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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12.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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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하이킥

김병수 | 정책편집부장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내가 그 대학 그 과에 가지 않았다면 운동이란 걸 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중학교를 다닐 즈음부터 내 희망직업은 공인회계사였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돈을 꽤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입시를 치르고 내가 나온 과와 다른 학교 경영학과에 최종 합격했다. 이전이라면 당연히 경영학과를 갔겠지만, 그 때는 또 어머니가 한 4년 까페를 하고 계셨는데 여기서 매상이 대충 올라오는 걸 보고는 결국 공인회계사니 뭐니 하지 말고 편하게 그거나 물려받아서 살자는 마음으로 과를 정했다. 그런데 웬걸 신입생환영회에 가보고는 후회막심이었다. 고등학생들도 안 갈 허름한 술집에 우글우글 모여서는 한참 술을 먹었다. 그러다가 웬만큼 술이 취했다 싶었는지 선배들이 팔뚝질을 하고, ‘투쟁가’라는 걸 부르기 시작했다. 대충 대학에 가면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냥 부르는 수준이 아니라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신념 가득한 눈빛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다. ‘이런 젠장 뭐 이런 경우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아버지가 나에게 한 유일한 당부가 ‘선배들한테 휩쓸려서 다니지 말고, 데모야 한두 번 나가도 너무 심하게 빠지지 말라’였고, 나는 또 똑똑하게 알아서 잘 처신하겠다고 이야기를 했건만 선배들이란 인간들이 전부다 시뻘개보였다.
지역에서 갓 올라온 신입생이 아무 연고 없는 서울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나. 선배 중 한명은 후배들이랑 100일 동안 쉬지 않고 술을 먹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니기도 했으니 넘치느니 술, 술이었다. 게다가 30명을 뽑는 과에 대구에서 온 얘들이 10명이었다. 심각한 지역 불균형 때문에 당연히 금새 친구들이 생겼고,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 얘들 욕이나 해대며 모여 다니던 것이 슬슬 데모를 나가게 했고, 세미나를 하게 했다. 그게 벌써 8년이나 되었고, 이 이야기는 여전히 과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내 대학 동기들 이야기다.

대학생이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내 친구들은 매일 시트콤을 찍고 다닌다. 시트콤의 특징은 대충 이렇다. 시츄에이션 코메디다 보니 아주 특별한 사건 없이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략 다 같이 모여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연속성이 보장되면서도 웃겨야 하니까 캐릭터의 특징이 확실해야 한다. 확실히 내 친구들이 사는 거랑 일치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대략 4명이다.
한 친구는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뭔가 호전적이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인생의 낙인 듯하다. 이 비난이라는 게 또 뛰어난 기억력과 합쳐져서 더 무서워지고, 또 아무 이유 없이 맘에 안 들면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1학년 때 답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 친구가 삼수를 한 동기 형이랑 싸우는데 시비를 거는 게 딱 하나다. ‘왜 당신은 나이가 많은 것이냐.’ 이렇게 물고 늘어지면 답이 안 나온다. 게다가 그 호전성이라는 게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떼어놓으니 답사를 같이 간 교수한테 시비를 거는 호전성이 이 시트콤의 주된 축이다.
또 한 명의 친구는 별명이 ‘제사또’다. 당연히 별명에는 별 이유가 없다. 이 친구랑 닮았다는 선배의 성이 ‘제 씨’였고, 답사에서 한 포스트모던하고 의미 불명의 꽁트에서 ‘사또’ 역을 맡았기 때문에 평생 별명이 결정되었다(01학번 후배는 이 친구랑 본명이 같다는 이유로 평생 별명이 또 ‘이방’이다). 마이크 타이슨과 같은 외모에 라이언 필립의 곱슬머리를 씌워놓은 것 같은 이 친구는 결혼식 때 정장을 입고 오면 영락없이 ‘조폭’이다.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의외로 소심한 이 친구는 사람들이랑 그리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답사를 다녀오면서 별명이 정해진 다음에는 위에서 말한 호전성 강한 친구를 중심으로 마치 기획사라도 차린 것처럼 이 친구에 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벌어졌다. 헌정 주제가가 수십 곡이 만들어지고,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항상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8년간의 노력 때문인지 요즘엔 스타의식에 들떠 거만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다음 친구는 별명이 ‘밍밍’이다. 왜 별명이 그런지 이유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이 친구는 유난히 ‘초조하다.’ 무얼 하건 땀을 한 바가지는 흘리고, 쉽게 흥분을 한다. 세븐 업 광고에 나오는 역삼각형의 얼굴로 항상 웃으면서 다니지만 누군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특유의 표정으로 또 땀을 흘린다. 술, 담배를 폭주기관차처럼 하지만 의외로 가톨릭 신자인데다, 자기 이름의 장학금까지 갖고 있는 뭔가 이상한 녀석이다.
또 하나 시트콤에 꼭 필요한 것이 어이없이 착한 녀석이다. 워낙 자유롭게 살다 보니 아무 이유 없이 학교에 결석을 하고, 방에 들어가 보면 홈쇼핑을 하거나 게임을 하고 있는 대책 없는 이 녀석이 시트콤에서 담당하는 것은 항상 당하지만 웃고 넘어가는 역할이다.
이외에도 막걸리만 먹으면 사람 따귀를 때리고 다니는 친구나, 우리 과가 아니었지만 항상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녀석들까지 수없이 많은 게스트들과 함께 항상 시트콤처럼 대학생활을 해왔다. 철거촌에 들어갔다가 잡혀가기도 하고, 한 녀석은 민중대회 때 전경이 던진 돌에 눈을 맞기도 하고, 제적을 당하기도 하고, 별 난리를 다 치르며 같이 산 게 벌써 8년째다. 이제는 다들 대학원이나 시험 준비에 같이 모여 있을 이유가 없지만 아직도 과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들이다. 이전만큼 자주 보진 못하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무한도전’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찍고 있다.

4학년 즈음에 이 녀석들이 학생운동을 다 그만뒀다. 계속 같이 살다시피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군대를 가기 시작했고, 돌아온 뒤에도 같이 뭔가를 해나가기보다는 제각기 살 길을 찾아간다는 느낌이다. 동기 한 명이 지난 2차 민중총궐기에 나왔지만 이전에 같이 뛰어다니던 것과는 다른 느낌에 씁쓸하기도 했다.
이전에 운영위원장님이 쓴 ‘친구 없음’을 한탄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아주 후일의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이 친구들이 사회로 나가는 지금 계속해서 같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자주 보기도 힘들어질 것이고 쉽게 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12월이고, 때마침 사회진보연대가 전례 없는 후원주점을 한다고 하니 송년회라도 하면서 다시 시트콤이나 한 편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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