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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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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 '역사수정주의' 비판

배성준 | 트랜스토리아 편집위원
전사(前史) - 한국 사회성격 논쟁과 식민지근대화 논쟁

조짐은 이미 20여 년 전에 나타났다.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성격을 둘러싸고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대립하던 와중에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하였던 안병직 교수(당시 서울대 교수, 현재 뉴라이트네트워크 고문)가 갑자기 ‘중진자본주의’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1989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종속’과 ‘독점’ 범주를 가지고 한국 자본주의를 설명하고 있던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한국 자본주의는 후진자본주의가 아니라 중진자본주의이고 자립적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내부에서도 ‘종속’과 ‘자립’이라는 쟁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학 전통에서 벗어난 ‘중진자본주의’는 근대화론의 아류로 취급되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안병직의 한국 자본주의관의 ‘수정’은 사실 일본의 경제사학자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원래 마르크스 경제사학에 뿌리를 두었던 나카무라는 1970-80년대 사회주의의 쇠퇴와 자본주의의 고도성장 및 아시아 신흥공업국가(NICs)의 출현이라는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현상에 직면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일본과 한국의 경험을 기초로 [저개발국→중진자본주의→선진자본주의]라는 발전모델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1987년 안병직과 함께 한‧일 경제사연구자들의 모임인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안병직은 1993년 한 인터뷰에서 “종래 진보학계의 기본 전제는 한국에서 자립적인 자본주의는 발전하지 못하고 사회주의로 갈 것이라는 점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나는 이것을 버렸어요. 이러한 전제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더 이상 역사의 전망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첫 번째 사실은 한국에서의 자립적인 자본주의가 성장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전통적인 자본주의와는 달리 급격한 고도성장을 통해서 발전해 가고 있어요. 또 하나의 사실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로서의 사회주의사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이 세계사적 경험에 의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점입니다.”(『월간 사회평론‧길』, 1993년 11월)라고 ‘중진자본주의’를 제기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중진자본주의’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식민지근대화’ 논쟁이 부각되면서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한 혼란 속에서 중진자본주의의 동아시아상에 기반하여 경제성장의 역사적 기원을 추구하던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는 한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식민지 인식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사학계의 식민지 연구는 일제의 식민정책과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의 근대화를 부정하거나 그 혜택이 일본인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에 대하여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는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통하여 토지수탈의 허구를 비판하는 한편 미조구치 토시유키(溝口敏行)의 추계를 근거로 1912년에서 1939년까지 27년간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3.6% 증가하였다는 통계수치를 제시하면서 식민지에서 공업화가 전개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식민지근대화 논쟁은 ‘수탈이냐 개발이냐’라는 쟁점에서 드러나듯이 식민지에서 근대화 여부를 둘러싼 대립이었지만 논쟁은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는 ‘실증’을 내세워 한국사학계의 식민지 인식을 ‘허구’로 몰아붙이면서 민족주의 비판을 전면화하였고, 주류경제학의 논리와 수치에 허약했던 한국사학계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공세를 ‘식민사관’의 아류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민족주의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자신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고 한국사학계는 자체의 보수화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소멸된 것은 한국 사회성격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반봉건(半封建)’ 문제였으며, 잠시나마 한국사학의 진보성을 담지하였던 ‘민중사학’이었다.

한국판 ‘역사수정주의’의 출현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9월에는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발의되자, “선진국 건설에 일로매진해야 할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노무현 정권은 자학사관을 퍼트리며 지배세력 교체와 기존질서 해체를 위한 ‘과거와의 전쟁’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있다”(「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라고 외치면서 2004년 11월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하였다. 곧이어 2005년 1월에는 ‘자학사관’에 기반하여 쓰여진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개정하기 위한 ‘교과서포럼’이 결성되었고, 10월과 11월에는 뉴라이트를 표방하는 기존 단체들의 결집체인 ‘뉴라이트네트워크’ 및 ‘뉴라이트전국연합’이 결성되었다. 아마도 정부의 과거사 진상규명이 출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뉴라이트’(new right)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뒷받침하는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난하면서 ‘실패한 역사’를 ‘성공한 역사’로 수정하고 있다.
뉴라이트 관련 단체 중 ‘자학사관’의 수정을 주도하는 곳은 뉴라이트네트워크 산하 교과서포럼이다. 교과서포럼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매도하는 잘못된 역사쓰기를 바로잡고, 세계 제10대 경제대국으로의 성장이라는 ‘미션 임파서블’을 이루어낸 ‘성공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과서포럼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교과서포럼총서(『한국현대사의 허구와 진실』(총서1), 『경제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총서2))를 발간하여 교과서의 문제점을 공론화하는 한편 올해에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와 경제교과서의 개정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에 착수하리라고 한다.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이자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인 이영훈 교수는 지난해 10월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역사 왜곡’의 핵심은 역사교과서의 ‘좌편향성’이라고 지적하고 이렇게 왜곡, 날조된 교과서가 횡행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좌파민중주의 정권’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탐독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 ‘좌파민중주의적 역사관’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과서포럼의 이러한 인식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으로 이어진다. 박지향 편집위원이 쓴 머리말에서 발간 당시 문제가 되었던 구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 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재인식』1, 11쪽)라는 간행 동기나, “민족 지상주의와 현대사에 대한 좌파적 해석이 그동안 우리 지식계를 압도해 왔다”(『재인식』1, 13쪽)는 현실 인식은 교과서포럼의 현실 인식과 동일하다. 『재인식』 편집위원들은 『재인식』이 지난 20년 동안 축적된 학문적 성과일 뿐 그 어떤 현실정치적 함의도 가지지 않는다고 강변하지만, 교과서포럼과 동일한 현실 인식 아래 교과서포럼의 핵심인사들이 참가하여 편집한 『재인식』이 ‘뉴라이트’와 무관하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그렇다면 ‘교과서포럼’과 『재인식』이 추구하는 역사상의 수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교과서문제로 한‧일 양국에서 주목을 받았던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 ‘교과서포럼’의 위상과 의미를 살펴보기 위하여 유럽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revisional historicism)를 둘러보자. 먼저 유럽에서는 종전 직후 프랑스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부인하는 주장이 출현하고 1970년대 후반 나치의 범죄를 상대화하는 주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문학가인 로베르 페리손이 신문 기고에서 ‘가스실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았다’거나 나치의 범죄가 미국이나 프랑스의 범죄에 비하여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트로츠키계통 신좌익의 일원인 피에르 기요므는 반파시즘통일전선을 비판하기 위하여 나치의 범죄를 상대화하였다. 또 1980년대 경제 침체를 타고 르팽의 ‘국민전선’이 등장하면서 나치의 범죄가 수천만이 희생당한 거대한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거나 가스실의 존재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는 등 나치의 범죄를 상대화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독일에서도 1980년대 보수당의 집권과 함께 민족의식의 회복을 주장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에서 독일의 역할이 강조되는 가운데, 1986년 나치의 범죄를 상대화하는 놀테(Ernst Nolte)의 글을 둘러싸고 ‘역사가 논쟁’이 벌어졌다.
역사가인 퓌레(Francois Furet)와 놀테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부인하거나 상대화하는 수정주의적 견해의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퓌레에 의하면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서로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역사적 기원과 민주주의 타도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상호 공모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공산주의는 반파시즘의 신화를 기반으로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는 것이다. 퓌레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놀테는 소련의 강제수용소가 나치즘의 유태인 학살을 초래하였다는 도전적 문제를 던져 ‘역사가 논쟁’을 촉발시켰다. 놀테는 볼셰비즘과 나치즘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여 나치의 범죄를 상대화시킴으로써 독일사의 부담스러운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역사수정주의는 유럽의 전후 민주주의를 규정해 왔고 유럽 진보세력의 도덕적‧현실적 권위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반파시즘이 허구임을 입증함으로써 진보세력의 권위를 붕괴시키고 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분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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