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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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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양극화/통합 비판 - 담론과 동맹전략을 중심으로

장진범 | 정책편집부장
노무현 曰, 남은 임기엔 양극화 해소와 한미FTA에 주력하겠다?!

집권 3년차 들어 노무현 정권은 이른바 사회양극화 및 사회통합을 핵심 화두로 내세울 태세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경제 전반이 회복됐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때문에 이 같은 치적이 가려지고 있다는 현실 진단을 내놓았다. 또 2월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등반 도중에는 남은 임기 중 매진해야 할 2대 과제로 한미FTA 체결과 양극화 해소를 들었다. 열린우리당 경선에서도 김근태와 정동영 모두 입을 모아 양극화 해소를 외쳤다. 총리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 국민통합 연석회의는 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 36명으로 구성되어 지난 1월 26일 출범했다.
노무현의 신년연설에 대해 박근혜는 감세로 응수했고, 여기에 노무현이 다시 감세는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반론을 펼치면서 증세-감세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논쟁에 언론과 NGO 등이 가세하면서, 이른바 개혁-보수 구도가 다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집권세력이 의도한 바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걸려 있는 양극화 특별 기획에서 집권세력은 양극화를 화두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등 이른바 ‘기득권 세력’에게 공세를 가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양상은 영국에서 블레어 신자유주의 정권이 등장할 당시와 유사하다. 당시 블레어는 선거 당시 사회적 배제 담론을 제시하면서 그 책임을 대처 신보수주의 정권에게 돌리는 한편, 대안으로 사회통합 담론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노무현 정권이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꺼낸 것 역시 눈앞에 다가온 지자체 선거 및 이후 대선 전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기존의 제도정치세력을 넘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05년 9월 22일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가 양대노총과 참여연대, 전국민중연대 등 전국 133개 단체를 중심으로 출범했고, 한국노총과 참여연대 등 핵심 단체들은 위에서 말한 국민통합 연석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국민중연대는 내부의 이견 때문에 연석회의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올해 투쟁 기조 논의 과정에서 사회양극화 해소투쟁을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제안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등 민중운동 내 거대 조직들 역시 사회양극화/통합이라는 진단 및 기획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내놓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지난 10월 『사회운동』 58호에서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은 당시 문제의식의 연장이면서, 앞으로 진행될 본격적 비판의 시론이다. 우리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에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담론은 현 정세에서 객관적으로 반동적인 효과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담론이라는 이유로 이를 실용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위험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이 담론을 다뤄야 한다. 다음으로 이 담론은 매우 우려스러운 동맹전략을 내포한다. 사회양극화/통합을 핵심 쟁점으로 하여 개혁-보수 구도를 형성하고, 보수세력에 맞서 개혁세력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저 지긋지긋한 ‘비판적 지지론’의 재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 정세에서 가장 필요한 과제 중 하나인 사회운동의 독자성 확보는 심각히 지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무엇이 문제인가

1) 사회양극화 담론이 노리는 바
혹자는 최근 사회양극화 담론이 전면화되는 것을 보고, 지배계급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인정한 것이니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이 담론을 구사하는 방식을 보면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다.
현 정부의 인식은 2월 21일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걸려 있는 양극화 특별 기획 두 번째 글의 소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압축성장과 양극화는 불균형 성장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가 그것이다. 곧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는 전적으로 한나라당 식 ‘개발독재’의 책임이고, IMF 사태 이후 자신들은 ‘국가경제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2배 이상 성장’하게 만들면서도 ‘압축성장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민주화 조치를 병행’하는 경제 발전의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특별기획 전면을 장식하는 다음과 같은 노무현의 발언은 이들의 인식을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잘 나가는 상장 기업은 역대 최고의 수익을 기록하고 있는데도 서민들은 계속 어려운 양극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생이 어려운 근본 원인입니다.”(2005. 10. 31.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 즉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노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사회위기를 양분한 후 전자를 건들지 않거나 심지어 가속화하면서 후자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을 유포하는 것이다.
현재 지배계급들이 경제회복의 근거로 드는 것은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수출액, 주가지수(증시규모) 등 주요 경제지표들이 IMF사태를 기준으로 대부분 2배 이상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두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통합되면서 IMF 이후 급상승한 환율이 조정되고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유입된 결과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이야말로 사회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왜냐하면 금융세계화는 성장과 고용을 근본적으로 분리하고, 고용을 파괴하거나 악화하는 성장을 낳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설비투자율 부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금융 원리가 기업의 핵심 운영원리로 관철되는 상황에서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배당할 단기적 이익 확보가 경영의 최우선 과제가 되기 때문에, 위험이 동반되는 중장기적 투자를 할 수 없다. 한국의 경영자들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고율배당을 하고, 경영권 확보 및 주가관리를 위해 자사주를 구입하며, 나머지 돈은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비상장기업의 경우 초민족적 자본은 유상감자를 통해 자금을 빼내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산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핵심인 자본자유화에 힘입어 국부유출과 자본도피가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와 성장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1)
이렇듯 지배계급이 추진하는 금융세계화로의 통합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자체가 다른 한편으로 지배계급 스스로 대안이랍시고 내놓는 고용확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양극화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설비투자율을 높이는 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IMF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자본주의는 과잉축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3저호황을 거치면서 재벌이 추진한 시대착오적 과잉축적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고정)자본소비적이고 노동절약적인 자본주의의 편향적 기술진보가 낳은 이윤율 하락을 이윤량의 증대를 통해 돌파해 보려 한 이 시도는 처참히 실패하여 IMF 사태를 불러왔다. 이렇듯 한국자본주의는 과잉축적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 갇혀 있다. 자본주의 체계를 유지하는 한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체계를 넘어서는 문제는 아득한 미래의 몽상이 아니라, 현재의 아주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떠오른다.
사태가 이렇다고 할 때, 현재 지배계급이 내세우는 사회양극화 담론의 일차적 문제는 한국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위기 및 변혁이라는 문제를 은폐한다는 점,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고용확대라는 양립 불가능한 처방을 결합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모순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가 아니므로 지적을 통해 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양극화는 처음부터 적합한 사고의 교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담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현재 한국자본주의가 겪는 모순과 위기의 양상을 체계적으로 뒤섞는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자산소득과 근로소득 간 격차 확대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확대,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확대를 마치 모두 동일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가 자본-노동 간 격차고 두 번째가 자본 내 격차며 세 번째가 노동 내 격차라는 점에서 이 모두는 전혀 다른 장에 속할뿐더러 각각에 대처하는 방법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다. 예컨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들이 내리는 처방은 비정규직의 확대다.
더욱 큰 문제는 지배계급이 이런 식의 유비를 통해 정규직 노동자가 마치 자산계급과 같은 안정적 지위에 있는 것처럼 허구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 및 빈곤화를 겪고 있는 노동대중의 현실을 은폐하고 노동대중 간의 갈등과 경쟁을 체계적으로 부추김으로써 노동 전반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 담론을 통해 이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노동대중 전반에 가해지는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 자체를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더욱 확대하면서 동시에 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시켜 양자의 격차를 줄이는 식의 하향평준화다. 이렇게 근로소득 내 재분배 문제가 초점이 되면서 근로소득과 자산소득의 격차 확대 곧 노동의 불안정화 및 금융화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다.
또한 교육이나 의료, 지역 등의 양극화를 언급하는 것은 얼핏 보면 소득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더 넓은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래 목적은 사실상 현재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금융화와 빈곤화 경향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최근 정동영 등이 전면에 내세우는 논리는 교육양극화로 인한 교육기회박탈이 소득양극화를 낳으므로 교육 양극화 해소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하지만, 이는 실상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소득양극화의 원인은 교육양극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교육양극화가 해소되어 모든 사람에게 교육기회가 제공되면 소득양극화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곧 계급 간 격차,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진단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소득격차를 초래하는 계급 간,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인 의제로 오르지 않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더구나 교육과 의료와 같은 필수서비스를 가장 앞장서서 상품화하는, 따라서 소득에 따른 불평등을 더욱 확대하는 WTO 체제를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은 기만일 따름이다.
한편 자산소득 내 양극화라는 문제에 이르면 사회양극화 담론이 전반적인 빈곤화 경향을 역전시키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다. 이 해결책은 일정한 자산을 가진 집단 곧 ‘중산층’을 보호하여 이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자는 것인데, 금융세계화 하에서 지배계급이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소득을 건드릴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결국엔 노동자들의 근로소득을 이전해 중산층의 자산소득을 보충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조치들은 금융화와 빈곤화 경향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2) 사회통합 담론의 반동성
노무현은 아펙 회의 직후 “200년 전에도 공장을 부순다고 산업혁명이 진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세계화를 ‘거역할 수 없는’ ‘시대’와 ‘역사’라고 규정했다. 한편 노무현이 최근 극찬했다는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 일자리 창출을 위한 패러다임 변화’라는 보고서는 사회양극화의 원인 중 하나로 ‘성장률 하락, 세계화, 지식정보화 및 중국의 부상 등 대내외 환경변화’ 등의 충격에 대해 ‘각 경제주체들이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사회양극화의 원인을 ‘거역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부적응’ 에 따른 ‘배제’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통합 또는 사회적 합의나 참여는 이렇듯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사회통합 담론은 필연적으로 탈(脫)정치적이다. 이 담론의 기초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금융)세계화, 신자유주의 따위의 현실적 모순을 ‘자연화’하여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일종의 섭리로 격상시키는 시도가 깔려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고통과 관련하여 지배계급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천재지변’에 대해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정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통치’나 ‘행정’ 또는 ‘관리’로 전락한다. 오늘날 좌우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민생정치’는 이 같은 정치의 타락을 의미한다.
또한 사회통합 담론은 탈(脫)주체적이다. 이 담론은 대량실업과 궁핍화 등의 객관적 조건이 노동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척 하면서, 대중들을 체계적으로 ‘피해자화’(victimize)하고 ‘부적응’의 현상을 크게 부각한다. 이들은 말한다. 문제는 대중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대량실업의 근본 원인은 세계화의 무한경쟁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또한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의 일자리가 요구하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 따위를 대중이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중에게 무조건적인 복지 혜택을 주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저 유명한 ‘복지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2)

이런 식의 논리에 따라 (대량)실업의 책임은 대중에게 체계적으로 전가되고, 현실적 모순에 대한 대중의 갈등과 불화는 적응/부적응, 나아가 정상/비정상 식의 병리(학)적 언어로 번역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응력 정도라는 기준에 따라 노동대중들은 위계적으로 분할되는데, 이 분할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또는 차라리 이 경계선 자체인 존재들이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 이편에는 이른바 ‘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저편에는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대량실업 때문에 산업예비군으로조차 통합할 수 없는 ‘잉여인구’가 있다. 대중을 이렇게 자의적이지만 전략적으로 분할한 후, 지배계급은 각각에 대해 차별적 조치를 취한다.
우선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거대하게 (재)조직된 산업예비군의 압박을 통해 노동유연화가 한층 강화되고 이에 부합하는 혹독한 노동규율․강도가 강제된다. 다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근로연계복지(workfare)에 입각하여 노동유연화에 대한 복종을 골자로 하는 직업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적 일자리’ 형태의 산업예비군과 노동빈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이들은 사회통합 담론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있어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존재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머물게 한 후 이들의 불만을 조작하여 기존 노동자들의 성과를 공격한다. 또한 이들에게 ‘사회적 일자리’ 따위의 일정한 시혜를 베풂으로써, 자신들이 IMF 경제위기와 사회양극화의 주범으로 표상하려는 보수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적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약속한 의미에서의 ‘통합’은커녕 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대중 전반의 불안정화가 초래된다. 또한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대량실업이 해결되지 않는 한에서 산업예비군으로조차 통합할 수 없는 ‘잉여인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 기존 체계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로 경찰적인 수단을 통해 이 같은 도전을 봉합하려는 억압적 시도를 강화한다. 이 때 경찰논리의 특권적 희생양이 되는 것이 바로 ‘잉여인구’다. 세계화 속에서 국가의 무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뚜렷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국가는 극히 무력한 이들 잉여인구에게 혹독한 경찰 조치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권위가 건재하다는 허구를 상연하고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권위적으로 잠재우려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권리 축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일정하게 해소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잉여인구의 권리가 열등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제도적 차별을 통해 전시함으로써, 기존 사회에 통합된 이들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안도감을 주거나 또는 그 경계 밖으로 넘어갔을 때 생기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려는 것이다.
사회통합 담론은 이러한 국가의 불의와 모순을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기존 체계에 저항하거나 기존 체계의 불가능성을 체현하는 이들 곧 ‘통합되지 않는 이들’을 ‘문화 지체자’나 잠재적 ‘범죄자’ 등으로 낙인찍는다. 따라서 지체자나 범죄자에 대한 ‘교정’이나 ‘진압’ 나아가 ‘추방’ 등의 경찰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반동적 담론으로 전도된다. 고(故) 전용철․홍덕표 농민의 죽음 앞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통합되지 않고 저항하는 한 또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노무현의 그 끔찍한 발언이야말로 사회통합 담론의 진실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의 동맹전략 비판을 위하여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또한, 2004년 탄핵 당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유실시키면서 화려하게 복귀한 개혁-보수 전선을 (재)강화한다는 점,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재)형성을 더욱 지체시키고 자유주의 세력에 대해 정치적 독자성을 견지하는 대중운동들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극히 위험하다.
탄핵 직후 50%까지 치솟았던 노무현 정권의 지지율이 취임 3주년 현재 22.9%라는 최악의 수치를 기록하는 한편, 유력한 대권후보로 꼽히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동반상승하고 뉴라이트의 출현 등 보수세력의 현대화 흐름이 가시화되고 있다. 또한, 최근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쟁점으로 장외투쟁을 벌이는 등 보수세력이 다면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은 현 정세를 ‘신보수대연합’의 형성으로 규정짓고 이에 반하는 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년 전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도를 그리기 위해, 이번에는 탄핵무효/민주수호 대신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핵심 쟁점으로 동원된다. 이렇게 보면 2년 전 탄핵무효/민주수호 구호가 그 의도와 무관하게 그랬던 것처럼, 현 정세에서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역시 객관적으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따라서 가장 반민중적인 효과를 산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민중운동 내 절대다수가 신자유주의 반대를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고 있음에도 이처럼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구축이 지속적으로 교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같은 현상은, 그러나 참여연대와 같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NGO나 심지어 신자유주의 세력의 수장인 대통령마저도 제 입으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데서 역설적으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전히 신자유주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문제는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정치와 분리된 ‘경제’적 문제로 바라볼 뿐, 그것이 필연적으로 기존의 정치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과거의 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타락하여 예컨대 인민주의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규명하고 토론해야 할 문제다.

1)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변형
남한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본래 재벌중심의 중화학공업화를 핵심으로 하는 박정희 식 발전주의의 모순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입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미국 주도의 금융세계화에 편입되어 초민족적 금융자본을 유치하려는 거시경제적 안정화 정책, 다른 한편으로 과잉축적으로 인한 자본의 재생산 위기를 해결하려는 미시경제적 구조조정 정책을 양축으로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정책적 차별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consensus, 합의)의 의미가 그것이다.
당장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계승자라는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이 계승한 것은 발전주의가 아니라 바로 신자유주의였다. 김영삼 정권은 재벌의 과잉축적을 처리하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수행하진 못했지만, ‘세계화’ 담론을 유포시키면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금융세계화에 편입되고자 했다. 김대중 정권은 IMF 사태를 계기로 금융세계화의 미시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APEC과 WTO와 FTA를 대하는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 노무현 정권 역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이른바 개혁-보수 세력 간에 아무런 차별성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신자유주의가 개별 국가가 자의로 선택하고 대체할 수 있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책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금융적 재편에 조응하는 국가 자체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민족국가의 사명은 더 이상 전통적인 민족적 발전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유치를 위한 조건을 확보하는 것,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족국가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쟁 국가’가 되고, 발전주의는 이를 위한 수사로 전락한다. 근대적 주권 개념 및 주권국가간 체계는 근본적인 위기를 맞는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사유화된다.3)
여기서 핵심은 탈(脫)국가적․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의 확대다. 시장의 탈규제화로 인해 국가의 개입 역량이 축소되는 한편, 강력한 ‘사적’ 행위자들 특히 점차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초민족적 기업들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 ‘사회적 합의’가 강조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국가는 더 이상 이런 사적 행위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혹자는 이를 정치의 ‘재봉건화’라 부르기도 한다. 즉 점점 제도적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이 쇠퇴하고 비공식적 협상공간들이 선호되는데, 이 같은 사적 협상 구조는 전통적인 민주적 제도와 절차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제 민주주의와 참여는 지극히 불평등한 행위자들이 시민사회 내에서 행하는 협상 절차로, 또는 단순히 지방들의 국제적 경쟁을 위한 참여적 동원으로 축소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는 통치가 된다. 이 같은 정치 조절체계는 점점 국제화되어 국제적 수준에서 조직, 제도, 그리고 비공식적인 ‘체제’의 한층 밀집된 네트워크가 창출된다. 이는 정부들을 새로운 협력 형태에 속박하고 특히 약소국들의 선택권을 제한한다. 이 같은 새로운 국제적 권력 구조에서는 자본주의 3극의 더 강한 국가들이 갈등적 협력 형태를 통해서 세계를 지배한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를 비롯하여 이들 중심의 공통이익을 대표하는 국제조직들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덜 제도적인 조정과 네트워크 형태들도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초민족적 기업들과 NGO(비정부기구)들이 각각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모두의 결합 효과로 개별 국가의 국가장치 자체가 변화한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 중 하나는 행정부 안에서 재무부와 중앙은행 등의 비중이 증가하고 자율성이 확대된다는 점이다. 대체로 민주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이들 장치는 국제 자본의 이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국제적 자본의 흐름과 개별 국가의 정책들 사이의 매개자, 심지어는 아예 단순한 전달 벨트로 행동한다. 이는 곧 (금융)시장이라는 세계적 규범이 행정적으로 내면화됐음을 제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상관적으로 의회나 정당 같은 전통적 대의장치는 역할이 약화되어 대의제도 전반의 위기가 초래되고 정치 체계의 정당성은 더욱 부족해진다. 대중들은 선거에서 어떤 정당을 선택할 권리는 있으나, 그들이 무엇을 할지 통제할 수 있는 권리는 박탈된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국내적으로 NGO의 역할이 부상한다. NGO는 기존의 국가 관료들이 소유하지 않은 관리적 지식과 이해 능력에 기반을 두고 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 안에서 정치적 협상과 의사결정을 위한 의제설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이들은 또한 대의제가 약화된 틈을 타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동원함으로써 발언권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들은 국가나 기존 정치세력․이해집단으로부터 자율적이지 않다. 일정한 지속성을 갖는 전문조직으로서 NGO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기부 이상의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며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와 국가연합, 국제조직, 심지어는 사적 협회나 사적 기업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의존관계를 통해 기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NGO를 활용할 수 있다. NGO는 특히 국가 행정기관들이 수행할 수 없거나 또는 수행하고 싶지 않은 실천적 프로젝트, 특히 개발 및 구호 작업의 영역에서 참여한다. 반대로 국가 행정기관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NGO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최근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적극적으로 여론화하고 이와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는 데에서 미디어와 국내 NGO들이 수행한 역할은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최근 노무현이 슬쩍 화두만 꺼낸 증세 문제가 증세-감세 논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박근혜의 반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사회쟁점화한 한겨레신문 등의 미디어 및 각종 NGO들의 역할 때문이었다. 또한 지역적 차원에서 조직되고 있는 자활 사업은 지역 NGO들이 주도한다. 그리고 현재 정부는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민간자본유치사업의 형태로 수행하면서 이의 운영을 지역 NGO들에게 이전시켜, 이들이 빈곤층을 직접 관리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듯 NGO는 전통적으로 국가가 수행했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의 출현, 그리고 노무현 정권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근대를 지배하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한 결과 발생하는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둘째, 서로 다른 지배계급들의 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수렴되는 상황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극히 첨예하고 격한 정쟁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지배적인 통치성의 역할을 수행해 온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통치성이 등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른바 ‘인민주의’라는 정치현상을 주목한다.4)

인민주의는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은 언급할 수 있다. 인민주의는 프랑스 혁명 등 근대 민주주의 혁명에 기원을 둔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라는 근대정치의 3대 이념이 위기에 빠질 때 출현한다. 이들은 사회적 갈등에 대한 인식과 토론보다는, 감정과 경험에 기초한 직접적인 분노의 표출을 추구한다. 또한 이들은 유기체주의에 입각하여 갈등 일반을 범죄화하고, 이 같은 유기체적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하는 가시적인 ‘적’을 만들어 원한의 감정을 동원한다.
현 정세에서 지배적인 인민주의 형태는 ‘정치가적 인민주의’다. 오늘날의 새로운 인민주의는 과거의 인민주의와 달리 지배이념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한다. 이들은 민족국가의 자율성이 제약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대중의 원한과 불만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안적인 발전전략을 추진하는 대신 대중의 곤궁과 불안을 가시적인 ‘적’에 대한 분노로 조직하고 인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적 수사를 남발한다. 이들의 정치적 수사에서 인민의 ‘적’이란 연고주의를 활용하는 기존의 정치가와 관료, 보호주의적 조치를 옹호하는 국내자본,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에 저항하는 노조 등 특수 이익과 특권을 옹호하는 존재들,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이러한 특권 그룹과 투쟁하며 그들의 특수 이익을 배격하고 기존 제도의 부패를 일소하겠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인민주의 지도자는 민주적 제도들을 우회하여 임의적 지배체제를 확립한다. 정치가적 인민주의는 입법부 등 대의제를 특수 이익의 구현체로 공격하는 한편 행정부와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킨다. 또한 지도자와 대중의 직접적인 인격적 유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미디어, 여론조사, 국민투표 등을 대중동원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한다. 이 때 NGO는 관리적 지식에 근거해 행정부의 역할을 대리할 수 있을뿐더러, 미디어를 매개로 한 여론형성에 능하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을 일부 대신한다. 더구나 의회와 정당을 통한 기존의 정치적 정당성 형성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인민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 영역에 속하지 않았던 NGO의 ‘재야’ 이미지를 활용하여 정당성을 보충한다.
요컨대 ‘정치가적 인민주의’의 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정치지형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위기에 대한 체계적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동시에 이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기득권 세력 및 기존 국가장치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한다. 집중화된 권력과 기술관료 지배 승인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위한 통치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대중의 고통의 강화라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둘러싼 악무한적 투쟁은 끊이지 않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약화되지 않는다. 이는 ‘탈식민지 발전도상국’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자본유치를 위해서는 기업가적 국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예외국가’로 존재했던 이들 발전도상국들의 ‘정상국가’로의 이행은 대중의 막연한 기대를 증폭시킨다.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가 결합되어 정치를 극히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안정감을 주는 권위적 국가에 대한 기대심리도 강화된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나 집권 과정, 그리고 이후 정치행태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정치가적 인민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대선 당시 여론조사를 통한 대선후보 결정, 이회창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공격,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등이 그렇다. 또한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에 비할 바 없이 적다는 10분 1 발언, 재신임 선언, 탄핵을 불사하거나 심지어 유도하며 선거법 위반 공방을 돌파하려는 정치행동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의 지지로 사태를 봉합하고, ‘나는 차악(lesser evil)이고 상대방이 진정 악의 두목이다’라는 전형적인 정치가적 인민주의 도식 활용이 그렇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득권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자 전반에 대한 공세를 가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을 인민주의라는 맥락에서 분석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인민주의는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낳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정적인 ‘대중적 토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은 여러 이질적인 집단들을 일시적으로 결집시킴으로써 집권에 성공했지만, 이는 특정한 정치이념에 근거한 다 계급연합이 아니라 계급형성을 봉쇄하는 ‘탈계급연합’일 뿐으로 사상누각처럼 불안정하다. 실제로 최근 보수세력의 지지율 상승은 그들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아니라, 노무현이 대표하는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멸에서 비롯하는 반사이익으로서 드러난다. ‘그들이 돌아오’는 이유는 보수세력이 건재해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가 안정적인 대중적 토대를 구축할 수 없어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민중운동 일각에서 제기하는 ‘신보수대연합’에 맞선 자유주의와의 동맹이라는 전략은, 반민중적일 뿐만 아니라 취약하기까지 한 정치세력의 손에 민중운동의 운명을 내맡기는 위험천만한 시도다.
둘째, 정치의 위기가 전면화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운데 대중의 민주적 통제 가능성을 무력화시킬뿐더러, 인민주의에 고유한 갈등의 범죄화 및 ‘반정치의 정치’를 초래함으로써 정치의 토대를 잠식한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하고 권위적인 국가를 (재)확립함으로써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자는 식의 대중적 정서를 낳을 수도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대중적 토대가 된다. 국가에 대한 미움과 기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 자체를 (재)발명하는 정치’가 개시되어야 한다.
셋째,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통과 책임을 전가하고 ‘적과 아’를 나눠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사쟁점이 등장한다. 현재 제기되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정확히 이 맥락에 있다. 따라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이 담론에 상식적이거나 실용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매우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넷째, 사회운동의 NGO화 압력이 가속화될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신자유주의는 대중들의 통제를 우회할 수 있는 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를 선호할뿐더러,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으로 인해 약화된 국가의 정당성을 보충해야 한다. 이 같은 이중적 요구에 동시에 호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NGO화된 사회운동이다. 대중운동의 후퇴 속에서 사회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만일 대중운동의 토대를 새롭게 구축하는 고단한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주의적이고 미디어적인 NGO 노선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또한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지체되어 온 이념적 독자성 확립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호명될 가능성이 높다. NGO화된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앞서 말한 대중적 토대의 취약함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이 위기에 빠지게 될 때 결국 비판적 지지라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제도정치로 진출한 이른바 386 ‘젊은 피’들처럼 운동 경력을 상품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대중은 벌써 386 정치세력을 환멸하기 시작했고, 이제 다음 차례는 NGO다.

주체화의 정치, 그리고 사회운동의 독자성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귀족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로마의 평민들은 국가에서 철수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했다. 이는 로마가 자주 에트루리아인들과 주변 산지 부족들인 아이퀴인들과 볼스키인들에게 공격을 받던 상황에서 대단히 위협적인 조치였다.
한 번은 이런 공격을 받은 뒤에 로마 군대가 그들을 격퇴하고 도시의 문들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자신들의 개혁 요구 조건들이 원로원에 의해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평민 병사들은 자신들의 귀족 장군을 버리고 아니오 강에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성산(聖山)으로 갔다. 자기들의 도움이 없으면 로마가 어떤 전투도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들은 귀족들의 후속 조치를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호민관(護民官) 제도를 쟁취한다. 호민관은 정무관의 전횡을 막아달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평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민회들이 통과시킨 법안과 원로원의 결의, 그리고 정무관의 행위 중에서 평민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 중재 또는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
5)

오늘날 사회운동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이념적·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가 통치와 관리,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대중들과 함께 주체로 서는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변혁이라는 의제를 현실적인 일정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초래한다. 이처럼 불안정한 정세 앞에서 우리는 자칫 과거의 실천을 묵수하거나 국가적 권위에 자발적으로 예속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정세는, 과거 로마의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지배계급으로부터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도리어 새로운 주체와 정치를 발명해 내는 호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같은 독자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 및 제도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통해서 정세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비판은 이를 위한 필수적 출발점이다.

1)박하순, 2006,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전망, 그리고 불안정노동」, 박하순․장귀연 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동운동 -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하여』, 도서출판 사회운동 본문으로

2)한편, 이러한 탈주체화 과정은 동시에 일정한 동원과 배제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중산층의 규율과 노력, 복지수급과 일자리를 얻기 위한 노동빈곤층의 근면성실이 요구되는 방식으로 각각의 층위가 서로를 경계하며 관리하도록 지배계급이 의도한 바대로 적극 주체화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3)아래 분석은 주로 요하임 히르쉬,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사회진보연대』54호를 참고했다.본문으로

4)구체적으로는 정인경․박정미 외, 2005, 『인민주의 비판』, 공감을 주로 참고하시오.본문으로

5)세드릭 A. 요, 프리츠 하이켈하임, 1999, 『로마사』, 현대지성사(표현은 일부 수정)본문으로
주제어
경제 빈민 민중생존권
태그
학생운동 등록금 대학구조조정 청년실업 청년유권자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