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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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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의 정치적 실천을 통한 권리의 재형상화

린다 M.G.제릴리 | <번역>책속의 책 번역팀
권위 있는 여성 대담자가 있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자유의 기획에 따라 분명히 표현하고 여성 되기(being a woman)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대담자가 필요하다.[…] 권리 주장의 정치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심오한지에 상관없이 부차적인 정치다.
- 밀라노 여성서점 31

이 놀라운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Non Credere di avere dei diritti: la generazione della liberta`femminile nell’idea e nelle vicende di un gruppo di donne)에서다. 이 책은 1987년 <밀라노 여성서점>(Liberteria delle Donne di Mliano)이 집단적으로 집필했고, 1990년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지금은 절판된『성적 차이』는 매우 도발적인 저작이어서 미국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1990년대 소위 “여성” 범주 논쟁에서도 사실상 누락되었다..1) 이와 같은 부재는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공동 역자이자 편집자인 라우레티스(Teresa de Lauretis)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여성의 권리, 법 앞에서의 평등한 권리의 옹호가 아닌 여성에 대한 완전하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책임성을 요구하는 자유는 서구적 사고 속에서 출현한 다른 어떤 통념에도 뒤지지 않는 급진적인 개념이다”(12)..2)
자유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정치적·개인적 책임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런 실천이 과연 서구 사상사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못지 않게 급진적이라면, 왜 미국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성적 차이』를 다소 무시했는가? 이러한 질문을 반성하려면,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의 개념화, 즉 의지의 현상, 주체의 소유, 주권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개념화에 그녀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체제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자유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용어로 정의되고,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 거주하며, 정치가 종결되는 곳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경험된다..3) 그러나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를 이와 다르게 사고한다. 이들에게 자유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집단적인 실천이자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가진 [실천으로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우연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한다. 즉 이 여성들은 이런 실천이 없었다면 남성적 교환 경제 안에서의 위치를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밀라노 여성들은 1·2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자유를 주장해온 틀을 거부하며 남성과의 유사성(동일, sameness) 또는 일반적인 사회 복리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특별한 기여(차이)라는 식으로 자유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정당화하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밀라노 여성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에 대한 이해를 특징짓는 주권이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자유를 향한 여성의 요구를 여성들의 사회적 기능의 봉사 안으로 밀어 넣는 유용성이나 편의의 논리 역시 거부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여성 문제와 여성권에 대한 논변의 역사적 반복을 운명적으로 지배해 온 논리다. 즉, 여성의 쓸모는 무엇인가? 내가 다른 곳에서 페미니즘의 사회적 문제라고 칭했던 것의 논리는 제쳐두고, <밀라노 여성서점>의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Milan 50)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발생시키는] 실천”(79), 또는 밀라노 여성들이 “성차의 정치”라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의 전체 기획을(145) 개작한다..4)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밀라노 여성서점>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자유를 주권으로 보는 문제적인 관점에 우리가 연루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이탈리아어본 부제(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미국 페미니스트는『성적 차이』를 여성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렇기 보다는, (“여성” 범주 논란의 맥락에서) 성들 간의 감축할 수 없는 차이에 관한, 그리고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국적 관계를 압도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상징적 비대칭성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였다..5) (대부분 유럽적 기원의) 페미니즘 저작을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성급히 기각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6)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성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위티그(Monique Wittig)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우리를 여성의 신화로 후퇴시키”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차이의 범주들, 이들의 정치적 기원과 효과에 관한 진지한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해 왔다(13).
이 글에서 나는 성적 차이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설명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익숙한 논변을 다시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7) 우리(페미니스트)가 이 논쟁에서 이미 지쳤다면―기초에 관한 논쟁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이는 적지 않게 성적 차이를 주체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사고하는 데에 우리가 진정한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 문제의 틀 내에서는,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모체 내에서 주체 형성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 이외의 것으로 성적차이를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 차이를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거나 (즉, 준 형이상학적인)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즉, 역사적으로 우연적인)으로 여겨왔다..8) 페미니즘 기획을 다루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 자유-중심적 틀 내에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우리로 하여금 성적 차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즉 이는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는, 즉 공적 공간에서 이 같은 다른 주장들과 공적 관계에 진입해야 하는 성적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성적 차이라고 불리는 자유의 실천이 부과한 난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밀라노 여성들의 정치의 중심에 있는 세계 건설의 임무에서 비껴나지 않아야 한다..9) 이러한 임무는 여성들이 남성적인 문화 안에서 겪는, <밀라노 여성서점>이 여성을 약화시키는 (상징적인) 무차별 상태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여성은 동일하다.’는 언명에 대한 대응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의 성/성별 차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초점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유산에 동반된 성/성별 평등의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스트 정치에도 도입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말하기를 페미니즘 내에서 평등은 “성별에 근거를 둔 공통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당신이 모든 다른 여성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를 강화하지만, 각각의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특색/구별을 필요로 한다.”는 점(137)과, 한 집합의 등가적 구성원 이상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그녀의 특수성을 무시한다. “중립적인 정의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여성과 비교하지 말고, 남성과의 평등을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 결과 여성들의 경험은 자기 자신 안에 감금된 채 사회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113) 다양한 경험을 인정하고, 평가하고, 매개할 수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리 잡을 시-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여성은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있고, 이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어쨌거나, 누구와 [기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25)
대담자와 매개(현세적인 사이 공간)의 상징적 구조를 이름붙이는 것은 “사회 계약의 성별화된 토대에 이르게 되며”, 첫째로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 계약은 없다.”는 사실과, 둘째로 “여성은 상징적인 수준에서는 무리이지만”, “사회생활에서는 […] 대부분 서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129, 134). 남성적인 사회 계약의 이면은 단지 페이트먼(Carol Pateman)이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밀라노 여성서점>이 동의했을.1) 것처럼 남성의 여성 소유뿐만 아니라, 여성이 기술과 “사회 교환의 규칙”을 누리지 못하는(134) “여성 인류의 야만적 상태”(137)이기도 하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남성들의 관계의 규범을 해치는 예외적인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밀라노 여성서점>이 “남성의 정치적 사고에서의 맹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136). “여성들이 개인적 특색/구별을 지니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여성의 공통성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자매들의 요구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개인과 집단성 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남성들의 선언들 사이에서 탐색해” 봐야 소용이 없다(136).
<밀라노 여성서점>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적 사회 계약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그 중심적인 원칙은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Equal” 32)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드러낸 실패한 논리 속에 페미니즘을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남성적 기준이 평등한 권리를 위한 여성들의 역사적 투쟁 이면의 공공연한 표준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11) 이 표준이 그들에게 평등이냐 차이냐 라는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 초기부터 페미니즘을 괴롭혀왔던 문제다..12) 이것은 페미니즘을 상반된 진영(평등 페미니스트 대 차이 페미니스트)으로 분할하는 문제며, 이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인다..13) 그리고 이는 아마 사실이다. 평등과 차이라는 분명하게 모순되는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즘의 틀 내에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1) 두 진영 중 한쪽을 따르거나, 즉 불가능한 선택을 하거나, (2) 불가능한 선택을, 스콧(Joan Scott)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의 구성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다..14)
그러나 아마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평등이나 차이(또는 양쪽 모두)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하는 대신, 자유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한다면 어떨까?
페미니즘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가능한 선택의 무게감으로 부서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에 내세워 페미니즘적 부등(disparity)이라는 실천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엄청난 위험과 서구 페미니즘의 상식과의 불화에 빠뜨린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의 역사적 열망을 실현하려는 기나 긴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야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페미니스트들은 그래야 한다고 지나칠 만큼 주장한 바대로 평등의 원칙을 자유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고 그것의 정치적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Milan 143). 그러나 왜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이라는 원칙을 문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면서, 어쨌거나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호소였던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기를 원하는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계약 이념의 중심을 차지해 온 자유라는 수사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는 그들이 본 뜰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 남성들의 자유로서의 역사적 정식화라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는 주권의 환상으로 해석된 자유다. 이 환상은 많은 1·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페미니즘을 사회 계약의 특정한 형태(자유주의)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로 축소시켰다 (Milan 136~137). 여성들 간의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사회적-상징적인 관계의 실천과 상징이 부재한 가운데, 자유주의는 자신의 성별화 된 육체 및 여성들의 제휴를 부정함으로써 남성과의 평등 및 자유를 추구하라는 “끔찍한 초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성적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를 북돋기는커녕 이를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공통성을 떠나기를 원하는 여성,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세르피나와 마찬가지로 “남성 권력의 마비된 상징의 범위에 갇혀, 다른 여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협상할 자격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135,137). 자유를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허하며, 가능성 없는 의지일 뿐이며,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만약 여성이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권이다(“What Is” 165).
“사회 계약을 찢어버린다.”는 것은 주권으로서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유를 공동체나 더 높은 선(善)에 대한 기여라는 견지에서(예를 들어 사회적 문제의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 정치는 이런 태도, 즉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약자를 보살피고 폭력적 수단을 회피하는 등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 행동으로 체현된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변화시킬 것을 계획하는 정치와 접목되었다.”(Milan 125) 여성의 자유가 “윤리적 본성의 내용”이나 “다른 내용”에 의존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정치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여성과 그들의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자신의 차이를 정당화해야 하는 의무와 이러한 의무가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26) 여성적 자유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근본적이거나 결과주의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유일한 이유는 그 자신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제시한 여성적 자유에 대한 과감한 설명은 “1966년~1986년 사이, 주로 밀라노에서 나타난” 자발적 연합의 발전을 상술하는 일련의 삽화 속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즉, 남성적 교환 경제 내에서의 전통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서로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던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무근거적 실천..15) 이러한 연합은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거니와, 권리의 영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여성들의 공적 자유의 실천과 영역의 구성에 결정적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러한 연합,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혼합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형식적 평등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정치적 자유의 구성과 실천을 형식적인 평등 및 권리의 제도화와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정치적 자유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실천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때로는 평등한 권리의 제도적 공간을 초과하는 주관적인 사이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다소 성급하게 덧붙이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실천이 자유의 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냐 차이냐의 선택지처럼) 권리와 자유를 놓고 다시 한 번 잘못된 선택지를 설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특성, 세계 건설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 새로운 사회 계약은 평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 또는 그의 행사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가? 이 질문, 그리고 성적 차이의 정치가 내놓는 비범한 답변으로 넘어가자.

보상에 대한 욕망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의 문제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제한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연합을 건설할 역량으로 이해되는 자유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형태는 성적 차이와 동떨어져서 사고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삶 전체를 조건 짓는 사건이기 때문이다.”(Milan128)
필연의 힘을 지닌 우연적 사실, 즉 성적 차이는 파괴되거나 초월되지 않고, “부자유의 원인에서 우리[여성의] 자유의 원칙으로” 재상징화, 변형된다. (122)
이러한 변형은 항상 “여성(female sex)의 인간적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된다.”(119~20)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그러나 회피하거나 의지로 사라지거나 폭력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인간 조건, 곧 성적 차이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며, 오직 이 “새로움만이 강제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혁명은 새로운 것을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러나 파괴는 여성적 사고의 혁명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사고해야 할 새로운 것은 차이(difference)기 때문이다. 전복은 어떤 사물들이 배열되어 있는 방식, 즉 그것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미 주어진 진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것을 악화시킴으로써 바꾸는 새로운 배열이 있다. 물리적 파괴는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되더라도 그 의미를 보존하며, 누구나 그것이 다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배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20)

앳킨슨(Ti-Grace Atkinson)이 유명하게 선언한 바와 같이 “여성이 인간으로 태어날 시도를 할 작정이라면, 그녀들은 자살을 해야 한다.”는 관념은 이탈리아 여성들의 자유 기획과는 철저하게 이질적이다(49). 만약 과거의 상태가 현재의 상태 및 자신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파괴하고자 하는 소망은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그리고 니체가 무기력하고 자기혐오적인 특성이라고 진단한바 있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과거의 상태”는 압도적인데, 왜냐하면 과거는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과 의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의지한다. 그리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잊혀지거나 바뀔 수 없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자신의 관계를 바꾸어야만 한다.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였다’를 ‘나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로 변형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179)”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성적 차이의 정치의 맥락에서 구원은 어떤 식일까? 페미니스트들은 위티그가 “성의 범주”라고 불렀던 것을 복귀시키지 않고 성적 차이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성적 차이에 대한 확증이 우리를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익숙한 수렁에 가두거나 브라운(Wendy Brown)이 “상처입은 집착”, 즉 “부자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불렀던 것이 최초에 여성적 동일성을 구성했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집착에] 숨어들지 않을까 (xii)?
주체 문제의 틀을 통해 읽는다면 『성적 차이』는 페미니즘과 같은 자유를 위한 근대적 투쟁과의 “역설적인” 연루라고 브라운이 불렀던 것을 “자유가 대항하여 출현한 바로 그 억압적인 구조”의 안에서 예로 제시한다 (Brown 7)..16) 브라운이 정의한 자유의 역설은 주체 형성의 역설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반영하는데, 이는 주체는 그것을 주체로/종속시킨 사회적 규범자체를 반복하도록 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제약된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주체는 자신의 실재성이나 및 사회적 존재감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브라운은 반응적이고 반영적인 동일성의 구조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쓴다.

주변화 혹은 종속에 대한 항의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정치화된 동일성은 자신의 배제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러한 배제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고 배제의 장소에서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것을 비난할 장소를 찾음으로써 종속과 주변화에 수반된 “고통의 방향을 바꾸거나” 이를 증대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역사 동안의 고통을 정치적 주장의 기초 자체, 동일성으로서의 인정에 대한 요구 안에 장착시킨다. (73~74)

인정 및 보상에 대한 주체의 정치적 요구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동일한 주체를 예속시키는 (또한 구성하는) 상처의 경험 자체를 강박의 형태로 반복한다.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보상에 대한 욕망에 포함된 위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쓴다. “여성이 보상을 요구하는 한, 그녀가 무엇을 획득하는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128)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어떤 식으로 과거를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둔 채, 여성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끝없는 추구에 가두고, 역으로 “여성”을 피해의 동일성으로 구성할 뿐인지를 보았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는 여성이 부당함의 피해자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들이 얼마만큼 보상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권리를 보유하고, 이렇게 게임이 영원히 지속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가 불확정적이고, 상실감이 깊어서, 영원히 되풀이해 비난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128~29)

이것이 2세대 페미니즘을 “피해자화의 정치”로 만든 것이다. 이는 “가정주부, 낙태 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 욕망하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여성(female sex)의 형상, 그 자체로 여성적인 것의 화신을 필요로 한다.”(103)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집착”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상처를 동일성으로 재설정한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피해자화의 정치에 관해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살아있는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성(female gender)의 비참함”을 형상화하는 것은 항상,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여성을 포함한 “다른 여성”이다..17) “다른 여성에게 투사된, 어떤 여성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형상”은 2세대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상징이며, 이는 “틀에 박힌 가정주부, 낙태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의 관점에서 브라운이 이야기한 “상처받은 집착”은 아무에게도 깃들지 않은 피해자 동일성이며 “누군가의 고통과의 대중적 동일화처럼 보인다.”(Milan 102)
밀라노 여성들에 따르면, 자유를 동시에 부인하고 확언하는 경향은 상징적 실천이 지닌 정치적 문제다. 즉,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는 아무런 상징적 형상화를 거치지 못한다.”(70) 따라서 <밀라노 여성 서점>은, “여성운동이 결여했던 것은 [여성의 예속]에 대한 의식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으로 사고되는 자유로운 여성의 표상이다. [대신] 자유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103) 달리 말하면, 여성이 억압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억압의 진실이나 날 것의 사실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형상이 동일하게 페미니즘을 북돋은 것은 아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 중요했던, 여성 자유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의 고대 모계제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대상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결과는 오직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내에서 이 욕망이 자신에게 반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18) 어떤 것도 과거의 절대적인 자유에 비견할 수 없으며, 과거로의 회귀만이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현재는 초월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 같은 고대적 과거라는 관념은,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의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몇몇 여성이 수행했던 결정적 역할과 같은 가장 최근의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도록” 만들었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가한다. 이러한 역할은 침묵 속에서 간과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개별 여성의 자유를 완전히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원망을 샀을 것이다”(104). 다시 말하면, 여성의 자유로운 행동은 고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자유와 비교해 한참 떨어지는 것으로 부인되었거나, 주권의 견지에서 파악되었을 것이다. 즉 다수에 반하는 일인 혹은 소수의 자유.
따라서 빠져 있는 것은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자유의 경험(예를 들어, 행동과 발언을 통해 다른 이들과 새로운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실천)이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형상화였다. 이러한 형상화가 부재한 가운데, 자유의 경험은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미래 혁신의 원천으로 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형상은 중요하다. “여성”을 간단히 피해자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밀라노 여성서점>의 말을 빌면, “한 범주의 여성, 즉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 범주의 문제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이를 여성적 조건의 일반적 전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조건을 그들의 최소공배수로 평준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의 다양한 선택과 스스로 상황을 개선해야 하기 위해 가지는 실질적인 기회를 지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이로써 여성(female gender)의 존재를 부인한다. 오직 아무도 동일화할 수 없는 ‘여성의 조건’만 존재할 뿐이다”(Milan 68). 더욱 나쁜 것은, 이 같은 아무것도 거처할 수 없는 주체 위치의 상징적 형상화가 헤게모니적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보상의 논리에 가두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피해자 동일성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형상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정치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상을 제공한다. 여성을 부당함의 피해자로 인정함으로써 게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을 보상이 아닌 사회적 기명(inscription)을 추구하는 욕망의 담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당한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상을 제시해 온 페미니즘은 여성 욕망의 대안적 상징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 게임이 계속 유지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빠져있는 것은 서로를 되풀이 해 비난하지 않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시점에서 일부 여성이 이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여성이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형태로만 상징화하지 않는” 여성 욕망의 “상징적 권위부여”다..19)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전체 사회 집단의 실질적인 욕망이라고 전혀 믿을 수 없는, 또는 ― 그것만이 아니라 ― 먼 일차원적인 정치적 표상의 문제라면,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상징에 대한 정치적 연구”라고 부르는 것이다(Milan 106)..20)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브라운처럼 피해에 선행하는 주체성이 발전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상징적 실천, “[보상을 요구하는] 다른 이의 부당함이 아닌 여성이 되고자 하고, 될 수 있는 더 이상의 무엇 안에서 윤곽이 그려져 있음을 보는 실천의 창출을 부정한다.”(101) 이 “이상의 무엇”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욕망이 아니며, 따라서 피해에 대해 보충받으려는 욕망도 아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정치는 피해라기보다는 자유의 형상, 평등보다는 “이상의 무엇”에 대한 욕망 아래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별의 형태를 제거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의 대응(남성에게 건네지는)은 새로운 사회 계약을 창조하기 위한 순향(順向)적인 실천(여성에게 건네지는)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제 이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실천”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21)

평등에 얽힌 문제

<밀라노 여성서점>이라는 이름이 드러내듯 『성적 차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주로 1975년 10월 밀라노에서 개장한 여성 서점이라는 공간과의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밀라노여성서점은> “하기의 실천(the practice of doing)”을 발의했다고 설명되는데, 이 실천은 1970대 초반에 Autocoscienza(자기고백)의 실천을 둘러싸고 형성된 “말하기 그룹”을 토대로 세워졌다. 초기 2세대 미국 페미니즘의 ‘의식 고양’운동과 유사하게, “Autocoscienza의 실천”은, “완벽한 상호 동일화를 전제로 하며, 또 이를 추동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즉 우리 [여성] 중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의 언어이며, 그녀의 언어이자 나의 언어다.”(42)라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언급했다. Autocoscienza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고양시켰지만, 그 힘은 또한 그 한계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보여줄 수 없었다”(45). 비록 이러한 실천을 시작한 많은 여성들이 지속되고 넘쳐나는 성차별에 대응하면서 남성들과의 평등의 가능성에 등을 돌렸지만 (40), Autocoscienza는 비록 여성들 사이에서이긴 하지만 평등의 논리를 유지했다. 즉 “차이가 발생하면, 이러한 차이가 상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한에서 주목받아왔는데, 그래야 상호 동일화가 다시 설치될 수 있다”(44).
무차이의 문제―모든 여성은 똑같다―와 초기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이것의 재생산은 ‘하기의 실천’의 출발점이다. 이는 “말하기 생활의 물질적 측면”을 정교화하고 페미니즘을 자매애로써, 즉 정치에 앞서 공통성들이 주어진 친족 양식으로서 실천하는 경향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하기의 실천’은 반드시 애정과 친밀성으로 묶이거나 간단명료한 슬로건으로 규합되지 않고, 공동의 기획에 의해 단결하는 여성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자신의 이성,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위해 이러한 공동의 기획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집단적 이행의 시험에 부친다.”(Milan 86)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초기부터 “하기”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정치의 중심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 경험 교류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데, 이는 최초의 말하기 그룹, 또는 Autocoscienza의 첫 번째 정치적 가치, 즉 “여성의 공통적인 동일성”의 확증을 특징짓는 것이었다(42).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한 순간을 형성했던 환상이나 정신적 고찰의 문제, “무의식의 실천”에 대한 고찰을 거부하지 않았다..22) 그러나 점차 출현하는 것은 평등의 정치와 주체에 대한 작업 양자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들은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차이를 상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세적 조건의 변화라고 보았다. ‘하기의 실천’에 “새로운 주제가 도입되었다. 여성 정치라는 주제는 더 이상 의식과 발언 [즉, 언어]에 대한 접근에 중심을 둘 수 없다[…]. 새로운 용어는 창조변형―주어진 사회적 현실을 변형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84). 이러한 창조와 변형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다루는 정치적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시작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평등의 원칙과 여성의 공통의 동일성을 둘러싸고 조직된 형태의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가 “페미니즘이 여성들을 분할하는 차이에 익숙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유일하게, 여성들 간의 차이는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고, 평가하거나 판단할 모종의 방법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차이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를 인정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문제다. 그 방법을 배우려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관련짓고 판단할 정치적 능력의 발전이 요구되며, 이는 또 다른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한다. 성적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상징화가 그것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들 간 차이의 상징화를 의식고양 및 초기 페미니즘과 연관된 동일성의 정치에 필요한 중화제로 여겨왔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성적 차이의 상징화를 여성들 간 차이의 소거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는 반면, <밀라노 여성서점>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상징화가 부재하다면 이러한 차이가 소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라노의 여성들은 성적차이의 정치를 <밀라노 여성서점>의 공간 자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하기의 실천’으로서 발전시킨다. ‘하기의 실천’의 중심적인 기획으로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여러 페미니스트 공간(loughi delle femministe) 중 하나로 여겨졌다(Milan 96)..23) <밀라노 여성서점>은 개점을 알리는 포스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서점은 거리로 열린 공간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서점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손으로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여성에게 아무도 당신은 누구며, 무엇을 믿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서점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이 안에서 공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여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치의 출발점이다”(92).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실천[…]이 정교화되었다. 이는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불렸다”(50). 이 실천은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이다.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관계의 체계는 ― 우리가 가능하다고 배운 바대로,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면서 구체적으로 ―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왔다”(51).
유사한 관심사(예를 들어, 문헌, 작가, 장르, 비평 등)를 공유하는 여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밀라노 여성서점>은 처음으로 정치의 최소 조건으로 기능했다. 이는, 아렌트의 설명대로, 공유된 현세적 관심사(interest)로,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이에(inter)-놓여있는(est) 무엇, 즉 사람들 사이에 놓여 그들을 서로 연계시키고 또, 묶어주는 무언가를 구성한다”(Human 182). 아렌트의 행동 중심적인 정치에 관한 견해에서, 이러한 사이 공간은 “절합적 방식으로 사람을 함께 묶으면서 또한 이들을 분리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항상 수행한다”(181).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사이 공간은 관심사에 따른 행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는 완전히 다른 사이 공간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서 성장한다. “이 두 번째의 주관적인 사이 공간은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하고 말하는 과정은 어떤 결말과 결과물을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무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이 공간은 가시적으로 공유하는 사물들의 세계 못지 않게 실재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고 부른다(182-83). 밀라노 여성들은 이를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주관적인 사이 공간, 정치적 관계 자체는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고 있다(human 183).” 이는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점인데, 그 중 하나를 우리는 항상 시야에서 놓칠 위험에 처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간단한 점인데, 즉 대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자는 나와 다른 견지에서 보는 사람이다. 대담자는 인류의 복수성(plurality)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미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이러한 복수성은 “여성들 간의 차이”로 생각되었다. 복수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에 우선하여 중요한 인구통계학적 요소로 보이는 사회적 차이(예를 들어,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를 인정함으로써 대담자를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도 사회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기의 실천” 뒤에 놓여있는 전반적인 요점이었다. 그러나 “하기의 실천”, 즉 여성들 간 차이를 다룰 방법을 습득하는 것은 실패했다. 왜?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하기의 실천”인, <파르마 여성 도서관>을 참조하여, 이것의 창립 문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기획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여성의 의견을 녹취하는’ 그들의 모험적 시도를 제시할 ‘문서’로 이어지는 논쟁의 일부분을 보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근거는 [파르마 여성들의 표현을 빌면] “우리 모두의 관점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문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논쟁 과정에서 한 여성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집단 내에서의 여성의 다양성과 비동질성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이기 때문이다.”(94)

그러나 이 기획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인 방법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 보장은 실패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출현하다. 이론에 따르면 차이는 여성(female sex)의 존재에 필수적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94)..24) 판단에 대한 무언의 금기는 특정한 차이가 발언되도록 허용하지만 이를 의미 없는 상태로 내버려둔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사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문서(그리고 동종의 다른 문서들)는 “여성들 간 차이의 가치에 관한 다량의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99). 이러한 차이를 평가·접합·연결하는 방법인 판단이 부재한 가운데, 이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알맞게 기록되고 심지어 칭송되지만 판단을 거치지 않는 차이는,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했던 Autocoscienza의 실천에서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하기의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에도 의미가 없다. 여기서 그들은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다.
“여성들 간의 차이”가 미국 페미니즘에서처럼 어떻게, 비록 역설적이지만, “진정 중요한 차이”를 숨기는 공허한 슬로건이 되었는지, 그렇게 해서 이것이 “죄책감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인지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하기의 실천이 지니는 한계를 대면한다. 즉, 여성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며 여성적 욕망은 대담자를 갖지 못한다”(99). 여기서는 처음부터 대담자의 존재에 필수적인 복수성을 구성하는 것이 여성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아니다. 복수성은 인구통계학적, 또는 실존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정치적 관계이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차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를 무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셈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대담자의 존재는 모든 여성의 의견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은 차이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러한 차이를 압도적인 평등에 붙들어 놓는다.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여성의 의견을 [판단하지 않고] 녹취하는 것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을 제공하기는커녕, 이러한 실존이 현실성을 획득할 공간, 즉 페미니즘 정치 자체의 현세적 사이 공간을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은 다른 여성을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판단을 대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142)고 선언한다. 초기 페미니즘(예를 들어, Autocoscienza, 하기의 실천) 의 판단 유예는 전혀 해방적이지 않다. 이와 반대로, 인가(approval)의 욕구가 우세하다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여성의 판단에 종속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여성의 욕망은 시들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여성 서점>이 다른 기획에 비해 더 좋은 하기의 기획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밀라노 여성 서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초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95). 이러한 기초가 욕망(즉 잘 근거지어진 논변이라기 보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밀라노 여성서점>이 관련되어 있는 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판단 내리고 판단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표현되는 욕망은 [욕망이라는] 기초에 손상을 입히는 여분의 감정을 발생시킨다.” 남아있는 것은 자신을 다른 것에 결부시키지 못한 채 여기 저기 존재하는 여성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95). “여성의 욕망을 침묵에서 꺼내고 위험에 처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면”, 자신을 판단에 노출시키지 못한다면, 하기의 정치는 다양한 욕망이 원칙적으로 판단에 대한 금기로 평준화된 채로만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이러한 실패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무언가를 여기에 걸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평등의 논리와 단절하고 부등의 정치적 가치를 발견했다.

부등을 발견하다

『성적 차이』의 4장은 <밀라노여성서점>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묘사하고 있다. 그 장은 “여성문학에서 자유의 첫 번째 형상(figures)”이라는 제목의 절로 시작되며 “『노란 일람』(Catalogo giallo, Yellow Catalogue)―이것은 <밀라노 여성서점>과 <파르마 도서관>이 1982년 출판하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Le madri di tutti noi)이란 제목의 소책자 표지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부등에 관한, 모든 여성들이 그녀들 사이에서조차 동일하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그리고 이 사실에 관한 여성들 자신의 사회적 해석에 관한 것이다.”(108) 그 기획 면에서 “『노란 일람』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책은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적 기록을 특권화하고 독자들 편에 서기 때문이다.”(109) 즉, 그것은 창작물을 생산하는 예술적 천재가 아니라 그 창작물을 판단하는 독자에게 초점을 두었다.
여성문학에 대한 이런 개입이 독특한 문학적 형태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사실 “여성들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런 흥미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 탐구는 정의될 수 없었던, 이름이 없었던 어떤 것, 즉 “인류 문화가 알지 못했던, 여성되기에서의 차이에 관한 것”(109)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직접 관련되는 것들의 의미를 찾을 필요성”과 “여성 작가들이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진 채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읽혀야 할 여성 작가들과 소설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읽기로 결정했다. 좀 더 객관적인 기준 [즉, 심미적 판단의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당시 생각했던 것처럼 결백한 결정이 아니었다. […] 사랑이나 우정 관계를 벗어나 다른 여성을 선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09)

반대로, 그런 선호들은 잠재적으로 금지되었는데, 그것들이 집단의 동일성을 해칠 수 있는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선호 행위는, 그 잠재적 ‘유해함’ 때문에, 모든 여성적 욕망을 마치 박해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평형 상태에 가두었던 여성적 정치의 도식을 뒤흔들 운명이었다.” 모든 독자가 같은 선호를 갖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선호가 없었으며, 또 일부는 매우 강한 선호를 갖기도 했다. “위기를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110).

위기가 터져 나온 것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인물에 관해 논쟁하던 때였다. 제인 오스틴을 반대하는 한 사람이 그녀가 다시 한 번 소수로 몰린 토론에서 […] 논쟁을 멈추고 관찰자처럼 말했다. “[딸의 자유를 방해하는] 어머니들은 작가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들은 사실 여기 우리 사이에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처음 말로 표현되었을 때, 그 말은 끔찍하게 들렸다. […]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수정처럼 분명했다.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 우리가 눈앞에 대면하고 있었으나 수년 동안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하지 않았고, 동등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동등했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다는 점을 즉시 발견했다. 첫 순간의 공포는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110~11)

여성들 사이의 불평등을 발견하자 자유로운 느낌이 생겨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심미적 판단을 내리는 실천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우리의 역사에서 생겨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에 부합하지도 않는 평등이라는 이상”에서 해방되는 것과 일차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111) 이 평등이라는 이상은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에 기초한 공통성을 명목으로, 상호반목하지 않는 모든 여성적 욕망(즉 피해의 동일성으로 표현되지 않는)과 차이의 분명한 표현을 뭉개버렸다. 이런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이상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상상하도록 우리 자신을 괴롭혔고, 존재했던 것의 활용을 스스로에게 금지했다. 마치 우리의 문제가 강력하게 경쟁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경합의 치료제를 찾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 불확실하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소위 여성들 사이의 권력 갈등 이면에서 그런 갈등을 고통스럽고 끝없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111)
존재했던 것은 여성들 사이의 재능, 능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며, 만약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다룰 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면 이는 여성들의 실천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가끔은 그런 실천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존재했던 것은 기호의 차이였고, 그것은 사회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었다. 모든 여성들이 비슷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들이 서로를 분할하는 각기 다른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이것이 최근 미국 페미니즘이 차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녀들이 각기 다른 호오(好惡)를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들이 어떤 특수한 사회적 집단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비록 약간은 연관이 되기야 하겠지만, 소모되지 않는다.
오스틴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차이(즉, 성별,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로 환원할 수 없고 하기의 실천(practice of doing)에서는 가려졌던 차이의 형태를 드러냈다. “하기의 실천”은 여성의 보편적 비참함이라는 표상에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차이를 다루는 방법,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다. 이런 정치적 기술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의견의 깊은 갈등과 차이를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밀라노 여성서점>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기술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성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남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여성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더 정확히는 운동하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성, 언쟁, 각기 다른 의식수준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모순이나 “나는 낙태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여성들과는 상관없다.”는 식의 근본적인 반대는 아니었다. (69)

격렬한 갈등이나 불화의 공간이 없다면, 강렬한 욕망을 위한 공간이나 진정성 있는 정치의 가능성도 없다. 그 당시 ― “그녀 말고는 다른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각각의 여성들과 “대담자 없는 여성적 욕망”이 있었던 때 ― <밀라노 여성서점>은 “페미니즘적 관점”, 즉 “더 이상 현실과 관계가 없는 미리 구성된 이데올로기나 진부한 담론”에 따른 판단의 필요성을 제외시켰다(85). 이데올로기는 판단의 규칙을 제공했다. 하지만 삼단 논법의 추론에서 예증된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심미적이거나 정치적인 판단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특수로서의 특수(particular qua particular)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당신이 ‘아름다운 장미다!’라고 말할 때, 이런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 이 꽃은 장미다, 그러므로 이 장미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Lectures 13~14)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당신은 이를테면 “이 장미는 아름답다”는 판단에서 다른 장미나 모든 장미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의 독특성에 직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문학 작품에 눈을 돌린 다음에야 여성들 사이의 부등이 발견된 것은 우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오스틴과 같은 작가들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선호를 표현하면서, 각자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이는 진리(또는 진리 담론, 이데올로기)에 고정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유한” 페미니즘적 관점의 독백과 더불어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이데올로기적(삼단 논법의) 추론(즉, 모든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 이 작가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과는 다르게, 기호의 판단은 하나의 규칙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드러낸다. (심미적이거나 반성적인) 판단을 실행할 때, 사람들은 여성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타인들을 진정한 대담자의 위치에 놓는다. 나와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은 선호를 가지고, 나의 관점과 동일하지 않은 관점에서 보며, 자신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나에게 청하거나 내가 고이 간직해 온 의견을 판단하고 아마 뒤흔들어 위기의 지점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할 것이다.
하나의 규칙에 의해 판결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부등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부등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쨌거나 수많은 형태의 사회적 부등이 있고, 그런 부등 중 많은 것이 부당하다. 그들은 “부등의 실천이 필수적인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등의 부당한 형태들을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다른 형태의 부등과 구별하게 해 줄 것이다.”.25) 부등의 실천은 “차이가 자유로운 사회적 형태 속에서 발언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다.(Milan 132) 우리가 아직 이 부등의 실천이 어떤 식일지 모르긴 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의 민주적 이상에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지는 궁금해 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서구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평등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관점을 가졌다. 여기에는 권리에 기초한 법적 사회변화 전략을 대체로 수용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된다. 평등의 이상과 만연한 차별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평등이라는 원리는 남성과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동일함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조건으로 확립하는 것 같다. 역사적인 실천 속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회적·성적 차이를 평준화하고 여성들에게 중립과 보편을 가장한 남성적 기준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26) 하지만 평등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게르하르트(Ute Gerhard)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기”(treating likes alike)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칙에 기초한다. 게르하르트는 우리가 평등을 동일함이나 동일성(a=a)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계적인 개념(a=b)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등이 고정되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평등은 차이를 부정(오직 같은 것만 같게 취급될 수 있다.)하기는커녕, 차이들을 구체적인 목표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도입되어야만 하는 것(다른 것이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으로 당연시하는 정치적 원칙이 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특징이나 특수성을 비교하고 동등하게 다루자는 것을 결정하는가?”(Gerhard 8)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 된다.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은 관점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비교되는 (사회적) 대상(즉, a와 b, 남성들과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마치 그 대상들 혼자서 비교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비교를 하는 주체들과 그 판단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즉, 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에서 관점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요구가 제기되는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그 요구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의 기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 양자의 사회적인 위치도 고려하는 것이다. 만약 그 기준이 대상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평등에 대한 모든 요구는 정치적 판단, 즉 특수성(같지 않은 것들)에 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적인 평등 실천은 제 3항(third term) 또는 제 3자, 즉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을 필요로 한다. 게르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 비교점은 결코 단순히 ‘남성’이나 남성의 지위일 수 없다. 그것은 양성에 공평한 기준이어야만 한다.”.27)
평등의 실천을 3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때 완전히 반(反)평등주의적 부등의 실천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동일함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평등을 재형상화하는 가능성을 실제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부등의 실천이 달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된 3항의 발전을 가능케 한다.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설명에 따르면, 3항은 오스틴과 같이 “‘원형’이라 칭해진” 여성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원형의 목표는 “우리보다 선행하여 우리에게 스스로를 알고 차이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의 위치를 특징짓는”(Milan 112) 것이었다. 원형을 현실의 어떤 여성도 접근을 시도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틀에 박힌 여성적 형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우수한 여성의 형상이 틀에 박힌 피해자 형상의 이면으로서, 현실의 어떤 여성도 동일화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잃어버린 “여성적 사회 경제(social economy)”의 징후라는 점을 관찰했다. 여성들 사이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상징화하는 두 가지 방식 모두 전혀 실재적인 관계가 아니고, 동일한 것(과 비참한 것) 또는 다른 것(과 우수한 것)에 대한 무매개적인 연계일 뿐이다. 이런 도해상의 지위(피해자 또는 우수한 여성)는 둘 다 현실의 여성들 자신에게는 알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상화의 경향은 페미니즘에게 힘을 북돋아주지 않는 부등의 한 실천이다.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다른 여성들과 차이나는 여성 개인과 여성적 성별(젠더) 모두를 가치화하는 권력, “여성적인 잉여(female plus)”(Milan 127)가 필요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찾던 것과 원형들에서 처음에 발견했던 것은 하나의 규칙(또는 이념형)보다는 특수성들을 연관시키는 사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역설적이게도 평등의 정치가 탄생시킨 우수한 여성들과 다르게, 원형들은 그 원형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세상에 관하여 권위와 가치를 또 다른 여성에게 돌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 ‘스타인(Gertrude Stein)을 옹호할 때 나는 스스로를 옹호하는 것이다.’”(112)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듯이, 만약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 자신일 뿐이라면, 그런 형상은 실천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판단과 논증과 토론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형상은 자유를 부인하는, 초월적인 권위의 원천이 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 위험이 최소화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원형들(오스틴, 스테인, 모랭(Elsa Morante), 울프(Virginia Woolf), 바흐만(Ingeborg Bachman) 등)에 이를 때다. 하지만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과 자유가 “상징적 어머니”로 불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얼핏 보기에 잃어버린 여성적 권위의 형상으로서 “상징적 어머니”는 “남성적 기원에서 나온 권위의 여성적 복제물”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어머니의 형상이 페미니즘적 자유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런 형상은 처음부터 페미니즘을 무력화했던 친족 관계를 상징화하는 것 아닌가? 남성적 문화 내부에서 어머니들과 딸들의 관계는 사라졌다(“어머니는 언제나 팔에 아들을 안고 있다.”)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과 그녀보다 더 위대한 여성, 즉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상징적 유대의 형태란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정서로 다양하게 덧씌워진 오직 자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할 뿐 상징적인 해석은 없다.”(127)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징적 어머니라는 바로 그 생각은 급진적―남성적 문화 속의 어떤 어머니도 결코 상징적이지 않다.―인 동시에 일반적(ordinary)일 수 있다.
상징적 어머니는 그를 둘러싸고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즉 새로운 사회 계약을 조직할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식별한 핵심 문제는 “여성이 모종의 여성적 미덕을 가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으로 솔직하게 밀고 나갈 도리가 없는 욕망의 무한함을 인정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어려움”(Milan 115)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정치에서 이런 가장은 사회를 개선하는 요구의 형태를 띤다. 이런 요구는 사회 문제라는 더 큰 틀 내에서 공명을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사회적 효용이나 편의라는 언어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차이에 대한 새롭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사회적 선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구별할 수 없었다. “다르게 되기와 더 좋아지기”를 혼동함으로써 그들은 “이런 잉여가 자격을 얻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실정적인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적 차이나 여성적 정치에 자격을 부여할 수 없고, 가치를 줄 수 없다.”(124) 유용성의 경제(the economy of use)에 사로잡혀, 그들은 여전히 여성적 성(female sex)과 여성적 자유의 존재이유, 즉 사회 개선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에 “어떤 실정적인 사회적 가치”(125)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을 상상할 수 없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성적인 잉여는 감축할 수 없는 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이 때문에 여성되기는 남성되기에 종속되지도 동화되지도 않는다.”(124) 즉, 그것은 어떤 사회적 가치, 사회적 효용도 표현하지 않으며, 보상을 추구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말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선언한다. (32) 이 기초는 페미니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만 하는 합리적 전제로 구성된 근거가 아니다. 상징적 어머니라는 수사 주위에 조직되는 이 계약은 합리성이나 영구적인 원칙에 호소하지 않고 “일상의 언어와 몸짓을 통한 정치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한 여성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욕망의 태동 속에서, 일상적 사물에 근접하여”자유를 욕망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111) 원시적 아버지 같은 토템과 ― 이 아버지는 사회 계약의 “다른” 이야기에서 살해되어야만 하는데, 그의 살해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 관계의 조건이며 그의 내재적인 회귀는 그들을 괴롭힌다. ― 다르게 상징적 어머니는 “세상에 맞서 여성의 욕망을 지지하고 유효하게 하는 여성들에 의해 한 여성으로 구체적으로 체현된 여성적 차이의 사회적 정당성의 근원을 가리키게” 된다. 이는 이 같은 성별화된 매개의 형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자유로운 관계라는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실천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하지 않을 것이다.

성적 차이 실천하기

상징적 어머니, 즉 여성적 기원의 잉여를 순환시켜 그것이 집합적 부가 되게 하는 실천의 이름은 <아피다멘토> 또는 수탁(entrustment)이다. 여성들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들 중에서 성경의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시인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브라이허(필명이다.)의 그리스에서의 관계(힐다의 『프로이드에 대한 헌사』(Tribute to Freud)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우정과 같은 수탁의 사례(규칙이 아니다.)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른 여성에 대한 한 여성의 수탁은 정치적 투쟁의 소재다.”(31)
가장 결정화된 형태 속에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그녀에게 수탁하는 여성은 수탁하는 이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또는 여성들)로서 그녀(들)은 “전진해(Go ahead)”라고 말한다..28) <밀라노 여성서점>은 “그것[이 경험]은 H.D에게 그녀가 시적 재능을 지녔다는 느낌을 주었고, 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곁에 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전진해’라고 말해 준 여성 때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고 언급한다.(33~34) “분명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위는 원래 그것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것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부여된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전진해’라고 브라이허는 H.D에게 대답하면서 H.D가 그녀에게 의존함으로써 그녀에게 부여한 모성적 권위를 상징적 권위부여의 형태로 그녀에게 되돌려준다.”(126) 초기 페미니즘의 이상화된 형상과는 반대로, 수직적인 수탁이라는 관계는 수평적, 상호적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의 욕망들을 적법화하는 권위는 그것을 수여하는 인정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확립된 위계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여성은 […] 그녀 자신을 남성 또는 남성적 기획에 수탁한다.”[Milan 133]).29)
수탁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여성적 수탁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라고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 기획의 내용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어머니[즉, 우리의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상징적 빚은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가시적·공적·사회적인 방식으로 지불되어야 한다.”(Milan 130) 수탁은 자매애가 아니다. “스스로를 수탁하는 것은 거울 안에서처럼 그녀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수탁의 관계 속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녀의 욕망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149) 수탁은 규칙이나 영구적인 정치적 형태가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한 가능한 다른 답들, 더 좋은 답들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121) 수탁은 우연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1966년부터 1988년까지 밀라노에서 여성에게 상징적 거처가 없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발전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인 실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된 욕구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즉, 권위 있는 대담자의 부재가 그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기초를 제공해야만 한다면,”(32) 하지만 그것이 자유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정당화(즉, 사회 개선 등)가 아니라면, 수탁이 바로 그런 기초다. 수탁의 실천에서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만] 보장된다.”(142) 그러므로 여성의 행동과 요구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권위가 자명하고 자신의 편에서는 어떤 동의나 행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형상도 아니고 (2세대 페미니즘이 전제하려 했던) 정치적 인식론, 즉 진리 주장으로 정치적 주장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욕망에 권위를 부여받고, 역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매번 권위부여 하는 여성들,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이다.
이 문구는, 그 완전한 단순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일상적인 표현 속에서, 페미니즘적인 의지의 자유가 처한 궁지의 탈출구를 겸손하게나마 상징화한다. 그것은 “나는 할 것이다.”라는 공허한 자유가 “나는 할 수 있다.”는 현세적 자유로 변형되는 것을 상징한다. “전진해”라고 말하거나 이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이 문장에 부합하게 공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피해자 동일성, 즉 피해자화의 정치에서 벗어나면서도 여성들이라 불리는 집단의 소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동질적 집단”의 심상 안에서 대표될 수 없었던 여성은 그런 부인에 쉽게 이끌려 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135) 여성은 종국에 “남성적 권력이라는 경직된 상징의 영역에 갇혀 다른 여성들이 필요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놓고 다른 여성들과 협상할 수 없게”(137) 된다.
지금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인정한다는 것 안다는 것의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카벨(Stanley Cavell)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빚지고 있음을 안다고 해서 내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카벨을 인용하며] 말할 수 있다. 인정은 앎을 넘어선다. (넘어선다는 것은 말하자면 앎의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앎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하거나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 안에 있다.)” (Cavell, 257) 다른 여성들에 대한 빚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그 부채에 대한 무언(無言)의 앎을 담고 다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고만으로는 현실이라는 직물을 바꿀 수 없고, 행동만이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성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꾸밈없는 감사는 여성적 자유가 실천적으로 기반을 둔 곳이다.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의 결과가 아니면 자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 다른 여성에게 감사하는 한 여성은 그런 감사를 잃어버린 집단이나 페미니즘 운동 전체 보다 여성적 성의 해방에 더 가치가 있다.”(130) 감사는 위계의 표현이 아니라 상호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인 조건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성적 차이가 여성들의 계보에 소속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 읽힐 때, 성적 차이는 그것이 주어진 방식을 전혀 속죄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것과 스스로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여성되기의 ‘인과적’ 소여(datum)”를 제거하여 퇴행적으로 의지하려는 소망을 따라다니는 원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 “남성들이 발명해 낸 사회적인 상징 질서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조건 짓는 사건이다. 그녀의 인생에 개인적 운명이란 없다. 그녀가 자유와 필연(necessity)을 일치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녀에게 필연이란 자신의 해부체(an anatomy)의 사회적 사용(모성, 처녀성, 성매매 …)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녀의 자유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Milan, 128) 성적 차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소속되는 것이 사회생활의 여성적 구성부분에 우리가 소속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적 전제”가 아니다. 성적 차이는 “부자유의 원인으로부터 나온 이 사실적 전제를 우리 자유의 원칙으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실천”(122)이다. “즉, 여성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선택의 대상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여성적 성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는 선택을 할 때다. (138)
그러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이해하는 식의 성적 차이의 정치는 필요성에 속박되고 자기-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원한으로 가득 찬 상태에 머무르는 “나는 할 것이다.”를 조건 지어지고 선택된 공동체, 즉 “다른 여성에 대한 감사와 교환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 사회 계약”(142)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나는 할 수 있다.”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 계약은 합리적으로 동의된 원칙들의 접합이 아니라 약속(빚을 인정할 것)과 형상(원형과 상징적 어머니)에 기초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와 그들의 후손을 영원히 속박하고, 계약의 정당성을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재치 있게 “암묵적 동의”라 부른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감축시키는 계약과는 다르다. 성적 차이는 그녀보다 먼저 와서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하는 일상적 실천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실존도 보증도 갖지 못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즉, 비주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과 페미니즘 자체의 조건이라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날 것의 사실을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 즉 “권위 있는 대담자”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불운한 거울놀이”에 입각한 평등의 통념을 더 위험하지만 더 실체 있는 무언가, 즉 상호성으로 변형시킨다.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당당하게 단언했다. “권위 있는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일단 권위 있는 매개자를 창조하고 나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권리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권리를 재형상화하기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차이』를 무시했던 것은, 아마 동일성(또는 동일성의 실패)의 렌즈를 통해 읽었을 때 그 글은 본질적인 성별화된(sexed) 차이에 관한 주장으로 쉽게 오독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비판이 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단호한 정치적 정식화에서, 성적 차이는 동일성의 생산이나 파괴가 아니라 수탁과 인정에 중점을 둔 자유의 실천이다. 세계 건설(world-building)과 새로운 사회 계약으로서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추구하는 것은 현세적인 실재의 직물에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성적 차이가 정치적 공간의 창조, 즉 멀고 가까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새롭게 생각될 수 있는 형상(즉, “상징적 어머니”) 주위에서 조직되며, 재조직화와 판단에 종속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worldly in-between)의 창조로 이해될 때, 성적 차이는 여성들로서 모든 여성(all women qua women)(그 계급에 대한 소속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간에)에 전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여성의 계보에 대한 정치적 주장과 판단을 제시하는 개인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그런 정치적 요구는 빚에 대한 인정, 즉 공적이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 조건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적 차이』를 본질주의적인 문헌―또는 최소한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 글의 가치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쟁점이 있다. 바로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투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권리에 기반을 둔 우리의 틀 내에서 『성적 차이』는 ― 본질주의의 공포는 차치하더라도 ― 바람직하지 못한(non grata) 페미니즘 저작으로 받아들여질 운명이었다. 자유의 정치(성적 차이) 대 평등의 정치(성적 비차이/무관심)는 쉽사리 평등한 권리냐 아니면 여성적 자유냐 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밀라노 여성서점>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양자 [모두가 실현될] 가능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다른 방식이 있다. 즉, 권리 요구의 조건으로서 자유의 실천, 그리고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는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때때로 모순적인 평등의 정치를 대체하려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기초하여 성취된 여성적 자유의 장소로부터 모든 종류의 성차별적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다.”(Milan 145. 두 번째 강조는 필자가.) 이 문장을 평등의 정치는 페미니즘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가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온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평등의 정치가 성적 차이의 정치로 대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현실의 실천에서 본질적으로 묘연한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문제라는 렌즈를 통해 읽는다면, 이 대안적인 해석은 성적 차이를 법에 기입할 필요성에 관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사상가임에 틀림없는 이리가레가 바로 그것을 주장했다..30) 하지만 이리가레나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 다른 특성의 권리들, 즉 권리들은 자유의 실천과 연결고리를 상실할 때 죽은 법적의 인공물이나 심지어 위험한 정치적 도구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31) 과연 미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대체적으로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동시대 페미니즘의 뿌리 깊은 사법적 제도적 점향은 어떻게 우리가 급진적인 권리 요구가 한 때 약호화한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과의 접촉을 상실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약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여성들이 성별화된 시민적 권리(civil rights)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참여(단순한 정치적 사법적 대의가 아니라)와 시민들 서로에 대한 수탁(“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Democracy, 174]), 양자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제도화될 때, 우리는 그 권리들의 기원이 자유, 비(非)지배, 공적업무에서의 평등한 참여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非)근거적인(ungrounded) 요구에 있다는 점을 잊곤 한다. 우리는 애초에 그 권리들을 창조했던, 종종 덜 안정적인 실천에 투자를 지속하기보다는 그 권리들을 그 자체로 보장하는 데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시민적 권리로 회귀하자는 요구는 그런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투쟁은 “권리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면서 법적인 판단도 국가 대표의 판단도 기다리지 않았다.”(Democracy, 175)고 쓴다. 자유는 권리에 대한 요구에서 발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말과 행동을 교환하는 데 있다. 자유는 그런 요구의 성공적인 제도화에 뒤따라오는 정치적 대의에는, 그 자체로는 있지 않다.
이리가레와 <밀라노 여성서점>은 모두 권리들이 보증하는 정치적 대의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풍부한” 성별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심원하게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이는”여성 일반”이라는 통념으로는 결코 대의될 수 없다. (Milan, 74) 이는 권리에 반대하는 논변이 아니듯 대의에 반대하는 논변도 아니며, 다만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의 경험을 권리의 제도화나 대의와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상기시키려 할 뿐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정치적 자유 없이 대의와 제도화된 권리를 갖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자유가 부재하다면,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는 동화 또는 이리가레가 “동일자의 법(law of the same)”이라 부른 것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하지만 아렌트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평등은 정치적인 따라서 인간적으로 구성된 원칙으로, 이는 인간 복수성의 경험, 즉 동무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다른 관점을 듣고 판단하는 경험을 지탱해야 한다. 아렌트와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유와 그것을 지지하는 주체적인 중간에 낀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평등한 대의나 평등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성을 요구하는 것 같은 양자의 통념을 거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점차 추상적인 원칙이나 규칙으로 굳어져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자신들의 기원과의 관계로 되돌려질 때, 권리들은 이미 우리인 을 승인하는 것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권리들은 더 이상의 무언가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승인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권리들은 “전진해”라고 말하는 자유의 정치적 도구다.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권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고, 사용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중요한 것은 마치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들처럼 오직 그것들이 우리가 전진하도록 영감을 주는 한에서다. 사실 게르하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권리들은 “수입되거나 명령받을 수 없다. 그것들은 연관된 사람들이 권리로서 그것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적용된다.”.32) (176)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여준 것처럼, 그런 위치의 창조는 자유의 실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 권위 있는 대담자를 전제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유의 기획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분명히 표현하고 자신의 여성으로서 존재[우연한 사실]를 이해하고자[즉,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권위 있는 대담자는 필수적이고,” 그것은 “어떤 권리나 법도 줄 수 없는” 것이다.(Milan, 31) 즉, 국가에게 청원하는 권리 요구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정치적 요구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33)
그것의 기원적 고향이자 열망인 자유의 실천을 통해 읽힐 때, 권리에 대한 요구는 현재 자신인 (what one is)을 인정(recognition)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은 누구인가(who one is),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은 누가 될 수 있는가(who one might become)에 대한 인정(acknowledgement)의 요구다.
그렇게 이해되면 평등권은 특정한 동일성 범주로 분류된 모든 주체들에게 규칙처럼 적용될 수 있는 법적 인공물이 아니다. 권리는 위로부터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더 이상의 무엇(something more)에 대한 요구다..34) 권리는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따라서 권리는 우리가 가지는 무엇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권리는 우리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힘을 북돋는다.
이런 방식으로 권리를 사고하는 것은 자유의 실천보다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평등한 권리에 대한 여성들의 역사적 요구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에 있는 권리의 기원을 회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요구는 여성 해방 투쟁으로 환원할 수 없는데, 이는 사회적인 용어법 속에서, 권리가 약호화한 무언가로 전형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성들과 같이 권리를 빼앗긴 집단에게 권리를 확장하는 것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에 대한 요구가 반드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솟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는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적 자유가 독자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 이것이 없다면 이는 자유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 [여성의] 해방을 외부에서 도왔던 역사적 환경이 말하자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그것들이 단위생식에 의해 스스로 재생산하고 자신의 실행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는 자유로 해석되거나 대체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미 쓴 것처럼, 만약 우유의 저온 살균이 “여성참정권 옹호자들”의 투쟁보다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더 기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도록 행동해야만 한다. 영아 사망률을 감소시키고 피임을 발명했던 의학에서도 마찬가지고, 남성이 더 이상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못하게 한 사회생활의 진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온 살균된 우유에 도달한 이런 자유는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우월한 문명의 표기로 제공된 그 꽃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가? 만약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이 병과 이 꽃에 나의 자유가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144, 강조는 필자)

자유는 증여된 것도, 상속받은 것도 아니며, 오직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서만 요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를 보증하고, 근거 짓고, 정당화할 것인가?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 보장된다.”(142).35)
권리와 대의의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밀라노 여성서점>의 지독한 회의주의처럼 보이는 것 덕분에, 우리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고 자유 실천의 일부가 아닌 평등 원칙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이 권리를 위한 투쟁과 실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우리의 눈―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법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대답 때문에 점차 맹목적이 되어가는―을 열기 위해 아마 <밀라노 여성서점>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비타협적인 용어로 그들의 주장을 진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권리가 그런 실천의 일부일 수 있는지 여부는 권리가 쟁점이 되는 사례의 특수성의 맥락과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이다. 이것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단에 대한 요청으로 인해 <밀라노 여성서점>의 문헌은 차이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평등에 대한 요구와 권리를 재형상화하려는 3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충분히 재생시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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