟁광이기 때문에 탄도학을 완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뿐이었고, 그들은 칭송받았고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다. 물론 그는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자신의 괴로운 감정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 괴로운 감정은 적의 막강한 군대를 분쇄한 승리감 속에서 하찮고 개인적인 문제에서 끝나버렸고, 그의 조국은 아낌없이 그들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먹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태를 분석할 때 과학의 순수성, 과학자의 양심만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과학, 그리고 과학자들을 다시 이용해먹겠다는 수작에 다름 아니다. 애국주의-조국에 대한 충성, 국익이 최선이 되어야하는-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과학의 순수성과 양심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면 사태를 전혀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중립성 혹은 순수성, 더 나아가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온 과학 지식과 과학자집단 역시 애국주의의 마수에서는 결코 헤어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국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정도는 가져봐야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겠는가.
이 책은 이제까지의 주류 역사가들이 다루기 꺼려하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결국 야사(野史)라고 규정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역사의 뒤안길에서 끄집어내 따끔하게 지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 조금 두꺼운 편이긴 한데 별다른 논리적 서술보다는 역사적 장면들을 스케치하듯 엮어나갔기 때문에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거나 적어도 야사(野史) 읽기를 즐기는 회원이라면 쉽게 읽으며 넘어갈 수 있다. 게다가 평소 그다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과학과 전쟁의 상관관계에 대한 역사를 다루는 글이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다만 책에서는 과학자의 양심과 위선 등의 지극히 관념적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어하는데 독자들은 이러한 결론만 내리지 않으면 될 듯하다.
주제어
평화 이론
태그
미국 북한 대북제재 6자회담 핵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