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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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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농민의 홍콩투쟁 참가기

김태경 | 거창군 여성농민회 사무국장
12월 12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 농민주유소에서 해자언니를 만나 서상IC로 갔다. 오후 1시 서상IC에서 버스를 탔다. 고성, 창녕, 진주, 합천에서 먼저 출발한 경남도여농 참가단이 타고 있었다. 우리를 태워준 도여농 회장인 혜숙이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향했다. 홍콩투쟁에 대한 결의를 나누고, 간단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이 있고, 많은 농사일들을 두고 8일에 이르는 긴 날을 투쟁의 현장으로 가는 우리로서는 큰 뜻을 갖고 떠나는 길이라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5시 30분경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민주노총사무실에 도착해 짐을 두고 영등포 백화점에서 촛불집회를 가졌다. 홍콩의 날씨가 우리나라보다는 따뜻하다고 해서 두꺼운 옷을 많이 준비하지 않았기에 더 추웠다.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7시부터 출정식을 가졌다. 반세계화의 깃발을 세우고 WTO를 저지하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 출국수속안내와 기내에서의 유의사항을 들었다. 출정식을 마치고, 잠을 자기위해 인근 찜질방으로 갔다.

12월 13일 화요일

새벽 4시경부터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민주노총 사무실로 가서 짐을 챙겨 인천공항으로 갔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산더미 같은 짐을 보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런 저런 수속절차를 마치고 8시 마카오행비행기를 탔다. 12시경 마카오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1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기까지 생소한 많은 절차를 거쳤다. 한국 보수 언론에서 폭도들이 홍콩으로 간다고 난리 법석을 떨어 혹시 홍콩에 도착해 입국거부나 당하지 않나 걱정도 했는데, 기우였다. 마카오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행사의 대절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섬으로 가야 했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다시 배로 옮기는 데는 괴력적인 힘이 필요했다. 모두들 짐 때문에 진이 빠져 버릴 정도였다. 홍콩섬에 도착해서 짐을 숙소로 보내고, 4시경 모두들 빅토리아 공원으로 이동했다.
처음 대하는 홍콩의 모습은 한국의 여느 도시와 똑같았다. 유독 높디높은 빌딩이 홍콩이 얼마나 좁은 도시인가를 알게 해 주었다. 빅토리아공원에 도착해 먼저 2003년 칸쿤각료회의에서 자결하신 이경해열사의 영정 앞에 묵념을 드렸다. 그리고는 도착해 있는 도시락을 먹었다. 모래알 같은 흰밥에 채 썬 당근이 올려져 있었고 반찬은 고기와 삶은 시금치가 나왔다. 음식마다 홍콩 사람들이 먹는 특유의 조미료가 들어있어 먹기가 힘들었다. 가방에 든 깻잎과 김치를 꺼내니 여기저기서 젓가락이 몰려든다. 몇 끼를 먹으려고 가져온 반찬이 동이 나 버렸다.
식사 후 한국투쟁단이 있는 컨벤션센터 인근 집회장으로 향했다. 우리는 등에 ‘NO! WTO!’가 적힌 빨간색 조끼를 입었다. 빅토리아공원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홍콩경찰이 우리 대열을 막았다. 이미 도착한 투쟁단들이 확보한 코스였기에 그 부당함에 항의했다. 여자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등 갖은 이유를 대며 우리 대열을 30분 이상 지체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여성농민가를 비롯해 준비된 문예팀, 청보리사랑과 즉석에서 만들어진 매력덩어리라는 율동패의 신나는 공연이 이어져 축제분위기가 연출되었고, 몰려든 홍콩시민들의 표정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마 국내보수언론이 제공한 자료로 폭도로만 알고 있던 한국투쟁단이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첫 시발점인 것 같다.
홍콩경찰은 몸만 만져도 잡아 간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결국 우리는 홍콩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한국투쟁단이 있는 곳으로 향해 나가기로 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찾은 것이기에 힘찬 환호성이 터졌다. 그들은 당황해하며 선두에 서서 “OK, OK”를 연발하며 전여농 대열을 안내하듯 앞서갔다.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비행기와 배, 버스를 번갈아 타고 달려오자마자 시작된 우리의 반(反)WTO 목소리는 많은 인파들과 홍콩거리를 스며들어갔다. 우리는 끊임없이 “Down, Down WTO!”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쳤다. 바다에 접해 있는 컨벤션센터를 눈앞에 둔 집회장에 도착하니 전농 동지들을 포함한 많은 동지들이 와 있었다. 평소에는 소 닭 보듯 하는 전농과 전여농의 첫 만남은 감격스러울 만큼 뜨거웠다. 서로 환호하며 박수를 쳤고, 신나는 풍물팀에 꼬리를 물고 서로 손뼉을 맞추며 마주 돌았다.
두 명의 전농동지가 바다에 뛰어들어 컨벤션센터까지 헤엄쳐서 가서 경찰에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부는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우리는 컨벤션센터를 뒤흔들 만큼 큰 함성으로 우리의 WTO 반대 의지를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버스가 위약금을 물고 모두 취소해 버렸다고 했다. 홍콩당국이나 경찰이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여행사에서도 발을 동동 굴렀지만, 당장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이틀간의 강행군에 금방이라도 뻗어버릴 것 같은 상태였지만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50~60대의 연세 드신 여성농민들은 걷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일정이 끝나 숙소인 폭플람캠프장으로 돌아오니 저녁 9시 30분이었다. 어제 집을 떠나 지금까지 이틀을 하루같이 보냈다. 한 곳에 수북하게 쌓인 각자의 짐을 찾아 정리하고 씻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잠자리도 불편한 2층짜리 나무침대에서 겨울 긴 코트까지 껴입고 잠을 청해야 했다. 모두가 피곤에 절은 몸과 마음을 이불에 묻는 그 즈음 평가와 다음날 일정을 위해 회의를 가지는 집행부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내 잠에 골아 떨어졌다.

12월 14일 수요일

아침 7시에 기상했다. 그리 낮지 않아 보이는 산꼭대기에 몇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괴력 전여농의 위력은 새벽부터 이어졌다. 힘들었던 이틀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자고 일어나 움직이는 모습이 하룻밤 사이 생생하게 재충전되어 있었고, 제주여농 동지들은 새벽 등산도 다녀왔다고 한다. 아침은 스스로 해결하게 되어있다. 모여 앉아 밥을 먹을 자리도 없어 침대아래 있는 사물함을 2개 쌓아 간이 살림대를 만들었다.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한 곳에 모았다. 오늘 아침식사는 우리들 대부분이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인 컵라면에 햇반을 말아 먹었다. 그리고 일부는 생식으로 해결했다.
9시 30분에 폭플람 숙소 강당에 모여 다양하고 효율적인 시위를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풍물팀과 율동패를 조직했다. 그리고 함께 율동을 배웠다. 바로 옆에 학교가 있는 관계로 풍물은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가야 했다. 12시경 풍물과 방송기구는 임시로 부른 밴에 싣고, 연세 드신 어른들을 태우고 나머지 동지들은 버스를 타고, 다시 전철을 타고 빅토리아공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떠들면 벌금이 있다는 말에 모두들 ‘교양시럽게’ 앉아 이동을 했다.
2시부터 비아캄페시아 투쟁단 결의대회가 있었다. 초국적 자본의 힘으로 농민에게 땅을 빼앗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잃게 하고, 가난한 사람에겐 교육, 의료, 물, 전기 등 인간에게 필수적인 기초서비스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 전 세계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횡포에 맞서 투쟁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연대투쟁의 결의를 마치고, 4시가 넘어 전농숙소인 YMCA캠프장으로 출발했다. 전농의 협상노력으로 다행히 버스편을 구할 수 있어 편안히 버스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동할 때마다 만나는 홍콩시민들은 손을 흔들어 보였고, “Down Down WTO!”를 외치기도 했다. 이런 홍콩시민들의 지지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우리 숙소 주변과는 비교가 될 만큼 전농 숙소 주위에는 홍콩의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호화로워 보이는 아파트촌이 있었다. YMCA 캠프장의 넓은 운동장에서 반WTO투쟁단 친목의 밤 행사가 열렸다. 800여명의 전농과 100여명의 전여농 동지들이 양 옆에 앉고, 외국에서 참가한 투쟁단이 가운데 자리했다. 11월 15일 농민대회 중 발생한 한국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을 영상으로 보며 한국의 치열한 투쟁현장을 공유하고, 홍콩에서 신(新)한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전여농의 많은 문예팀들이 다양하고 확실한 전술의 공연으로 열기를 더했다. 특히 청보리사랑과 강원도 횡성댁, 매력덩어리(율동패), 풍물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일정이 끝나고, 여러 나라 동지들이 어울려 친목의 밤을 보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각 나라의 전통음악에 맞춰 춤추고 박수치고 진지한 관심과 지지로 친목을 다졌다. 서울에서는 견디기 힘든 추위 속에서 청와대 앞 농성을 하고, 많은 동지들이 잡혀갔다는 소식과 컨벤션센터 내에서 한국협상단이 미국의 개가 되어 협상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남미의 반대 목소리를 죽이려 한다는 참담한 소식이 들려 다른 나라 투쟁단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밤 10시가 넘어 버스로 숙소로 이동했다(우리나라처럼 관광버스가 아니라 스쿨버스였다.). 11시경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는 걸음걸음이 천근만근이었고, 온기 없이 서늘하게 기다리고 있을 방을 생각하니 서글펐다.

12월 15일 목요일

“자기야, 자기야!”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잠을 깼다. 아니 이 아침에 웬 자기타령“ 부스스 복도로 나가보니 복도 공중전화기에 매달린 선애진 단장님이다. “단비야, 단비야 엄마야.” 그 때까지도 불량전화기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밤새 자다 눈을 뜨면 아침이다. 오늘은 어제 아침보다 피로감이 덜하다. 모두들 신기하게도 아침이면 생생한 모습들이다. 컵라면이나 햇반, 생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는 WTO가 여성농민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의 포럼이 결의 대회형식으로 열리는 빅토리아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에서 풍물을 선봉대 삼아 입장했다. 우리가 지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대열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회장에는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높은 농업보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유럽, 미국 농민들의 참가하였다. 그들 역시 다국적 기업농에 의해 소농들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고 했다. 모두들 한결같은 목소리로 WTO가 인류의 재앙임을 말했다. 특히 농산물의 상품화로 초국적 자본에 땅을 뺏기고 성매매로 삶은 이어가야 하는 동남아 여성농민들의 호소는 절망에 가까웠다. 참석한 많은 나라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로 모였다. “WTO, 10년이면 충분하다.” 전농 측 통역자의 발언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았다. “10년이면 충분히 해쳐먹지 않았나!”
1시 30분에 포럼을 마치고, 모든 나라의 투쟁단들이 전여농의 풍물팀을 선봉대로 하여 구호를 부르며 홍콩시내를 가로질러 컨벤션센터 인근 집회장으로 이동했다. 도로가에 몰려든 홍콩시민들은 주먹이나 손을 들어 보이며 지지를 보냈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 행렬과 함께 걸어갔다. 우리 투쟁단을 거슬러 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97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에 반환된 이후 경제적인 급성장을 하던 홍콩은 90년대 후반부터 발생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로 빈부격차가 커지고, 복지에 대한 요구가 급증했으며, 그리고 보통선거제도입 등의 민주개혁에 대한 요구 또한 심화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98년 금융위기 이후 늘어나는 실업률에 대한 불만으로 2003년에는 50만 명의 민중이 모여 시위를 벌렸다고 한다. 영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홍콩의 집시법은 홍콩시민들의 민주적 행동표현에 많은 제약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다양한 시위문화가 그들에게 해방감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지 않았나 싶다.
전농은 빅토리아 공원에서 컨벤션센터 인근 집회장까지 삼보일배에 들어갔다. 오랜 단식으로 건강이 나빠진 강기갑국회의원님과 연세 드신 오종렬 전국연합의장님도 함께 했다. 그리고 일부 홍콩시민들도 함께 했다. 홍콩언론은 하루 종일 생중계로 그 모습을 보도했고, 신문은 절반 이상을 특보로 보도했다. 삼보일배가 홍콩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3시간이 넘도록 삼보일배를 하며 온 몸으로 WTO의 부당함을 알렸다. 전여농은 컨벤션센터가 보이는 집회장에 도착해 다시 전농대열을 향해 삼보일배에 들어갔다. 100여 미터도 가지 않았는데 전농의 삼보일배단과 만났다. 총 3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삼보일배한 우리도 무릎 붕대가 다 닳아 버렸는데, 전농 동지들의 무릎은 얼마나 까져 아릴지. 늘 때려 부수고, 불지르고 하던 과격한 시위를 해야만 그나마 언론에 보도되던 우리나라 언론 양태로 인해 더 확산된 ‘폭력적인’ 시위 방식을 제외하니 삼보일배나 차가운 겨울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처럼 스스로의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전농의 동지들의 몸부림이 안타까웠다.
농민가와 아프팔트농사, 구호만 외치며 3~4시간의 시위를 꾸려가는 하는 남성 동지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웃긴 했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서로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고 대안까지 내었다. “전농이여, 앞으로는 인원동원과 밥만 대라, 우리가 데모의 모든 기획을 하겠노라”고. 전농과 전여농이 만나 어색하고 더러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한 대열이 되어 컨벤션센터를 향해 삼보일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해가 지면서 한국투쟁단 친목의 밤 행사를 가졌다. 전여농 문예팀은 투쟁 일정 속에 쌓인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해주었고, 횡성댁은 시위대의 중심에 섰다. 횡성댁이 준비한 오나라의 개사곡과 율동패 매력덩어리의 “10년이면 충분하다”, “짠짜라”, “아줌마”는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촛불의식 중 순천여농의 김재임 회장님의 잔잔한 이야기에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집을 떠나서는 하루 밤도 살기 힘든 여성농민들이 자식새끼 떼놓고, 나라도 버린 농민의 신세가 되어 이국 만리까지 이렇게 와서…” 이어지는 눈물 머금은 잔잔한 이야기는 피눈물 그 자체였다.
숙소로 이동하면서 컨벤션센터 인근 바다에 있는 보트피플을 볼 수 있었다. 부산 아펙 개최 전 노점상들을 폭력적으로 모조리 철거해 버린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었다. 어느 여성농민이 물었다. “태풍이 오면 저 사람들은 어떡해?” 이내 누군가 답했다. “죽어야지.” 썰렁한 대답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몹시 좁은 골목사이를 대로처럼 질주하는 홍콩의 이층버스는 묘기를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홍콩은 모든 것이 엄청 빨랐다. 에스컬레이터도 정신없이 빨라 전철을 탈 때마다 우리는 초긴장을 해야 했고, 거리를 달리는 차들도 거의 경이로움을 갖게 했다. 그리고 하늘을 찌르는 빌딩숲. 그런 빠른 흐름 속에 홍콩시민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지 모두들 연민으로 바라봤다.

12월 16일 금요일

어제와 비슷한 메뉴로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숙소 강당에 모였다. 생기 넘치던 체력도 조금씩 바닥이 나는지 기운이 없었다. 교육시간을 가졌다. 이정옥 정치위원장의 짧은 교육에 이어 볼리바리안 혁명에 관한 비디오를 보았다. 남미 베네수엘라의 민중봉기와 이후 차베스대통령이 민중정권을 세워 민중을 위한 개혁을 해 가는 과정들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부패한 보수정권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지만 무고한 죽음만 당한 채, 민주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다.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차베스대령이 지도자로 나서고 민중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 보수정권의 거짓 공작으로 차베스대통령이 섬으로 쫓겨나고 이후 다시 민중에 의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었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고기의 씨마저 말려버리는 기업어농의 저인망어업을 금지하여 가난한 어민들이 다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 한다. 농민을 위한 농업개혁도 진행 중인데, 자본의 투기처로 전락한 농지 중 농사를 짓지 않는 농지를 국가에서 모두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농사를 짓게 해 준다고 한다. 척박한 삶으로 농민들이 떠나면서 버려지고 있는 농지가 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개발과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갯벌을 매립하여 대규모 우량농지를 만들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보면 한숨만 나온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환경을 파괴하고 농업을 파괴하여 삶의 터전을 망치고 그 대가로 결국 부자들의 주머니만 불리는 악랄한 미국의 농간에 불과하다. 비디오 교육 이후 오종렬 의장님의 강연이 있었다. 연로한 몸으로 홍콩까지 몸소 오셔서 우리 여성농민들을 향해 간절한 강의를 하셨다.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실천할 수 있는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참 맞는 말이다. 아무리 WTO니 FTA니 해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같은 대통령이 있다면 왜 이리 우리 농민들이 설움을 당하겠는가? 850만의 비정규직과 350만의 농민이 모이면 대통령도 뽑을 수 있는데, 왜 이리 한국경찰에 맞아 머리 터지고 죽음을 당해야하고, 먼 이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국제적인 투쟁을 해야 하는지 답답하다. 한국이라는 한 나라에서 관료들과 농민들이 각기 다른 목적으로 날아와 관료들은 우리 농업 포기할 테니 협상하자 하고, 농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반대를 하고 있으니.
홍콩시민들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홍콩에 왔는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을 이해해주고 지지해 주었다. 보수언론에 귀 막고 판단력을 잃어버린 한국 사람들보다 더 고마웠다. 2시가 넘어 전 투쟁단이 둘로 나누어 미국영사관과 한국영사관으로 찾아갔다. 경찰의 인도에 따라 인도와 빌딩숲을 지나 풍물을 울리며 행진했다. 허용된 코스 외에는 경찰이 두세 명씩 막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새까만 경찰이 깔려 위협적인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동하면서 머리가 부딪힐 것 같은 장애물이 있으면 홍콩경찰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그 장애물을 받치고 있기도 했다. 홍콩시민들에게 거만하고 위압적인 홍콩경찰이 우리에게는 감동을 줄만큼 친절했다. 우리가 홍콩경찰이 참 친절하다고 말하면 홍콩시민이나 기자들은 “kind, kind?”(뭐 친절하다고요?)를 연발하며 이상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국영사관으로 간 투쟁단이 영사관의 박대에 분노해 점거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영사관으로 간 우리 전여농과 민주노총 등의 투쟁단은 영사관 입구에서 비웃음을 흘리며 우리를 보고 있는 빨간 점퍼의 사람 때문에 더욱 분노하였다. 민주노총과 몇 단체 투쟁단에서 나온 사람들이 항의 표시로 삭발을 하였다. 이 나라에서 시위라는 건 자기 몸을 학대하며 하는 시위밖에 가능한 게 없었다. 그리고는 빨간 스프레이로 “Down, Down WTO!”를 적고, 계란을 투척했다. 나눠주는 사람이 절대 던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먹지 않고, 세계의 강도 나라 간판에 던져 항의를 했다.
해가 지면서 11월 15일 농민대회에서 발생한 폭력진압장면 영상을 틀어놓고, 촛불집회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역시 청보리사랑과 풍물패, 매력덩어리, 강원도 횡성댁의 문예공연은 투쟁단과 홍콩시민을 하나로 엮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손에 촛불을 든 홍콩시민들은 늘어갔다. 홍콩시민들은 핸드폰 카메라로 우리를 찍었고, 구호도 함께 하고, 홍콩 시민의 통역(한 홍콩 시민이 통역을 자청해주었다)이 끝날 때 마다 홍콩시민들의 박수세례가 넘쳐났다. 고맙게도 그들은 우리가 홍콩에 온 목적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고 있었다.
9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전철을 타러갔다. 민주노총 및 다른 팀들도 같이 내려왔는데, 인원을 확인하는데 9명이 모자랐다. 난리가 났다. 그렇게 걱정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정옥 위원장 왈 “이제 간이 배 밖에 나왔군.” 홍콩에서 길 잃어버리거나 납치될까봐 화장실을 갈 때도 둘 이상 짝지어 다니고 했는데, 9명이나 실종이 되었으니…. 여기저기서 어디서 마지막으로 봤는지 추적을 해 보니 이곳까지는 왔던 것 같고, 민주노총에 쓸려 전철을 타고 갔다는 추정이 우세했다. 전철직원과 홍콩경찰의 수고로 그들이 몇 정거장 앞에 내려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철을 타고 그 곳으로 이동하니 미아들은 쏟아질 비판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이동할 때마다 만나는 홍콩시민들은 우리들에게 함께 사진 찍을 것을 부탁하기도 하고, 짧은 영어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진주 공부방선생님이 홍콩학생으로부터 사진을 찍자는 부탁을 받고, 왜 찍으려 하느냐고 물으니 친구에게 보여 주려한다 답했고, 무슨 말을 하며 친구에게 보여 줄 거냐고 물으니 “자랑스럽지 않냐?”고 했다.
전철에서 내려 대중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묵고 있는 폭플람 캠프 주변은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달동네 정도 되는 듯 했다. 숙소에 다다르기 전 조그마한 과일가게가 있다. 그 가게를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는데, 귤, 바나나, 망고, 사과, 감과 이름을 알 수없는 과일들을 아주 싼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가지고간 홍콩달러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가게였다. 그 가게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그 주인아줌마는 늘 잔돈이 없다했다. 잔돈이 없다며 한 주먹 더 얹어주고는 홍콩말로 뭐라 몇 마디만 하고 말아 모두들 그 수법에 당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알고도 당해 주었다.
11시에 숙소에 도착하니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두드린 풍물로 팔도 뭉치고 다리도 뭉쳤다. 18일이 폐막이니 내일 하루만 잘 지내면 각료회의가 무산인데, 그 남은 하루에 대해 모두들 마음을 졸였다. 미국이 유럽의 농업보조금을 지원해 주겠다며 유럽을 꼬드기고 있다는데….
어떻든 전 세계에서 모인 투쟁단의 거센 투쟁이 협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하니 내일 하루 남은 투쟁의 방법과 수위가 집행부가 아닌 사람들로서도 고민거리였다. 다행히 각료회의가 성과 없이 폐막을 해 버리면, 우리의 투쟁이 그야말로 승리로 장식되지만, 만에 하나 협상에 이른다면 홍콩경찰의 순진한 양이 되어 지낸 홍콩에서의 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진대 집행부의 고민은 어떨까 싶었다.

12월 17일 토요일

날이 밝았다. 홍콩각료회의 폐막 하루 전이다. 오늘마저 각료회의 협상이 무산된다면 우린 홍콩까지 날아와 몸과 마음을 다한 투쟁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모두들 비장한 마음으로 바다에 뛰어들고 밤새워 투쟁을 할 준비를 하고 나섰다. 조별로 바다에 뛰어들 지원자를 받았는데, 경남은 생리하는 사람 빼고는 모두 뛰어들기로 마음을 모았다. 풍물을 든 사람들로 인해 남은 사람들은 짐꾼이 되어야 했다. 바다에 뛰어들고 난 뒤 입을 속옷과 겉옷 그리고 밤샘 노상투쟁을 위해 두터운 외투까지 챙기느라 커다란 여행용가방까지 등장했다.
9시에 숙소에서 출발 빅토리아공원에 도착했다. 반WTO 홍콩투쟁의 중심이었던 한국투쟁단 결의대회가 열렸다. 외국의 투쟁쟁단들도 함께 모였다. 1시 30분 대열을 정리하고, 거리로 나섰다. 홍콩민중투쟁단의 방송이 나오는 방송차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전농의 상여와 여성농민 상복대열이 맨 앞에 섰다. 경찰의 저지선을 따라 가다가 홍콩 시내에서 컨벤션센터 인근에 마련된 집회장으로 향해 오른쪽으로 방송차가 돌고 난 뒤, 전농의 상여가 컨벤션센터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홍콩시내로 돌진했다. 뒤를 따르던 투쟁단은 일부만 상여 뒤를 따랐고, 경찰 저지선을 뚫기는 홍콩 도착 첫날을 빼고는 처음이었기에 우왕좌왕했고, 풍물팀은 열심히 따라가며 풍물을 쳤다. 다시 뚫은 도로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전여농 상복팀이 다시 경찰의 저저대를 향해 나갔다. 상복을 입은 분들은 연세가 드신 여성농민들이었고, 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섰다.
어제까지 홍콩경찰의 신사적인 진압방법을 믿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졌다. 홍콩경찰이 상복을 입고 영정을 든 연로한 여성농민들의 얼굴에 최루액을 떡이 되도록 사정없이 쏘아 부었고, 플라스틱 방패로 사정없이 밀어붙여 넘어지고 밟히는 일이 벌어졌다. 전농 투쟁단이 몸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진로를 막은 두 대의 버스를 흔들어 댔다. 홍콩경찰은 맨손의 전농투쟁단을 향해 사정없이 가운데 쇠가 든 방망이를 내리쳐 많은 농민들이 피를 흘렸다. 한 기자가 넘어져 밟혀 내장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진압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무장하지 않았다. 그 당시 사진을 보면 무장한 농민의 모습은 어느 신문에서도 볼 수 없다.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해 다른 도로를 통해 컨벤션센터를 향해 나아갔다. 얼마가지 않아 또 홍콩경찰과 대치했다.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컨벤션센터가 있다고 했다. 우리 투쟁단과 비슷한 수의 홍콩시민들이 우리 주위에 있었고, 얼마인지는 몰라도 우리와 투쟁을 함께 하고자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경찰이 에워쌌다. 컨벤션센터로 가고자 하는 투쟁단은 맨몸으로 경찰의 방패를 밀었다. 여지없이 최루액과 최루탄이 터지고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드디어 농민들의 손에는 가로수 지지대를 뽑은 각목이 들렸고, 퍼포먼스에 사용되었던 하나의 쇠사슬도 등장했다. 가로수 지지대는 사람 키만한 크기라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방패로 무장한 경찰에게 상해를 입힐 만큼 폭력적이고 위력적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서도 홍콩시민들은 난사된 최루액을 씻어내는 생수를 끝도 없이 공수했고, 물안경도 사서 지원해줬다. 물대포를 쏘아대자 홍콩시민들은 긴 팔 티를 사서 보내주었다. 또 홍콩경찰을 향해 항의를 하기도 했다. 농업인구가 천명도 안 되는 홍콩이란 나라의 시민들이 남의 나라 투쟁단에게 보내주는 지지는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소위 지랄탄이 발사되면서 모두들 뒤로 퇴각했다. 숨구멍이 탁 막히면서 현기증이 돌고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중앙분리대가 있는 아주 넓은 도로로 밀려났다. 풍물을 든 여성농민들과 종일 무거운 짐을 들고 다녀야 했던 투쟁단은 피난민의 모습이었다. 하루 종일 장구나 북을 메거나 무거운 짐가방을 들거나 끌고 다니며 겨드랑이까지 오는 경계펜스를 넘고, 중앙분리대로 만들어 놓은 높은 화단을 주위의 도움을 받아 가며 넘었다.
해가 졌다. 우스개지만 이런 말이 있다. 한국농민은 해가 지면 가만 내버려둬도 자진해산하고 집으로 간다고. 오늘은 사정이 다르지만(숙소를 나올 때부터 각료들이 출근하는 도로를 밤새도록 막아서라도 각료회의를 저지하겠다고 결의하고 나온 터) 그래도 해가 지고 추워지니 그 온기 없이 썰렁한 숙소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화장실마저도 봉쇄되었다. 홍콩경찰과 마지막으로 대치하던 그 곳에서 경찰과 함께 같은 화장실을 쓰며 지나가는 인사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막았다. 서투른 영어로 윗사람에게 전화해서 물어봐라, 화장실은 가게 해 줘야하지 않나 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오후 2시경 경찰 방망이에 맞아 병원에 간 사람들을 구속해간 시점부터 연행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개별적으로 숙소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돌아가지 못했다. 도로가에 있던 홍콩시민들도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들 중 누군가가 긴팔 옷을 사서 보내주었고, 빵과 음료수가 끊이지 않았다. 1,500명 가까운 투쟁단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빵을 홍콩시민들은 보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본적인 생리현상도 해결하지 못한 채 추위에 떨었다. 한 홍콩시민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홍콩경찰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왜 이런 투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물러나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면 도로를 봉쇄하고 육교까지 밀려들었다. 홍콩시민들은 그런 경찰을 향해 야유를 보내고, 육교에 서 있던 홍콩시민 중 몇 사람이 육교로 밀려드는 경찰을 막아서 우리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우리 투쟁단은 그분들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도로가의 홍콩시민들도 큰 소리로 함께 하며 지지를 보내왔다. 그 자리에는 홍콩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도 함께 했다. 반바지차림으로 대열에 함께 있었던 한 고등학생에게 우리는 옷을 벗어 입혔다.
엄격한 법으로 혹시 잡혀가면 어쩌나 두려움도 들기도 했는데, 홍덕표 어른의 사망소식이 들리면서 연행이 되더라도 담담해질 만큼 비장해졌다. 손발이 묶일 때까지 최선을 다해 투쟁을 하겠다는 결의가 생겼다.

12월 18일 월요일

이리저리 도로에 누워 몸을 잔뜩 웅크리고 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새벽 2시쯤 홍콩경찰이 전원연행방침이 방송으로 나왔다. 처음엔 한국말로, 그 다음은 영어로 마지막으로 홍콩말로 했다. 새벽 3시가 넘어 경찰 버스가 도착하고, 연행이 시작되었다. 맨 앞에 있던 전여농은 연행 이후 연락할 집행부의 비상연락처를 적은 후 서로 팔을 끼고 연행당할 준비를 했다. 연행이 될 때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쏟아졌고, 여성농민들은 전율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단지 5%의 부자들을 위한 잔치 WTO에 항거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뿐인 몸마저 포박당한 채 끌려가야하는 신세가 한탄스러웠고, 농민을 버린 한국이란 나라가 원망스러웠다. 경찰차 앞에서 몸수색을 당하고, 팔이 뒤로 꺾인 채 플라스틱 수갑을 차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았고, 뒤로 꺾인 어깨 죽지가 고통스러웠다. 심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발악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 그 수갑을 자르고 앞으로 채웠다.
수갑을 채우거나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해 폭행을 당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해도 그들은 “ Later(나중에)”나 “Wait(기다려)”만을 연발했다. 악을 쓰고 발악을 해야만 그들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화장실도 함께 들어가야 했고, 어떤 경찰은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볼 것을 강요했다. 충격으로 인해 걷지도 못할 만큼 아픈 사람이 있어도 그들은 모른 척했다. 우리가 연행되어간 경찰서 마당은 우시장 같았다. 스테인리스 펜스로 구역을 가르고, 의자나 바닥에 앉혀 조사를 했다.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네 차례 사진 찍기를 강요당했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다. 그러나 투쟁단은 홍콩경찰서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그리고 다시 경찰버스를 타고 영화에서나 본 감옥으로 이동했다. 감옥 앞에는 연행에 항의하는 홍콩시민들이 있었고, 수많은 방송카메라가 있었다. 우리는 밖을 보며, 당당한 얼굴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 안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감옥 장면 그대로였다. 많은 철창문이 있었고, 우리는 여러 철창문을 거쳐 좁은 방에 갇혔다. 서너 평이나 될까한 방에 20명이 넘는 사람이 갇혔다. 아픈 사람을 눕히고 나니 다리를 펴고 앉을 수도 없었다. 그 안에는 가리개도 없는 화장실이 같이 있었다. 참으로 황당했다. 변을 보고 싶어도 참았다. 참다 참다 할 수 없으면 분위기 봐서 눈치껏 볼 일을 봤다. 일단 아픈 사람을 위해 조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집행부에서 보낸 변호사가 온 이후에야 그들은 환자들을 병원에 보내주었다. 그 변호사는 요구사항을 듣고, 밤 11시 30분 마카오행 배를 타고 예정된 2시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연락이 끊겼다. 대책도 없이 1,000명이 넘는 투쟁단을 호기롭게 연행한 홍콩경찰은 뒷수습을 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약속했던 권리들을 하나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고 시간만 흘러 보냈다. 그들은 하나를 해결하는 데도 열 단계 이상의 결제를 걸쳐야 할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나라였다. 그만큼 원칙에도 철저할 듯한데, 감당할 수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절절매고 있었다.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하는 좁은 감옥에서 오줌도 누고 똥도 누고 밥도 먹으며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단지 걱정하는 동지들에게 이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가둬둘 수도 없을 것이고, 혐의도 없으니 오늘 내일 바로 풀려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말로 위로를 했다. 철장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햇볕 하나 들어오지 않는 시멘트벽이라 동틀 무렵 여기에 갇힌 이후 우리는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어제 저녁부터 밥을 먹지 못한 터라 배도 고팠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도시락이 나왔다. 프랭크 소시지 2개와 얇게 썬 소시지와 삶은 야채가 나왔다. 화장실 문제로 밥을 먹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두 끼를 먹고 나니 저녁이 된 것 같은데, 제시간에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영사관에서 나온 통역인을 통해 예정된 11시 30분 마카오행 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난감했다. 농사이며, 어린 아이들과 가족들… 예정된 일정을 넘기며 이런 문제들을 감당하기에는 불안감이 컸다. 서로에게 용기를 줘가며, 여성농민가도 부르고 그동안의 평가시간도 갖고 쪼그려 앉자 잠을 청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경찰은 압수한 우리 짐을 이리로 옮겼다 저리로 옮겼다 하더니, 11시 쯤 석방이라는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경찰들끼리 나누고 있는 대화를 듣고 누군가가 석방소식을 알렸고, 갇혀있던 투쟁단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나가기를 기다렸다.

12월 19일 화요일

가방을 돌려받고, 나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갑자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민주노총의 한 여성노동자가 지문을 거부하다가 홍콩경찰에 뺨을 맞았다는 말을 하기 무섭게 경찰은 그 노동자를 데리고 올라가버렸다. 그리고는 잇달아 홍콩경찰의 폭력행위에 대한 성토들이 쏟아졌다. 이제 풀려났구나 싶었는데, 끌려올라간 동지를 두고 우리끼리 나올 수도 없었고, 홍콩경찰의 부당함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홍콩경찰에 뺨을 맞은 그 여성노동자는 책임자 사과와 사인을 강요당한 개인 파일을 열람하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부는 그 담당 폭력경찰을 잡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누군가 그 경찰을 지목하자 경찰들은 그를 올려 보냈다. 심신이 지쳐있었고, 두려움의 연속이었던 내겐 정당하게 따져야 할 상황이었지만, 사과정도로 적당히 끝내고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서양인으로 보이는 책임자라는 사람의 사과를 받고, 개인 파일을 복사해 받은 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조장들만 남고, 먼저 온 버스를 타고 앞에 석방된 사람들을 보냈다. 차가운 시멘트벽에 기대, 일렬로 붙어 앉아 남은 사람들을 기다렸다. 혹시 남은 사람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투쟁단의 강경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홍콩경찰의 폭력행위에 대한 대응은 내일부터 조직적으로 하기로 미루고, 두 번째 버스를 타고 모두들 나왔다. 고맙게도 밖에서 소수지만 홍콩시민들과 외국인들이 밤샘 항의농성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나올 즈음 감옥 창살을 붙들고,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울며 말하던 외국의 여성들과 앞일을 예측하기 힘든 전농 투쟁단을 생각하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나올 때 까지 끝까지 감옥에 남아 투쟁해야 했지만, 현실에선 그럴 수 없었던 나약함이 부끄럽기도 했다. 근 이틀간 양치는 물론 씻지 못한 엉망인 몸을 씻으려 하는데, 3시 50분까지 숙소 마당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부족한 비행기삭 13만원(1인당)을 급히 모았다. 대부분이 한국에서 환전해간 돈 그대로 갖고 있던 터여서 모두들 별 어려움은 없었다. 4시 50분 배를 타야한다고 했다. 모두들 짐을 꾸려 마당으로 모이고 택시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망치듯 황급히 집을 꾸려 택시를 타고 선착장으로 갔지만 배는 이미 가고 없었다. 다음에 뜨는 6시 배를 타고 조금 늦게라도 비행기는 탈 수 있다고 해서 안심했다. 우리가 다 타면 출발할 비행기라 했다. 그리 심해 보이지 않는 파도이건만 배는 좌우로 뒤집어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배멀미하는 사람 하나 없이 곤하게 잠을 잤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짐을 부치고 난 뒤 잠시 틈이 생기니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고 맨 먼저 맨몸으로 부딪혀 머리가 깨져 피 흘리던 전농 투쟁단의 모습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각 지역에서 올라온 대절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있는 열린공원으로 가서 간단한 보고대회를 갖고, 청와대 인근에 있는 중국대사관으로 향했다. 구속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끝나고 인근 한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정말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댔다. 배가 좀 부르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는 듯 뜨거운 열정들이 다시 일었다. 웃음바다를 이루고 점점 헤어질 시간이 다가옴을 모두들 느껴갔다. 횡성댁이 “지금부터는 눈 마주치지 맙시다. 정 보고 싶으면 사팔눈을 뜨고 봅시다.” 라고 말했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헤어졌으면 아마 눈물바다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적당히 지나는 인사를 하고 애써 얼굴을 외면하며 식당을 빠져나와 각자의 대절 버스에 올랐다. 경남여농만 남은 버스 안. 빠지면 안 되는 순서, 평가시간. 우리는 그렇게 홍콩투쟁은 마무리 지었다. 내년 제네바 각료회의마저 박살낼 것을 기약하며.

반WTO 투쟁은 투기자본에 죽어가는 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이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권리이다. 그 중심에 한국농민이 있었음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리고 홍콩대학생들이 발표한 지지성명에서 한국투쟁단의 행위를 “시민불복종정신”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홍콩대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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